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하려면 디즈니처럼

junglebook

올해 들어 유독 한국 박스오피스의 1위는 ‘새로운’ 소재와 장르와 이야기 전개를 갖춘 영화들의 차지가 되었다. <데드풀>과 <주토피아>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곡성>과 <아가씨>의 한국영화까지, 그의 연장 선상에서 <베테랑> 이후 오랜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한 <부산행>은 총 제작비 115억 원의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정체성을 갖고도 장르물 중에서도 가장 마니악한 좀비물이라는 모험적인 시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이제 관객은 아무리 빅네임을 가진 배우가 출연하더라도 중반부 웃음, 후반부 신파로 승부를 보려는 한국형 가족드라마나 과도한 살인이 난무하는 스릴러에 조건 없는 애정을 보이지 않는다. 새로움으로 유혹하지 않는 한 부러 푯값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 최근 관객들의 냉정한 소비 패턴이다.

새로움, 사실 말은 쉽지만, 구현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누구나 시간과 노력을 들일 수는 있어도 인정까지 받는 경우는 드물다. 그럼 어떻게 해야 새로움으로 관객에게 호감을 살 수 있을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그걸 알았다면 지금 이 지면에 영업(?) 비밀을 밝히는 대신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쪽을 택할 것 같다. 물론 내게 그런 능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만큼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은 신의 영역에 가깝고 그 언저리에 다가가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다. 새로움을 창조하는 방식의 비밀을 파헤치는 건 어렵더라도 관객들이 유독 열광한 기존의 결과물을 통해 일관되게 목격되는 어떤 방향성을 캐치하는 정도는 가능하다. 그럼 이렇게 질문해 볼까. 지금 전 세계의 영화 제작사 가운데 가장 혁신적인 작품을 발표하는 곳은 어디라고 생각하나? 슈퍼히어로물의 흥행을 독점하고 있는 마블 스튜디오? 영화 개봉과 함께 흥행은 물론 세계 경제를 흔드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루카스 필름? 창의(創意)라는 단어와 동격의 대접을 받는 픽사 스튜디오?

답은 이미 하나로 모였다. 바로 디즈니. 디즈니가 이들 영화사를 사들인 건 유명하다. 2006년 픽사를 인수한 데 이어 마블엔터테인먼트와는 지난 2009년 5,000여개에 달하는 마블 캐릭터 소유권을 인수했다. 2012년에는 루카스 필름, 그러니까, <스타워즈>의 판권을 구입했다.

혹자는 디즈니의 공격적인 행보를 두고 ‘디즈니의 시대’라고 명명을 했을 만큼 전 세계 영화 시장에서의 활약이 독보적인 수준이다. 지난겨울 개봉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는 개봉 첫날부터 기존의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2011)이 가지고 있던 개봉일 최고 수입 기록을 가볍게 넘어설 만큼 전 세계 극장가를 휩쓸었다. 국내 극장가에 역주행 흥행 신화를 썼던 <주토피아>는 국내 개봉한 애니메이션 중 역대 흥행 5위를, 전 세계적으로는 10억 달러의 흥행 수입을 돌파하며 올해 개봉작 중 역시나 디즈니 산하의 마블 스튜디오가 제작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 바로 아래 자리인 2위의 흥행 성적을 올렸다.

종합하자면, 디즈니는 2015년 메이저 스튜디오 북미 시장 점유율 순위에서 <쥬라기 월드>를 킬러 콘텐츠로 앞세워 16.5%를 차지한 유니버설에 이어 14.9%로 2위를 차지했다. 올해 상반기 디즈니의 순위? 연초부터 <주토피아>로 대박을 치고 <정글북>으로 다시 한 번 기세를 올린 후 <도리를 찾아서>로 정점을 찍은 디즈니는 상반기 누적 박스오피스 18억 달러를 달성했다. 연간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는 스튜디오의 수익은 18~20억 달러 선에서 결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디즈니는 상반기 수익만으로 2016년 박스오피스 결산 1위 기록을 이미 예약한 것과 다름없다.

잠깐,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디즈니의 박스오피스 독주는 단순히 디즈니가 인수한 루카스 필름과 마블과 픽사 스튜디오의 활약에만 있지 않다. 디즈니는 이들 스튜디오의 작품 외에도 자체 콘텐츠를 꾸준히 생산하고 있다. 올해 개봉한 작품은 <주토피아>와 <정글북>이다.

두 작품은 영락없는 디즈니 버전이면서 한편으로 이전과는 달라진 지점이 눈에 띈다. 결과적으로 디즈니의 진화한 양상을 볼 수 있어 흥미로운 콘텐츠다. 가족을 이루는 신구 세대가 모두 즐길 수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주토피아>와 <정글북>은 디즈니의 정체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또한, <정글북>은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한때 디즈니가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만든 적이 있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인 <주토피아>와 장르적으로 공유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다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의 결말이 주는 메시지는 이전처럼 단순히 가족애에만 한정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가족애의 메시지를 주로 전달했기 때문에 디즈니는 종종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주토피아>는 그런 세간의 선입견을 보기 좋게 배반한 작품이다.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주토피아라는 이상향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조화를 이루는 광경이 의미하는 바는 예사롭지 않다. 인간 세계를 겨냥해 다수자와 소수자가 서로에 대한 편견을 거두고 사이좋게 살았으면 하는 메시지가 우회적으로 담겨 있다.

