[GV] <퍼스널 쇼퍼>

(*GV 준비를 위해 생각난대로 쓴 글이라 문장이 둔탁거려요. 감안해서 읽어주세요. ^^;)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예술영화와 장르영화를 구분하지 않고 만드는 감독으로 유명하죠. <보딩게이트>와 <카를로스>는 범죄물이라고 할 수 있고요. 또한, 여성의 이야기도 많이 만들어왔죠. 장만옥과 함께 했던, 심지어 그녀와 결혼까지도 했는데요. <클린>이라는 작품이 있었죠. 한국에도 개봉했던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에서는 줄리엣 비노쉬와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클로이 모레츠와 함께 했습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특징은 이 배우들의 현실의 모습을 영화 속에 투영한다는 점일 텐데요. 일례로,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에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이제는 나이를 먹어 젊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줄리엣 비노쉬의 현재와 20대 배우 중 가장 잘 나가는 클로이 모레츠의 현실을 영화 속에 직접 반영해 줄리엣 비노쉬가 클로이 모레츠를 질투하는 역할을 주기도 했어요.

요는,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어떤 경계를 두지 않고 언급한 영화 속 배우의 활용처럼 오히려 경계를 허물어 영화와 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연출을 선보인다는 데 있는데요. 지금 소개할 <퍼스널 쇼퍼> 또한 그러하죠.

<퍼스널 쇼퍼>의 첫 장면은 감독의 그런 연출 성향은 물론 이 영화를 이해하는 일종의 가이드이기도 한데요. 주인공 모린(크리스틴 스튜어트)은 쌍둥이 남매였죠, 루이스의 영혼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고저택으로 루이스의 전 여친과 함께 방문합니다. 이때 카메라는 철창 문 뒤에서 다가오는 모린 일행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순간을 그대로 보여주죠. 경계를 넘어서는 이야기와 이미지를 선보이겠다는 선언 혹은 가이드 같은 것이죠.

안 그래도 철창 문이 열리면서 모린 일행이 들어오는 건 현실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들어온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그처럼 <퍼스널 쇼퍼>에서 현세와 영의 세계를 구분하지 않는 것처럼 구분지어지는 모든 개념을 허무러트려 혼재하는 세계로 만들어버려요. 그래서 이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와 두 번째 시퀀스의 편집은 그런 개념을 적용해 보여주고 있는데요. 모린이 저택에 들어와 살피는 낮 장면이 이어지다가 테라스에 나가 바뀌어라 뿅! 하듯 라이터에 불을 붙이는 순간 마치 하나로 연결된 듯 밤 장면에 모린이 다시 저택을 이리저리 살피는 장면으로 이어져요.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낮과 밤’ 정도 될 것 같은데요. 이런 편집의 장면에서 저는 화가 M.C. 에셔의 <낮과 밤>이 연상되더라고요. M.C. 에셔는 초현실주의 화가로도 유명한데 안 그래도 <퍼스널 쇼퍼>에는 추상화가의 선구자 ‘힐마 아프 클린트’가 언급되죠. 예, 영화를 위해 창조한 화가가 아니라 실제 화가입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그렇게 현세와 영의 세계, 현실과 초현실세계, 추상과 구체의 세계, 심지어 장르영화와 작가영화 등을 구분하지 않고 공존하는 세계로 그리고 있죠.

모린과 루이스의 쌍둥이 남매 설정이 의미를 갖는 것은 하나라고 생각했던 반쪽이 떠나가면서 공백이 된 그 반쪽을 찾는 이야기인 건데요. 그래서 이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가 마치 거을상처럼 마주 보는 구조이죠. 영매인 모린이 유령이 된 쌍둥이 오빠와 만나려하는 예술영화, 그리고 퍼스널 쇼퍼 모린이 키라의 살인 사건에 연루되는 공포 혹은 스릴러 장르영화가 함께 진행되다가 서로 하나가 되는 구조인 것이죠

이에 대해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의 환상과 꿈, 두려움과 씨름한다. 이것들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매우 실제적인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유령은 우리의 기억, 잠재의식과 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에 모두와 관련될 수 있다.” 그래서 <퍼스널 쇼퍼>의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인간과 유령이 공존한다는 믿음 하에 추상적 존재인 유령을 실제적인 존재로 그려내고 있죠.

하지만 서로 반대되는 개념의 세계로 하나로 엮기 위해서는 이를 이어줄 대리의 존재가 필요한데요. 바로 여기에 이 영화의 제목인 ‘퍼스널 쇼퍼 Personal Shopper’가 의미를 갖습니다. 일차적으로 극 중 모린의 직업이 퍼스널 쇼퍼이죠. 잘 나가는 엔터테이너 키라가 너무 바빠 대신 옷과 장신구를 찾아다 주는 등의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이차적으로는 ‘영매’를 의미하죠. 모린은 극 중에서 여러 번 자신은 영매라고 합니다. 심장병으로 먼저 죽은 쌍둥이와 살아있을 적에 누가 먼저 죽게 되면 둘 모두 영매이니 함께 만나자고 약속까지 한 상태이죠.

‘대리하는 행위’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퍼스널 쇼퍼>에는 대리하는 행위와 기구들이 많이 등장해요. 이 영화에서 희한하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문자 메시지 시퀀스가 있죠. 스마트폰이 바로 연락을 주고 받는 사람들을 대리하는 기구인데요. 스마트폰이라는 게 앞에 대화를 나누는 대상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대상과 대화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영매’ 같은 것이죠.

또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유독 기차와 지하철 장면이 많아요. 목적지를 연결해주는 교통 수단인데요. (그래서 이 영화의 화면비는 기차처럼 긴 2.35:1의 화면비를 갖고 있죠.) 특히 문자를 나룰 때 기차, 더 정확히는 런던과 프랑스를 잇는 유로스타이죠. 바로 유로스타에서 나누는 문자 메시지 시퀀스는 죽은 쌍둥이 남매에게서 신호를 받은 후 모린이 긴가민가하는 상황에서 바로 벌어지는데요. 그 의심을 어떻게 보면 실제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장면이랄 수 있을 텐데요. 그래서 기차가 이동하는 장소를 도버 해협을 건너야 하는 런던과 파리의 유로스타로 잡아주고 있죠.

그러니까, <퍼스널 쇼퍼>에는 유령을 인식하는 과정이 단계별로 제시되는 듯한 인상이죠. 영매인 모린이 십(+)자 표시를 발견한 후 스마트폰을 통해 유령과 대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확인의 단계를 거친 후 뒤에 가면 실제로 모린의 쌍둥이 형제가 모습을 드러내죠. 그런 식으로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모린이 퍼스널 쇼퍼의 의뢰인으로 모시는 키라의 옷을 입는 순서로도 드러나요.

문자 시퀀스에서 유령인지 혹은 잉기인지 알 수 없는 대상이 “금기 없인 욕망도 없지”라고 문자를 보내죠. 현세에서 영의 세계는 일종의 금기의 세계인 것처럼 퍼스널 쇼퍼인 모린에게 의뢰인의 옷을 입는 것 또한 금기입니다. 하지만 모린은 퍼스널 쇼퍼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 키라처럼 되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으로 보여요. 구두를 받으러 간 곳에서 디자이너가 한 번 신어볼래, 라고 하자 모린은 볼멘소리로 예전에도 한 번 그랬다가 당신이 키라에게 고자질해서 혼났다는 얘기를 하죠.

그래서 키라의 옷을 입는 순서는 좀 조심스러워요. 일단 갑작스럽게 모린이 상의를 탈의하고 심장병 검사를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퍼스널 쇼퍼 직업인으로, 정말 영의 세계가 존재하는지 의심하는 영매로서 자신이 그어놓은 의심의 선을 조금씩 넘는 과정을 이 영화는 모린이 키라의 옷을 서서히 갖춰 입는 과정과 등치해요. 그래서 신발을 신는 장면 그 뒤에 체형 속옷을 입는 장면, 문자 시퀀스 후에 키라 집으로 가 그녀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아예 검은 옷으로 갖춰 입죠. 그리고 나서 행하는 자위 행위, 유사 섹스 관계인데요. 섹스는 일종의 하나 됨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 검은 옷은 유령을 불러내는 영매를 연상시키죠. 모린의 현세와 영의 세계, 삶과 죽음 등 모린을 둘러 싼 구분되는 개념 등이 하나로 합쳐짐을 자위행위로 드러내는 겁니다.

그때 자위하는 모린의 옆에 등장하는 유령의 모습. 근데 우리는 그 유령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 전에 모린의 쌍둥이 형제 루이스와 접촉(contact)하겠다며 간 그 저택에서도 유령을 만났었는데요. 잔뜩 화가 나 있고 모린을 향해 폭력적인 유령은 루이스의 것 같지 않습니다. 현세와 영의 세계를 대리하는 모린은 혹시 그 저택에 머무는 다른 령을 대리하여 키라의 집으로 데리고 간 것이 아닐까요. 그 영은 혹시 키라에게 원한이 있어 키라와 한동안 불륜 관계였다가 헤어진 보그 지의 잉기로 하여금 키라를 죽이게 했던 건 아닐까요.

의문은 또 있습니다. 키라의 시체를 확인한 모린이 거실로 나왔을 때 맞은편 문쪽에서는 영들끼리 다투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영화에는 그런 대사가 나오죠. “죽은 자가 산 자를 보살핀다죠.” 그러니까, 모린을 보호하기 위해 루이스의 영이 폭력적인 영매와 싸움을 벌인 것은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그건 이 영화를 보고 해석하는 관객의 몫일 겁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퍼스널 쇼퍼>를 두고 이런 얘기를 했죠. “우리의 인식 혹은 상상과 현실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영화다. 나는 유령을 보여주기만 했을 뿐 그 누구든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완전히 열어 놓았다.”

그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고작 유령을 보여주었다고 다양한 해석의 폭이 열리는 것은 아닐 겁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말한 ‘모호함’ 그 정체는 현실과 환상, 현세와 영의 세계, 추상과 구상 등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영화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게 모호함 투성이입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캐스팅 자체도 그런 모호함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하죠. 그녀의 중성적인 매력은 개념을 구분하지 않는 이 영화의 콘셉트를 고려할 때 딱 맞아떨어지는 조건이죠.

모린의 쌍둥이 형제 설정도 그래요. 쌍둥이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죠. 모린과 루이스, 남과 여, 인간과 유령 등 모린이 찾는 건 결국 자신의 반쪽이라고 할 수 있죠. 모린이 찾는 반쪽의 개념이 환상과 영의 세계와 죽음과 같은 현재의 모린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이에요. 거울상 같은 개념이죠. 안 그래도 <퍼스널 쇼퍼>는 거울 장면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모린의 쌍둥이적인 측면을 묘사해요. 예컨대, 키라를 위해 은박 옷을 구하러 갈 때 숍에서 모린이 이를 자신의 몸에 대보는데 카메라는 우선 거울 속 모린을 비춰 그녀가 한편으로 자신의 현재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옷의 직업을 꿈꾸고 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다가 스스르 빠져나오듯 이동해 현재의 모린을 비춰주는 식이죠.

<퍼스널 쇼퍼>의 카메라 운용 자체가 그래요. 사실 카메라는 영화 속 세계와 현실에 존재하는 관객의 세계를 대리해주는 기구죠. 그래서 이 영화의 카메라는 극 중 인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영화의 눈이면서 또 한편으로 모린 곁을 따라다니는 루이스 혹은 다른 귀신의 시선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죠. 다시 말해, 양면성.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언급한 모호함과 양면성은 모두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죠.

이 영화의 마지막도 그렇게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키라 살인 사건의 용의자에서 풀려난 모린은 남자 친구가 있는 오만(인가요?)로 여행을 떠나죠. 그곳 숙소에서 모린은 유령과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루이스 너야?” 아무 반응도 없습니다. “루이스 너야 그럼 내가 유령이야?” 바닥을 치듯 울리는 소리 한 번. 그럼 모린은 유령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땅을 밟고 있는 너머의 세계를 자각한다는 것. 쿵, 하는 소리는 모린의 자각을 알린 내면의 소리는 아니었을까요. 앞으로 그녀는 과거와는 다른 인식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겠죠.

 

<퍼스널 쇼퍼> GV
아트나인
(2017.2.15)

<더 킹> 권력과 몸을 섞는다는 것

한국의 미래가 시험대에 오른 새해를 맞이하였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국정 농단의 현실로 정치는 더는 영화의 소재로 장점이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지배적이다. <더 킹>은 그런 걱정에 아랑곳없이 썩은 내 나는 한국 정치의 작동원리에 대해 다룬다.

“국민은 개, 돼지입니다”라는 강렬한 대사로 기억되는 <내부자들>(2015)을 떠올리면 된다. <내부자들>은 한국의 기득권 세력인 정치인과 언론인과 기업인이 어떻게 하나 되어 국민 위에 군림하는지를 따라간 작품이었다. <더 킹>에도 그런 ‘내부자’가 등장한다. 이번엔 검사다. 박태수(조인성)라는 인물이다.

또 하나의 <내부자들>

<더 킹>은 박태수의 시선으로 진행하는 영화다. 박태수는 전라도 출신으로 원래는 양아치였다. 동네 패싸움이나 일삼던 그가 개과천선하는 계기는 좀도둑으로 연명하던 아버지가 검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는 광경을 목격하면서다. 평소 아버지의 악행이 불만이었던 태수는 검사에 감정 이입하며 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그렇게 서울대에 입학하고 사법고시도 최종까지 척척 합격한 태수는 바라던 검사가 되는 것에 성공한다.

기쁨도 잠시, 생각한 것과 다르게 검사 생활은 초라했다. 뭔가 엄청난 권력을 누릴 줄 알았는데 박봉에, 야근에 한 달이면 600~700건의 사건을 처리하는 일상은 샐러리맨과 다를 바가 없었다. 2년 동안 살이 5kg이나 빠졌을 때 맞닥뜨린 부조리한 사건 하나. 학교 선생님이 제자를 성폭행했는데 합의로 처리된 사건이었다. 가해자를 감옥으로 보내기 위해 재수사를 하던 중 태수는 선배 검사 양동철(배성우)의 연락을 받는다.

