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 나의 ‘진짜’ 아버지는 누구인가?

“내가 너의 아버지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그 유명한 대사 “I’m your father”를 즉각적으로 떠올리실 테지만, 이 지면에서 다룰 내용은 이 장르와는 좀 다르다. 베일에 싸인 아버지의 정체 때문에 고뇌하거나 고민하는 슈퍼히어로에 관해 얘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스타워즈> 시리즈도 슈퍼히어로물이기는 하다.)

이 주제를 떠올린 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이하 ‘<가오갤 2>’)를 보면서다. 확실히 마블과 DC로 대표되는 슈퍼히어로물은 다양한 슈퍼히어로들로 개별성을 뽐내지만, 결과적으로 ‘아빠 찾아 삼만리’ 테마의 변주다.

<가오갤 2>는 좀 다를지 싶었다. 주로 지구를 활동 무대로 활약하는 슈퍼히어로들과 달리 ‘가오갤’ 멤버들은 우주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일 뿐 아니라 판타지 세계가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멤버 중 리더인 피터 제이슨 퀼스/스타로드(크리스 프랫)는 ‘워크맨’으로 주목 같은 1980년대 팝 넘버를 애청하며 미래 배경 속에 자연스럽게 과거를 끌어안는다.

물론, 피터가 애지중지하는 카세트테이프가 어머니의 유산이라는 사실이 복선이기는 했다. 그렇다면 피터 아버지의 생사는? 이에 대한 의문을 풀어줄 내용이 <가오갤 2>의 핵심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나 달라, 피터는 절체절명의 순간, 아버지와 상봉하게 된다. “I’m your dad, Peter” 근데 이 아버지의 정체가 좀 황당하다. ‘에고’(Ego)라는 이름의 ‘행성’(Planet)이다.

아시다시피, 피터는 외계 출신의 아버지와 지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계에서 온 슈퍼맨이나 지구에서 나고 자란 대부분의 슈퍼히어로와는 좀 다른 출생의 비밀 아닌 비밀이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그냥 외계의 존재도 아니고 행성이라니!

파격은 여기까지. 피터의 아버지는 알고 보니 사람 모양의 에고를 앞세워 은하계의 곳곳에 씨(?)를 뿌려댄 전력이 있다. 그리고 자신, 즉 행성을 이어받을 후계자를 하나하나 찾아 나서 적임자를 찾은 게 바로 피터다. 그러는 동안 고아 신세가 된 피터를 데려다 키운 건 다름 아닌 욘두(마이클 루커)이었다. 그러니까, 피터에게는 아버지가 두 명이다. 생물학적 아버지 에고와 실질적인 아버지 욘두다.

두 명의 아버지를 가진 슈퍼히어로는 피터 말고도 또 있다. 외계에서 온 슈퍼맨/클라크에게는 크립톤 행성에서 그를 낳아준 아버지 조엘과 지구에서 그를 기른 아버지 조너선 켄트가 있다. 배트맨은 또 어떤가. 조실부모한 브루스 웨인은 웨인 가문의 집사이자 대리 아버지인 알프레드의 보호 속에 성장할 수 있었다. 굳이 두 명의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피터 파커/스파이더맨은 실종된 부모 대신 삼촌 집에서 사는 처지고 토니 스타크/아이언맨은 아버지 하워드 스타크가 버키에 의해 살해된 사실을 나중에야 알고서야 경악한다.

많은 슈퍼히어로가 출생 배경과 관련해 혼란을 느끼는 설정은 미국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슈퍼히어로물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최전선에 선 오락물이면서 미국 역사의 트라우마를 읽을 수 있는 좋은 텍스트다. 세계 평화를 운운하며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은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물을 빌려 자신들의 힘을 과시한다.

그래서 이들 작품을 보고 있으면 위험한 총을 손에 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연상시킨다. 그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정체성은 자신들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한 주인공의 출생 배경과 연결된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미국은 개척정신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포장했다. 하지만 말이 신대륙이지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을 몰살하고 그 위에 제국(?)을 건설한 미국의 역사는 피와 폭력으로 출발한 셈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슈퍼히어로는 개척의 아버지와 폭력의 아버지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낮에는 평범한 인간으로, 밤에는 범상치 않은 가면을 쓰고 두 개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슈퍼히어로의 운명. 좀 다를까 싶었던 <가오갤 2> 또한, 질기디질긴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다. 몸은 미래 배경에 존재하지만, 정신은 1980년대에 묶여 있는 피터 제이슨 퀼스/스타로드는 그렇게 미국 역사가 품은 기원의 양면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VOGUE KOREA
(2017.5.4)

<언노운 걸> 타인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

‘형제’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감독들이 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의 루소 형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의 코언 형제, <매트릭스>(1999)의 워쇼스키 형제, 엇! 이들은 여자로 성 확정 수술을 받았으니 이제는 자매이지만, 어쨌든. 그리고 벨기에 출신의 다르덴 형제가 있다.

다르덴 형제는 누구?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형제의 <언노운 걸>(2016, 국내 개봉 2017년 5월 3일)은 2016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랐던 작품이다. 다르덴 형제는 칸영화제 경쟁부문의 단골손님(?)으로 유명하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칸영화제 초청을 받아 <언노운걸>을 포함해 7편의 영화가 연속해서 경쟁부문에 포함되었다. 칸영화제에서의 수상 경력은 더욱 화려하다.

<로제타>(1999)로 칸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을, <아들>(2002)로 남우주연상을, <더 차일드>(2005)로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로나의 침묵>(2008)으로 각본상을, <자전거 탄 소년>(2011)으로 심사위원 대상(박찬욱 감독이 2004년 <올드보이>로 받았던 바로 그 상!)을, <내일을 위한 시간>(2014)으로 에큐메니컬 상을 받는 등 세계 최고의 영화제로 군림하는 칸에서만 무려 7개의 상을 받은 명실상부 유럽, 아니 전 세계 최고의 영화감독이다.

대체 다르덴 형제가 어떤 영화를 만들기에 발표하는 작품마다 칸영화제가 주목하는 걸까. <내일을 위한 시간>으로 받은 애큐메니컬 상(Prize of the Ecumenical Jury)은 인간 존재를 깊이 있게 성찰하는 것은 물론 예술적 성취까지 이뤄야 받을 수 있다. 그렇다, 다르덴 형제는 이 사회의 가장 최하층에 있는 인물에 주목하고 그들의 삶에 눈높이를 맞춘 카메라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언노운 걸>의 제니(아델 에넬)는 입원 중인 원장 의사를 대신해 병원 업무를 맡고 있는 의사다. 인턴의 일 처리가 맘에 들지 않아 충고를 하던 중 벨이 울리지만, 제니는 업무가 끝났다는 이유로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다음날 병원으로 경찰들이 찾아온다. 인근에서 ‘신원미상’(The Unknown Girl)의 소녀 변사체가 발견되었는데 마지막 행적이 이 병원이라는 것. 자초지종을 살피던 중 제니는 어제 병원 벨 소리의 정체가 소녀이었음을 깨닫고 혼란에 빠진다.

목숨을 살리기 위해 의사가 된 제니는 자신의 행동 때문에 소녀가 살해된 것만 같아 마음이 괴롭다. 그렇다고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대신 속죄하는 마음으로 소녀의 이름을 찾기로 한다. 소녀가 최소한 익명으로 매장되기를 바라지 않는 제니는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쓴다. 주변을 수소문한 끝에 소녀가 어떤 이유에서 성매매를 하던 중이었고 그 대상자 중 한 명이 제니가 치료하는 환자와 연관이 있다는 걸 발견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엄밀히 말해 제니는 이 사건의 가해자는 아니다. 몰려오는 환자를 치료하느라 업무에 심신이 지쳐 안정을 취할 목적으로 정해진 진료 시간을 지켰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제니가 신원미상 소녀의 죽음에 죄의식을 느끼는 건 사회적인 약속의 범위가 포함하지 못하는 사각지대, 즉 마음의 문제가 걸리기 때문이다. 제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사건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괴로운 거겠죠.”이다.

이 사회에는 단순히 업무 시간을 지키는 것 이상의 가치가 요구될 때가 있다. 병원이라는 곳이 그렇다. 병원은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심각한 병을 예방하고 그럼으로써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역할의 공간이다. 인간은 약한 존재여서 병원처럼 치료와 치유의 공간이 없으면 살아가기 힘들다. 약자는 더 그렇다. <언노운 걸>의 죽은 그녀는 여자이고, 아이이고, 흑인이고, 난민이다. 도움이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인물이다. 그들에게는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까지도 도움이 절실하다.

의사는 그 누구보다 타인의 고통에 먼저 반응하고 동참해야 한다. 제니의 죄의식을 추동하는 건 이 부분이다. 그리고 이는 다르덴 형제 영화의 근간이기도 하다. 그동안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 등장했던 인물의 면면을 보면, 생계 곤란에 시달려 아이를 팔아야 하는 부부(<더 차일드>),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온 이주민(<로나의 침묵>), 아빠를 찾아 보육원을 탈출한 아이(<자전거 탄 소년>), 동료의 동의가 있어야 회사에 복직할 수 있는 노동자(<내일을 위한 시간>) 등 계급이라는 표현조차 사치스러울 정도로 고통을 겪고 있다.