첨단의 컴퓨터 기술력을 활용한 애니메이션에 진보적인 메시지를 담은 방식의 <주토피아>는 디즈니보다 픽사의 작품 세계와 더 가까워 보인다. 실제로 디즈니는 2006년 픽사를 인수하기 훨씬 전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을 고집하며 가족애를 전면에 내세웠던 디즈니는 픽사가 <토이 스토리>(1995)를 발표하며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신천지를 개척하면서 한물간 취급을 받았다. 디즈니로서는 당장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변화에 대한 요구는 사실 그 전부터 있었다. 1984년 당시 디즈니를 이끌던 이는 마이클 아이즈너 회장이었다. 마이클 아이즈너는 가족 관객 중심의 디즈니의 영향력을 성인 관객으로까지 확장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터치스톤 필름과 미라맥스를 사들이면서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갔지만, 주변의 반발을 사면서 오히려 디즈니의 위기를 불렀다. 고집이 셌던 마이클 아이즈너가 주변의 의견을 듣기보다 자신의 비전을 강요하면서 주변 인재들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마이클 아이즈너야말로 변화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수장을 찾을 수밖에 없다. 마이클 아이즈너에 이어 2006년 새롭게 회장 자리에 오른 로버트 아이거는 현재까지 디즈니를 이끌고 있다. 변화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다. 픽사와 마블과 루카스 필름의 인수는 모두 그의 재임 시절 이루어졌다. 특히 회장 취임과 함께 로버트 아이거는 픽사의 인수를 주도했다. 디즈니가 고전하는 동안 생겼던 마이너스 수익률을 픽사의 작품을 통해 플러스로 전환하겠다는 안일한 발상과는 거리가 먼 결정이었다.

로버트 아이거는 픽사 고유의 창작권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되 충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들의 캐릭터 창조력과 이를 이야기에 녹이는 화법에 주목, 디즈니 작품에 이식하는 방식을 고민했다. 그 결과로 나온 작품이 ‘렛잇꼬’ 열풍을 몰고 온 <겨울왕국>(2013)과 <주토피아>이다. 픽사가 2013년 이후 발표한 <몬스터 대학교>(2013) <인사이드 아웃>(2015) <도리를 찾아서>(2016) 등과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아니 흥행 면에서 오히려 더욱 파괴력을 지닌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픽사의 합병으로 얻은 이득이 단순히 흥행의 측면에만 한정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듯 디즈니가 다시금 전성기를 맞게 된 배경에는 제작사의 고유한 브랜드를 존중하고 이에서 얻은 이야기와 캐릭터와 기술력 활용에 대한 노하우를 디즈니 작품의 창작과 상상력의 원천으로 삼는 태도가 자리하고 있다. 픽사에게서 뿐만 아니라 마블과 루카스 필름과의 관계에서도 디즈니가 유지하는 것으로 이는 올해 또 하나의 ‘히트다 히트’ 상품 <정글북>에서도 확인된다.

실사 영화에, 애니메이션에, 잊었다 하면 다시금 콘텐츠화되는 <정글북>의 영화화로 디즈니가 주목한 것은 ‘CG의 실사화’였다. <정글북>에는 70종이 넘는 동물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이는 모두 100% CG로 이뤄낸 결과물이다. 마블이 ‘어벤져스’의 슈퍼히어로를 다루는 것처럼, 루카스 필름이 <스타워즈>라는 가상의 우주 세계를 창조한 것처럼 정글이라는 미지의 공간에 주목한 디즈니는 여기에 CG 느낌이 전혀 없는 CG 동물들을 창조해 넣어 새로운 볼거리를 구현했다. 그리고 디즈니가 2016년 상반기 흥행 수익에서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세상에 전혀 존재한 적 없는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은 이미 존재하는 콘텐츠들을 가지고 이를 재조합하여 새로운 콘텐츠를 창조하는 시대다. 예컨대, <부산행>은 좀비라는 익숙한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한국의 토양 위에 이식되면서 새로운 볼거리로 기능했다. <곡성>은 스릴러라는 기본 바탕 위에 오컬트와 좀비물을 섞으면서 전례 없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데드풀>은 지금 한창 사랑받는 슈퍼히어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되 정의 실현보다 사익 추구에 혈안인 성격으로 색다른 이야기를 견인했다.

새로움은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을 알아보는 눈과 이를 꾸준히 지켜보는 인내심과 간섭 대신 지원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디즈니는 이를 통해 전 세계 극장가의 박스오피스를 쥐락펴락하는 제작사로 우뚝 섰다. 디즈니 말고도 새로움으로 주목받는 곳은 많으나 디즈니처럼 여러 자회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전 부문에 걸쳐 획기적인 성과를 내기란 절대 쉽지 않다. 흥행하려면 디즈니처럼? 아니 혁신하려면 디즈니처럼!

 

ARENA HOMME
2016년 9월호

<부산행> 반칙 개봉 변칙 흥행

pusan

<부산행>의 흥행 기세가 무섭다. 역대 한국영화 박스오피스의 기록을 있는대로 갈아치우며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부산행>을 배급한 NEW에 따르면, 역대 한국영화 최고 사전 예매량(323,186장), 역대 최고 오프닝(872,232명), 역대 일일 최다 관객수(1,280,950명), 역대 개봉 첫 주 최다 관객수(5,315,567명) 등등. 개봉(7월 20일) 5일 만에 500만 관객을 돌파했다. 하루에 평균 100만 명을 넘어서는 속도인 셈이다. (7월 25일 기준)

이 기세라면 <부산행>은 해당 기사가 지면으로 발행되는 이번 주말 정도에 천만 관객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7월 30일 현재 7,872,329 명) <명량>(2014)이 세운 한국영화 최고 관객 수(17,615,051명)도 한 달 안에 무난히(?)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영화가 지닌 오락성이 관객에게 통한 결과라고 분석하면 좋겠지만, <부산행>의 흥행 기록은 단순히 작품의 힘에만 있지 않다. 1년 중 가장 성수기로 통하는 여름 대목, 되는 영화에 스크린을 몰아주는 멀티플렉스의 폐해와 이를 악용한 변칙개봉이 더 큰 흥행 효과로 작용하고 있다.