갑작스러운 동철의 방문은 이유가 있다. 동철의 직속 상관은 한강식(정우성) 검사다. 그는 검찰 내에서 실세로 통한다. 소위 ‘라인’을 잘 타서다. 태수가 감옥에 보내겠다고 재수사에 나선 성폭행 가해자는 한강식 검사와 인연이 있다. 동철 왈, 내가 태수 너 한강식 검사랑 일할 수 있게 소개해줄게. 단, 조건이 있다. 성폭행 재조사 이쯤에서 덮자. 정의구현이냐, 권력 잡기냐, 태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이에 대한 태수의 반응은? 그 묘사 방식이 흥미롭다. 한강식과 양동철은 전략부 소속이다. 이들의 수사실은 어둡고 은밀한 곳에 있다. 공개되면 이 나라가 들썩들썩할 자료를 보관하고 있어서다. 동철은 그중 하나를 집어 비디오플레이어를 재생한다. 청순의 아이콘으로 유명한 배우가 여러 남자와 몸을 섞는 영상이다. 이에 아랫도리가 불끈한 태수는 브라운관 속 배우를 보며 자위행위를 한다. 그러자 문제의 배우가 브라운관 밖으로 나오더니 태수의 몸에 올라타 섹스를 한다.

눈요깃감으로 보이지만, <더 킹>을 이해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섹스는 결합을 뜻한다. 전략 수사실의 존재를 알기 전까지 태수는 잘못된 판결을 바로 잡아 정의를 세우려는 상식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겉으로는 청순한 척 뒤로는 난잡한 성생활을 즐기는 배우와 성 관계를 갖는 건 기존의 태도를 버리고 불의와 야합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다. 안 그래도 태수는 동철의 주선으로 참석하게 된 한강식의 파티에서 문제의 성폭행 가해자 선생님과 화해의 술잔을 나누며 비리로 얼룩진 권력의 라인에 올라타게 된다.

태수, 또 다른 우리

한국의 현대 정치사는 몰상식과 비도덕과 비정상으로 무장한 권력에 맞선 약자들의 저항의 역사였다. <더 킹>은 전두환 군사정권부터 이명박 정부까지, 권력 실세에 빌붙어 꼬리 짓을 일삼은 이들의 악행의 메커니즘을 해부한다. 태수는 그 출발점이다. 뛰어난 스펙을 가졌지만, 일에 치여 사는 태수는 보통 사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가 권력의 라인을 잡기 위해 영혼까지 파는 이유는 무엇인가.

권력을 손에 넣으면 한국만큼 살기 좋은 나라가 없다. 국민연금에 거액의 손해를 입히고 기업을 합병한 기업인에게는 부정청탁과 대가성의 소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영장이 기각되고, 대통령과 친하다는 이유로 온갖 이권에 개입해 천문학적 이득을 취해도 모르쇠로 일관하면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한국 기득권 세력의 정신 상태다. 온갖 특권과 특혜와 검은돈이 뒤따르는 권력이기 때문에 한 번 맛보면 헤어나오기 힘들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다 보니 한강식과 양동철과 이들의 라인을 타는 박태수와 같은 이들의 권력을 향한 욕망은 거칠 것이 없다. 살아 있는 권력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까닭에 대통령 당선이 유력한 후보자의 측근을 만나 상대방 후보의 비리가 담긴 자료를 넘기는가 하면, 대선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경우에는 무당을 찾아 굿을 보며 점을 치는 등의 우스꽝스러운 행보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존심은 잠깐이요, 라인만 잘 타면 고생 끝이라는 생각에서다.

과연 그럴까. 지금 우리가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듯이 라인을 쫓는 권력은 허망하다. 영원할 것 같아도 언젠가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없어지는 성질을 지녔다. 다시 태수의 섹스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태수의 몸에 올라타는 배우의 모습은 TV 화면의 질감으로 묘사된다. 현실의 태수가 상상 속에서 몸을 섞어 얻게 되는 더러운 욕망은 비현실적인, 그러니까 잠에서 깨면 자각하는 꿈 같은 것이다.

한강식 앞에서 영원한 의리를 맹세했지만, 권력의 좌표가 이동하자 곧 버림받고 마는 태수는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선다. 태수가 처한 상황은 현재 한국 국민이 직면한 처지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동안 잘 살게만 해준다면 어느 정도의 비리는 눈감아줄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부패한 권력에 눈을 감아왔다. 부패한 권력에 ‘더 킹’의 자리를 내어준 결과가 지금의 한국이다. 밝은 미래로의 도약이냐, 어두운 과거로의 회귀냐, 이제 그 자리의 주인을 바꿀 때가 됐다.

 

KDI 나라경제
2017년 2월호

 

<테일 오브 테일즈> 잔혹동화의 정수를 담다

tailoftails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테오 가로네는 <고모라>(2008)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 범죄조직 ‘카모라’를 다룬 <고모라>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최신작 <테일 오브 테일즈>(2015)는 <고모라>와 다르게 동화의 세계를 다룬다. 현대 배경의 영화 일색이었던 마테오 가로네의 세계관에 어떤 변화가 생긴 걸까.

동화(?)라는 파격적 시도

<테일 오브 테일즈>는 세 개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퀸(셀마 헤이엑)과 도라(헨리 카마이클/스테이시 마틴)와 바이올렛(베베 케이브)이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이다. 퀸은 고민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 그때 마법사가 찾아와 술책을 내놓는다. 처녀가 요리한 바다 괴물의 심장을 먹으면 아이를 얻을 수 있다는 것. 왕(존 C. 라일리)은 괴물과 사투 중 사망하지만, 그 덕에 퀸은 하루 만에 아이를 잉태한다.

도라는 이마와 자매 사이다. 나이를 먹어 젊음을 잃은 탓에 숨어 살고 있다. 다만 목소리가 아름다워 난봉꾼 왕(뱅상 카셀)의 관심을 끈다. 매일 같이 집으로 찾아와 유혹하는 왕에게 도라는 밤에 불을 켜지 않는 조건으로 함께 잠자리를 갖는다. 날이 밝자 왕은 도라의 쭈글쭈글한 피부에 기겁하고 근위병을 시켜 창밖으로 그녀를 던져버린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도라는 마녀의 젖을 먹은 후 젊음을 되찾는다.

바이올렛은 시집갈 나이가 됐음에도 신랑감을 찾지 못한다. 왕(토비 존스)인 아버지가 애완 빈대에 정신이 팔린 탓이다. 어느 날 빈대가 목숨을 잃자 왕은 실의에 빠진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신랑감을 구해달라는 딸의 요청에 왕은 공고를 낸다. 빈대의 피부를 전시해 이것의 정체를 맞추는 남자에게 딸을 주겠다는 것. 바이올렛이 눈 여겨뒀던 남자들이 탈락하는 와중에 흉측한 외모의 거인이 답을 맞힌다. 바이올렛은 어쩔 수 없이 거인을 따라나선다.

마테오 가로네가 <테일 오브 테일즈>에서 ‘취한 동화들 Tale of Tales’은 잠바티스타 바실레의 원작이다. 잠바티스타 바실레, 그는 누구인가. 이탈리아의 셰익스피어로 통하는 그는 그림 형제, 안데르센과 같은 동화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테일 오브 테일즈>의 줄거리로 짐작되듯 잠바티스타 바실레는 <라푼젤> <신데렐라> <헨젤과 그레텔>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등과 같은 걸작동화들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를 선보인 작가다.

잠바티스타 바실레의 독창적인 이야기에 매료됐던 마테오 가로네는 줄곧 영화화를 꿈꿨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잠바티스타 바실레의 원작으로 영화를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환상적인 비주얼이 동반돼야 하는 이 프로젝트는 이탈리아 영화 시장에서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환상 배경의 판타지 장르는 이탈리아 관객에게는 낯설다. 오히려 그래서 개인적으로 상상하고 있던 이미지로 이 장르를 탐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마테오 가로네의 말이다.

지나친 욕망으로 괴물이 된 사람들 

마테오 가로네는 다큐멘터리 요소가 짙은 작품들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장편 데뷔작 <이민자들의 땅>(1996)은 이민자들이 이탈리아에 터를 잡고 생활하는 모습을, <나폴리의 웨딩사진사>(1998)는 신랑신부 사진을 찍는 웨딩사진사의 일상을 다룬 작품이었다. 이후 가로네는 다큐멘터리를 벗어나 <박제사>(2002) <첫사랑>(2004) <고모라>와 같은 원작이 있는 이야기를 영화로 옮기는 작업에 몰두했다.

마테오 가로네가 잠바티스타 바실레의 원작을 다룬 건 전혀 의외가 아니라는 얘기다. <테일 오브 테일즈>에서 보여주는 그의 새로운 면모는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다큐멘터리로 연출을 시작한 감독답게 마테오 가로네 영화는 비교적 사실적인 배경에 충실했다. <고모라>도 그렇거니와 마테오 가로네의 영화는 그의 고향 나폴리가 배경인 경우가 많았다. 그와 다르게 동화를 다루는 <테일 오브 테일즈>의 배경은 현실과 동떨어진 요소로 가득하다.

물론 시칠리아에 위치한 알칸타라 협곡, 돈나푸가타 성, 카스텔 델 몬테 성 등에서 배경을 촬영했지만, <테일 오브 테일즈>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어두운 욕망을 다루는 영화라는 점에서 성의 내부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그래서 마테오 가로네가 주목한 것이 그림이다. 확실히 <테일 오브 테일즈>의 내부 배경 묘사를 보면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 연상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영화 도입부에 서커스 단원들이 성 바깥에 삼삼오오 모여 화면을 꽉 채운 모습은 피터 브뤼겔의 풍경화 구도를 떠오르게 한다. 바다괴물의 심장을 요리할 처녀로 지목받은 하녀를 비출 때 카메라도 흥미롭다. 베르메르의 그림처럼 주변은 어둡게, 하녀는 환하게 대비함으로써 인물에 주목하도록 한다. 또한, 퀸이 힘들게 얻은 아들 엘리아스와 초상화 모델을 서는 장면 묘사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듯하다.

그중 마테오 가로네가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은 작품은 프란시스코 고야의 판화 연작 ‘로스 카프리초스 Los Caprichos’다. 로스 카프리초스에는 잠든 인물 주변으로 악마의 형상을 한 새가 날아드는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를 비롯하여 부패한 성직자들, 방탕한 귀족들, 마녀와 악마가 등장하는 불길한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다시 말해, 로스 카프리초스는 욕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욕망한 결과를 이미지화한 것이다. 이는 곧 <테일 오브 테일즈>의 주제이기도 하다.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에서

퀸이 엘리아스를 잉태한 그 시간, 바다괴물의 심장을 요리한 하녀 역시 아이를 임신한다. 엘리아스와 똑같이 생긴 하녀의 아들을 경계한 퀸은 이 둘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이 못마땅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엘리아스는 엄마를 떠나고 퀸은 아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기세인 퀸에게 마법사는 이렇게 얘기한다. “욕망은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죠.”

<테일 오브 테일즈>의 인물들은 모두 욕망의 도가 지나쳐 결국에는 몰락의 길을 재촉한다. 이는 <테일 오브 테일즈>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마테오 가로네가 극영화로 완전히 돌아선 이후 <박제사> <첫사랑> <고모라>의 인물들은 모두 허락되지 않은 욕망으로 파국을 자초했다. <박제사>와 <첫사랑>은 이상적인 육체에 대한 집착이 낳은 비극이었고 <고모라>는 부와 권력을 거머쥐기 위해 검은 조직에 동조했다 모두 죽어나가는 이야기였다.

마테오 가로네는 지나친 욕망이 인간성을 잡아먹어 괴물로 화한 이들에 주목해왔다. 그 자신만의 ‘로스 카프리초스’를 이어온 것이다. 다르다면 마테오 가로네의 전작에서는 괴물들이 인간의 탈을 쓰고 있었다면 <테일 오브 테일즈>에서는 실제로 등장한다. 퀸은 엘리아스에 대한 집착과 하녀의 아들을 죽이겠다는 못된 욕망으로, 이마는 도라를 질투해 늙고 병든 육체의 피부를 모두 벗겨내 젊음을 얻으려다 괴물이 된다. 딸의 신랑감을 두고 흥정을 벌이는 바이올렛 아버지의 괴물성은 피를 빨아먹으며 거대해진 애완 벼룩이 대신한다.

이를 두고 마테오 가로네는 “동화적인 요소로 시작했지만, 가능한 현실적이 되도록 노력했다.”고 말한다. 동화의 형태를 빌렸지만, 현대 사회의 반영이 될 수 있게끔 구성했다는 의미다. 안 그래도 <테일 오브 테일즈>는 원작의 50개 이야기 중 3개를 선택한 것이다. 자식을 향한 도 넘은 사랑, 미에 대한 비정상적 집착, 권위를 잃은 리더의 추악함은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다.

마테오 가로네는 <테일 오브 테일즈> 이전 <리얼리티: 꿈의 미로>(2012)를 만들어 <고모라>에 이어 연속으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리얼리티: 꿈의 미로>는 TV 리얼리티 쇼의 스타를 꿈꾸다 현실세계를 가짜로, 방송국의 세트를 진짜로 믿는 이의 영화다. 그렇게 마테오 가로네는 현실과 환상, 이성과 상상, 진실과 거짓, 진짜와 가짜 등 모든 경계를 가로지르며 그 안에서 균형 잡힌 영화를 완성하는 데 도가 튼 연출력을 선보여왔다. <테일 오브 테일즈>는 동화의 형태를 띠지만, 판타지의 경계를 넘어 현실에 도달하는 능수능란한 줄타기가 돋보이는 ‘진짜’ 마테오 가로네 영화다.

 

매거진 M
(2016.11.9)

<색, 계> ‘빗장’ 풀린 욕망에 대하여

custlution

<색, 계>는 국내 개봉(2007년 11월 8일) 당시 전국 200만 가까운 관객을 모으며 기대 이상의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20~30대 여성이 주도하는 극장가에 40~50대 주부층 관객이 대거 몰린 것. 가장 큰 이유는, 주연을 맡은 양조위와 (<색, 계>가 영화 데뷔작이었던) 탕웨이의 정사 장면이 입소문을 타며 화제를 모았기 때문이다.

1942년 일제강점기의 상하이. 부유한 저택 안에 부인들이 모여 마작 게임에 한창이다. 이들은 게임을 즐기면서 남편의 승진과 홍콩에서 수입해 온 스타킹, 여자들이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법한 다이아몬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다. 게임에 몰두하랴, 대화 또한 진행하랴, 시선과 입놀림이 분주한 그녀들을 쫓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덩달아 바쁘다. 그 속에서 막부인(탕웨이) 만이 조용히 튀지 않게 게임과 대화에 집중한다.

곧 이은 분위기 반전. 저택의 주인이자 정보부 장관인 이(양조위)가 퇴근 후 모습을 드러내자 막부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과연 막부인과 이의 관계는 무엇일까? 리의 부인은 온종일 마작이냐며 조용히 타박하는 남편 이에게 왜 다이아몬드를 사주지 않느냐며 투정을 부린다. “무거운 거 껴봐야 마작하기만 불편하지.” 그와 동시에 막부인은 약속이 있다며 판을 깨고 일어난다. 이 또한 약속을 이유로 집을 나선다.