이들의 사정을 외면한다고 죄가 되는 건 아니지만, 제니가 벨 소리를 외면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문제다. 굳이 죄의식이 아니더라도 연대의식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들이 처하게 될 최악의 상황을, 또는, 동일한 고통의 반복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다르덴 형제가 영화를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다. 그래서 다르덴 형제 영화의 카메라는 극 중 인물의 곁에 바싹 달라붙어 이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하고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게 하여 종국에 세상을 변화시킬 방법에 대해 고민하도록 한다.

그러니까,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일종의 <언노운 걸>의 도움이 절실한 소녀가 누른 ‘벨 소리’이다. 이에 대해 문을 열어줄지 말지를 판단하는 제니의 위치는 곧 우리가 맞닥뜨리게 될 상황인 셈이다. 실제로 생활이 너무 곤궁해 일자리 찾기에 전전하는 소녀를 다룬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는 개봉 후 벨기에 정부가 청년 고용을 의무화하고 십 대 노동자를 보호하는 ‘로제타 법’을 제정하도록 했다.

세상이 아무리 고도화되고 조직화되고 그 결과, 각박해지고 있더라도 타인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이유로 우리 모두에게는 책임감이 필요하다. 책임감은 타인을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타인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 또한, 주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간다는 의미다. 제니는 소녀의 죽음에 죄의식을 느끼고 최소한 그 소녀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걸 세상에 확인시켜주려고 이름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타인의 고통은 익명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만큼 세상은 병들었다. 병든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건 관심이라는 책임감이다. 다르덴 형제는 그와 같은 책임감에서 영화를 만들고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 있다. 그리고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형제, 아니 감독을 통틀어 최고의 연출자가 되었다.

 

KDI 나라경제
2017년 5월호

[GV] <나의 사랑, 그리스>

(GV를 위해 마구잡이로 적은 글이라 문장이 둔탁하고 맞춤법이 틀린 부분도 있을 거예요.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달콤한 제목을 인식하고 영화를 봤다가 깜짝 놀랐어요. 물론 사랑과 같은 감정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작품이지만, 그리스가 주는 아름다운 풍경과는 다른 그리스를 국가 부채 위기로 몰아넣은 상황이 전면에 나서는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원제는 ‘Worlds Apart’인데요. 한국 말로 풀자면, ‘크게 동떨어진’입니다. 무엇이 ‘크게 동떨어졌다’는 걸까요? <나의 사랑, 그리스>는 3개의 에피소드 형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각 장(part)마다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메랑’입니다. 여대생 다프네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괴한의 공격을 받습니다. 길을 지나던 중 파리스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다프네를 구해줍니다. 사실 파리스는 내전 중인 시리아를 탈출해 왔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다프네와 사랑에 빠지는데요. 아뿔싸, 다프네의 아버지 안토니는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다 이방인에게 화풀이를 하는 자경대원입니다.

두 번째는 ‘로세프트 50mg’입니다. 그리스 남자 지오르고는 우울증 약 로세프트가 없으면 평상심을 유지하기 힘듭니다. 부인과의 불화, 직장에서 해고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인데요. 우연히 스웨덴에서 온 엘리제를 만나 원나잇 스탠드를 하고 그녀에게서 위안을 얻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그녀는 지오르고가 소속된 회사에 파견되어 직원들의 상당수를 해고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세 번째는 ‘세컨드 찬스’입니다. 독일에서 그리스로 이주해 온 세바스찬은 마트에 갔다가 마리아의 도움으로 인연을 맺습니다. 60세를 훌쩍 넘긴 이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서로에게 호감을 느껴 데이트를 하기 시작합니다. 평생을 주부로 살아왔던 마리아는 세바스찬 덕에 낭만을 알게 되고 세바스찬은 평생을 홀로 지내다 마리아 덕에 사랑을 알아갑니다.

3개의 에피소드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없어 보입니다. 대신 공통점은 보여요. 각 에피소드에서 맺어지는 커플은 서로 국적이 다릅니다. ‘부메랑’의 다프네와 파리스는 각각 그리스와 시리아죠. ‘로세프트 50mg’의 지오르고와 엘리제는 각각 그리스와 스웨덴입니다. 그리고 ‘세컨드 찬스’의 60대 커플은 독일과 그리스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의도가 있어 보입니다.

<나의 사랑, 그리스>의 ‘로세프트 50mg’에서 지오르고를 연기한 크리스토퍼 파파칼리아티스는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기도 합니다. <나의 사랑, 그리스>가 두 번째 연출작인 그는 “그리스의 끔찍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매일 일상에 부딪히며 살아가는 그리스 인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안 그래도 그리스는 2000년대 들어서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게 되는데요. 과다한 사회복지비의 지출, 국가회계의 분식회계처리, 그리고 관광업에 의존하는 산업구조가 주요한 원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파생된 사회 문제 역시 만만치 않아서요. 실직하고 희망을 잃은 그리스인 중 일부는 파시스트가 되어 자신들의 절망감을 그리스로 유입된 이주민들을 향해 폭력적으로 휘두르고 있죠.

또한, 국가 부채 위기이다보니 그리스의 기업들은 도산에 이르게 되는데요. 타국에서 이들 기업을 매각하기 위해 직원을 파견하고 그래서 그리스인 직원들은 대량 해고 사태를 맞게 되죠. 그러면 사회의 가장 기본이랄 수 있는 가정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직장 잃은 남편은 방황해 그런 남편과 살아야 하는 아내는 맘이 편치 않아 그 영향이 자식에게까지 미칠 수밖에 없는데요.

지금 말씀드린 그리스의 위기 상황은 <나의 사랑, 그리스>의 각각의 에피소드의 배경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혼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리스인의 현실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서로 ‘크게 동떨어진’ 이들끼리 어떻게 하면 화해하고 협력하여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의도가 더 강해보입니다.

이에 대해 크리스토퍼 파파칼리아티스는 이런 얘기를 했죠. “사랑을 통해 현재 이 시대의 가장 뜨거운 문제, 특히 유럽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난민과 경제적 위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은 계속 변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과 가족이 될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 영화는 그것을 이야기한다.”

그처럼 이 영화는 가혹하고 혼란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죠. 사랑을 이어주는 방식이 흥미로운 건 그리스의 문제라고 해서 그리스 내부의 것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국가와 인종이 연계되는 방식으로 풀어간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사랑으로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건데요. 사실 3개의 에피소드는 각각 ‘크게 동떨어진’ 것 같아도 실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프네와 지오르고는 남매 사이이고, 이들의 엄마가 마리아입니다. 이들 가족은 각자가 처한 상황 때문에 하나로 융화되지 못하지만, 사랑의 힘을 믿는 이 영화의 마지막에는 결국 한 자리에 모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가족의 개념을 이렇게 작은 규모가 아닌 전 세계 규모로 가져가 하나로 엮는 시도를 보여주는데요. 바로 거기에 이 영화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들 가족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음에도 각 에피소드마다 <나의 사랑, 그리스>는 서로 연결하는 미장센을 극 속 이미지로 반영합니다. 각 에피소드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이미지 중 하나는 아마 그리스 정교회의 행진으로 보이는데요. 에피소드마다 등장하기 때문에 서로 동떨어진 에피소드를 모두 실로 꿰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종교라는 게 화합을 앞세우기 마련이잖아요. 사랑을 통해 서로 반목하고 거리를 두는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것 같죠.

각 에피소드의 배치 역시 정교하게 하나로 맞춰져 있는데요. ‘부메랑’이 청춘을, ‘로세프트 50mg’이 중년을, ‘세컨드 찬스’가 장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어 ‘하나의 생’이라는 틀을 마련하고 있죠. 게다가 <나의 사랑, 그리스>가 제시하는 이야기는 특수하기보다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스가 처한 국가 부도 위기는 그리스의 특수한 상황이면서 또한, 어느 나라도 그처럼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요. 그런 맥락에서 사람들은 과거에도 반목을 한 적이 있고 그런 위기의 상황들은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죠.

그렇다면 이런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랑이죠. 극 중 세바스찬이 영화를 시작할 때 이런 말을 합니다. “모든 것은 사랑으로부터 시작했다” 이 영화에서 묘사돼듯이 사람들이 서로 반목하고 싸우고 하는 것도 모두 사랑에서 비롯됐다는 얘기입니다. 해결책도 사랑이라는 의미가 되겠죠. <나의 사랑, 그리스>를 연출한 크리스토퍼 파파칼리아티스는 그리스 신화죠,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연으로 의미를 부여합니다.

프시케의 미모를 질투한 아프로디테는 아들 에로스로 하여금 프시케를 쫓아냅니다. 그러나 프시케를 본 에로스는 프시케의 외모에 흠뻑 빠져 그녀를 궁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밤이면 찾아와 프시케와 사랑을 나누죠. 단, 조건이 있습니다. 프시케에게 에로스 자신의 얼굴을 절대 보지 말라고 해요. 하지만 프시케는 에로스가 잠든 사이 초를 가지고와 그의 얼굴을 보고는 역시나 멋진 외모에 반하고 마는데요. 그때 촛농이 에로스에게 떨어지고 실망한 에로스는 프시케를 떠납니다. 절망에 빠진 프시케는 에로스를 찾아 지옥까지 간 끝에 다시 만나게 되는데요.

여기에는 사랑으로 비롯된 질투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역시나 사랑을 찾는, 극 중 세바스찬의 말처럼 사랑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는 바벨의 신화와도 맥을 같이 해서 사람들이 신에 가닿기 위해 하늘 높은 탑을 세우니까 신은 인간들에게 서로 다른 언어를 부여했는데요. 그럼에도 인간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면 바로 ‘사랑’ 때문일 거예요.