반칙 개봉, 변칙 흥행

<부산행>은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로 사람들이 삽시간에 좀비로 변해가는 혼돈을 배경으로 한다. 그 와중에 서울역에서 부산행으로 가는 KTX에 탑승한 일부 승객들만이 운 좋게(?) 살아남는다. 말이 좋아 생존이지 KTX 안도 지옥이나 마찬가지다. 좀비에 물린 사람이 KTX에 올라타고 주변 승객들을 물어 뜯으면서 곧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히 KTX가 칸으로 구획되는 구조라 좀비로 가득한 객차를 피해 문을 닫고 옆 칸으로 이동한 몇몇은 실낱같은 희망을 이어간다. 그것도 잠시, 인간의 이기심은 극한 상황에서 물을 흐리고 결국 모두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 좀비의 공격을 피해 온 사람들에게 또 다른 사람들은 전염 위험이 있다며 이들이 죽건 말건 다시 칸을 옮기라고 협박을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부산행>과 같은 재난 블록버스터는 동시대의 사회상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부산행>의 배경인 KTX는 곧 한국사회의 축소판에 다름 아니다. 좀비의 공격에 살아남겠다고 사투를 벌이는 극 중 주인공들은 곧 각종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피말리는 생존 전쟁을 벌이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더욱이 침몰하는 사회를 구조해야 할 리더는 부재 상황이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들만 득세하다보니 한국사회는 ‘각자도생’이 생존의 주요한 수단이 되고 말았다.

이런 한국사회를 비판하는 <부산행>이 극장 개봉에서는 역설적으로 ‘각자도생’하는 상황. <부산행>이 연일 갱신하고 있는 박스오피스의 기록에는 ‘변칙’이 숨겨져 있다. <부산행>의 공식 개봉일은 7월 20일. 하지만 <부산행>은 공식 개봉 5일 전인 7월 15일부터 17일까지 3일간 ‘유료 시사’ 명목으로 57만 명 가까운 관객을 개봉 전에 미리 모았다. 그러니까, <부산행>이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5일 만의 500만 관객 돌파는 실은 개봉 전 3일간의 유료 시사 관객수까지 포함한 ‘반칙’ 흥행이라는 얘기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으로 <부산행>은 개봉일인 7월 20일부터 24일까지 5일 동안 474만 9,953명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정확히는 하루 평균 백만 명이 되지 않는 수치다. 변칙 개봉으로 하루 평균 백만 명이 넘는 관객 수를 기록한 <부산행>은 ‘보기 좋은’ 숫자를 마케팅에 적극 노출하며 더 많은 관객에게 어필하고 있다. 이는 시장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작은영화가 떠안고 있다.

말로는 함께, 실제로는 혼자만

<부산행>과 같은 블록버스터는 개봉일을 미리 정해놓는 것이 보통이다. 거액의 제작비(<부산행>의 경우, 110억 원)가 투입되는 까닭에 홍보 일정도 길게 잡아야 하고 여름 시즌은 워낙 대작들이 집중되는 시기라 비슷한 체급의 영화들끼리 함께 붙어 출혈을 감수하지 않기 위한 의도다. 산업은 그럼으로써 블록버스터 급 영화와 정면 승부해 제대로 스크린 수를 확보하기도, 관객 동원도 쉽지 않은 작은 영화를 위한 일종의 보호책을 예비한다.

작은영화는 블록버스터처럼 예산이 크지 않고 빅스타도 출연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홍보에 한계가 있어 온전히 작품성만으로 관객에게 어필한다. 그래서 가급적 블록버스터의 개봉일을 피해 최대한 많은 수의 스크린을 확보하는 것이 관객을 모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럼으로써 블록버스터와 작은영화가 공존하는 산업은 건강하게 유지되고 영화라는 문화의 다양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부산행>의 변칙 개봉은 산업의 페어플레이를 저해하는 행위다. <부산행>의 1주 빠른 ‘실질적인’ 개봉 행위는 하나라도 더 스크린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은 영화에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부산행>은 2500개에 달하는 국내 총 스크린 수 가운데 개봉 첫째 주에 1,700여개(개봉 4일차 1,786개, 상영 10,292회), 둘째 주 1,000여개(개봉 10일차 1,020개)를 확보했고 유료 시사회 동안은 2,663회를 상영하며 56만5,614명의 관객을 모았다. 관객 수 1만 명을 넘지 못하는 작은영화가 부지기수인 것을 고려하면 <부산행>의 ‘유료 시사회’로 작은영화가 직격탄을 맞았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부산행>만의 사례가 아니다. <나우 유 씨 미 2>는 <부산행>에 앞서 변칙 개봉을 감행했고 스크린 독점 문제는 올해만 해도 <검사외전>(1806개)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1708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1863개) 등이 도마 위에 오른 적이 있다. 영화계 문제는 내부에서 자정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움직여야 할 CJ와 롯데와 쇼박스와 NEW 등과 같은 대형 회사들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 개선의 여지는 물 건너간 상태다.

이제 방법은 하나. 스크린 독과점 문제를 법으로 금지하는 수밖에 없다. 미국 대법원은 일찍이 1948년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가 영화관을 계열로 지배하는 것을 공정거래에 어긋난다며 불법화하였다. 한국의 경우, 지난 19대 국회에서 멀티플렉스의 특정영화 스크린 수를 제한하는 법률이 발의됐지만, 법률로 제정되는 것에는 실패했다. 지금은 시민단체들이 주도가 되어 스크린 독과점을 제한하는 법을 입법청원한 상태다. 과연 대형 제작/배급사의 폭주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부산행>에는 혼자만 살겠다며 주변의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고속버스 회사 상무가 등장한다. 그의 말로는 당연히 비참하다. 꼭 영화 속 설정만도, 인간 관계에서만 성립하는 얘기가 아니다. 영화는 산업이기 이전 문화다. 그리고 문화의 본질은 다양성이다. 다양성이 파괴된 산업에는 미래가 없다.