짧은 줄거리에서 언급한 승진과 스타킹과 다이아몬드는 막부인과 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다. 이는 대만에서 머물던 당시 대장이었다가 지금은 장관의 지위에 올라 상하이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는 대만 출신으로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고 상하이가 일본에 점령되자 일본군에 붙어 동족을 처단한 매국노다. 대장에서 장관으로 ‘승진’한 이는 독립군에게 있어 처단해야 할 1순위 인물인 셈이다.

이의 처단의 선봉에 선 인물이 바로 막부인이다. 지금은 수입업을 하는 남편을 둔 귀부인 행세를 하고 있지만, 그녀는 실은 평범한 여대생 왕치아즈다. 영국으로 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홍콩으로 피신 유학을 온 그녀는 연극부에 가입한다. 민중 연극을 무대에 올리며 주인공으로 출연하던 날 관객들의 환호에 조국의 독립을 향한 애국심이 마음속에서 뜨겁게 불타오른다.

이참에 왕치아즈는 연극부 단원들과 함께 더 큰 일을 도모하기로 의기투합한다. 연기에 능하고 미모가 뛰어난 왕치아즈가 귀부인으로 분해 홍콩에 잠시 머무는 이의 아내에게 접근, 기회를 봐서 이를 암살하기로 한 것이다. 왕치아즈는 생전 해본 적 없는 진한 화장에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치파오를 입고, 무엇보다 임무 완수를 위해 잠자리 기술까지 터득한다. 결국, 이의 환심을 사 침대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색, 계>에는 주인공 사이의 적나라한 정사 장면이 총 세 차례 등장한다. 단순한 눈요깃감이 아닌 것이 둘 간의 섹스가 거듭할수록 변화하는 이들의 심정을 달라지는 체위에 고스란히 반영하는 까닭이다. 이가 부인의 눈길을 피해 막부인을 비밀스러운 아파트로 불러들여 첫 번째 섹스를 나누는 장면은 한마디로 폭력적이다. 막부인이 치파오를 걷어 올리고 천천히 ‘스타킹’을 내리며 분위기를 잡으려던 찰나 이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는 벽에 내동댕이친다. 그리고 치파오와 스타킹을 거칠게 찢어낸 후 막부인의 감정에 아랑곳없이 후배위로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이는 겉과 속, 집안에서와 바깥이 다른 인물이다. 대만 출신이지만, 동족을 보호하기는커녕 일본군에 고발하고 고문까지 서슴지 않는 냉혈한이다. 마작 게임이 벌어지는 집안에서 귀부인들의 눈에 비친 그는 말 수가 적고 말끔한 신사의 전형이다.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은 철저히 비밀에 감추고 있어 부인은 이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게 주변을 경계하는 이는 막부인과의 첫 번째 섹스에서 감정을 교류하는 전위 행위를 무시한 채 상대방을 무력하게 만드는 후배위로 막부인을 몰아붙이고는 관계를 일방적으로 끝마친다.

정체성을 드러내듯 고문이라는 표현이 어울릴법한 섹스를 마친 이는 자신의 집에서 벌어지는 두 번째 섹스에서도 막부인을 우리에 가둔 듯 경계하는 자세로 행위에 임한다. 막부인이 주도할 수 없게 남성 상위로 몸을 압박한 후 이 그 자신은 측배위와 같은 체위를 통해 뱀처럼 조심스럽게 그녀를 압박해 들어간다. 막부인이 전혀 저항하지 못하도록 교란해가며 사정을 마친 이는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하며 그동안의 경계심을 풀기에 이른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처지에 몰렸던 막부인은 세 번째 섹스에서 비로소 동등한 위치에서 이와 몸을 섞는 경험을 한다. 역시나 이의 남성 상위에서 시작했던 섹스는 어느 순간 막부인의 반격으로 여성 상위의 체위 변화를 겪는다. 이의 몸에 올라탄 막부인은 급기야 베개로 이의 눈을 가린 후 행위의 절정을 주도하기까지 한다. 그동안 이와의 섹스를 공적인 임무로만 여겼던 막부인의 눈에서는 ‘어떤’ 만족감이 서광을 비춘다.

베개로 눈을 가렸다는 건 그동안 막부인을 믿지 못했던 이의 눈을 ‘멀게’ 하여 경계심을 풀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다. 이제 이는 막부인의 사랑의 포로다. 안 그래도 세 번째 섹스에서 여성 상위에 있던 막부인은 고개를 돌려 옷걸이에 걸린 총집을 응시한다. 총을 꺼내 이의 가슴에 한 방을 쏘면 임무 완성이지만, 시선만 줄 뿐 욕망을 채우는 데 주력한다. 이의 암살에 ‘주력 戒‘하던 막부인은 어느덧 ‘사랑 色‘을 갈구하는 순진한 여대생 왕치아즈로 돌아온 듯하다.

암살 대상을 보호하고 사랑해야 할 인간으로 느끼기 시작했다는 건 위험한 징조다. 막부인, 아니 왕치아즈의 흔들리는 마음에 결정타를 날리는 건 ‘다이아몬드’다. 영화 초반, 귀부인들이 마작 게임을 하며 다이아몬드 운운하는 에피소드는 후반부에 반복된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이의 저택 주변에서 벌어지는 삼엄한 경비, 그런 이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막부인의 태도를 종합하면 <색, 계>는 첩보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등장하는 이 에피소드는 같은 장면임에도 초반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와 의미를 갖는다.

이미 세 번의 섹스를 통해 이를 사랑하게 된 왕치아즈는 임무, 즉 사회적인 자아와 은밀한 자신 사이에서 갈등한다. 첩보물로 시작했던 영화 역시 계를 무력화하는 색의 본능이 이와 왕치아즈 사이를 무너뜨리면서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로 이동을 단행한다. 지하에서, 어둠에서, 은밀한 침실에서 나오는 법이 없던 이는 왕치아즈에 이끌려 상하이의 번화가에 모습을 드러낸다. 왕치아즈를 미끼 삼아 대어를 불러내는 데 성공한 독립군들은 결정적인 순간 이의 암살에 실패하고 만다. 이가 선물한 다이아몬드를 받고 막부인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암살 계획을 노출한 것.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이지만, 사회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사랑은 사회적인 토대 위에서 성립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고로 상처받기 쉬운 것이 또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 상처의 가해자는 대개 사회가 만들어놓은 규범 또는 제약, 편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중 전쟁은 사랑을 억압하고 억제하는 최악의 환경이다. 전쟁과 같은 감시사회는 인간을 괴물로 만든다. 평범한 여대생이 암살 작전에 투입되고 이를 위해 사교 기술을 익히고 섹스를 배운다. 또 어떤 이는 제 한 몸 건사하겠다고 조국을 쑥대밭으로 만든 적의 편에 서서 호의호식한다.

그렇다면 왕차이즈와 이는 괴물인가? 괴물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 욕망을 채울 뿐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하거나 갈등하지 않는다. 아픔은 인간의 전유물이다. 왕차이즈와 이는 시대가 낳은 희생양이다. 사랑과 섹스는 괴물이 주도하는 전쟁통에서 인간임을 호소하는 자기 증명에 가깝다. 관능은 가린다고 해서 가려지는 게 아니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도 사랑은 식지 않는다. 감정은 그렇게 솔직한 법이다. <색, 계>의 과감한 섹스는 왕차이즈와 이의 솔직한 감정 표현이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라는 화가가 있다. 로코코를 대표했던 프라고나르는 에로틱을 전면에 드러낸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중 가장 노골적인 작품이 <빗장>이다. 두 남녀가 호사스러운 침대를 놔두고 바깥에서 선 자세로 엉켜있다. 남자는 한 손으로 여자의 허리를 감싸 쥔 상태이지만, 나머지 손으로는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다. 여자는 빗장에 손을 얹은 남자의 손을 제지하면서도 고개로는 침대로 가자는 포즈를 취하는 듯하다. ‘어머 이러면 곤란해요’ 거부의 표시를 하면서도 달아오른 육체는 어서 빨리 침대로 들자며 승낙하는 것만 같다.

이들의 애매한 행동에서 유추컨대 이와 왕차이즈처럼 서로 관계 해서는 안 되는 사이인 것처럼 보인다. 그럼 불륜 관계일까? 연극 무대의 조명처럼 이 둘에게만 환한 빛을 비춰 강조점을 둔 것을 보면 불륜에 초점을 맞춘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이 지금 애매한 행동을 취하고 있어도 서로를 향한 감정만은 솔직하다는 방증일 터. 그림 속 남자와 여자의 감정은 옆에 침대 위의 시트와 커튼에서 우회적으로 드러난다.

환한 빛의 꼬리 부분을 주목하자. 남자의 성기가 발기한 것처럼 침대의 귀퉁이가 솟아있다. 불쑥 올라 있는 하얀 시트를 따라가면 그 위로 빨간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두 개의 커튼이 꼬인 틈바구니가 검게 벌어진 것을 보니 여자의 성기를 연상시킨다. 여자를 응시하는 남자의 시선과 그런 남자의 눈빛에 달뜬 여자의 표정을 보니 이미 이들의 육체는 서로 탐할 준비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속된 말로 불륜 관계이지만, 이 그림이 불쾌하거나 외설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 또한 욕망 앞에서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의 ‘빗장’이 의미하는 건 마음속 감정일 터. 왕차이즈와 이도 각각 암살 임무와 사회적 지위 상승을 이유로 욕망에 빗장을 단단히 쳐둔 상태였다. 그럼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모호한 태도로 스스로를 괴롭혀 왔다. 고통의 시간을 끝내기 위해서는 파국이 예고되더라도 마음의 빗장을 풀고 감정에 솔직해지는 수밖에 없다. 왕차이즈는 자신도 모르게 피어오른 사랑 앞에서 임무를 버리고 이를 택한다. 이는 자신에게 향하는 의심의 눈길을 차단하려 왕차이즈의 처단을 명령하지만, 진심이 아니기에 정신적 충격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색, 계>의 섹스를 두고 단순히 화끈하다, 적나라하다, 고 묘사하는 건 실은 이들의 사랑을 모욕하는 표현에 가깝다. 왕차이즈와 이에게 섹스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상대방에게 드러낸 솔직한 감정의 표현이자 이들의 사랑을 시험대에 들게 한 불온한 시대를 향한 저항의 몸짓이다. 죽음마저 감수한 사랑은 그래서 위대하고 숭고하다. <색, 계>의 섹스가 몸이 아닌 마음을 뜨겁게 하는 이유다.

bitjang

 

메디포
(2015.12.12)

[GV] <라우더 댄 밤즈>

louderthanbombs

(GV를 위해 소리나는대로 작성한 글이라 맞춤법이 틀린 부분도 있고 문장도 좀 거칩니다. 감안해서 읽어주세요. ^^; 또 하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우더 댄 밤즈> 다들 어떻게 이해하셨는지 궁금해요.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는 어머니의 죽음에 따른 가족 간의 갈등과 화해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인데요. 요아킴 트리에는 이를 서로를 이해하’려’는 가족 드라마로 만들었다는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여기서 방점은 이해하는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인데요. 기본적으로 사람이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건, 소통한다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이죠.

이 영화는 우리가 어떻게 해도 100% 이해할 수 없는 심리를 가족 드라마라는 형태를 빌려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개 영화의 오프닝은 해당 영화가 펼쳐나갈 이야기를 압축하고 콘셉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라우더 댄 밤즈>의 오프닝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조나(제시 아이젠버그)의 표정은 복잡미묘하죠. 바로 그게 타인에 대한 이해의 정체일 텐데요.

이 장면은 한편으로 가족의 출발을 말하고 있죠. 뒤에 가면 이 아이는 늙은 모습으로 콘래드의 꿈 속에 등장하는데 삶과 죽음, 즉 일생에 이뤄지는 복잡한 가족 관계를 보여주기 위함일 거예요. 그렇게 가족이란 구성원은 우리가 가장 오래, 아니 평생을 밀접하게 관계를 맺는 방식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인 미스터리입니다. 여기서 미스터리는 <라우더 댄 밤즈>의 중요한 사건의 정서인데요. 가족들의 갈등이 폭발하는 지점은 어머니 이자벨 리드(이자벨 위페르)의 죽음입니다. 어머니는 자살을 한 것으로 보여요. 그렇다면 왜 자살했을까? 남편 진(가브리엘 번)과 아들 조나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녀가 왜 자살했을까, 그 미스터리를 탐구하려고 해요.

동생 콘래드(데빈 드루이드)는 달라요. 콘래드는 엄마가 교통사고로 죽은 것으로 알아요. 아직 어린 그가 충격을 받을까봐 아버지와 형은 엄마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교통사로로 위장해 얘기해주죠. 이들은 엄마의 죽음에 따른 슬픔과 상실을 각자의 방식으로 억누르고 있어요. 겉으로는 슬픔과 상실의 감정 대신 침착함과 태연함 등을 가장하지만, 속내에는 슬픔과 상실의 감정을 도화선 삼은 시한폭탄이 언제 터질지 카운트다운을 세고 있는 단계이죠.

바로 여기에 이 영화의 제목 ‘라우더 댄 밤즈 Rouder than Bombs’의 의미가 담겨 있죠. ‘폭탄보다 시끄러운‘이라는 의미인데요. 유치환 시인이 <깃발>의 익숙한 구절을 빌려 온다면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할까요. 아버지와 조나와 콘래드는 지금 마음 속으로 어떻게든 엄마 잃은 슬픔과 상실과 이에 영향 받을 가족을 안배하려는 애씀이 아우성을 치고 있는 단계입니다. 우리는, 이들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리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리의 정체를 포착하는 데 있어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데뷔작 <리프라이즈>(2006)부터 탁월한 연출 감각을 보여 왔습니다. <리프라이즈>는 ‘노르웨이 버전의 <트레인스포팅>‘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만큼 탁월한 비주얼에 담은 청춘의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리프라이즈>에서 요아킴 트리에가 주목한 감정은 에너지가 요동치는 청춘이 경험하는 실패에 따른 낭패감과 절망감입니다.

이 영화의 시작은 작가로서 대성하기를 꿈꾸는 두 젊은 남자 주인공이 각자 쓴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기 위해 우체통에 넣는 장면입니다. 이에 맞춰 각종 현란한 기법으로 이들 주인공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해요. 그것만 보면 이들이 조만간 엄청난 문학의 대가로 성공할 것 같지만, 그러고 나서 영화는 초반에 보여줬던 화려한 촬영 기법을 자제해요. 이전과는 다르게 무거운 분위기로 일관하면서 이 두 주인공이 젊음을 연료 삼아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지만, 번번히 좌절하는 과정을 담아 냅니다.