이를 위해 <나의 사랑, 그리스>는 의도적으로 다국적 캐스팅을 하고 있는데요. 다프네를 연기한 니키 바칼리, 지오르고를 연출한 크리스토퍼 파파칼리아티스, 마리아를 연기한 마리아 카보기아니 등 그리스 배우들과 함께 파리스를 연기한 이스라엘 출신의 타우픽 바롬, 엘리제를 연기한 헝가리 출신의 안드레아 오스바르트, 세바스찬을 연기한 J.K. 시몬즈 등이 바로 그러하죠.

배우들끼리 서로 태어난 나라와 언어가 달라도 크게 문제가 없는 건 더듬거리는 말일지라도 서로 얘기하다 보면 이해가 되고 무엇보다 감정은 보편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소통하는 데 큰 문제가 없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리스를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갈등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사랑이라는 걸 <나의 사랑, 그리스>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회의적인 분들도 계실 거예요. 다만, <나의 사랑, 그리스>에서 크리스토퍼 파파칼리아티스 감독이 전제하는 건 이 영화가 인용하는 에로스와 프시케의 신화가 나왔던 시절부터 그런 갈등과 반목은 있어왔고 그럼에도 세계가 여전히 존재하는 건 사랑을 통해 극복했기 때문이라는 메시지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실패가 끝이 아닌, 이를 딛고 일어서는 ‘세컨드 찬스’, 즉 두 번째 기회가 중요하다는 의미인데요.

그에 맞춰 이 영화는 에피소드 구성이기는 하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 에피소드는 희한하게 결말을 유예한 채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는 전개를 보여줍니다. 바로 세 번째 에피소드 ‘세컨드 찬스’에서 핵심을 이야기하겠다는 건데요. 각 에피소드의 화면 구성은 마치 사람들이 벽에 가려져 있는 듯 구획화되어 있습니다. ‘부메랑’에서는 지나가는 버스 사이에서 다프네와 파리스가, ’로세프트 50mg’에서는 회사 내 파티션으로 직원들이, ‘세컨드 찬스’에서는 슈퍼마켓의 진열대로 인물들이 구분되어 있는데 구획화된 곳을 나오는 것이 <나의 사랑, 그리스>에서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사랑을 나눌 때는 구획화된 답답한 곳을 나와 뻥 뚫린 공간에서 사랑을 나누는 경우가 많은데요. 물론 공개된 장소라고 해서 모두 안전하지는 않습니다.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거세게 내릴 때가 있는데요. 그럴 때는 몸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구획화된 공간이 아니라 사람의 온기가 살아있는 그런 곳 말이죠. 바로 집과 같은 곳이 그런 장소가 되어야 하는데요. 그러니까, 그리스 사회가 처한 문제로 인해 가정이 무너지는데 다시 가정이 바로 서는 것에서부터 그리스 사회를, 더 나아가 전 세계를 평화롭게 만들자는 의도이겠죠.

내부의 온기를 만드는 것은 사람 사이의 감정입니다. 감정은 인간이라는 존재 증명인데요. 사랑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도 있지만, 우울함과 슬픔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있습니다. 이 모든 건 결국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데요. 사실 각 에피소드에서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기계적인 업무 처리를 하거나 등등 그 장본인들도 실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맘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의 감정이 분노와 증오로 바뀐 걸 거에요. 그렇게 긍정적인 감정이 부정으로 바뀌듯 부정적인 감정도 긍정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보세요. 다프네의 아버지 안토니는 비록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딸의 죽음으로 인해 사랑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죠. 감정이 없어 보이는 엘리제는 원나잇 스탠드로 만난 지오르고와 만남을 거듭하면서 남다른 감정을 갖게 되고 결국 사적인 감정 때문에 그에 대한 해고 명령을 내릴 수없어 상사의 압박 속에 우울증에 시달린 끝에 지오르고에 대한 그리움으로 살아갑니다. 결국 사랑으로부터 시작해 사랑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요.

바로 그런 메시지가 통해서 이 영화는 그리스에서 2015~2016년 시즌에 가장 흥행한 작품이 되었는데요. 이는 당시 그리스에서 함께 개봉했던 <스타워즈: 꺠어난 포스>와 <007 스펙터>를 뛰어넘는 기록이라고 합니다.

 

GV <나의 사랑, 그리스>
압구정 CGV
(2017.4.12)

<분노> 분노의 기원을 찾아서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이 코너명인 ‘신나는’과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제목부터가, 무시무시해라, <분노>다. 그에 걸맞게 영화의 시작 배경 또한, 평범한 부부가 무참히 살해된 현장이다. 이런 영화를 신나게 볼 수 있다면 변태 같겠지만, 어떻게든 연결해 설명할까 한다.

원인인가, 결과인가 

문제의 살해 현장에 남은 단서는 단 하나. 벽에 피로 쓰인 ‘분노 怒’라는 글자다. 그리고 영화는 1년을 건너뛴 시점에서 세 개의 에피소드를 오가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요헤이(와타나베 켄)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던 딸 아이코(미야자키 아오이)를 치바의 집으로 데려온다. 타시로(마츠야마 켄이치)는 요헤이의 밑에서 아르바이트로 항구 일을 하고 있는데 아이코와 사랑에 빠진다.

도쿄의 샐러리맨 유마(츠마부키 사토시)는 클럽파티를 즐기다 처음 보는 나오토(아야노 고)와 하룻밤을 보낸다. 별 연고가 없는 나오토를 집에 데려온 온 유마는 함께 동거하며 사랑을 나눈다. 오키나와로 이사를 한 중학생 이즈미(히로세 스즈)는 새로 사귄 친구 타츠야(사쿠모토 타카라)와 무인도를 구경하러 간다. 그곳에서 혼자 배낭여행 중인 청년 타나카(모리야마 미라이)를 만나 친구가 된다. 하지만, 타나카가 무엇을 하고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배경이 서로 다른 세 개의 에피소드는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한 살인 사건을 매개로 연결이 된다. 세 개의 에피소드는 겉으로 이어져 있지 않지만, 몇 가지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타시로와 타츠야와 타나카는 모두 외지인이고 이름도 비슷한 데다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한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의심받는다. 그러니까, 이 세 명 중의 한 명이 범인인 셈이다.

그렇다면 <분노>는 살인사건의 가해자를 찾는 이야기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범인 찾기가 유일한 목적인 영화는 아니다. 제목의 ‘분노’가 어디서 혹은 어떻게 기인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다. 재일동포 출신으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이상일 감독(<훌라걸스> 등)은 그 전에도 비슷한 소재로 <악인>(2010)을 만든 적이 있다. <분노>와 같이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이 원작인 <악인>은 살인 사건을 다루되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악인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묘사한다.

이상일 감독의 전작 <악인>을 상기한다면 <분노> 또한, 어느 한 명의 가해자를 발본색원하여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구조가 아님을 파악할 수 있다. 왜 그와 같은 살인 사건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파고드는 <분노>는 믿음과 불신의 동전 양면을 오가며 분노의 메커니즘을 파헤친다. 에피소드별 사랑하는 관계를 중심에 두면서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는 심리적 상황을 첨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에 있어 둘의 관계는 완벽한 구도이지만, 그 사이에 누군가 개입하면 사랑 이외의 감정이 난무하는 상황이 펼쳐지고는 한다. 요헤이는 타시로의 지난 행적이 불분명하여 딸 아이코가 불행해지지는 않을까 마음에 걸린다. 엄마가 오랫동안 병원에서 요양 중인 유마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언제 끊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오토와의 사랑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다. 타츠야는 정체불명의 타나카와 어울리는 이즈미를 불안한 눈길로 바라본다.

그에 따르는 선택은 온전히 개인의 문제로 환원된다. 영화는 이런 상황에서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약한 고리를 주목하여 이야기의 핵심으로 삼는다. 극 중 대사를 빌려 말하자면, “네가 어떻게 말하던 받아들이는 건 나의 몫이다.” 문제는 그 선택이 최악으로 몰릴 때다.

믿음이냐, 의심이냐

모든 에피소드의 커플 관계가 무르익을 때쯤 경찰은 살인 사건 용의자의 구체적인 인상을 언론을 통해 공개한다. 용의자의 생김새를 보니 눈매는 타시로를, 얼굴의 점은 나오토를, 전체적인 인상은 타나카와 닮았다. 이를 본 요헤이 부녀와 유마와 타츠야의 반응은 당연히 한결같아서 일단 사실을 부정하는 가운데 한편으로 실제 살인자이면 어떡할까, 고민을 숨길 수가 없다.

상대에 대한 불신은 자기 내면에 침전해 있는 불안감의 거울상이기도 하다. 예컨대, 가출을 밥 먹듯 하며 유흥업소에서 일했던 딸의 행각에 여전히 마음고생이 심한 요헤이는 아이코의 불행을 전제하며 사는 듯한 인상을 준다. 아이코가 과연 번듯한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딸이 좋아하는 타시로도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요헤이는 아이코 몰래 타시로의 뒷조사를 해보니 이름을 바꿔가며 떠도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 마침 우연히 보게 되는 살인 사건 용의자의 인상착의. 아버지는 타시로가 바로 그 살인자가 아닐까 강하게 의심을 한다.