 

  • 최대순 님이 댓글에 지적해주신대로 팩트가 틀린 부분(대형 사업체 회장-> 고속버스 회사 상무, 상영 2주차 스크린수 1,020개)이 있어 수정하였습니다. 틀린 정보로 혼돈을 준 점 사과드립니다.

 

시사저널
(2016.7.30)

읽다 보면 익히는 것들

hashima

소설에 재미를 붙인 건 대학교 때부터다. 책은 중학교 시절부터 읽었지만, 재미를 느끼기에는 의무감이 너무 컸다. 당시 읽은 소설을 생각나는 대로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염상섭의 <삼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김유정의 <동백꽃>, 이인직의 <혈의 누> 등이었다.

이들 소설을 기억하는 이유? 내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는 매 학기 한 편씩 독후감 숙제가 있었다. 국어 선생님께서 한 편의 소설을 정해주면 그걸 읽고 정해진 기한 내에 독후감을 제출해야 했다. 시험 점수에 포함되다 보니 울며 겨자 먹기로 읽어야 했는데 어찌나 눈에 안 들어오던지.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남의 독후감 베끼기(?)는 언감생심 꾸역꾸역 읽어내고 어찌어찌 글을 써서 제출했지만, 그 후유증으로 열거한 소설의 제목과 달리 내용은 머릿속에서 집 나간 지 오래다.

그와 다르게 대학 시절에 읽었던 소설들의 상당수는 대략적인 이야기를 여전히 기억한다. 주로 추리물과 같은 장르소설이었다. 재미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들인 습관은 지금도 유효하다. 지하철이나 버스로 이동할 때면 대개 장르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는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책 읽기를 싫어했던 나를 알고 있는 어머니는 소설로 가득 채워진 내 방의 책장을 보면 경천동지할 일이라며 놀리고는 하신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하는 얘기. 이 재밌는 걸 어떻게 끊어.

재미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주의다. 그런 생각을 키운 건 소설을 읽으면서다. 소설은 내게 일차적으로 킬링타임이다. 게임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무료한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는 데 소설만 한 게 없다. 그 정도로도 소설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요즘 심각할 정도로 책을 읽지 않는 한국의 풍토가 오락이 아니라 교양으로서 책 읽기에 너무 과한 의미를 부여해서 사람들을 질리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근데 소설을 읽다 보면 재미 외에도 생기는 부수(?)효과가 뜻밖에 많다. 앤디 위어가 쓴 <마션>을 예로 들어보자. 화성에 홀로 남은 마크 와트니가 막사를 만들어 감자를 재배하고 산소 발생기를 만들고 통신기를 수리해 지구와의 교신을 시도한다. 변변한 우주 장비 없이 척박한 화성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연을 읽다 보면 나도 한 번쯤 우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빠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주에 대한 기본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스럽게 관련 서적을 찾게 된다.

그래서 내가 고른 책은 닐 디그래스 타이슨이 쓴 <스페이스 크로니클>이었다. 부제처럼 ‘우주 탐험, 그 여정과 미래’에 대한 칼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우주 관련 지식이 적지 않다. 가령, 1969년 7월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올드린 주니어가 탄 아폴로 11호가 최초의 유인 달착륙을 두고 날조라는 이야기가 많다. 그 이후 미국이 달에 유인 우주선을 발사하지 않고 있다는 게 근거 중 하나다. 이 책은 달 착륙 음모론에 관해서 설명하지 않지만, 미국이 달에 우주선을 보내지 않는 이유는 명확히 밝힌다. NASA의 예산이 부족한 탓이다.

가뜩이나 밖으로는 전쟁을 벌이고 안으로는 내수 진작이 시원치 않다 보니 당장 눈에 띄는 성과를 내기 힘든 우주 계획을 두고 의견이 갈리는 분위기라고 한다. 실제로 조지 부시 대통령이 재임하던 당시 2010년을 목표로 달에 유인 우주선을 보낼 계획을 세웠지만, 정권이 바뀌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새로운 우주 정책을 발표했다. “화성행 로켓 개발을 추진하겠다.” 다만 그날이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은 피한 상황. <마션>과 다르게 실제 NASA의 화성행 유인우주선 발사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학교 시험이나 학과 공부 차원에서 접근했다면 꽤 고역(?)이었을 정보가 소설을 매개로 이어지다 보니 재미있게 다가온다.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내가 요즘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가 한국사다. 그중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비극적 삶이 넘실거리는 하시마 섬, 즉 ‘군함도’다. 군함도를 알게 된 건 지난해 <무한도전> ‘배달의 무도’ 편을 통해서다.

원폭 도시 (아니, 지금은 짬뽕으로 더 유명하려나?) 나가사키에서 멀지 않은 섬 하시마는 그 모양이 군함과 닮았다고 하여 군함도로 불린다. 징용으로 끌려 온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이곳 해저탄광에서 모진 탄압을 겪은 까닭에 ‘지옥의 섬’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군함도에 어떻게 해저탄광을 설치했을까? 그 살벌한 곳에 왜 초등학교가 있는 것일까? 이곳에서 조선인들은 얼마나 모진 삶을 겪었을까?

<무한도전>을 보면서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에 무지했다는 나 자신의 부끄러움이 군함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으로 감가상각 되었다. 그렇다고 관련한 역사서를 찾아 읽는다는 게 엄두가 나지않았다. 비극적 역사가 가진 무게감에, 한국 근대사에 대한 개인적인 의무감까지 더해지니 좀 더 가벼운 접근 방식이 절실했다. 마침 한수산 작가의 <군함도>가 소설로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당장에 구입했다.