그러다가 중간중간 갑자기 빠른 템포의 음악이라든지 현란한 기법을 삽입해요. 그것은 꼭 얼마 남지 않은 젊음의 패기를 쥐어 짜 좌절과 실패를 딛고 다시 한 번 힘차게 일어서려는 주인공들의 몸부림 같은데요. 두 주인공은 결국 자신들이 원하고자 했던 것을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영화는 끝이 나고 맙니다. 결국, 이 영화가 남기는 정서는 낭패감인데요. 선택지는 두 가지로 귀결이 될 거예요. 그와 같은 낭패감을 극복하고 좀 더 나은 미래를 획득하든지, 아니면 실패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우울증에 빠져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지워져 가는 것일 텐데요. 요아킴 트리에는 후자의 감정에 주목한 것으로 보여요. 5년 후에 만든 <오슬로, 8월 31일>(2011)은 느슨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리프라이즈>의 후일담처럼 보이거든요.

<오슬로, 8월 31일>에는 <리프라이즈>의 주인공 한 명이었던 필립 역의 배우 앤더슨 다니엘슨 라이가 다시 주인공으로 출연해 안더스를 연기합니다. 안더스는 큰 돌을 안고 물속으로 들어가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는 그 길로 친구들을 만나러 다닙니다. 안더스는 <리프라이즈>에서 보여줬던 젊은 필립의 연장선인데요. 그때의 실패에 따른 후유증으로 약물에 빠져 중독되었다가 지금은 겨우 끊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는 것, 자신의 주변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아요.

그렇게 <오슬로, 8월 31일>은 안더스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서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다시금 약에 빠지는 장면으로 마무리합니다. <오슬로, 8월 31일>의 ‘8월 31일’은 ‘백야’를 의미하는데 안더스가 약을 한다는 건 그 상황 자체를 백지 상태로 만들어버려 스스로 잊혀짐을 택한다는 의미일 거예요. 그것이 이 영화의 8월 31일이 상징하는 백야와 연결이 되죠.

<오슬로, 8월 31일>에는 요아킴 트리에의 영화의 세계관과 관련한 흥미로운 대화가 등장합니다. 자살 시도 실패 후 안더스가 처음으로 찾아가는 친구의 부부가 대상이에요. 이 친구는 아름다운 아내에, 직업도 있고, 아이도 기르고 있는 등 안더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리는 것만 같아요. 그 친구는 안더스의 이야기를 듣다가 프루스트를 인용해 이런 얘기를 해요. “벗은 여인을 보고 욕망을 이해하려는 건 시간을 이해하려고 시계를 분해하는 아이와 같다.” 그러자 이를 들은 친구의 부인이 어이 없는 표정으로 안 그래도 힘든 안더스에게 왜 어렵게 프루스트를 인용하느냐며 타박을 합니다. “최소한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어야지”

요아킴 트리에가 마음 속 감정을 영화화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미묘한 심리가 만들어내는 마음 속 풍경을 다루는 요아킴 트리에의 영화는 그래서 차분하고 평온하게 흘러가는 게 특징입니다. 하지만, 차분하고 평온안 겉내 그 속에서는 마치 오리가 물 속에서 물바퀴질을 하듯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죠. 우리는 그와 같은 타인의 마음 속 물바퀴질을 따라가려고 시도를 해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게 바로 사람의 속성이죠. 최대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제에 빠진 인물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라우더 댄 밤즈>의 가족은 화목해 보여도 서로 말 못할 감정의 벽이 견고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가정을 소홀히 하고 사진을 찍는 게 이해가 안됩니다. 조나는 콘래드가 자기 방에 박혀 오락이나 하는 것 같아 지질해 보입니다. 콘래드는 아버지가 귀찮게 자기를 미행하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이들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대화를 시도하는 방식을 카메라의 다양한 앵글로 잡아 대신합니다. 클로즈업도 쓰이죠, 미디엄숏, 시점의 초점을 이동시키기 등 인물들이 타인에게 향하는 대화의 욕망을 반영합니다.

여기서 빠지지 말아야 할 함정이 절망에 빠진, 상실감에 젖은, 슬픔을 겨누지 못하는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된다는 게 아닙니다. <라우더 댄 밤즈>의 마지막 장면에서 엄마의 죽음 이후 소원했던 아버지와 두 아들은 화해에 이릅니다. 아니, 이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의문이 들었던 건 조나의 집으로 향하는 자동차를 따라가던 카메라가 갑자기 멀어져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가족의 화해로 마무리하는 장면이라기보다는 임시적 봉합의 형태로 느껴졌습니다. 멀어져가는 카메라가 이들 가족의 행복을 유예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그렇죠. 앞으로 이 가족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몰라요. 왜냐면, 조나는 어제 아내와 아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놓고 별 얘기 없이 돌아가지 않았잖아요. 또 다른 가족 간의 불씨가 타오를 수도 있는 거죠.

<라우더 댄 밤즈>의 결말은 꽤 성숙한 감독의 시선이라는 생각이었어요. 요아킴 트리에는 장편데뷔작 <리프라이즈>를 만든 지 올해로 10년 째인데 그동안 딱 세 편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30대 초반 나이에는 20대 청춘을 전면에 내세운 <리프라이즈>를, 30대 중반에는 30대가 겪는 상실감을 묘사한 <오슬로, 8월 31일>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이끌 40대의 나이에 <라우더 댄 밤즈>를 만들었는데요. 자신이 절실하게 경험하고 느꼈을 나이대의 감정을 영화로 만들기 때문에 다작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만큼 절실하다는 인상을 주죠.

그처럼 요아킴 트리에 감독에게는 ‘시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라우더 댄 밤즈>는 가족이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에 여러 개의 시선이 등장합니다. 근데 이들이 바라보는 시선의 방식은 각자가 너무 달라요. 요아킴 트리에 감독이 이자벨 리드를 종군 사진기자 역에 캐스팅한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이자벨 리드가 극 중 의미 있는 사진을 찍는 것과 별개로 사진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사진 작가에 의해 현실을 왜곡하기 마련이죠. 사진은 사각의 틀로 세상을 바라보는 매체입니다. 프레임을 벗어난 세계는 담기지 않기 때문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어요.

감정은 주관적이죠. 시선도 다르지 않아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바탕으로 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요. 이자벨 리드는 사진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이죠. 콘래드는 온라인으로 세상을 바라봐요. 아버지 진은 배우였죠. 배우는 짜인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죠. 그에게는 화목한 가정이라는 해피엔딩의 시나리오가 박혀 있는 인물일 거예요. 가족의 화합을 결말로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행동하죠. 그래서 아내의 죽음 이후 허한 마음을 콘래드의 담임 선생과의 관계로 풀어가다가 콘래드의 반발이 거세지자 곧바로 그녀와의 만남을 포기해요.

각자의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니 거기서 시선의 충돌, 더 나아가 가족 간의 갈등이 벌어집니다. 진은 아내 리드가 왜 자살했는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자주 집을 비운 그녀를 진은 이기적인 여자라고 비난했죠. 그와 다르게 진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습니다. 가족을 떠나 위험한 현장으로 갔던 이유는 아마도 열정 같아요. 나이를 먹으면서 열정이 줄어드는 것 같아 걱정인 듯 해요. 조나의 대학 시절 그를 찾아갔던 엄마가 조나와 함께 거울을 보는 장면을 보면 젊음과 늙음이 극단적으로 대비되죠. 그녀에게 얼마남지 않은 열정을 잃지 않기 위해 이자벨 리드는 더 적극적으로 전쟁 현장에서 사진을 찍었던 것 같아요. 그것이 더욱더 가족과 멀어지는 계기가 된 건데요. 사진 작가 일을 그만 둔 후에도 가족 주변을 맴돌다 정을 붙이지 못해 결국 자살을 택한 것으로 보여요. 하지만 그 속내는 정확히 알 수 없죠.

콘래드는 온라인 세계에 익숙하죠. 그 말은 오프라인의 관계에서는 미숙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엄마의 죽음을 잘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제가 볼 때는 그냥 감정 표현에 서툴러 슬픔을 제대로 표출할지 모르는 겁니다. 아버지의 외도를 목격한 후 그 상대자인 담임 선생님에게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을 보세요. 면전에 침을 뱉어버립니다. 온라인 게임에서는 감정 표출을 직접적으로 하다보니 오프라인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렇게 관계는 복잡해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이면이 언제나 갈등의 도화선으로 존재합니다. 콘래드가 좋아하는 여학우 멜라니를 보세요. 콘래드의 눈에는 굉장히 참해 보였는데 파티에서 그녀가 보여준 모습은 기가 찹니다. 자신이 쓴 일기를 그 전에 멜라니에게 줬기 때문에 좋은 인상을 심어줬을 거라고 생각한 콘래드는 그녀가 선생님 얼굴에 침 뱉은 애로 기억하자 표정이 안 좋아집니다. 더군다나 그녀의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 단 둘이 걷는 기회가 생겼는데 멜라니가 갑자기 오줌을 누겠다네요. 환상이 깨지는 순간입니다. 그때 콘래드는 눈물을 흘리는데 깨달은 게 있어 보여요. 인간에게는 보이는 것과 다른 이면이 있구나. 그녀가 차 뒤에서 싼 오줌이 콘래드의 발 밑으로 침투하는 광경은 상징적이죠. 오줌으로 더럽혀지는 신발처럼 성장이란 이면에 감춰진 어둠 혹은 그림자를 알아갈 때 이뤄지는 것이죠. 가족 관계도 그러면서 나아지는 것일 테고요.

<라우더 댄 밤즈>의 포스터는 감각적인 이미지로 꽤 화제가 됐죠. 나무결의 벽을 배경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제시 아이젠버그의 모습에서 여러분들이 감지하는 정보는 무엇인가요? 제시 아이젠버그가 출연한다와 이 영화의 제목 정도이죠. 공중제비를 도는 치어리더의 모습을 한 포스터는 어떤가요? 와~ 멋있다 정도를 빼면 역시나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바로 그게 의도이죠. 헤어라기 힘든 사람의 심리를 영화화하는 작품답게 포스터 역시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흔히 영화에는 미장센이라는 개념이 있죠. 화면에 위치한 모든 요소, 배우의 연기와 대사, 배경에 놓은 물건들, 그 위로 흐르는 음악, 카메라의 움직임 등등을 미장센이라고 하는데 <라우더 댄 밤즈>는 그와 같은 미장센으로도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감독의 의도일 거예요. 요아킴 트리에에게 영화는 영화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을, 사람의 시선을 영화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죠. 사람의 심리로 다가가기 때문에 역시나 우리가 타인의 심리를 정확하게 읽을 수 없듯 영화의 묘사도 그렇게 가져간 겁니다.

<라우더 댄 밤즈>는 그렇게 아이의 탄생에 따른 가족의 탄생으로 출발하여 콘래드의 꿈 속에서 그 아이가 늙은 노인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통해 삶과 죽음이라는 평생을 형상화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오해를 겪고 이를 풀기 위해 싸우고 결국 대화하는 관계를 관계를 반복하겠죠. 영화는 그것이 삶이고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해요. 그러니 <라우더 댄 밤즈>로 끝이 아니겠죠. 이후에 요아킴 트리에가 또 어떤 감정을 들춰낼지 궁금합니다.

 

<라우더 댄 밤즈> GV
압구정 CGV
(2016.10.26)

[GV] <비거 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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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V 준비를 하면서 소리나는대로 쓴 글이라 오타, 비문 등이 난무합니다.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

1. <비거 스플래쉬>는 자크 드레이 감독의 1969년 작품 <수영장>을 리메이크하였습니다. 두 영화는 기본적으로 이야기 전개가 같아요. 편집 순도 흡사하고요. 이야기를 흡사하게 다룰 거라면 굳이 리메이크를 할 필요가 있는가.

이 영화들은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는데요. 욕망은 제어한다는 게 쉽지 않죠. 어느 선을 넘으면 점점 불어나는 특징이 있는데요. 바로 거기에 착안을 했습니다. <비거 스플래쉬>가 욕망이라는 주제에 더 풍부하게 살을 붙였다고 할까요. 그래서 더 탐욕, 아니 욕망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데요. 가령 이런 거죠.

같은 수영장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수영장>은 수면 위에 비친 주인공들의 모습, 그러니까 욕망을 비추는 거울 같은 느낌이죠. <비거 스플래쉬>는 이에 더해서 수영장을 욕망의 시선이 엉켜 있는 곳으로 그려요. 그래서 <비거 스플래쉬>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를 주목하죠.

2. 데이비드 호크니의 대표작은 영화와 제목이 같아요. 바로 <A Bigger Splash>(사진)입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자크 드레이 감독의 <수영장>을 리메이크하기로 결정한 후 제목을 지으면셔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을 떠올렸다고 하죠. <A Bigger Splash>는 캘리포니아 현대식 가정의 쓸쓸한 한낮 정경을 포착한 작품이라고 해요. 수평과 수직의 선들이 교차하는 가운데서 비전형적으로 물이 튀는 모습이 강렬한 작품이죠. ‘물이 튄다’는 의미가 바로 <A Bigger Splash>라고 하는데요.

고요한 느낌 가운데 물이 튀니까 거기서 무언가 불안함과 혼돈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아닌 게 아니라, 영화 <비거 스플래쉬>는 바로 네 남녀의 서로를 향한 욕망이 서로 사선을 그으면서 극단까지 이르는 이야기죠. 실제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욕망이 남, 녀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휘젓는지에 대한 것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이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아이 엠 러브>에서 보여준 것이기도 했는데요. 한편으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왜 <수영장> 리메이크에 관심이 많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죠.

3. <비거 스플래쉬>는 마리안의 콘서트 무대 뒤편의 철골 구조를 보여주면서 시작합니다.  호크니 그림에서 목격되는 수직과 수평의 선들이 어지럽게 교차를 하고 있죠. <비거 스플래쉬>가 어떤 욕망과 감정이 이렇게 복잡하게 서로 선을 그으면서 진행되는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하는데요. 그래서 이 영화에는 시선이 교차하거나 서로의 방향이 어긋나는 운동성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꽤 많아요.

차를 몰고가는 마리안과 폴의 시선 반대에서 해리와 페넬로페를 실은 비행기가 착륙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마리안과 폴 그리고 해리와 페넬로페의 감정이 갈수록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임을 예고하고 있죠. 이 장면 전까지 정말 아무 소리 없이 평화로웠던 분위기는 자동차 엔진 소리와 비행기의 착륙 소리가 극대화 되면서 평화를 깨고 있는 것인데요.