가까운 사이에 형성되는 믿음은 굳건한 것 같아도 실은 살얼음 못지않아서 의문이라는 감정이 무겁게 발을 디딛는 순간 깨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말로는 믿음을 연발하고 거기에 기대어 살아가려 해도 이는 역으로 그 믿음이 얼마나 얄팍한지를 드러내는 자기 부정과 같은 것이다. 가족이나 연인과 같은 가까운 사이에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이를 견디기 힘들어 상처받고 도망치는 패턴을 반복한다. 적어도 이 영화 속 아이코와 유마의 경우가 그러한데 이들은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스스로를 경멸하고 이를 분노의 감정으로 전이해 자신은 물론 주변까지 파괴한다.

이 영화는 ‘분노’의 기원을 믿음과 불신 사이에 피어나는 의심에서 찾는다. 에피소드마다 배경이 다르고 등장하는 인물이 많은 것, 이는 <분노>가 다루는 분개하여 크게 화를 내는 감정이 특정인의 것이 아닌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사항임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말한다는 건 쉽지 않다. 분명한 건 믿음의 회복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될 때 웃고 떠들며 즐길 수 있는 ‘신나는’ 것들을 도모할 수 있다. 그렇다. 내가 ‘신나는 씨네’ 코너에 전혀 신나지 않은 영화 <분노>를 신나게(?) 떠들어대며 선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KDI 나라경제
‘신나는 씨네’
2016년 4월호

[GV] <나의 딸, 나의 누나>

(언제나처럼 말로 하기 위해 생각나는대로 쓴 글이라 문장들이 거칠어요. 감안 부탁드리고 또 하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나리오 작가로 더 유명한 토마 비더갱은 고전적인 이야기를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죠. 그의 각본 데뷔작 <예언자>는 할리우드 장르물로 인식이 되는 감옥영화를 프랑스 감옥물의 전통과 혼합해 자크 오디아르 감독에게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선사했죠. 그런 인연이 하드보일드한 이야기를 다룬 <러스트 앤 본>과 <디판>까지 이어졌죠.  <디판>에서는 프랑스 사회에 유입된 인도인 난민이 어떻게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져가는지 현실 비판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와 다르게 <미라클 벨리에> 같은 경우는 말을 하지 못하는 부부의 딸이 뛰어난 음악성을 가지고 성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토마 비더갱은 장르를 가리는 작가는 아니지만, 고전적인 장르와 보편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죠.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그런 비더갱을 일러 ‘그림자 사나이 the man in the shadow’라고 헤드라인에 적시했는데요. 영화의 전면에 나서지 않지만, 영화의 세계관을 완성한 작가라는 의미이겠죠.

그림자 사니아 토마 비더갱은 이제 <나의 딸, 나의 누나>로 전면에 나섭니다. 그의 첫 감독 연출작이죠. 토마 비더갱 감독은 동료 시나리오 작가인 로랑 아비톨에게서 우연히 프랑스의 컨트리 웨스턴 축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나의 딸, 나의 누나>의 이야기의 시작이었다고 말합니다. 축제에서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가족의 모습을 떠올린 토마 비더갱 감독과 어느 한 사건을 겪으면서 성숙해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이는 딸의 실종을 계기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아버지와 아들의 여정을 다룬 이야기로 탄생했습니다.

가족 드라마이지만, 이 영화에서 진하게 느껴지는 장르는 서부극, 더 정확히는 존 포드의 <수색자>입니다. 실제로 토마 비더갱 감독은 <나의 딸, 나의 누나>를 만드는 데 있어 <수색자>를 참조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수색자>는 수정주의 서부극으로 유명하죠. 남북전쟁을 마치고 몇 년 후 집으로 돌아온 이든(존 웨인)은 가족과의 행복을 느낄 짬도 없이 인디언 원주민 코만치족에게 조카 데비를 납치당하고 말죠. 이후 이든은 또 다른 조카 마틴과 함께 그녀를 찾아나섭니다.

<수색자>의 이든과 마틴의 관계는 <나의 딸, 나의 누나>의 아버지 알랭(프랑수아 다미안)과 아들 키드(피네건 올드필드)를 연상시키죠. 알랭과 키드가 각각 ‘나의 딸’과 ‘나의 누나’인 켈리를 찾고 싶은 마음은 동일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는데요. 이는 토마 비더갱 감독이 인물을 통해 각 세대의 정체성을 반영하기 위한 의도를 드러낸 것인데요. 알랭은 딸 켈리가 지하드스트에게 잡혀감으로써 그녀가 성적으로, 인종적으로 더렵혀지지는 않았을까, 걱정하는 것이 역력해 보여요. 그의 과격함은 역으로 알랭이 공포와 증오에 빠져있다는 것을 보여주죠.

반면 키드는 누이 켈리를 찾는 여정을 포기하지 않지만, 아버지와는 좀 다른 대처를 보여주죠. 인종이나 문화에 상관 없이 순수하게 누나를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과격한 아버지가 키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거부감이 드는 거죠. 아버지 세대가 <나의 딸, 나의 누나>에서 보여주는 이슬람 문화권에 대해 적대적이라면, 아들 세대인 키드는 적당하게 거리를 둔 채 인정하는 뉘앙스를 풍기죠. 누나를 데려간 이의 본거지를 찾아 침입했다가 함께 프랑스로 돌아온 이슬람 여성과 가정을 이루는 영화의 결말이 이를 보여주고 있죠.

<수색자>가 서부극 가운데서도 미국의 개척정신을 찬양하는 장르가 아닌 인디언에 대한 미국 백인의 불안을 드러낸 ‘수정주의 서부극’으로 각광받은 이유를 <나의 딸, 나의 누나>가 그대로 이어받고 있죠. <나의 딸, 나의 누나>의 알랭처럼 <수색자>의 이든은 과격한 인종주의자입니다. 심지어 그는 조카 데비가 코만치족에게 잡혀가 인디언처럼 변한 모습을 보고 그녀를 단죄하려고 합니다. 백인과 인디언의 결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죠. 그런 태도는 영화에서 일종의 상징적인 단죄를 받습니다.

<수색자>의 유명한 장면이죠. 데비를 구한 이든과 마틴이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틴은 가족의 품이라는 집으로 들어가지만, 이든은 문턱을 넘지 못하고 다시 서부의 어딘가로 떠나죠. 서부 사나이는 그렇게 쓸쓸히 퇴장할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처럼 <나의 딸, 나의 누나>의 아버지 알랭도 단죄를 당합니다. 딸을 찾지 못한 분을 삭이지 못하고 과격하게 운전을 하던 중 차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죠. 이 장면에서 차가 전복되는 장면은 흡사 서부극의 말이 격렬한 전투 속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지는 광경을 연상케 합니다.

사실 알랭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딸이 사라졌죠, 딸을 찾는 과정에서 아내와 이혼했죠, 가족이라고는 아들만 남았는데 키드는 딸을 찾기 위해 집착하는 아버지에 저항을 합니다. 정보를 입수한 아버지가 함께 가자고 하자 “NO!” 싫다고 거부감을 드러내죠.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이상을 꿈꾸며 타인과 타문화에 적대적이었던 아버지는, 더 정확히는 그 세대의 태도는 키드 세대에게는 구시대의 산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드는 의문이 있죠. <나의 딸, 나의 누나>는 왜 프랑스 사회의 이야기를 하면서 미국의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서부극을 끌어오는 것일까요. 그에 대한 힌트는 이 영화 중간중간 언급이 되는데요. 알랭과 키드가 켈리를 찾는 여정 속에 TV 화면을 통해 9.11 사건을 노출하고 있죠. <나의 딸, 나의 누나>가 배경으로 삼는 건 서양권과 이슬람 문화권의 대립이죠. 그의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9.11이고요. 9.11 이후 미국은 이에 대한 복수로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공격에 나서는데요. 미국처럼 프랑스 역시도 이슬람 문화권과 난민 문제를 비롯해 갈등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죠. 서양권과 이슬람권의 대립에 대해서 프랑스는 미국과 다름 없는 상황이었던 건데요. 이에 토마 비더갱 감독은 미국의 장르인 서부극으로 프랑스의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한국 개봉명과 달리 원제가 <카우보이 Les Cowboy>인 이유가 있죠.

세대별 역사에 대응하는 방식과 감정을 서부극의 장르로 우회하는 <나의 딸, 나의 누나>는 한편으로 타인과 타문화에 대한 관계 맺기의 변화를 가족 드라마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한데요. 알랭 가족이 켈리의 실종으로 드러내는 삶의 방식은 두 가지죠. 알랭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심지어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딸을 찾는다면, 키드는 그 와중에도 타인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알랭을 잡는 카메라는 대개 그를 단독으로 잡는 경우가 많다면, 키드는 UN 구호단체에서 사귀는 여자 친구, 그곳에서 만나는 미국인(존 C. 라일리) 등 누군가 함께 하는 과정 속에 누나를 찾아나서는 장면이 빈번하죠.

알랭의 아내이자 키드의 엄마 역할도 중요합니다. 그녀의 태도는 키드와 거의 흡사한데요. 알랭이 딸을 찾아나서느라 집을 돌보자 않자 이혼을 하고 새로운 남자 친구를 만들죠. 남자 친구는 알랭처럼 프랑스인이지만, 존재감이 거의 없습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알랭처럼 그 자신의 가치와 태도를 강요하지 않는 것업니다. 그러니 알랭과 다르게 타인종과의 결합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거죠. 엄마 또한, 아들 키드가 이슬람 문화권의 여인, 심지어 딸을 납치한 이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떠한 증오와 분노 없이 가족처럼 맞이해 줍니다. 이들의 태도에 이 세계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가 있는 것이겠죠. 바로 새로운 신화가 필요한 셈입니다.