<군함도>는 돈을 많이 주겠다는 일본인의 꼬임에 빠져 군함도에 들어왔다가 친구를 잃은 명국과 아버지를 찾기 위해 직접 군함도로 들어온 길남과 그리고 강제로 끌려온 지상까지, 군함도를 탈출하려는 세 인물을 중심으로 고난의 역사를 살핀다.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해저탄광에서 24시간에 가까운 중노동을 하는 것도 모자라 인근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그 피해까지 떠안아야 했던 명국, 길남, 지상을 포함한 식민지 조선인의 나라 없는 설움이 가감 없이 전달된다.

한수산 작가는 각각의 사연으로 군함도에 징용 왔던 이들의 사연을 따라가면서 이 섬에 얽힌 역사를 중간중간 밝히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군함도>의 설명에 따르면, 하시마 섬 해저탄광의 비극적인 역사는 한 영국인 사업가로부터 시작한다.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모델이 된 토머스 글로버다. 거대기업 미쓰비시가 타카시마 탄광을 개발하며 그 시설을 현대화할 때 토마스 글로버는 공동 경영에 참여했다. 그리고 일본 최초의 채탄터널, 배수펌프 등 근대적인 설비를 도입했다. 그것이 1868년의 일이다.

그런데 1873년 일본이 외국기업과의 합병을 금지하면서 타카시마 탄광은 관영이 되었다. 관에서는 타카시마가 섬이라는 것에 착안, 나가사키 교도소에 수감 중인 죄수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그러면서 폭력이 횡행하게 되었고 미쓰비시가 타카시마에 이어 하시마 탄광을 매수하면서 이곳 역시 매질이 일상화된 지옥으로 악명을 떨쳤다. 한창 아시아대동영을 외치며 주변 아시아 국가를 식민지 삼고 미국과 전쟁을 벌이던 일본은 포탄과 어뢰 제조를 위해 더 많은 석탄 확보가 필요했다. 자국 내 부족한 노동력을 조선(과 중국)의 죄 없는 남자들을 강제로 징용해 와 해저탄광으로 몰아넣은 것이 군함도의 비극적 역사의 배경이다.

조선인 노동자가 착취당하기 전까지 군함도에서 작업을 하던 이들은 당연히 일본인 광부들이었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과 떠돌이 기질 탓에 군함도에 정착하지 못했다. 미쓰비시는 이들이 군함도에서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끔 각종 편의시설을 제공했다. 그중 하나가 하시마 심상 소학교다. 자녀들 교육 문제가 해결되자 이곳에 머물러 사는 광부들이 늘었다. 일본인 광부가 인간다운 삶을 누릴 동안 타의에 의해 군함도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노예 같은 삶을 견디거나 죽음도 불사하고 탈출을 감행하는 등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처럼 소설을 통해 역사를 접하는 건 교과서로 배우는 역사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교과서로 기술된 역사는 중요한 사건 위주로 연대의 순서를 좇는 까닭에 건조하고 무엇보다 민중의 삶이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그에 반해 <군함도>와 같은 소설 속 인물의 삶은 일정 부분 허구일지언정 자료 조사가 바탕(한수산 작가는 <군함도>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후 긴 자료조사를 거쳐 무려 30년 만에 완성했다!)이 되어 보편성을 획득하기에 보다 생생한 맛이 있다. 그러니까, <군함도>는 소설이지만, 우리네 삶을 재현한 살아 있는 역사다.

그 어느 때보다 역사에 대한 필요성이 중요해진 시기다. 졸속으로 진행된 위안부 협상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 도심의 대형 호텔에서 진행될 예정인 일본 자위대 창설 기념행사의 바탕에는 역사에 대한 무지가 전제되어 있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역사는 중요하다. 하지만 교과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입시 위주의 교육 환경에서 역사 수업을 주입식으로 진행하다 보면 관심과 흥미를 잃은 학생이 속출하기 마련이다. 달달 외워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다고 해도 그 기억이 오래갈 리 없다. 그것을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이라 말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역사에 대한 좀 더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혹자는 역사를 오락화하는 접근에 대해 불편한 속내를 비치기도 하지만, 역사에 대한 경직된 사고가 초래한 결과를 우리는 지금 이 현실에서 뼈저리게 목격하고 경험하고 있다. 시대가 변하듯 역사에 대한 접근도 변화하는 법이다. 천만 관객을 넘게 동원한 영화 <암살>이 친일파 청산의 필요성과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무명의 독립투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켜 화제가 됐었다. 그게 지금 사람들이 역사를 대하는 태도다.

소설도 역사를 배우는 좋은 창구다. 이는 꼭 우리 역사를 아는 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소설 중에 <경관의 피>와 <경관의 조건>이 있다. 이 소설은 전후 경찰관이 된 일본인 4대가 주인공이다. 각각의 세대가 50년대, 70년대, 90년대, 그리고 현재 일본의 특징적인 범죄를 수사하며 일본의 근현대사를 횡단하는 이야기다. 사립탐정 켄지 & 제나로 시리즈로 유명한 데니스 루헤인의 역사소설도 있다. <운명의 날>과 <리브 바이 나이트: 밤에 살다>와 <무너진 세상으로>이다. 경찰관 커글린과 그의 막내아들 조 커글린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이 삼부작은 20세기 초 격랑에 휘둘렸던 금주법 시대의 보스턴을 배경으로 미국의 어두웠던 근대사를 파헤친다.