그럼으로써 한적하게 휴가를 보내고 있던 마리안과 폴의 분위기는 해리와 페넬로페가 타고 있는 비행기에 의해 잠식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어요. 그렇듯 우리 주인공들의 욕망은 너무나 달라요. 그리고 사실 욕망은 너무나 주관적인 것이라서 그것을 백 퍼센트 파악하기도 힘들죠. 그러다보니 서로 간의 욕망은 결국 엉켜버릴 수밖에 없어요. 마치 이 영화의 첫 장면이 보여주는 것처럼요. 그래서 <비거 스플래쉬>에서 보여주는 욕망의 색깔들은 너무 다양하고 서로 달라요.

4. 마리안과 폴이 휴식을 취하는 부분에서의 이 영화의 카메라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죠. 하지만 공항에서 해리를 바라보는 폴의 시선은 차가운 파란 빛이에요. 선글라스 렌즈를 통해 색을 굴절하고 있죠. 해리를 향한 폴의 마음의 굴절을 보여줘요. 사실 해리는 여기에 온 목적이 있죠. 전 연인이었던 마리안의 마음을 다시금 돌려 놓고 싶어요. 마리안은 그 가운데서 갈등해요. 그래서 화면의 한쪽은 너무 뜨겁지만, 한쪽은 차갑게 해서 혼돈을 표현하는 장면도 등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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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또 하나의 데이빗 호크니 그림이 <비거 스플래쉬>에서는 중요하게 활용이 돼요. <Portrait of an Artist(Pool with Two Figures)>라는 작품인데요. 영화 <비거 스플래쉬>에는 이에서 인용한 듯한 장면이 있어요. 수면 위로 수영장 아래 새겨신 선들이 비추고 있는데 이는 또한 욕망이 엉켜있는 듯한 이미지들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 거죠. 그것은 ‘비거 스플래쉬’, 즉 물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것처럼 욕망이 엉킬 수밖에 없는 주인공들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는데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바로 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영화의 형식을 구상하고 있어요. 무슨 소리냐고요?

물이 튀면 물 방울이 어디로 튈지 모르잖아요. 그처럼 해리와 페넬로페가 마리안과 폴의 평화로운 일상을 깨면서 드러나는 파편화된 감정들을 여러 가지 예술 매체로 파편화해 보여주고 있는 것인데요. 일단 영화 <비거 스플래쉬>는 <수영장>을 리메이크 했죠. 리메이크 하면서 영화의 제목을 데이빗 호크니의 그림에서 가져왔죠. 그리고 이 영화에서 마리안은 록 스타를 연기하는데요. 그래서 록음악이 빠질 수 없죠.

6. 루카 구아다니노는 <수영장>을 <비거 스플래쉬>로 각색하면서 “우리는 20세기를 끝으로 한 물 간 로큰롤의 시대와 현재의 우리를 지배하는 신보수주의 시대 사이의 균열에서 아이디어를 시작했다”는 말을 했어요. 이 영화가 욕망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로큰롤은 욕망 중에서도 밖으로 분출하는 데 이만한 장치가 없는 요소죠.

그중에서도 롤링스톤즈가 사용이 됐는데요. 이에 대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왈, “로큰롤이 곧 롤링스톤즈였다. 만약 당신이 롤링 스톤즈에 대해 잘 모른다면 로큰롤을 잘 안다고 주장해선 안 된다. 스크립트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 각본가 데이빗은 ‘해리’ 캐릭터를 롤링 스톤즈의 역사에 아름답게 뿌리를 둔 멋진 인물로 그리기 원했다.”

7. 특별히 롤링 스톤즈의 <Emotional Rescue> 음악이 중요하게 사용이 되죠. 해석하자면, ‘사랑의 구원자’ 정도가 되려나요. 해리는 그 자리에 모인 친구들과 함께 이 노래를 들으며 춤을 추는데요. 어떻게 보면 마리안에게 은밀하게 암호를 보내는 것 같아요. <Emotional Rescue>의 가사 일부를 들어볼까요.

‘약속이란 깨려고 있는 거 아니나/ 내가 너의 사랑의 구원자가 되어줄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노래가 실린 앨범은 해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종의 상징이 되고 맙니다. 폴과 다투다가 해리는 죽고 이를 폴이 아닌 다른 이의 타살로 몰아가려 폴은 수영장에서 죽은 해리의 시신 옆에 이 앨범을 두죠.

8. 이처럼 극 중 마리안과 폴과 해리와 페넬로페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는 경우가 없어요. 물이 튀는 것처럼 욕망을 분출해요. 마음을 숨기고 있을 때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성적 혹은 욕망의 상징물을 도구를 통해 드러내는데요. 와인병과 카메라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죠.

그 의도는 <수영장>에서 폴이 글을 쓰다가 실패한 인물인 것에 반해 <비거 스플래쉬>에서는 사진 작가로 변경된 것이 그렇죠. 해리는 너무 드러내 놓는 반면 폴은 그래도 좀 참으려는 욕구가 있어요. 그래서 페넬로페가 노골적으로 폴에게 접근하지만, 폴은 시선을 돌려 카메라, 즉 남성의 성기를 내려놓고(?) 욕망을 조절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죠.

9. 다만 욕망 분출이라는 측면에서 틸다 스윈튼이 연기한 마리안은 좀 다른 부분이 있어요. 말을 하지 못하는 설정으로 되어 있죠.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마리안 역할에 가장 먼저 염두에 뒀던 배우는 케이트 블란쳇이었다고 해요. 케이트 블란쳇이 스케줄 문제로 <비거 스플래쉬>에 합류할 수 없게 되자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틸다 스윈튼에게 합류를 요청했죠. 틸다는 자신이 1순위의 배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아이 엠 러브>의 인연에 아랑곳없이 거절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녀의 단호한 결심에 변화를 가져온 건 어머니의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진리 앞에서 단절된 관계와 벽에 부딪힌 소통의 한계를 경험한 틸다 스윈튼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중화해 줄 영화가, 캐릭터가 필요했습니다. 마침 마리안은 자연인으로서 경험했던 한계와 이를 예술로 승화할 좋은 매개체가 되어줄 것 같았습니다.

틸다 스윈튼은 엄마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경험을 반영해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에게 한 가지 조건을 들어 마리안 역할을 수락했습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로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인물로 마리안을 설정해달라는 것. <아이 엠 러브>에서도 그랬듯이 인간의 욕망이 초래하는 복잡한 관계와 비극을 테마로 삼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에게 틸다 스윈튼의 제안은 혹할만한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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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비거 스플래쉬>에는 유독 먹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죠. 낙원에서의 식사, 게다가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의 식사의 의미가 뒤로 갈수록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르는데요. 그래서 이들이 서로의 파트너(?)를 놔두고 관계를 맺은 후 어색한 감정 속에 나누는 마지막 식사 장면은 일종의 ‘최후의 만찬’이 되겠죠. 실제로 <비거 스플래쉬>에는 종교적인 상징도 있어 보여요. 마리안과 폴을 찾아온 해리가 마굿간을 개조한 침실에서 잠을 자는 것도 그렇고 뜬금없이 뱀이 등장하는 장면도 그러한데요.

11. 판텔레리아 섬은 이탈리아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죠. 우리가 흔히 ‘따뜻한 남쪽 나라’라고 해서 일종의 낙원, 이상향의 위치를 남쪽으로 잡고 있는데요. 실제로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판텔레리아 섬은 정말 낙원처럼 보이죠. 하지만 중간 중간 언급되는 내용들을 보면 판텔레리아는 노예들의 섬이었고 지금은 튀니지 쪽에서 넘어오는 난민들이 꽤 많이 유입되고 있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판텔레리아 섬에 문명의 파편들이 유입되면서 서서히 자연 그대로의 환경에 생채기가 나고 있어요. 해리가 고층빌딩이 난무한 뉴욕에서 이곳으로 왔다는 설정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죠. <비거 스플래쉬>의 첫 장면, 콘서트 무대의 ‘철조물’로 욕망의 엉킴 혹은 어긋남을 표현한 이유이기도 하죠.

그래서 낙원처럼 보이는 판텔레리아에는 비밀이 있는데요. 비밀은 이 영화의 결말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함께 하던 에덴 동산은 낙원이죠. 하지만 이곳에는 일종의 인류 욕망의 비밀 같은 것이 서린 곳이에요. 뱀이 나타나 이브를 유혹하고 선악과를 따먹게 하죠. 그 순간부터 아담과 이브에게는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한 비밀이 생기는 건데요. 그처럼 폴과 마리안에게 에덴 동산 같았던 판텔레리아 섬은 폴이 해리를 죽이면서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이곳에 남은 폴과 마리안과 페넬로페에게는 모두 비밀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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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폴과 마리안은 해리의 죽음이라는 비밀을 간직한 현대의 이브와 아담입니다. 페넬로페요? 그녀는 17살인데 22살이라고 속였고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알면서 모른 척 하고 있었죠. 어쩌면 페넬로페는 낙원에 침투한 뱀이고 해리는 선악과와 같은 존재일 텐데요. 그동안 페넬로페가 해온 행동들이 뱀과 닮아 있지 않나요? 특히 등에 베길 것만 같은 돌맹이 사장에 누워 몸을 비틀어 폴을 유혹하는 것을 보세요. 뱀(?)이 따로 없죠.

13. 해리는 자기 욕망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인데요. 그래서 뭔가를 놓치고 싶지 않은, 끌어 안고 있는, 하지만 해리를 죽인 폴에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마리안에게는 그의 죽음을 비밀에 붙여야 할 마치 선악과처럼 먹어치워야 할, 하지만 목 안에 걸리는 비밀 같은 것이겠죠. 그래서 둥근 형태의 사과 모습 같기도 하고 말이죠.

 

<비거 스플래쉬> GV
CGV 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
(2016.8.11)

<500일의 썸머> 사랑에 운명이란 게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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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일의 썸머>가 2010년 국내 개봉했을 때 작성한 글입니다)

2009년 로맨틱 영화의 가장 큰 성과랄 수 있는 마크 웹 감독의 <500일의 썸머>가 국내 극장가에서 썩 재미를 못보고 있다. 1월 21일 221개관에서 개봉하고도 일주일 동안 고작 8만 명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지난 한 해 미국 평단이 꼽은 10대 영화 리스트(‘USA Today’ ’Rolling Stone’ ‘Premere’ 등)에 대부분 포함된 것을 감안하면 아쉬운 결과다. 마크 웹 감독이 데뷔작 <500일의 썸머>의 성공을 등에 업고 샘 레이미가 물러난 <스파이더맨4>의 새 감독으로 결정된 사실이 알려졌다면 결과가 다소 바뀌었을까.

소년, 소녀를 만나다

<500일의 썸머>는 그 흔한 사랑과 그 이후 벌어지는 이별을 다룬 영화다. 다만 마크 웹 감독은 뻔한 사랑과 이별 얘기를 연대기 순으로 진행하는 대신 시간을 재배열함으로써 전혀 다른 함의를 갖는 로맨틱영화로 탈바꿈시켰다. 로맨틱코미디영화에 <21그램>의 형식을 합했다고 할까. 영화는 초반 10분 동안 그런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오프닝과 함께 반지를 낀 여자의 손이 남자의 손 위로 포개지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는 마치 이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이야기는 곧 이은 장면에서 이들이 처음 만난 ‘1일째’로 돌아간다.

축하카드를 제작하는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는 톰(조셉 고든 레빗)은 사장의 새 비서 썸머(주이 드샤넬)를 보고 첫 눈에 반한다. 다소 소극적인 성격의 톰은 썸머가 사랑에 큰 관심이 없음을 알고는 일단 마음속에만 그녀를 담아둔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더 스미스’의 음악을 썸머 역시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운명적인 사랑을 감지하니. 여타의 로맨틱영화였다면 이후 주인공 커플이 불같은 사랑을 나눴을 테지만 <500일의 썸머>는 별안간 290일째로 넘어가 썸머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톰의 좌절한 표정을 보여준다. 첫 장면에서 그렸던 톰과 썸머 커플에 대한 환상이 확 깨지는 순간이다.

이처럼 <500일의 썸머>는 톰과 썸머가 관계한 시간을 뒤죽박죽 나열하며 사랑에 대한 환상의 풍선을 터뜨리는 형식을 취한다. 톰과 썸머의 첫 만남의 에피소드 뒤에 바로 이별의 사연이 자리 잡고 가구 매장에서 소꿉놀이하듯 펼치는 이들의 닭살 행각을 따라가던 카메라가 홀로된 톰이 다시 매장을 찾아 씁쓸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비추는 식이다. 여기에는 사랑을 운명으로 대하는 남자와 사랑을 현실적으로 대하려는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를 드러내 로맨틱영화의 공식을 재정의 하려는, 더 나아가 사랑에 대해 더 깊이 성찰해보려는 감독의 소박한 야심이 뽀얗게 서려있다.

이 영화가 시종일관 경쾌한 톤을 유지하고 선배 로맨틱코미디 영화에 대한 영향력을 숨기지 않는 것은 <500일의 썸머>가 다루는 사연이 사랑의 끝이 아니라 진정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알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더 스미스’ ‘홀 앤드 오츠’, ‘사이먼 앤 가펑클’ 등의 음악을 극에 적극 개입시키는 연출은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2000)를 연상시키고 뮤지컬 영화에 대한 패러디부터 잉그마리 베르히만의 <제7의 봉인>(1957)과 <페르소나>(1966)에 대한 재치 있는 오마주까지, 겉보기엔 로맨틱코미디 장르의 최근 조류를 취하고 있지만 이상화된 사랑의 무책임한 결론을 향해 가지 않는 것이다.

이미 주인공 톰을 소개하는 내레이션부터가 심상치 않다. 내레이터(리처드 맥고나글) 왈, 톰은 <졸업>(1967)의 결말을 잘못 이해하고 사랑을 경험한 케이스란다. 톰은 ‘사랑은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소유자인데 사실 <졸업>의 마지막 장면은 운명론적인 사랑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낸 것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톰은 극중 벤자민(더스틴 호프먼)이 결혼식장에서 일레인(캐서린 로스)을 데리고 나오는 장면을 보고 사랑에 대한 환상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랑의 도피에 성공한 벤자민과 일레인이 버스 뒷좌석에 자리하고 긴장을 푸는 순간 이들을 바라보는 일군의 어른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은 사랑이 운명만으로 충족되는 감정이 아님을 역설한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500일의 썸머>의 톰을 보며 <봄날은 간다>(2001)의 상우(유지태)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사랑을 운명이라고 믿는 톰이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떼쓰는(?) 상우나 사랑에 있어서 순진한 면모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더군다나 톰은 자신의 사랑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한참이나 나이 어린 여동생에게 카운슬링을 받고 안정을 취한다!) 그에 반해 썸머는 (역시 <봄날은 간다>의 은수(이영애)처럼!) 사랑에 대해 좀 더 유연한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을 감정의 의무라고 생각해 강제하지 않고 환상 따위 품지 않으며, 그래서 현실에 대한 감각도 톰에 비해 월등하다. 다만 그 나이 대 여자들에게서 종종 목격되는, 이미 사랑에 대해 모든 걸 아는 듯 젠체하는 태도는 썸머 역시 어느 면에서 톰과 다를 바 없이 유아적인 것이 사실이다.