새로운 신화는 과거처럼 자신들의 공동체만 보수적으로 지키는 가족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겠죠. 새로운 국가 건립, 즉 신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정이 필요합니다. 여행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요. <나의 딸, 나의 누나>는 아버지 알랭과 아들 키드로 이어지는 시간의 여정과 프랑스에서 시작해 파키스탄까지 가는 공간의 여정으로 신화를 구축하는데요. 이에 대한 토마 비더갱 감독의 말을 들어볼까요.

“우리가 <나의 딸, 나의 누나>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어느 누구도 지하드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지하드는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이 영화에서처럼 프랑스인이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미국인처럼 구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베일이 상징처럼 된 이들도 함께 존재한다. 이게 지금 세계의 풍경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프랑스의 가족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더 나아가 새로운 나라로의 여정을 통해 베일을 쓴 여인을 만나고 가족을 구성하는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계다.”

 

<나의 딸, 나의 누나> GV
CGV 명동 씨네라이브러리
(2017.3.22)

<토니 에드만> 등만 보면 흐르는 눈물의 정체

많은 이가 그러하듯 나 또한 아버지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다. 아예 안 보고 싶을 때가 많은데 뭐라 설명하기가 쉽지 않네, 한 마디로 애증의 관계다. 돈을 번답시고 밖으로 나돌며 가족을 돌보지 않았던 그의 과거를 지금도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사실 그 하나 때문에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처지다. 얼굴을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과 다르게 등을 보고 있으면 희한하게 눈물이 쏟아진다. 도대체 왜?

<토니 에드만>이라는 영화가 있다. 전 세계 유수의 영화잡지가 선정하는 2016년 올해의 영화 목록에서 상위권을 놓치지 않은 작품이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어 국제비평가협회 상을 수상했고 올해 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어영화상 부문 후보에도 오를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독일 출신의 여성 감독 마렌 아데가 연출했는데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녀의 자전적 경험을 영화에 반영했다.

그러니 주인공은 사이가 좋은 않은 부녀로 설정되어 있다. 아버지 빈프리트(페테르 시모니슈에크)는 딸은 물론 부인과도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는지 혼자 산다. 근데 혼자 사는 척을 하지 않는다. 누가 찾아오면 가발과 가짜 치아로 외모를 변신해 ‘토니 에드만’으로 행세한다. 혼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다.

딸 이네스(산드라 휠러)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일을 앞두고 오랜만에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가 판다 화장을 하고 나타나니, 기가 찰 노릇이다. 뭐 오늘 하루뿐인데 겉으로는 별문제 없는 척 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저 먼 루마니아의 회사 업무에 복귀한다. 그런데 웬걸, 아버지가 독일에서 회사에까지 찾아와 생일 선물을 챙겨주는 것도 모자라 관계를 개선해보겠다며 변장을 하고 장난을 쳐온다. 이네스 왈, 아버찌 쫌!

부녀의 이야기임에도 나는 이네스에게 감정 이입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토니 에드만>을 봤다. 그녀와 아버지의 관계가 남 일 같지 않아서였을 테다. 특히 아버지가 연락도 없이 숙소로, 회사로 찾아와 이네스의 상사와 동료와 친구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황당한 변장으로 딸에게 다가가려는 시도가 일종의 폭력으로 보여 불편했다. 내가 이 정도인데 당사자인 이네스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감정이 폭발한 이네스는 딸의 상황에는 개의치 않고 화해라는 선의를 앞세워 일방적으로 다가오는 아버지에게 쌓였던 불만을 쏟아낸다. 그러면서 독일의 집으로 돌아가 달라 부탁하는 딸의 주문에 아버지는 고개를 떨군 채 얘기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울컥했다. 그 상황의 결말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세상이 끝난 듯한 발걸음으로 떠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네스는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현대의 가족 관계는 이렇듯 복잡 미묘하다. 부모와 자식 사이처럼 가족의 갈등 관계는 단순히 가족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갈등의 우물을 깊게 파고 들어가면 그 수원지에는 가족 구성원 각 세대가 처한 환경과 지나온 역사와 그로 인해 확립된 입장 등 다양한 물줄기가 충돌하며 파문을 일으킨다. 같은 사안이라도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얘기다.

나의 경우, 만나기만 하면 돈 문제로 충돌하는 친척과의 관계 지속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럴 시간에 글이라도 한 줄 쓰고, 영화라도 한 편 더 보는 게 정신 건강에 유익하다고 믿는다. 아버지는 그럼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을 통과한 아버지는 힘든 일을 겪게 되면 결국 기대는 언덕은 가족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친척의 대소사에 관심을 거두지 않는 아버지를 나는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빈프리트와 이네스 부녀도 다르지 않다. 아버지 빈프리트는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경험한 세대다. 인간관계로 파생되는 가치가 너무나 소중하다. 변장을 동원해 가면서까지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하다. 이네스는 다르다. 기업에서 오래 근무한 탓인지 동료를 밟고 넘어야 내가 살 수 있다. 그녀는 회사에 나갈 때면 늘 사회적 가면을 쓰고는 한다.

이 둘이 타인과 맺는 관계의 방법은 기본적으로 같다. 다만 아버지는 친근하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으로, 딸은 일과 생활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가면을 쓴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들이 계속해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면으로 마주해서는 차이만 확인할 뿐이다. 그래서일 거다. 변장하지 않고, 사회적 가면도 쓰지 않은 뒷모습에서 진심을 읽는다. 흰머리가 잔뜩 내려앉은 뒤통수와 축 처진 어깨와 굽은 등은 부모가 자식 때문에 겪은 수난의 세월을 말없이 웅변한다.

피로 맺은 관계일지라도 그사이에는 엄연히 차이가 존재한다. 그건 설득으로 좁힐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이기고 지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를 넘어 인간관계가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뜻밖에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차이를 인정하면 된다. 물론 쉽지 않다. 그럴 때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예컨대, <토니 에드만>과 같은 영화를 함께 나란히 앉아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싶다. 영화의 마지막, 아버지와 딸의 극적인 포옹이 제공하는 감동이 제법 크다. 아버지 <토니 에드만> 같이 보실래요?

 

ARENA
2017년 4월호

 

Goodbye Hugh Jackman, Farewell My Rogan!

<로건>은 휴 잭맨이 울버린/로건으로 출연하는 9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출연작이다. 휴 잭맨에게나 <울버린> 시리즈에서나 남다른 작품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 레이어가 다양한 <로건>은 단순히 슈퍼히어로물로만 접근하기에는 아까운 영화다. 네 가지 관점에서 <로건>을 읽어본다.

Last Man Stand
등장부터 충격이다. 하얀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얼굴에 주름살은 자글자글, 수염은 덥수룩, 다리까지 절룩이는 로건은 옷깃만 스쳐도 으르렁거리던 예전의 울버린이 아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영화는 그에 대한 설명을 의도적으로 빠뜨린다. 단 하나. 죽을 날이 머지않았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하게 제시한다. 어떻게?

로건은 울버린의 정체를 숨긴 채 텍사스 엘 파소와 멕시코 국경을 넘나드는 운전사다. 차종은 2029년형 블랙 리무진. 어딘가 모르게 장의차를 닮았다. 시체를 넣은 관이 실린 건 아니지만, 검은 양복과 넥타이의 로건은 관객에게 곧 죽을 것임을 암시한다. 클로와 힐링팩터로 영원히 목숨을 부지할 것만 같았던 로건은 <용서받지 못한 자>(1992)의 병들고 지친 총잡이 빌 머니(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로건>은 서부를 주요 배경으로 슈퍼히어로 장르를 이식해 ‘퇴장’의 테마를 펼쳐간다.

Western Movie
<로건>을 연출한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서부극 <3:10 투 유마>(2007)를 연출한 경력이 있다. 서부극에 대한 노골적인 힌트는 <로건>에서 세 번이나 인용되는 영화 <셰인>(1953)이다. 특히 <셰인>의 마지막 장면, 떠나려는 자신을 잡는 아이에게 셰인(앨런 래드)은 이렇게 얘기한다. “난 가야 해. 사람은 한 번 살인을 저지르면 다신 돌이킬 수 없단다.”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떠나야 하는 건 서부 사나이의 운명이다. 로건도 방황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엑스맨 탄생: 울버린>(2009)에서 소개됐듯 친부를 죽인 로건은 그래서 머물 곳이 없다.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며 사건에 휘말리고 이를 해결하는 그는 슈퍼히어로의 서부 사나이 같은 존재다. 또한, 소수자 슈퍼히어로의 신화를 쓴 인물이다. 서부는 신화의 공간이다. 신화는 전승되는 법이다. 로건의 퇴장은 곧 새로운 슈퍼히어로의 등장을 의미한다. 이 영화에 언급되는 <셰인>에서 아이가 셰인을 붙잡듯 희망의 끈을 놓으려는 로건의 눈에 돌연변이 소녀 로라(다프네 킨)가 눈에 들어온다.