<군함도>를 포함해 이들 소설은 역사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재미를 놓지 않기 위해 적재적소에 흥미로운 사건을 배치하고 독자들이 해당 인물에 감정 이입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재미에 역사까지 습득할 수 있으니 독자로서는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다. <삼대>와 <운수 좋은 날>과 <메밀꽃 필 무렵>과 <동백꽃>과 <혈의 누>도 시험에 상관없이 재미로 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책을 잘 읽지 않는 환경도, 역사 인식이 갈수록 희미해가는 풍토도 결국 해결책은 재미에 있다고 생각한다. 재미로 접근하는 역사는 가벼울 수밖에 없다고? 작고 가벼운 발걸음이 모여 큰 줄기를 이루고 변화를 이끌었던 건 역사가 증명한다. 나는 오늘도 소설을 읽는다. 그리고 역사를 읽는다.

 

arena homme
2016년 8월호

멍청한(?) 블록버스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indieresergence

<인디펜던스 데이>가 개봉했다. 이 문장은 ‘블록버스터가 개봉했다’는 표현과 뉘앙스가 좀 다르다. 후자가 ‘즐길 만한 오락물이 나왔다’는 의미가 있다면 전자는 ‘멍청한(?) 블록버스터가 또 개봉했어?’라는 뜻이 크다.

<인디펜던스 데이: 리써전스>(이하 ‘<인디펜던스 데이 2>’)는 1996년에 개봉했던 <인디펜던스 데이>의 속편이다. 무려 20년 만이다. 그동안 할리우드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촬영과 배급이 디지털로 이뤄지고 3D 상영이 대중화되었다. 천지개벽할 수준… 까지는 아니지만, 2D 필름 상영이 일반적이었던 걸 감안하면 엄청난 변화의 폭이다.

그에 비하면 <인디펜던스 데이 2>는 변한 게 ‘없어 보인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규모 정도. 전편의 뉴욕 하늘을 덮었던 외계인의 비행물체는 지구의 절반을 가릴 정도로 어마해졌다. 그리고 출연하는 배우 정도. 나를 따르라! 보무도 당당히 전투기를 직접 몰아 적진으로 향했던 토마스 휘트모어 대통령 역의 빌 풀먼은 전(前) 대통령으로 출연한다. 이번에는 나만 믿어라! 측근들이 만류하는 가운데도 홀로 외계인에 맞선다. 하지만 스티브 휠러 대위 역의 윌 스미스는? 출연료를 너무 과하게 요구해 출연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대신 ‘토르’ 크리스 헴스워스의 동생 리암 헴스워스가 새롭게 합류해 (과감한 결단력으로 포장된) 만용을 만방에 떨친다.

20년 전 외계인의 공격에 쑥대밭이 됐던 지구는, 아니 미국은 재건을 이뤄낸다. 이를 기념하려 독립기념일에 맞춰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하던 중 세계 곳곳에서 이상 신호가 잡힌다. 20년 전 전쟁에서 생포했던 외계인들이 몸부림을 치고 아프리카에 숨겨 놓았던 외계 비행물체에 별안간 전원이 들어온다. 이제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요양 중인 토마스 휘트모어는 악몽에 시달리니, 아니나 달라, 더욱 힘을 키운 외계인들이 다시 한 번 침공을 감행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속편을 만들었다고 해서 <인디펜던스 데이> 시리즈를 멍청하다고 매도하는 건가? 이런 소재의 할리우드 영화는 세고 셌다. 일일이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이 지면의 1/3을 채울 수 있다. <인디펜던스 데이> 시리즈가 멍청한 블록버스터의 대명사 격이 된 이유는 팍스 아메리카의 메시지를 거대한 볼거리로 무리하게, 그리고 노골적으로 실어나른다는 데 있다.

지구 절반의 크기에, 강력한 자기장까지 장착한 비행물체를 개발하고 운행하는 외계인의 지능은 결코 지구인이 따라갈 것이 못 된다. 이런 생명체를 지배하는 여왕 외계인, 즉 퀸 에이리언의 존재라면 그 능력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터. 이제 지구는 끝장을 맞이하는가 싶은데 이 지점부터 <인디펜던스 데이 2>는 이야기가 널을 뛰기 시작한다. 굳이 ‘스포일러’라고 경고할 만한 설정도 아니라서 좀 자세히 설명하면,

퀸 에이리언이 이끄는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공하기 전 멸망시킨 외계종족 중 하나가 스피어다. 스피어는 비밀리에 지구로 잠입, 나쁜 외계인이 지구를 재침공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이에 맞서려 일종의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자신들의 과학 기술을 인간에게 전수해 지구를 구하려는 의도다. 이를 눈치챈 퀸 에이리언은 직접 스피어를 생포하기 위해 거대한 위용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근데 한다는 짓이.. 스피어 잡기에도 바쁠 텐데 아이들을 태운 (퀸 에이리언의 눈에는) 코딱지만 한 통학 버스에 정신을 뺏겼다가 미군의 공격에 위기에 직면한다.

이걸 지금 줄거리라고 요약하자니 난감하다. 왜 아이들 통학버스가 그곳에? 여기에 이성이나 합리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미국의 압도적인 전투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서는 외계인 정도 희생시켜야 하는데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설정이다보니 무리수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비행물체를 개발하고도 한낱 인간에게, 아니 미국인 따위에 패배하는 외계인은 노골적인 미국 만만세의 메시지를 강백호의 왼손처럼 그저 거들뿐.

그런데도 이런 이야기를 밀어붙일 수 있는 원동력은 할리우드 특유의 거대한 이미지 축조 능력에 있다. 실제 우주에서 촬영한 듯한 배경 하며, 동공이 확대되는 파괴 장면 하며,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퀸 에이리언의 이미지는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가 싶어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마력이 있다.