<500일의 썸머>는 한편으론 톰과 썸머 중 누가 먼저 사랑에 대한 환상을 깸으로써 좀 더 빨리 성장하는지를 비교, 분석하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그리고 당연히 더 오래도록 실험대상(?)을 남는 쪽은 톰이다. 남자라는 동물 자체가 그렇다. 사랑에 거품을 잔뜩 치장하고 거품이 빠져도 오랫동안 헤어 나올 줄은 모르며 그걸로 세상 끝이라고 생각하는 게 그 놈의 남자다. 한마디로 여자에 비해 덜 현실적이고 조금 더 비하하자면 철이 없다.

<500일의 썸머>의 각본 자체가 그런 남자에 의해 쓰였다. 이 영화의 각본가 스콧 뉴스타터는 첫사랑 여자와 헤어진 뒤 겪은 감정을 고스란히 <500일의 썸머>에 담았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마이크 니콜스의 <졸업>이었고 ‘더 스미스’ 노래에 꽂혀 몇날 며칠을 이어폰만 꽂고 살았으며 그러면서 사랑은 운명으로 굳게 믿었던 것이 바로 스콧 뉴스타터다. 그는 자신을 떠나간 첫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500일의 썸머>가 시작되자마자 나오는 자막, ‘등장인물들이 현존하는 사람과 닮았다면 그건 순전히 우연일 뿐입니다. 특히 당신, 제니 베크먼… Bitch!’인데 제니 베크먼이 바로 스콧 뉴스타터의 첫 사랑이었더랬다.

다만 각본가 스콧 뉴스타터는 이제 어느 정도 객관적인 선에서 자신의 사랑을 돌아볼 만큼 몇 번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이도 더 먹으면서 좀 더 현실적인 인물에 가까워졌다. <500일의 썸머>의 각본을 썼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 중에서도 썸머의 손이 톰의 손 위로 포개지는 장면을 전략적으로 영화의 앞뒤에 구성한 배치는 <500일의 썸머>의 의도를 명증하는 구조의 핵심이라 할만하다. 처음 제시될 때는 관객들에게 이들의 결혼을 암시하는 역할을 하지만 영화의 결말부에 다시 한 번 반복되는 이 장면의 의미는 정반대로 그들의 사랑이 완전히 끝을 맺는 순간이면서 또한 톰이 운명의 사랑에 대한 환상을 깨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톰이 깨닫는 사실이란 사랑은 바로 우연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현상이라는 것. 운명적인 사랑이란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 속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지 이미 피운 꽃을 갖는 게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미 지나간 버스 후회하며 쫓아간들 무슨 소용이며 앞으로 다가올 버스를 놓치지 않는 것이 사랑에 더욱 충실한 태도가 아니냐는 거다. 그러니 허구한 날 운명의 사랑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될 사랑을 제 때 알아보는 것이야말로 진정 ‘사랑의 기술’임을 <500일의 썸머>는 잘 보여준다.

봄, 여름 그리고 가을

사실 톰과 썸머의 사연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랑 이야기라 해도 틀리지 않다. 처음부터 사랑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연애를 하는 사람은 없다. 사랑에도 단계가 있고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사랑의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 <봄날은 간다>의 상우도 은수라는 첫 사랑의 실패로 한 뼘의 성장을 이루었고 <500일의 썸머>의 톰 역시도 썸머와의 이별 후 오랜 가슴앓이 끝에 사랑을 조금 더 알게 됐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새로운 사랑은 ‘Autumn’, 즉 가을이다.

개인적으로 <500일의 썸머>에 대한 글을 쓰면서 <봄날은 간다>를 언급한 것은 단순히 사랑의 성장통이 가져오는 감정의 변화를 계절의 속성으로 암시하는 구조의 친연성에 있지만은 않다.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흡사한 구조의 영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다만 사랑의 형태는 다양할지언정 속성에 있어서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니까 <500일의 썸머>의 톰과 썸머가 경험하는 사랑은 결국 너와 나,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리고 모두가 한 번쯤은 겪은 (혹은 겪게 될) 추억이기도 하다. <500일의 썸머>는 사랑이란 공식 같은 것이 아니라 기억처럼 순서 없이 좌충우돌 하는 경험에서 완성된다고 말하는 영화인 것이다.

 

무비스트
(2010.1.31)

[GV] <오베라는 남자>

themanobe

(GV를 위해 작성한 글이라 문장이 거칩니다. 감안해서 읽어주세요. ^^;)

오베(롤프 라스가드)는 참으로 괴팍한 노인네입니다. 주변 이웃과는 전혀 소통하려 들지 않아요. 처음부터 화만 내기 일쑤죠. 마치 우리네 어르신 같은 모습이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닙니다. 한스 홀름 감독의 <오베라는 남자>는 오베가 왜 이렇게 삐뚤어(?)졌는지를 밝혀가는 이야기인데요. 오베의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플래쉬백)을 취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과거에 사로 잡힌 인물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초반에 오베가 과거에 사로잡힌 인물이라는 사실을 재밌는 묘사로 보여줍니다.

앞집에 패트릭과 파르바네 부부가 이사를 오는데 오베 눈에는 마뜩잖습니다. 운전 실력부터가 영 시원찮습니다. 원래 오베가 사는 동네에는 운전이 금지되어 있는데 차를 몰고 들어온 것도 모자라 오베네 집의 우체통을 박살내기까지 합니다. 성질 급한 오베의 입장에서는 폭발할만도 하죠. 근데 화를 내는 것에 멈추지 않고 대신 운전을 합니다.

특히 후진 실력이 정말 좋아요. 오베가 과거 지향적인 인물이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죠. 우체통이 부서진 것만 봐도 그의 소통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다만 오베가 사람을 불신하는 건 태생부터 나쁜 사람이기 때문은 아니에요. 사연이 있는 거죠. 그게 슬퍼요. 어릴 때 엄마를 잃었고 청소년 때 아빠를 잃었습니다. 무엇보다 오베를 더욱 보수적인 인물로 만든 건 부인 소냐의 죽음입니다. 소냐가 6개월 전에 사망한 이후 오베는 살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까칠한 데다가 몰래 죽을 생각까지 하고 있죠.

하지만 자살을 시도할 때마다 이웃의 방해로 늘 실패합니다. 첫 번째 자살 시도 때는 패트릭과 파르바네 부인의 이사 문제로 한 번 어그러졌죠. 그런 후 다시 자살 시도를 하는데 마침 벨소리가 울립니다. 이번에는 패트릭과 파르바네 부부의 두 딸입니다. 운전을 도와줬다며 고마움의 표시로 샤프란을 넣은 밥과 닭요리 도시락을 전해줍니다. 오베는 이를 마지 못해 받아들이죠.

여기에도 재미난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패트릭의 부인 파르바네는 이란 출신입니다. 스웨덴으로 온 이민자이죠. 그런 이민자가 요리한 음식을 받아들였다는 건 파르바네는 물론 그녀의 문화까지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음식 한 번 먹었다는 것만으로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가 과거에 사로잡힌 오베를 그 과거에서 빼내어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는 걸 암시하는 것이겠죠.

<오베라는 남자>에는 오베를 과거에서 현재로, 집 안에서 바깥으로, 고집불통에서 함께 하는 이웃으로 끄집어내기 위한 의미심장한 미장센들이 등장해요. 우선 음식이 그랬죠. 음식을 전달해준 파르바네 가족은 이번에는 사다리를 빌려달라고 합니다. 사다리 또한 그냥은 이동하기 힘든 곳을 연결해주는 도구이죠. 그 와중에 아니타가 오베를 찾아와 레디에이터를 고쳐달라고 합니다. 내가 왜 도와줘야 하냐며 오베는 거절하지만, 빌려준 호스를 받기 위해 마지못해 아니타를 찾아가 라디에이터를 고쳐줍니다. 호스 또한 긴 선의 형태로 수도꼭지에 연결하는 물건이라는 점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의미로 볼 수 있겠죠.

영화는 그처럼 소통을 의미하는 다양한 연결의 미장센으로 내부에 사로잡힌 오베에게 노크를 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오베의 죽음을 막으려는 간절한 부름이기도 하죠.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전혀 새롭지는 않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와 픽사의 애니메이션 <업>이 있었죠. <그랜 토리노>의 할아버지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업>의 할아버지 칼은 모두 오베처럼 과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코왈스키도 부인을 잃고 홀아비 신세가 되어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누구의 방해도 없이 조용히 보내려는 인물이죠. 하지만 젊은 갱들은 동네의 안전을 위협하고 아시아인들로 채워지는 이웃들은 자꾸 코왈스키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오며 가족들은 애지중지 아끼는 그랜 토리노에 호시탐탐 눈독을 들입니다. 칼도 다르지 않습니다. 개발업자들에게 집을 압류 당할지도 모르고, 아시아계 소년 러셀은 봉사활동을 이유로 귀찮게 굽니다.

오베와 코왈스키와 칼은 한마디로 ‘변화’가 싫습니다. 이들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자신의 신념만은 지키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지키려는 것, 오베와 칼에게는 부인과의 추억이 묻어 있는 집, 코왈스키에게는 1972년형 그랜 토리노가 그것인데, 모두 오래되고 낡은 과거입니다. 과거는 미래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죠. 그렇다면 방법은 과거를 버리면 되겠죠. 사실 오베도, 칼도, 코왈스키도 만약 배우자가 있었다면 고집불통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 부인들은 남편들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는 않겠죠.

소냐는 오베에 앞서 몇 번의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 건 임신 후 오베와 떠난 스페인 여행에서 버스 사고를 당해 유산을 한 것은 물론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에서 평생을 보내게 됐다는 것입니다. 힘들게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열심히 공부를 해 교사 자격증을 땄지만, 채용해주는 곳이 없습니다. 소설 <오베라는 남자>에는 그 대목에 관한 중요한 대사가 있습니다. 소냐 왈, “우리는 사느라 바쁠 수도 있고 죽느라 바쁠 수도 있어요. 오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오베의 부인 소냐뿐이겠어요. <업>의 칼의 부인도 죽으면서 사진첩에 이런 문장을 남겨뒀었죠. “당신만의 여행을 떠나세요.”

부부가 의미를 갖는 건 이렇게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기 때문인데요. 부부에게 서로는 각자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는 부분이 있죠. 오베와 소냐의 부부만 해도 소냐는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 출신이고 오베는 운전과 수학 빼고는 무언가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선생과 학생의 역할이 되겠죠. 반대로 소냐가 휠체어에 의지할 때 오베는 그런 부인을 위해 집안의 모든 부엌 시설의 높이를 낮춰주고요, 소냐가 겨우 학교에 부임했을 때는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도록 따로 계단을 마련해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는 게 부부 사이인데 한쪽이 없다면 그 절망감이 얼마나 크겠어요. <오베라는 남자>에는 오베가 혼자 밥을 먹거나 잠을 잘 때 그 옆자리가 비워있는 장면을 종종 노출합니다. 그 빈자리가 너무 커서 오베는 자살하려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그 빈자리를 채워주면 됩니다. 그 빈자리를 채워주는 건 오베의 이웃사람들입니다. 특히 파르바네의 역할이 크죠. 파르바네는 오베의 자살 시도를 눈치채고 이런 얘기를 합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어요”

부인과는 사별했고 스페인 여행에서의 사고 때문에 아이도 없는 오베를 위해 영화는 (그리고 소설은) 그를 위해 가족을 만들어줍니다. 패트릭과 파르바네 부부가 어떻게 보면 자식 같은 입장이 되겠죠. 그들의 아이들은 오베에게 손주가 될 겁니다. 게다가 파르바네는 현재 임신 중이기도 해요. 오베가 소냐의 임신 당시 새로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만들어두었던 요람은 파르바네의 셋 째 아이 차지가 되겠죠. 그런 광경을 지켜보는 감정은 꽤 훈훈합니다.

영화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이 부분에서 오베가 사는 마을에 걸려 있는 스웨덴 국기를 비추며 스웨덴의 훈훈한 미래까지 그려봅니다. 현재 유럽은 이민자들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죠. 유럽 뿐이겠어요. 한국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오베라는 남자>는 그런 현재를 거부할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가족처럼 서로 화합하고 힘을 합칠 것을 이야기합니다. 오베의 앞집으로 이란 출신의 파르바네가 이사를 오는 건 그런 의미이겠죠. 파르바네 뿐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다양한 출신 성분의 조화인데요. 다양성을 소수자라고 치환해도 될 거예요. 파르바네의 남편 패트릭은 스웨덴 출신이지만, 사다리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다는 설정은 이를 의미하겠죠. 또한, 파르바네의 옆집에는 뚱뚱한 백수 청년이 살고 있고요. 소냐가 가르쳤던 학생 중에는 아랍 출신의 게이도 있습니다. 사람에만 한정하지 않아요. 오베의 집 앞에는 늘 고양이 한 마리가 찾아오고는 하는데 나중에는 오베의 가족이 됩니다.

이런 다양성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있겠죠. 오베의 이웃인 아니타의 남편 루네는 한때 오베와 절친했던 사이이지만, 언젠가부터 소원해진 상태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거동도 하지 못할 정도로 몸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정부에서는 그런 루네를 요양원에 데리고 가려 하죠. 아니타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인데 이에 도움을 주는 것이 오베와 이웃 사람들입니다. 정부에서 파견된 요양원의 스웨덴 백인 직원이 루네를 데려가려고 하자 다양성으로 무장한 오베와 가족들이 이를 막는 것이거든요. (사진 참조) 감독이 앞으로 스웨덴이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으로써 오베는 과거를 탈출해, 집안에서 벗어나 미래를 위한 새출발을 하게 됩니다.