Welcome to Laura
<엑스맨> 시리즈의 울버린 캐릭터를 창조한 브라이언 싱어(<엑스맨: 아포칼립스> 등)는 차기 울버린에 대해 여자가 될 것이라고 인터뷰한 바 있다. 과연 <로건>에 등장하는 로라는 이름의 유사성처럼 울버린의 클로와 힐링팩터를 갖춘 여자 돌연변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로건이 특유의 능력을 타고 난 것에 반해 로라는 돌연변이 DNA를 활용한 실험으로 태어났다는 것. 즉, 로라는 애초 인간병기로 양성되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실험실을 탈출해 미국 북부에 위치한 일명 ‘에덴’으로 향한다.

에덴에는 로라를 비롯해 특출한 능력을 갖춘 아이들이 숨어 있다. 이들의 구성은 흥미롭게도 여자와 흑인과 아시아인과 스페인계 등 소수자다. 이들은 사이보그 용병 집단의 추격을 따돌리고 소수자를 향한 억압이 도를 넘은 미국을 떠나 캐나다로 넘어가려 한다. 하지만 아직 어려서인지 힘과 세력이 달리는 이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바로 로건이다. 로건은 과거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북전쟁을 통해 흑인 노예를 해방했듯이 소수자 아이들을 백인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지키려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짠다.

Donald Trump
로건을 링컨에 비유한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로건은 로라를 쫓는 용병들의 추격을 피해 찰스 자비에(패트릭 스튜어트)와 함께 북쪽으로 이동하던 중 어느 흑인 가족 집에 머물게 된다. 그 집의 아들 방에는 미합중국 16대 대통령 링컨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로건>의 극 중 배경은 2040년대다. 링컨의 초상화로 추측하건대 미래의 미국은 백인 남성을 제외한 소수자에게, 특히 유색인종에게 힘겨운 시기다. 또 다른 남북전쟁으로 보이는 이유는 역시나 소수자로 구성된 로건과 로라와 찰스 자비에가 은신하던 미국 남쪽 텍사스 엘 파소를 떠나 자유를 찾으러 북쪽으로 향하는 까닭이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을 전후해 벌어지는 미국 사회의 특정한 풍경과 무척이나 닮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 전부터 미국과 멕시코 국경 사이 장벽을 설치해 불법 이민자를 막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강한 (백인의) 미국을 외치는 트럼프는 이와 같은 조치를 통해 다양성 억압에 대한 의지를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안 그래도 <로건>의 원작 코믹북으로 알려진 <울버린: 올드맨 로건>의 배경은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원작의 배경을 미국 남부 텍사스 엘 파소로 옮겨 트럼프 시대를 예견했다. 로건의 시대는 그렇게 트럼프의 출현과 함께 막을 내린다.

 

GQ KOREA
(2017.3.2)

<로건> 트럼프 시대의 슈퍼히어로가 살아가는 법

슈퍼히어로물은 미국의 현실을 첨예하게 반영하는 장르다. 슈퍼히어로가 등장해 나쁜 놈들을 처단하고 세계평화를 실현하는 이야기는 ‘옛날 옛적’이 된 지 오래다. 세계 경찰을 자처하던 미국이 정의 구현과는 먼나라가 된 까닭이다. 지금 미국 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트럼프의 반(反)이민 정책이다.

반이민 정책은 미국에 테러 위협을 가할 수 있는 무슬림 7개 국가를 지정해 미국 비자 발급과 입국을 최소 90일간 정지하고, 난민입국프로그램을 120일간 중단하도록 한 조치다. 미국이 이민자들에 의해 건설되고 다양성으로 지탱해온 것을 고려하면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충격적인 조치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슈퍼히어로의 위상 역시 변화할 수밖에 없다. 특히 다양성의 가치를 훼손하는 트럼프 시대에 가장 고통받을 슈퍼히어로라면 단연 ‘엑스맨’이다. 엑스맨들은 능력이 남 다르다는 이유로 돌연변이 취급을 받으며 주류에서 배척당한 채 소수자로서 힘든 삶을 유지한다.

<로건>은 그와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울버린, 즉 로건(휴 잭맨)의 최후를 다룬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20년 후. 평생 건장하고 건강할 것만 같던 로건도 늙었다. 머리는 새치 천지이고 수염은 덥수룩한 게 날카로운 맛이 사라졌다. 얼굴에 주름살은 왜 또 그리 많은지 곧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몰골이다.

멕시코와 국경을 맞닿은 텍사스 엘 파소의 버려진 석유 창고에서 은신하던 로건은 돌연변이 소녀 로라(다프네 킨)를 만난다. 함께 숨어지내던 찰스 자비에(패트릭 스튜어트)는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며 로라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로건을 다그친다. 그렇게 옥신각신 하던 중 정체불명의 집단이 찾아오면서 로건과 자비에와 로라는 이들을 피해 도주한다.

<로건>의 포스터 중 나의 눈길을 끈 건 휴 잭맨에게 보내는 한국 팬들의 메시지로 구성한 것이었다. 이 포스터 속 휴 잭맨, 아니 로건은 에이브러햄 링컨을 닮았다. 실제로 극 중 로건이 로라와 자비에와 도주 중 어느 흑인 가족 집에서 묵게될 때 아들의 방에는 링컨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은 남북전쟁을 통해 흑인 노예를 해방한 것으로 유명하다. 로건 또한, <엑스맨> 시리즈에서 자비에 교수를 도와 주류 사회에서 버림받고 방황하는 소수자 돌연변이들이 엇나가지 않게 도움을 준 인물이었다. 로건은 링컨과 같은 영웅적 존재인 셈이다.

스포일러를 밝히자면, 로라는 미국 정부가 엑스맨 돌연변이의 DNA를 활용해 아이들을 인간병기로 만드는 실험 중 탈출한 케이스다. 이 실험에 동원된 아이들은 아시아와 흑인과 스패니쉬 등 미국 사회에서 소수에 속하는 유색인종이다. 실험을 주도하는 의사는 간호사에게 이들을 사람이 아닌 상품으로 취급하라 주의를 줄 정도니 남북전쟁 당시의 노예와 다름 없는 처지다. 로라는 북쪽의 ‘에덴’으로 향하는 길, 그곳에는 실험에서 탈출한 이들이 캐나다 국경을 넘기 위해 대기 중인 상태다.

이들 중 한 흑인 아이는 코믹북의 울버린 피규어를 가지고 있다. 가지고 노는 장난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많은 어린이들이 링컨의 전기를 읽고 대통령의 꿈을 키우듯 에덴의 아이들은 코믹북과 피규어를 보며 울버린과 같은 영웅을 꿈꾼다. 어린 돌연변이들에게 울버린은 코믹북에만 존재하는 캐릭터가 아니다. 현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러니까, ‘울버린’ 대신 ‘로건’이라는 인간적인 이름을 내세운 제목은 현실 반영이라는 의도가 담겨 있다.

<로건>에서 미국의 현실을 읽을 수 있는 기호는 텍사스 엘 파소다. 멕시코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이곳은 현재 세계의 관심이 쏠린 곳이다. 트럼프는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부터 미국과 멕시코 국경 사이에 장벽을 세우겠다고 공언해왔다. 미국으로 넘어오는 멕시코의 불법 이민자를 막겠다는 의도다. 더 크게는 이를 본보기 삼아 유색인종들이 위대한 백인 미국의 가치를 훼손하는 걸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로건>이 그 많은 아이들 중에서 멕시코 출신으로 보이는 로라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를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로건의 역할은 링컨이 노예 해방을 이룬 것처럼 미국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억압받는 아이들을 해방시키는 데 있다. 서부극의 상징적인 공간인 텍사스 엘 파소는 척박한 서부에 젖과 꿀이 흐르는 문명을 이뤘던 미국의 신화적인 공간이 더는 아니다. 상품으로 부르는 실험용 인간병기 아이들을 노예로 부리고 쓸모 없어지면 폐기처분하는 그들만의 세계로 전락했다. 그 자신이 소수자의 설움을 경험했던 로건은 로라를 북쪽의 에덴으로 데려가 아이들을 한 데 규합, 캐나다로 넘어가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근데 로건의 처지가 말이 아니다. 자신 한 몸 건사하기 힘들 정도로 약해진 상태다. 곧, 죽을 운명에 처했다. 운전기사로 위장해 국경 사이를 넘나드는 사람들을 태워 나르는 그의 차는 검은 리무진이다. 꼭 운구차를 닮았다. 울버린의 트레이드마크인 흰 러닝셔츠와 진 대신 검은 양복과 넥타이를 착용한 모습은 죽음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사신을 연상시킨다. 요컨대, 울버린이 포함된 엑스맨을 비롯하여 ‘다양한’ 슈퍼히어로들이 활약했던 시대는 이제 시효를 다했다.

백인이 아니고서 슈퍼히어로로 활약하기에 이제 미국은 안전한 곳이 아니다.  미국이 아닌 또 다른 ‘에덴’에서 소수자 슈퍼히어로들은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휴 잭맨의 울버린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로건>은 징후적인 작품이다. 여전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건재하고 DC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도전이 뜨거운 상황에서 <로건>을 필두로 이 시리즈 만큼은 트럼프 시대에 다양성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는 사연을 다룰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로라가 어떤 형태로든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이는 이 시리즈가 슈퍼히어로물의 새로운 시대를 선도할 것 같다.

 

BizEnter
(2017.3.1)

[GV] <문라이트>

(생각을 정리하려고 마구 써내려간 글이라 문장이 둔탁하고 오타도 많을 거예요. 언제나처럼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

먼저, 이 영화의 제목인 ‘문라이트’가 과연 영화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알려진 사실대로 <문라이트>는 각본가 타렐 알빈 맥크래니가 연극 학교에서 과제로 낸 작품 ‘달빛 아래에 흑은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 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를 확장했다고 하죠. 연극은 소년과 청년 시절을 다뤘을 뿐인데 영화는 여기에 성년 시절을 더했고, 뒤에 더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아예 극 중 주인공의 생과 또 다른 생의 시작을 다루고 있습니다.