실제로 북미에서는 개봉과 함께 박스오피스 2위를, 한국에서는 1위를 기록하며 전편만큼은 아니지만, 녹록하지 않은 흥행력을 과시했다. 성조기 휘날리며 ‘팍스 아메리카나 Pax Americana’(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를 일컫는 말)를 전파하는 이야기에는 킬킬거리면서도 재난 이미지에 푹 빠진 관객이 적지 않다는 의미다. 멍청한 블록버스터에 대처하는 관객의 자세가 <인디펜던스 데이> 때와 비교해 얼마나 변화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인디펜던스 데이 2>는 시쳇말로 생각이 없는 영화인가? 멍청하게 구는 듯해도 실은 또 다른 보수적 가치를 은연중에 관객의 뇌리에 심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교활한 영화다.

<인디펜던스 데이> 1편과 2편을 모두 연출한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민주당 지지자다. 정치적 성향에 걸맞게 <인디펜던스 데이 2>에서 대통령은 엘리자베스 랜포드, 즉 여성으로 설정했다. 민주당 경선을 통해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것을 고려하면 롤랜드 에머리히가 진보적인 스탠스를 취하려고 나름 신경을 쓴 것 같은 모양새다. 과연 그럴까? 그 배경을 파고들면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의도가 감지된다.

<인디펜던스 데이 2>와 같은 재난 블록버스터는 아무리 진보적인 양 해도 기본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도시가 파괴되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선악의 경계가 불분명해서는 관객을 쉽게 현혹할 수가 없다. 생각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는 온갖 보수적인 가치가 주도권을 잡는다. 그래서 이분법의 논리가 횡행하는 곳이 바로 재난 블록버스터의 세계다. 결국에 인간은 모든 재난을 극복하지만, 그 중심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건 남자이고, 백인이고, 이성애자다. 여자거나, 유색인종이거나, 동성애자이면 죽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여자 대통령이라는 그 자체로 특별할 뿐이지 <인디펜던스 데이 2>에서 엘리자베스 랜포드의 운명은 뻔하다. <인디펜던스 데이>에서의 토마스 휘트모어 대통령이 활약한 것과는 다르게 엘리자베스 랜포드는 ‘남자’ 정치인과 경호원의 보호를 받다가 영화 중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망 처리되어 극 중에서 사라진다. 엘리자베스 랜포드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임시로 이임 받는 이는 외계인과의 전투를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는 ‘남자 백인’ 조슈아 아담스 장군이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 토마스 휘트모어는 퀸 에이리언을 유인해 외계인의 우주선에 탑승하는 데 성공, 자신을 희생해가면서까지 기폭장치를 터뜨리며 미군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멍청한 듯 보여도 <인디펜던스 데이> 시리즈는 보수의 가치 전파를 위해 치밀하게 접근한다. 이와 같은 전략은 흥미롭게도 도널드 트럼프에게서 발견된다. “모유 수유? 역겹고 구역질 나고 끔찍하지 않나요?”, “제가 얼마나 잘 생겼습니까. 그러는 힐러리는 대통령 할 세숫대야입니까?”, “한국이 미국에 안보를 공짜로 의존하고 있어요. 한국은 미쳤어요. 한반도에 전쟁이 나든 말든 그들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연일 쉴새 없이 뱉어내는 트럼프의 막말은 가히 블록버스터급이다. 그중 몇 개 추린 것만 보아도 그의 막말은 여성에, 자신들보다 약한 국가에, 소수자에게로 향한다. 그래놓고 한다는 소리,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답게 행동하겠습니다.”

이런 멍청이가 대통령 후보가 다 뭐야 공화당 경선이나 통과할까 웃으면서 지켜봤던 이들은 현재 상황 ‘멘붕’이다. 트럼프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자 설마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 아니냐며 불안에 떨고 있다. 예상과는 다르게 영국이 국민투표로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한 마당에 트럼프가 다가오는 미국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사건은 아니라는 얘기다. 어쩌다? 그의 막말이 그동안 체면을 생각해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많은 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며 지지를 끌어냈다는 분석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재난 블록버스터가 노리는 효과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말이 되지 않는 설정을 비웃다가 계속되는 재난 이미지의 노출에 재미를 느끼고 그러면서 서서히 이들 영화가 옹호하는 가치에 은연 중으로 넘어가는 악순환. 설마 이런 멍청한 블록버스터가 지향하는 가치를 옹호할 사람이 있겠어, 라고 웃어넘기는 동안에도 혹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게 작금의 현실이다. 멍청하다고 조롱하고 놀려대고 무시해도 이에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미국 만만세를 외치는 블록버스터가 기획되고 개봉하는 배경이다.

블록버스터라는 명칭에 걸맞게 대규모로 밀어붙이는 물량 공세는 매번 새로운 관객층을 형성한다. 이에 경계하는 기존의 관객에게는 변하지 않은 듯 교묘하게 메시지를 끼워 넣는 방식으로 이에 동조하도록 유도하며 진화를 꾀한다. 이미 <인디펜던스 데이 2>는 속편을 암시하는 방식으로 극을 마치며 많은 이들의 기대감과 우려를 동시에 올려놓은 상태다.

이런 종류의 블록버스터가 노리는 효과라면, 트럼프와 같은 이가 지지를 받는 사회적 현상이 그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고 보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재난 블록버스터가 관객에게 제공하는 기능 중 중요한 게 현실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오락성이다. 다만 선별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젠 생각을 해야겠다. 정말로 생각이 중요한 거 같아. 끝까지 생각하면 뭐든지 고칠 수 있어” 홍상수 감독이 연출한 <극장전>(2005)에서 극 중 영화감독 데뷔를 준비 중인 동수(김상경)가 하는 얘기다. 생각을 원천봉쇄하려는 재난 블록버스터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것. 생각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 영화 시즌이 도래했다.

 

arena homme
2016년 8월호

여배우 전성시대(?)

no secret

여성 배우의 변신이 주목받고 있다. 남성(이 주인공인) 영화가 일색인 한국 영화계에 반가운 소식이다. 물론 그 수는 손에 꼽을 정도이지만,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영화가 왜 필요한지를 역설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변화다.