새출발은 오베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베의 의무는 스웨덴의 어른으로서 후대에게 앞으로 살아갈 방법을 전도하고 가르쳐주는 것이겠죠. <오베라는 남자>에서 자동차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베는 ‘메이드 인 스웨덴’ 사브만 평생을 몰고 다녔죠. 그것은 그의 가치였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은 그였죠. 그의 차에는 항상 소냐만이 탔습니다. 소냐의 빈자리는 이제 파르바네 부부와 그의 자식들이 차지하게 되었죠. 스웨덴이라는 국가에 다양성이 생겨난 겁니다.

오베가 파르바네에게 운전을 가르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이제 스웨덴을 이끌어가는 건 스웨덴 출신 뿐만이 아니겠죠. 그렇다면 사브에 좌석에 않을 수 있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운전을 할 수 있게도 해야겠죠. 오베가 파르바네에게 자동차 운전법을 가르쳐주는 이유는 물론 스웨덴의 미래를 이끌어가는 건 다양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겠죠. 사실 오베도 그래요. 오베는 아버지에게 운전하는 법, 거짓말 하지 않는 법, 앞으로 나아가는 법에 대해서 배웠지 다양성은 익히지 못했습니다. 만약 엄마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오베는 엄마에게서 다양성을 배우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지금처럼 고집불통의 외골수 할아버지가 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아무렴 어때요. 이제 오베도 다양성을 알게 됐는데요. <오베라는 남자>의 마지막, 파르바네의 두 딸이 마을의 문을 닫는 장면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GV
(2016.4.28)

[GV] <크로닉>

chronic

(GV를 위해 러프하게 메모해서 맞춤법도 틀리고 비문도 많아요. 감안해서 읽어주세요. 무엇보다 엄청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셸 프랑코는 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마비로 쓰러져 남은 생을 침대 위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때 그녀를 돌봐줬던 이는 여자 간호사, 즉 호스피스였는데요. 6개월 동안 할머니 곁을 지켰던 호스피스에게 감동을 받았다고 해요.

내용인즉, 매일 할머니를 찾아와 도운 호스피스는 가족도 힘들어하는 목욕과 식사와 생리 현상을 모두 도왔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가족보다도 더 할머니와 깊은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것이 처음엔 미셸 프랑코 감독에게 낯설게 다가왔답니다. 할머니가 가족이 아닌 낯선 이방인에게 더욱 친근감을 느끼는 상황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모순적인 데가 있어요. 할머니와 관련한 일련의 상황을 경험하면서 미셸 프랑코는 이를 영화로 만들 생각을 했습니다. 우선은 호스피스란 과연 어떤 작업일까, 로부터 출발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할머니를 간호했던 호스피스와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그녀를 신뢰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호스피스가 할머니를 부축하고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우선 프랑코의 가족들에게 비키라고 했대요. 그러면서 할머니를 조심스럽게 옯기는 데 엄청나게 능수능란하다는 겁니다.

왜 아니겠어요, 그녀는 무려 20년 넘게 그 일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늘 우울해 보였다고 해요. 미셸 프랑코는 생각했겠죠. 남의 죽음을 보고 있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닌데 그런 표정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그러면서 들었던 의문은 우울한 이 일은 왜 그렇게 오랫동안 하고 있는 걸까? 호스피스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이 일은 나의 삶이야. This is my life”

타인의 죽음을 돌보는 것이 삶이 된 이라니. 거기서 미셸 프랑코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사유 없이 어떻게 삶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렇죠. 우리가 삶이라고 말하는 것은 죽음을 포함했을 때 완벽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논하지 않고는 삶을 말할 수 없죠. 그래서 삶은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크로닉>이 역설과 모순의 드라마인 이유가 여기에 있죠.

이미 언급했듯 호스피스는 타인의 아픔과 죽음을 돌보면서 자신의 삶의 존재 가치를 찾습니다. 일례로, 팀 로스가 연기한 극 중 호스피스 데이비드 윌슨은 홀로 집에 있을 때면 그렇게 무기력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침대에 누워 시체처럼 잠을 잔다든가 불도 켜지 않고 노트북을 보며 시간을 죽이는 식이죠. 환자를 돌볼 때야 데이비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데이비드의 얼굴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가 없습니다. 무표정으로 일관해요. 그럴 수밖에 없겠죠. 돌보는 환자는 고통에 쌓여 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 어떻게 호스피스의 얼굴에 활력이 돌 수 있겠어요. 영화는 이와 같은 모순적인 상황을 탁월한 이미지로 보여줘요. 데이비드가 체중이 쭉 빠진 여자를 목욕시킬 때 장면을 보세요. 화면의 양 옆은 어둠에 쌓여 있지만, 그 가운데 화장실 문으로 보이는 이들의 목욕 장면 만은 환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호스피스의 정체성뿐 아니라 환자의 삶에 깊숙이 들어간 호스피스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요. 이것이 불만인 가족도 있을 거예요. 가족은 볼 것 안 볼 것 모두 겪은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생각 때문인데요. 실은 가족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도 있을 거예요. 데이비드가 돌보는 할아버지가 그래요. 할아버지는 가족들을 귀찮아 하고 데이비드에게 신뢰를 보이죠. 가족이 없을 때면 아이패드로 포르노를 보며 즐거워 하는데 가족의 입장에서는 데이비드가 할아버지를 성희롱한다고 받아들입니다. 이 또한 가족보다 환자를 더 깊이 이해하는 호스피스가 겪어야 하는 삶의 역설이자 모순이겠죠.

(스포일러 주의!)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은 충격적입니다. 타인의 아픔과 죽음을 어루만져주는 데이비드는 정작 그 자신의 죽음은 돌보지 못합니다. 조깅을 하던 중, 달려오는 차를 보지 못하고 도로에서 차사고를 당하고 마는데요. 데이비드의 입장에서는 정말 아이러니인 게, 그는 아픔을 겪는 아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안락사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요. 또한, 조깅을 하기 전에는 그에게 의학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해 달라는 환자를 위해 다시 한 번 안락사를 관장했는데요. 타인의 죽음을 맡아서 다루던 그가 자신의 죽음은 결코 예비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모순적입니까.

그처럼 우리는 앞 날을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죽음도 그렇지만, 내가 병에 걸릴 지조차 알 수 없는 게 인간 아니겠어요. 그러다보니 생기는 게 편견이에요. 저 사람은 저런 행동을 하니 저럴거야, 라고 우리는 쉽게 타인을 재단하고 규정하고는 하죠. 그런 점에서 첫 장면은 의미심장해요. 차 안에서 바깥을 응시하는 시점으로 영화를 시작하는데요. 우리는 쉽게 그것이 데이비드의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데이비드의 딸 나디아가 집 밖으로 나서는 모습에 시선이 움직이기 때문인데요. 정확히 보면 그건 데이비드의 시선이 아니에요. 운전석에 앉은 데이비드라고 하기에 카메라는 좀 더 옆 좌석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이 시선은 좀 애매한 데가 있어요.  의도적인 장치이겠죠. 영화의 첫 장면만 봐서는 마치 젊은 여자를 스토킹하거나 해하려는 중년 남자처럼 보이니까요. 물론 선입견이죠. 오랫동안 딸을 만나지 못해 딸을 멀리서 지켜보는 아빠의 시선인 거니까요.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걸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 의도를 곡해해서 받아들이거나 퍼뜨리는 경우가 많아요. 100%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죠. 반이라도 이해를 할 수 있을까요. 미셸 프랑코가 담당한 <크로닉>의 시나리오는 그처럼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우리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 같은 것이겠죠.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애매한 시점숏은 한편으로 우리의 삶에 대한 운명의 시점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애매한 시점은 극 중 대상과의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확보하고 있는데요. 그 거리감에서 오해가 발생하고 삶의 역설과 모순이 생겨나는 것일 테죠. 호스피스가 환자를 돌보는 태도가 애매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동시에 그와 같은 거리감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영화 속 죽음에 대해, 호스피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거리감은 시점숏 뿐만 아니라 1.85:1의 화면과 미디엄 숏과 롱테이크로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아주 작지도(1.33:1) 그렇다고 와이드(2.35:1)하지도 않은 화면은 감독이 극 중 세계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대신 관객들이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의 공간을 남겨두죠. 미디엄 숏도 그래요. 인물에 가깝게 붙어서거나 반대로 멀찍이 떨어지지 않아 중립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끔 하죠. 이 영화는 94분의 상영시간 동안 단 97개의 컷으로 이뤄질 정도로 롱테이크가 빈번한데 극 중 인물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호도하지 않겠다는 의지로도 읽힙니다.

팀 로스가 연기한 호스피스는 여자 배역으로 정해져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처음에 미셸 프랑코의 할머니를 병간호했던 이가 ‘여자’ 간호사였다고 말한 거 기억하시죠. 이 영화를 구상하던 중 미셸 프랑코는 전작 <애프터 루시아>(2012)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정을 받았고 그때 심사위원장이 팀 로스였다고 해요. 미셸 프랑코의 영화 세계에 깊은 인상을 받은 팀 로스는 차기작에 대해 물었고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남자 배역으로 바뀐 거죠.

팀 로스의 데이비드 윌슨은 무척이나 적역의 캐스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데이비드는 극 중에서 전혀 관객이 예상할 수없는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갑니다. 환자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데이비드는 스스로 환자의 가족인 듯 행세를 해요. 그 때문에 그가 과연 속으로 어떤 생각을 숨기고 있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워요. 그와 같은 비밀스러운 캐릭터는 팀 로스의 연기를 규정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그는 쿠엔틴 타린티노의 <헤이트풀 8>(2015)에서 비밀을 간직한 8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을 연기했죠. <저수지의 개들>(1992)에서는 어떤가요. 강탈을 모의하기 위해 모였던 인물 중 경찰임을 속이고 일원에 합류했던 미스터 오렌지를 연기하기도 했습니다. 그 자신의 삶을 싹 지우고 환자를 위해 그 자신의 모든 걸 바치는 데이비드 역으로는 팀 로스가 딱이었던 거죠. 그는 이 영화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합니다. 아니 딸을 만나 죽은 아들을 기억할 때 딱 한 번 괴로운 모습을 비춥니다. 오히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우울한 표정으로 일관한다고 하면 되겠네요.

여기에 이 영화의 제목 ‘크로닉 Chronic’이 가진 의미가 있는데요. ‘만성적인’ 우울함에 빠져있다고 하면 되겠죠. 아들의 죽음으로 그는 평생을 만성적인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늘 죽음과 가까이 하는 데다가, 그렇죠 결국 영화 마지막에 죽게 되니까요. 또한, 우리 모두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고질병’과 같아서 죽음의 순간까지도 풀지 못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죽음이 삶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보세요. 극 중 데이비드의 가족은 아들의 죽음으로 삶이 예전과는 완전히 바뀌었잖아요. 딸은 오빠의 죽음을 접하면서 의과 대학에 갔을 거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죠. 데이비드와 아내는 그 때문에 이혼까지 한 상태입니다. 그런 죽음을 외면해서는 안되겠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껴안아야 하는 것이 죽음일 텐데요. 그래서 2015년 칸국제영화제는 죽음에 대한 우울한 성찰을 보여줬다는 평과 함께 <크로닉>에 각본상을 주었습니다.

 

<크로닉> GV
(2016.4.11)

[GV] <산하고인>

mountainsmaydepart

(* GV 준비를 위해 소리나는대로 쓴 글이라 오타와 잘못된 문장이 많습니다. 감안해서 읽어주세요. ^^;)

오프닝

지아장커의 영화치고 오프닝 좀 파격적이죠. 좀체 음악을 사용하지 않았던 전작과 달리 <산하고인>은 영화 시작과 함께 ‘펩 샵 보이즈’의 ‘Go West’가 흘러나옵니다. 이에 맞춰 일군의 젊은이들이 같은 율동에 맞춰 춤을 추죠. ‘가자! 서구로’ 우린 우리 길을 갈 거야/ 언젠가는 떠날거야/ 너의 손은 내 손을 잡고/ 우리의 꿈을 세울 거야  높이 날겠어/ 우리 친구들에게 작별을 할 거야/ 새롭게 인생을 시작할 거야/ 이것이 우리가 할 일이야

지아장커의 영화를 꾸준히 보아 온 관객이라면 ‘Go West’가 경쾌한 음악과 다르게 현대 중국 사회에 대한 우회적인 반영임을 알 수 있는데요. 지아장커는 빠르게 서구화되어 가는 중국 사회가 이로 인해 겪는 부작용을 개인의 기억과 경험에 녹여 영화로 만들고 있는데요. 아닌 게 아니라, ‘Go West’가 흘러나오는 이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한 번 비교해 보세요.

자오 타오가 연기한 션 타오가 첫 장면에서는 중국의 전통 대문이 인상적인 빌딩 내부에서 많은 사람들과 춤을 추지만, 마지막 장면에서는 개발을 위해 산수가 깎인 허허벌판 위에서 눈을 맞으며 외롭게 율동을 하고 있죠. 서구지향적인 삶과 경제개발에만 올인함으로써 돈과 출세 만이 최고의 가치가 된 중국인들의 삶과 정신은 화려한 경제 발전상과는 다르게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는 게 현실이죠.

‘Go West’는 영어 속어로는 ‘죽어라’를 의미한다고 하죠. 1990년대 들어서면서 급속도로 발전을 거듭한 중국의 정신은 ‘Go West’, 즉 ‘죽어가고 있’는 셈이죠. 그러니까, 음악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지아장커의 영화치고는 파격적인 오프닝이지만, 그의 사용법은 확실히 지아장커다운 면모가 있는 겁니다. 결국 <산하고인>은 여럿이 함께 춤을 추며 부르던 ‘Go West’를 왜, 아니 어떻게 혼자서 쓸쓸하게 춤을 추며 부르게 되었는지를 따라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지아장커는 이를 위해 <산하고인>을 1999년과 2014년, 그리고 2025년 세 파트로 나누어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압축해 놓은 듯한 이런 구성은 중국이 빠른 시일에 이룬 압축성장을 형식으로 옮겨 놓은 듯한 인상을 주죠. 첫 번째 파트가 1999년인 점도 흥미로워요. 1990년대는 말하자면 중국의 개방화에 따른 발전이 모색되던 시기인데 1990년대의 마지막 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선택이 이뤄졌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겠죠.

1999년의 이야기가 45분이 지난 뒤 2014년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에 비로소 이 영화의 제목 <산하고인>의 타이틀이 화면에 뜹니다. 1999년에 이뤄진 경제와 돈과 물질에로 기울어진 선택이 현재인 2014년과 미래인 2025년에 어떤 양상으로 벌어질지 곧 이어 펼쳐진다는 의미이겠죠.