극 중 주인공의 생은 명보다는 암이 많죠. 불안정한 엄마의 상태, 주인공을 괴롭히는 학우들 등과 같은 인생의 어둠을 비추는 건 비밀스러운 사랑입니다. 어둠으로 쌓인 그의 인생이 아주 엉망이 되지 않은 건 한줄기 달빛과 같은 인생을 다잡아줄 어떤 동력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비록 청소년 시절 자신을 괴롭히는 학우에 대한 폭력으로 감옥에 갔다 와 마약상으로 일했지만, 인간 실격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삶을 보고 있으면 감동 비슷한 것이 느껴져요. 무너질 수도 있는 삶이었는데 사랑과 그를 괴롭힌 배경에 이 악물고 지지 않겠다며 잡아 놓은 삶의 기준 때문이었겠죠.

이 영화에는 (달)빛의 시점으로 추정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달을 비춰주는 장면은 블랙이 케빈과 관계를 완성하는 마지막 부분에 한 번 등장합니다!) 영화는 소년 시절을 ‘리틀’(알렉 히버트), 청소년 시절을 ‘샤이론’(애쉬튼 샌더스), 성인 시절을 ‘블랙’(드레반트 로즈)으로 하여 한 인물의 성장기를 보여주는데 언급한 시점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샤이론입니다. 샤이론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케빈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죠. 그날은 언제나처럼 샤이론이 기분이 안 좋은 날이었죠. 역시나 엄마 폴라(나오미 해리스)는 약에 절어 있었고요. 무엇보다 케빈이 학교 여자와 섹스를 했다는 얘기를 해서 특히 기분이 안좋습니다. 꿈까지 꿨을 정도니까요.

기분이 안 좋은 상황에서 해변에 나와보니 케빈이 있어요. 그때 둘은 첫 키스를 나누죠. 샤이론에게는 마음에 둔 이와 나눈 첫 번째 스킨쉽이었습니다. 이때 카메라는 이 둘을 부감으로 잡는데요. 이 영화의 제목이 의미하는 ‘문라이트’는 샤이론이 케빈과의 사랑을, 특히 샤이론이 이날의 접촉을 평생의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며 살아갈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달빛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화장실의 인공 빛에서 내려보는 듯한 구도의 장면인데요. 이 또한, 샤이론의 장면에서 등장해요. 학교에서 꾀임에 빠진 케빈에게 샤이론이 폭행을 당한 날, 피멍이 든 얼굴을 얼음을 가득 채운 세면대에서 식히는 장면입니다. 케빈으로 하여금 샤이론에게 상처를 준 고약한 운명을 이겨보겠다는 의지를 상징하는데요. 이 장면 이후 샤이론은 자신을 괴롭힌 이에게 복수를 하고 감옥에 가게 되죠. 그리고 세월이 흘러 블랙이 되는데 샤이론 에피소드에서의 세면대 장면이 다시 활용이 됩니다. 그 전에 강한 의지를 묘사하는 장면이었다면 지금은 냉점함의 표현이겠죠. 그렇게 변화한 자기방어를 가지고 성년이 된 것이고요.

케빈과의 사랑이 긍정적인 의미의 달빛이었다면, 주변의 괴롭힘은 샤이론이 살아가는 데 깡다구를 심어준, 어떻게 보면 부정적인 상황을 오히려 삶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바꿔준 것입니다. 무엇보다 후안(마허샬라 알리)의 존재가 중요한데요. 후안은 친구들의 폭력에 도망치다 마약 소굴에 들어온 리틀을 구해줍니다. 그에 더해 집에 가지 못하는 사정을 알고는 먹을 거리와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어떤 면에서 보면 유사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맡았습니다.

후안의 역할이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문라이트>에서 블랙 이후 부재한 성장의 시기를 부여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 영화는 리틀과 샤이론과 블랙 세 에피소드로 진행이 됩니다. 각 이름의 배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죠. 근데 유독 리틀 부분에서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건 후안입니다. 후안은 아빠가 없는 리틀의 아빠 역할을 해주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블랙으로 마무리 되는 이 영화의 블랙 이후 나이대의 삶을 보여주는 역할이기도 합니다. 감옥에서 출소해 마약상이 된 블랙은 리틀 시절 따랐던 후안처럼 이빨에 금 액세서리를 부착하고 차에는 왕관 장식을 하고 있습니다. 에피소드를 할애하지 않지만, <문라이트>가 리틀->샤이론->블랙->후안의 구도로 한 인물이 성장한다는 걸 보여주죠.

레이어를 더하는 건 이뿐이 아닙니다. 후안은 죽을 운명의 인물이죠. 그의 죽음은 샤이론 에피소드에서 대사로 언급됩니다. 말하자면 후안은 곧 유령이 될 인물입니다. 근데 이 영화는 블랙의 마지막 장면에 리틀을 배치합니다. 리틀은 특정 이름이라기보다 어린 시절을 뜻한다고 할 수 있는데요. 또 다른 흑인의 삶으로 흑인의 다양한 삶을 유추토록 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배치된 리틀의 삶이 그 전 리틀과 달라진다면 후안과 같은 존재가 자신이 경험했던 삶의 노하우를 알려준 결과이기도 하겠죠. 부러 해변으로 데리고 나가 거친 물살을 헤치며 수영을 할 수 있도록 후안이 리틀에게 가르쳐 주는 장면은 삶을 헤쳐나가는 법에 대한 가르침일 거예요. 죽음이 예정된 후안이 그 자신과 같은 흑인이면서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를 위해 나침반 역할을 해주는 것이죠.

<문라이트>의 첫 장면은 흥미로워요. 후안이 마약을 파는 동네에 와서 그의 곁으로 도망치는 리틀이 등장하기까지 3~4분의 장면을 원테이크 원씬으로 잡아요. 이들의 삶이 하나로 묶인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그리고 나서 친구들의 괴롭힘을 피해 창문을 나무로 가려놓은 방에 숨어 있던 리틀을 향해 후안이 옵니다. 이때 후안은 창문을 가려놓은 나무를 떼어내는데요. 그때의 구도는 리틀과 후안이 나무가 떨어져 나간 창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는 구도입니다. 마치 서로 거울을 보는 인상데요. 유령 후안이 자신이기도 했던 리틀을 찾아와 자신과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고 볼 수 있겠죠.

어떻게? 후안은 리틀에게 밥을 사주며 마약굴과 같은 동네에는 절대 오지 말라고 충고를 합니다. 왜 마약상이 됐느냐는 리틀의 말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눈물을 흘리죠. 아마 샤이론과 같은 일이 있었겠죠. 그리고 나서 그는 죽은 것으로 처리가 됩니다. 다시 살아가는 또 다른 후안은 이런 길에 빠져 죽지 않기를 일종의 유령이 되어 알려준다고 할까요. 다행히도 리틀에게는 친구이자 짝사랑하는 대상이자 힘이 되어주는 케빈이 있었죠.

이처럼 <문라이트>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이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즉 양면적인 이야기를 펼칩니다. 인간의 삶이란 게 그렇죠. 비슷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바라보는 달빛이 어떤 종류이냐에 따라서 다양해지는 것인데요. 리틀과 샤이론과 블랙의 엄마가 두 명인 것도 그래요. 실제 엄마 폴라는 약에 절어 정신이 오락가락하죠. 말짱할 때는 리틀에게 다정하게 굴려고 노력하지만, 약 기운이 떨어지면 리틀을 들들 볶아 약을 살 돈을 뺐고 집에도 못들어오게 합니다. 그럴 때마다 리틀이 의지하는 건 후안과 후안의 여자 친구 테레사(자넬 모네)입니다. 리틀의 기분을 살펴주고 먹을 밥도 주고 잠자리도 제공하고 엇나갈 수 있는 케빈을 다잡아 주는 역할을 하죠.

베리 젠킨스 감독은 <문라이트>를 만들면서 “개인적이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는데요. 우리가 그동안 봐왔던 흑인(이 주인공인) 영화와는 결이 많이 다르죠. 대개 백인 지배층에 억압받는 모습이거나 인종차별에 대한 은유의 존재로서 흑인을 다룬 영화들이 대부분이었죠. <문라이트>는 다른 인종의 필터링을 통과하지 않은 온전히 흑인의 시선에서 흑인의 삶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는 의미가 있는데요. 보고 있으면 이들의 삶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느껴져요.

베리 젠킨스 감독은 또한 이런 말도 했어요. 다루는 소재와 주제에 적합한 규모와 형식과 삶을 담는 것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말이죠. 이 영화가 다루는 건 시궁창 같은 환경에서도 한줄기 달빛과 같은 의지를 삶의 동력으로 삼은 이의 인생인데요. 그래서 베리 젠킨스 감독은 그 자신이 감독 생활을 꿈꾸면서 달빛이 되어준 영화를 <문라이트>에서 오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목록은 생각보다 꽤 많아요.