1999년

<산하고인>은 지아장커가 자신의 청년 시절을 회고하며 만든 작품이라고 합니다. 중년의 나이에 들어서면서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를 돌아보게 되었다며 그 사이 중국의 급격한 경제적 성장과 함께 사람들이 감정을 대하는 방식이 바뀌었음을 영화에 담고 싶었다고 하네요. 이를 위해 지아장커는 1999년 부분을 자신의 고향 ‘펀양’에서 그의 청년 시절을 회상하며 촬영하였죠.

세 친구가 등장합니다. 리앙즈(양경동)와 진솅(장역)은 소위 말하는 ‘불알 친구’인데요. 둘 모두 마을에서 예쁘기로 소문난 타오(자오 타오)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리앙즈는 비록 가난하지만, 마음으로 타오를 대하는 것에 반해 진솅은 독일 자동차를 구입해 타오 앞에서 자랑하는 등 돈을 앞세워 그녀의 마음을 사려고 합니다. 리앙즈이냐, 진솅이냐, 선택의 기로에 선 타오의 입장은 곧 정신이냐, 물질이냐, 를 선택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산하고인>은 시기로 세 부분을 나누면서 화면비 또한 해당 시기에 맞춰 변화합니다. 1999년의 화면비는 1.33:1입니다. 마치 TV 화면을 보듯 좌우 폭이 좁아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화면비로 접근한 이유는 지아장커가 당시 상황을 담아 두었던 영상 라이브러리 소스를 활용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요. 다른 의미도 있어 보이는군요. 좌우가 좁다는 건 타오의 입장에서 보자면 첨단을 의미하는 진솅인지, 전통을 뜻하는 리앙즈인지 아직 선택을 하지 못해 모색중이라는 상황의 반영이기도 하겠죠.

대신 1999년 부분에서의 카메라는 좌우 움직임이 눈에 띕니다. 타오가 근무하는 전자대리점의 장면이 대표적인데요. 타오를 가운데 두고 우측에 리앙즈가, 좌측에 진솅이 위치해 있죠. 다만 화면 안에서의 인물들의 움직임은 다른 편인데요. 화면 안에 리앙즈가 위치하고 있는 것에 반해 진솅은 거침 없이 화면으로 들어오는 움직임을 자주 선보입니다. 그전까지 이어오던 전통적인 관계에 물질과 첨단을 상징하는 진솅이 폭력적으로 침입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겠죠.

어떻게 보면 1999년이라는 시기는 과도기입니다. 전통과 첨단이, 정신과 물질이, 동양과 서양 문화가 거칠게 충돌하는 시기였으니까요. 그에 맞춰, 지아장커는 사실적인 화면 위에 조악한 CG를 의도적으로 ‘욱여’ 넣습니다. 뒤로는 그림자처럼 옛 건물이 늘어선 가운데 그 앞으로는 공사가 한창인 땅 위를 걷고 있던 타오의 위로 갑자기 비행기가 출현해 그대로 땅에 급전직하 하는 것이죠.

싸구려 티가 팍팍 나는 비행기 폭발 CG 장면은 전통과 첨단이 충돌할 때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아직 발전이 이뤄지지 못한 당대의 상황을 티가 팍팍 나는 CG로 활용한 점이 흥미로워요. 게다가 추락하지 않았다면 낭만적이었을 비행기의 추락과 폭발은 타오가 중국의 전통과 정신을 지향하는 리앙즈가 아닌 돈과 물질에 경도된 진솅을 선택함으로써 생활을 풍요롭되 정신은 병든 나날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상징은 1999년 장면에서 꽤 많이 등장해요.

진솅이 독일 자동차를 몰아 ‘황허 9곡’ 비석을 들이 받는 장면, 그 뒤로 흐르는 물줄기는 동양의 정신과 전통의 자리를 빼앗은 서양의 첨단과 물질의 삶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이겠죠. 밤 하늘을 낭만적으로 밝혀주던 폭죽은 이제 산수를 파괴하는 폭탄의 무서움으로 돌변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갑작스럽게 이뤄진 변화라 부작용이 속출할 텐데요.

그것은 적정 무게를 넘어선 화물을 실어 시동을 거는 동시에 쓰러질 듯 위태로운 트럭의 이미지이기도 해요. 지아장커 감독은 타오를 진솅에게 뺐기고 일자리마저 잃어 평생을 살아온 고향 펀양을 떠나는 리앙즈의 장면을, 그리고 리앙즈와 결혼한 타오가 애를 낳는 장면을 트럭 장면을 전후해 편집하고 있습니다. 출산은 무언가를 낳는 의미인데 이 세 장면이 만들어내는 몽타주의 의미는 (마음의) 고향을 잃고 부유하게 될 이들 주인공의 앞으로의 운명을 암시합니다.

2014년

이제 영화는 15년을 훌쩍 건너 뛰어 2014년으로 옵니다. 1999년과는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지아장커가 먼저 주목하는 인물은 리앙즈죠. 리앙즈가 동물원 철창에 갇힌 호랑이를 바라보는 장면은 여러 모에서 쓸쓸합니다. 이는 현재 리앙즈가 처한 상황이자 중국의 현재이니까요. 호랑이와 같은 기개를 자랑하던 중국의 전통문화와 정신이 이제는 동물원에 갇힌 구경거리로 전락했죠. 그에 더해 리앙즈는 타오를 진솅에게, 더 정확히는 돈과 물질에 빼앗겨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습니다.

타오를 진솅에게 잃은 후 고향을 떠난 리앙즈는 다시 펀양으로 돌아옵니다. 금의환향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내와 딸이 곁에 있지만, 그는 현재 암에 걸려 죽을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다시 돌아온 고향도 1999년과는 많이 변모했죠. 자전거와 사람이 다니는 길은 좌우가 넓어졌지만, 자동차들이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습니다. 기차가 다니던 철로 위에는 고속철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그렇게 고향은, 펀양은, 중국은 너무나 빠르게 발전하며 외양을 바꾸었습니다.

사회가 빠르게 발전할수록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죠. 빠른 경제 발전은 경쟁적으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도태되는 이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요. 급속도의 경제 발전 시대의 경쟁력은 다름 아닌 돈. 그와 같은 미친 경쟁에서 살아남는 건 소수일 뿐 다수는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2014년 부분에는 소수에 속하는 진솅 같은 이는 등장하지 않죠. 진솅은 시골 같은 펀양을 떠나 대도시 상하이에서 아들과 함께 호주로 이민 갈 준비를 서두릅니다.

타오? 타오는 역시나 리앙즈처럼 고향에 돌아와 주유소를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었죠. 하지만 그녀는 혼자입니다. 왜 아니겠어요, 돈과 물질만이 전부인 진솅은 젊은 날의 타오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지내보니 겉만 번지를했을 뿐 정신은 말라 비틀어진 상태였겠죠. 타오는 자식까지 진솅에게 뺐긴 채 고향에 와 있는 상태입니다. 리앙즈처럼 시한부 인생은 아니지만, 내 배 아파 난 아이를 잃은 타오는 가정적으로는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 없죠. 게다가 타오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고령의 아버지마저 사망에 이릅니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은 도태된 이들을 결국 죽음에 몰아 넣었죠. 빌딩의 층수가 하나하나 높아질수록 그에 비례해 실제적으로, 상징적으로 죽는, 그러니까 지하에 묻히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1.33:1이었던 화면은 1999년에서 2014년으로 바뀌자 좌우 폭은 물론 상하까지 늘어난 듯 보이는 1.85:1로 바뀌었죠. 1.85:1의 화면은 그전까지 1.33:1에 익숙했던 관객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위압적으로 다가옵니다. 하늘 높이 올라가는 빌딩에 위압감을 느끼는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는 화면 비율이겠죠. (또한, 개발에 따른 발전상의 확장이기도 할 테고요.)

사람들은 그와 같은 발전 속도를 따라라기가 더딥니다. 2014년 부분에서의 카메라 움직임이나 편집의 속도도 1999년과는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느려졌죠. 카메라는 비추는 대상을 따라가기에 급급해 보이고 롱테이크 장면이 빈번해 편집점 역시 길어집니다. 진행이 느려졌다는 얘기죠. 그러다보니 분위기가 침울해요. 극 중 사람들은 아프죠. 사망하죠. 이를 어찌할 도리가 없는 남은 사람들은 무기력해지죠. 새로운 시대가 온 겁니다. 정신 시대에서 물질 시대로, 동양 정서의 시대에서 서양 물질의 시대로, 그야말로 ‘Go West’이죠.

타오의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타오의 아들이 상하이에서 펀양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옵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아들과 이를 아래에서 바라보는 타오의 모습에서 2014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지아장커의 의미가 느껴지죠. 심지어 타오 아들의 이름은 ‘달러 Dollar’입니다. 서양의 이름인 것도 모자라 의미는 ‘돈’이라뇨. 기가 찰 노릇입니다. 곧 아빠와 새 엄마를 따라 호주로 이민을 간다니 타오의 심정은 더욱 타들어 갑니다. 달러와 함께 있지만, 공동체라는 느낌은 들지 않죠. 몸만 중국인이지 정신은 서양식으로 개조된 달러에게 타오는 한편으로 위화감도 느낍니다. 타오는 더욱 외로울 수밖에 없죠. 그렇게 현대 중국인들은 개인화되고 파편화되면서 결국 부유하는 신세가 됩니다.

2025년

11년을 건너뛰어 2025년이 되었습니다. 지아장커가 묘사한 미래 배경이라. 전 결국 지아장커가 이를 위해 영화를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 면에서는 2025년 부분이 가장 뛰어났습다. 지아장커는 <산하고인>을 만들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네요. “중국은 1990년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룩했는데, 이런 비현실적인 경제환경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방식을 변하게 했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사랑보다 경제력을 선택했을 때의 결과를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의 10년 후 미래를 상상해 본다면, 그때의 우리는 지금의 일들을 어떻게 돌아보고 있을까? 또, 우리는 ‘자유’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2025년의 화면비는 1999년의 1.33:1과 2014년의 1.85:1과는 또 달라서 2.39:1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1.33:1의 화면비가 좌우가 잘린 형태이고 1.85:1이 상하가 돋보이는 비율이라면 2.39:1은 저에게는 금붕어가 헤엄치고 다니는 작은 수족관 형태로 보이던데요. 그래서 2.39:1의 화면 속에서 진행되는 2025년의 이야기는 잘 꾸며진 어항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어떤 목적도 없이 그저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부유한다는 것은 목적 없음, 곧 정체성 부재라는 의미이기도 할 텐데요. 2025년의 주인공은 2014년에 중국을 떠나 호주에 이민 온 달러(동자건)입니다. 겉보기에는 중국인처럼 보여도 달러는 호주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중국말은 거의 배우지도 않은 채 영어를 하며 살아가고 있죠. 대학에서 중국어 수업에 들어가 1996년에 호주로 이민 온 교수 미아(장애가)의 강의로 중국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때 교수는 별 의미를 두지 않았겠지만, 타오에게는 치명적인 질문을 하나 던지죠. “너희 어머니는 누구이니?”

타오는 기억이 없는 건지, 아니면 안 좋은 건지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아버지 진솅이 있지만, 아버지와 소통이 되지도 않습니다. 진솅이 중국어를 하면 구글 번역기를 통해 타오는 영어로 알아듣죠. 그래서는 부자 간의 속 깊은 대화가 될리 만무합니다. 게다가 부와 물질만을 추구해온 진솅의 인생이 긍정적인 미래를 맞이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늘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며 총기를 소지하고 다닐 정도인 거죠. 타오는 그런 아버지가 혐오스럽습니다.

독립을 하고 싶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습니다. 여전히 가족이 함께 해야 한다는 중국식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반대와 더불어 레스토랑에서 버는 알바비만으로는 독립이 어렵습니다. 누구 하나 기대고 싶은 구석이 없는 그에게 그나마 따뜻하게 대해주는 교수가 눈에 들어옵니다. 교수 또한 지금은 남편과 이혼한 상태인데요. 그러다보니 곁에 있어줄 누군가가 절실해집니다. 둘은 곧 애인 사이로 발전하지만, 그보다는 타오에게는 대체 엄마가, 교수에게는 대체 자식이 필요했던 것이겠죠.

결국 타오는 미아 교수와 함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중국에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둘을 모자 사이로 본 항공 카운터 직원의 오해에 기분이 나빠진 달러는 중국 여행을 포기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달러의, 이 둘의 정체성이겠죠. 이와 같은 정체성의 문제는 그대로 2025년의 미래를 묘사한 지아장커의 정체성으로 치환할 수 있겠죠. 2025년의 첫 장면 아마 공중자기열차와 같은 미래형 기자 혹은 지하철의 종류로 보이는데요. 그 창으로 보이는 미래적인 풍경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미래 배경의 묘사라고 보기에는 좀 허약하다, 라는 인상을 주는 거죠.

이에 대해서 좋은 평을 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할리우드 문법에 익숙한 관객에게 <산하고인>의 2025년은 빈약하기 그지 없죠. 근미래 혹은 SF의 정체성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있어 보여요. 이게 바로 핵심이겠죠. 2025년의 인물들은 정체성 때문에 고민합니다. 나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을까, 분주하게 찾아다니죠. 하지만 소득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2025년을 묘사하는 지아장커의 연출력도 1999년과 2014년 부분에 비해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찾기가 힘들어요. 그게 바로 의도였겠죠. 특징 없음. 곧 정체성 없음.

부유한다는 건 찾아다닌다는 것이기도 해요. 다만 한정된 공간에서 부유하고 있다보니 정말로 어항 속의 물고기들처럼 보이죠. 2.39:1의 화면비를 채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거예요. 정체성을 찾아 부지런히, 쉬지 않고 부유하는 중국인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죠. 지아장커는 타오를 주목합니다. 타오의 선택이 부른 결과이니까요. 리앙즈 대신 진솅은 선택한 것, 달러를 자신이 키우지 않고 양육권을 진솅에게 넘긴 것. 그로 인해 타오는 이제 ‘Go West’에 맞춰 혼자 춤을 춥니다. 그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이겠죠.

하지만 이것이 끝일까요. 그렇지 않을 거예요. 지아장커는 이런 인터뷰를 했습니다. “나는 50대의 ‘타오’가 그녀의 선택을 재고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산하고인>이 모자 상봉으로 끝나진 않았지만, 관객들은 ‘타오’와 아들 ‘달러’가 만나 서로에게 어떤 말을 할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지아장커 영화의 세계는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형태입니다. ‘Go West’ 서구로 향하는 중국의 정신은 계속 서쪽으로 향하다 보면 다시 중국으로 와 있겠죠. 타오는 지금 혼자 춤을 추고 있지만, 곧 그녀의 손을 잡아 함께 율동에 참여할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산하고인> GV
CGV 압구정
(2016.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