먼저 찰스 버넷 감독의 <양 도살자>(1977)를 들 수 있는데요. <킬러 오브 쉽>은 캘리포니아 동부 지역에서 양 도살을 하는 흑인 가족을 다룬 작품으로 <문라이트>처럼 이들의 삶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주인공 가족의 엄마는 샤이론의 엄마 폴라처럼 좀 무섭고 그래서 아들은 주눅이 든 모습인데요. 리틀과 샤이론을 연기한 배우들은 바로 <킬러 오브 쉽>의 극 중 분위기와 배우의 연기를 참조해 촬영에 임했다고 하죠.

<문라이트>가 세 개의 시기로 진행하는 방식을 택한 건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쓰리 타임즈>(2006)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쓰리 타임즈는 1911년, 1966년, 2005년을 다루는데 시기를 달리하지만, 주인공 연기는 장첸과 서기가 모두 소화하고 있는 반면에 <문라이트>는 시기마다 다른 배우들이 동일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죠.

원래 베리 젠킨스 감독은 엄청난 영화광이라고 하네요. 많은 영화를 보면서 느낀 남다른 감정이 있다고 해요. 특히 왕가위 영화를 보면서 서로 사랑하지만, 맺어지지 못하는 이들간의 감정을 다룬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해요. 국가도, 인종도 다르지만, 느끼는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해준 매체가 영화였다는 건데요. <문라이트>에는 특히 왕가위 영화의 특정 장면이 많이 연상이 되죠. 예컨데, 블랙이 케빈을 방문하러 갈 때 도로 장면을 보여주는데요. 장면의 구도나 흘러나오는 노래는 다름 아닌 <해피 투게더>(1997)의 오마주죠. 카에타누 벨로주(caetano veloso)의 쿠쿠루쿠쿠 팔로마(Cucurrucucu Paloma)의 음악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모습도 차용하고 있죠.

또 하나 있습니다. <문라이트>에서 샤이론의 가장 중요한 관계인 케빈과 리틀 시절에 운동장에서 뛰노는 장면 있죠. 미국의 뮤직비디오 아티스트인 카일 조셉(Kahlil Joseph)의 <Until the Quiet Comes>(2013)에서 가져왔는데요. 굉장히 흡사합니다. 세면대에 얼음을 채워놓고 세수를 하는 장면은 클레어 드니 감독의 <아름다운 직업 BEAU TRAVAIL>(1999)에서 가져왔고요. <아름다운 직업>은 허먼 멜빌의 고전 『수병 빌리 버드』를 바탕으로 아프리카의 거친 오지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고 있는 여러 인종이 섞여 있는 프랑스의 한 외인부대의 이야기인데요.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사막과 그 위의 장엄한 푸른 하늘이 대비되는 가운데 병사들이 훈련하면서 유대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또한, <문라이트>와 닮아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희망이 없다고 비관하며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금에 이르렀는데요. 여전히 어둠이 자욱한 인생이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삶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희망을 품지 않기 때문인데요. <문라이트>를 보니 다른 이유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를 힘들게 했던 주변 사람들과 환경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이 나의 삶을 이끌었던 동력이 아닐까, 자문하게 되는 건데요. 우리 삶의 스타일은 제각각이지만, 삶 그 자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죠. 어린 시절을 거치고 국적, 성별, 인종으로 묶이기도 하고요. 그런 삶의 보편성을 담아 내면서 우리가 자주 보지 못했던 흑인을 주인공으로 그들 자신의 필터로 특별함을 부여하는 영화가 바로 <문라이트>입니다.

 

GV <문라이트>
명동역 CGV 씨네라이브러리
(2017.2.21)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가족 관계의 역학에 대해

(* 영화의 관람을 방해할지도 모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장 밀접한 사이지만, 그러므로 더욱 알 수 없어 가족 관계를 탐구하는 영화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도 그런 영화 중 한 편이다. 한국말로 풀자면, ‘바다 마을 맨체스터’ 정도 되려나. 근데 언제부터 맨체스터(Manchester)가 바다를 접하고 있었느냐고? 나도 처음에는 박지성 선수가 활약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속한 영국의 도시가 배경인 줄 알았다. 아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속한 작은 도시다.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는 보스턴의 아파트 관리인으로 근무하며 혼자 살고 있다. 슬픔이 얼비치는 듯한 눈매가 매력적인 리는 자주 여자들의 구애를 받음에도 반응하는 법이 없다. 대신 술에 취해 주변 사람과 시비가 붙을 때면 감정을 폭발시키고는 한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다가오는 여자들도 마다하고 인정머리 없이 매몰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까.

그런 궁금증이 생길 때쯤 리에게 고향에서 소식이 날아든다. 형 조(카일 챈들러)가 심부전으로 위독한 상태이니 급히 맨체스터로 오라는 전갈이다. 살아있기를 바랐지만, 도착하니 형은 숨진 상태다. 임종을 지키지 못해 마음이 편치 않은 상황에서 리는 형이 아들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의 후견인으로 자신을 지목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내가 고향을 왜 떠났는데, 리는 패트릭을 데리고 보스턴으로 가려 했다가 조카의 거센 저항에 부딪힌다.

패트릭은 되려 리에게 보스턴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맨체스터에서 함께 살자며 설득에 나선다. 형이 남겨둔 재산도 있겠다 듬직한 조카도 있으니 받아들이면 좋으련만 리는 택도 없는 소리라며 조카의 의견을 무시한다. 이들은 작은아버지와 조카의 관계가 무색하게 욕지거리를 섞어가며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러던 중 리는 전 부인 랜디(미셸 윌리엄스)의 연락을 받고는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픈 기억을 떠올린다.

이 영화의 주요한 배경이 ‘바다’인 이유가 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연출한 케네스 로너건 감독은 가족이리는 테두리 안에 갇힌 구성원들의 심정이란 곧 바다 위를 표류하는 배와 같다고 생각한다. 스포일러(!)를 밝히자면, 리가 고향을 떠난 이유는 몇 년 전 새벽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술을 사기 위해 식료품점을 갔다 오던 중 집에 불이 나 자식 셋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불찰 때문이라고 생각한 리는 괴로운 마음에 자살 시도까지 하는 등 고향에서 더는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인과 이혼을 한 후 보스턴에서 혼자 살아가던 중이었다.

삶의 풍랑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잔잔한 수면 위에 떠 있듯 보스턴 생활에 익숙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별안간 형이 죽고 조카를 돌보기 위해 맨체스터에서 다시 생활해야 한다니, 리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안 그래도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는 이들 가족, 더 정확히는 리와 조 형제의 부모님이 소유한 배가 있다. (배의 이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부모님 사후 리와 조와 패트릭은 종종 이 배를 타고 바다를 나가 고기 낚시를 하고는 했다. 형 조가 배를 몰면 리는 패트릭에게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주고는 했다. 바로 이 구도에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묘사하려는 가족 관계의 역학이 압축되어 있다.

조가 세상을 떠났으니 배의 운전대는 리가 잡아야 하는데 리는 이제나저제나 물(?) 밖으로 떠날 궁리만 한다. 언제 또다시 불어닥칠지 모르는 파도를 피하고 싶은 리는 바다와는 거리가 먼 육지, 즉 보스턴이 일종의 피난처와 같다. 케네스 로너건 감독은 리의 심리에 맞춰 연출을 가져간다. 보스턴에서의 일상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속에 이뤄지는 가운데 어느 날 눈발이 날리고 찬바람이 씽씽 불어오면서 형의 병상 소식이 들려온다. 그리고 형의 유언장을 담당하는 변호사로부터 패트릭의 후견인 얘기를 듣고는 리의 현재와 과거가 마치 배의 양옆을 때리는 파도처럼 리를 흔들며 혼란스럽게 교차한다.

가족관계를 자연에 빗대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특별한 사연을 다룬다기보다 보편적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물론 리의 심리를 무너뜨린 사연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머무는 동안에는 떠나고 싶고, 떠나있는 동안에는 돌아가고 싶은 가족을 향한 양면적 감정을 이해하는 이들에게 리가 처한 복잡한 상황은 남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표류하는 배처럼 밀려오면 쏠려나고 쏠려 나면 밀려오는 가족을 향한 모순된 심정을 가지고 있는 많은 이에게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가족의 초상’과 같은 작품이다.

가족의 초상을 내세우는 영화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말고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단지 세상의 끝>(2016) <미스 리틀 선샤인>(2006) <가족의 탄생>(2005) <바람난 가족>(2003) <아메리칸 뷰티> <매그놀리아>(이상 1999) <아이스 스톰>(1997) 등에 더해 아예 가족의 초상이 부제로 들어간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2013)도 있다.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가족도,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들 작품이 모두 공유하는 지점은 오랜 시간을 지지고 볶고 해야 겨우 티끌만 한 정도의 이해와 화해의 폭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마지막은 리와 패트릭이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갑판 위에서 낚시하는 장면으로 할애된다. 이들이 잡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날 저녁상에 올라갈 생선일까? 언젠가 이들이 함께 맞이할 미래일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이제 리와 패트릭이 새로운 가족을 이뤄 이 배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것이 리와 패트릭 간의 절대적인 화해를 의미하는 건 아닐 테다. 가족이란 구성원 모두가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혈연이라는 운명에 묶여 반목하고 화해하고 다시 싸우고 손잡는 일을 반복하며 평생을 보낼 존재들이다.

리와 패트릭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또 부딪힐 테고 때때로 서로의 품 안에서 온기를 느낄 것이다. 이들에게는 여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은 그렇게 좋던, 나쁘던 가족 관계에 풍화 작용을 일으켜 매 순간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부여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정의를 내릴 수 없어도 관계의 역학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ARENA
2017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