손예진은 없다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는 손예진을 위한 영화다. 손예진은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고군분투’하다가 ‘대오각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기존의 손예진이 맡았던 캐릭터는 ‘절세미인’(<아내가 결혼했다>(2008))으로 등장해 ‘경국지색’(<첫사랑 사수 궐기대회>(2003))으로 뭇 남성들을 홀린 후 그중 한 명과 ‘천생연분’(<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을 맺는 역할이 거의 전부였다. 손예진의 경우만 그럴까. 미모가 뛰어난 여배우들의 영화에서의 운명이란 게 대부분 그러했다. 그러니까, <비밀은 없다>의 손예진은 전에 본 적 없던 이미지로 관객을 홀린다.

손예진이 <비밀은 없다>에서 맡은 역할은 연홍이다. 예비 국회의원 종찬(김주혁)을 남편으로 둔 아내다. 연홍은 남편의 선거 승리를 위해 조용히 내조를 일삼는다. 사랑하는 딸이 실종되면서부터 연홍의 태도는 돌변한다. 선거가 코 앞인 남편은 딸의 실종에 슬퍼하는 내색을 비추지만,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선거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돼서다. 연홍은 그런 남편이 가식적으로 느껴진다. 행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될까 종찬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는 경찰도 믿기 어렵다. 연홍은 직접 딸을 찾아 나선다.

딸을 잃은 모성이 중요한 테마인 만큼 극 중 손예진은 외모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예쁘게 넘겨 묶었던 머리는 딸의 실종 날짜가 늘어날수록 점점 풀어져 마지막에는 산발이 된다. 우아한 서울말을 구사하던 그녀는 경찰의 수사에 진전이 없자 이성을 잃고는 걸쭉한 고향 사투리를 내뱉더니 급기야 쌍욕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천생연분이 웬 말, 딸의 실종을 선거에 이용하는 것 아니냐며 종찬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그 와중에 집에서는 사랑스러웠던 딸이 학교에서는 전혀 다른 면모의 학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제 연홍은 예전의 연홍과는 안녕을 고한다.

극 중 연홍은, 아니 연홍을 연기한 손예진은 전복의 쾌감을 선사한다. 그녀는 더는 예쁨으로 승부하는 배우가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비밀은 없다>는 첫 장면을 그녀의 얼굴에 할애한다. 카메라를 비스듬히 잡아 각이 진 그녀의 얼굴 위로 머리카락이 나부끼면서 예쁨과는 다른 차원의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얼굴 위로 정체 모를 사연이 드러나고 그녀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런 게 배우들의 새로운 면모를 관객에게 제시하는 감독의 연출법이다. 하지만 남배우들의 매력 포인트만 부각하는 영화들에 많은 여성 배우들이 소외감을 느끼던 터였다.

한국의 여배우들이 매력이 떨어져서? 여성 관객이 흥행을 주도하기에 그들이 혹할 만한 남배우의 매력을 우선적으로 어필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시선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두 여성의 사랑을 그린 레즈비언 로맨스다. 기존 투자사와 제작사의 편견대로라면 <아가씨>는 전혀 흥행할 만한 영화가 아니다. 김민희, 김태리 두 여배우가 타이틀 롤을 맡았고 심지어 동성 베드신까지 감행한다. 결과는? 개봉 한 달 동안 4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박찬욱이 만든 19금 영화 중 최고 흥행을 기록했다.

여배우는 있다

<비밀은 없다>와 <아가씨>가 한국영화계에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그동안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여성 배우 또한 남배우들처럼 마땅한 멍석이 깔리면 새로운 매력을 뽐낼 만한 실력이 충분하다. 바로 그와 같은 제한적인 기회를 살려 롱런한 대표적인 배우가 김혜수다. 김혜수의 대표작은 <차이나타운>(2015)과 <도둑들>(2013)과 <타짜>(2006) 등이다. <차이나타운>에서는 뒷골목 조직의 보스를, <도둑들>에서는 옛 남자에게 배신당한 기억을 잊지 못하는 도둑을, <타짜>에서는 “나 이대 나온 여자야” 희대의 명대사를 남긴 마담을 연기했다. 이들 영화가 김혜수의 대표작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그녀에게서 다양한 얼굴과 캐릭터를 뽑아낸 까닭이다.

신작 <굿바이 싱글>에서 김혜수는 또 한 번의 변신을 시도한다. 이제는 한물 간 여배우 주연이다. 인기가 시들해지자 그녀는 평생을 함께할 내 편을 만들겠다며 돌연 임신 발표를 한다. 남자도 없는데 임신 발표라니, 이런 대책 없는 여배우를 봤나. 소속사 식구들은 희대의 임신 스캔들을 덮으려 뒷수습에 나서고 주연은 우연히 만난 미혼모에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다. 똑부러지고 자기주장이 강한 김혜수의 평소 모습으로 보건대 <굿바이 싱글>의 주연은 그녀의 새로운 면모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혀 짧은소리에, 상황에 맞지 않는 단어 사용으로 주변을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주연 캐릭터는 김혜수에게는 도전이다.

도전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국영화의 다양성에 일조한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한국영화계는 매년 두세 편 정도의 천만 영화를 생산하며 박스오피스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동시에 다양한 영화의 빈곤으로 우려를 자아낸다. 다양성 부재의 주요한 원인은 남자 영화로의 몰림 현상이다.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로 천만 관객과 같은 대박을 노리다 보니 아버지가 전면에 나서는 드라마, 남자들의 폭력이 판을 치는 누아르, 두 남자 주인공의 콤비 플레이가 브로맨스로 포장되는 버디 무비 일색이다. 어쩌다가 천만 영화가 등장한다지만, 이를 제외하면 매번 그 나물에 그 밥인 한국영화에 관객은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여배우를 소홀히 한 대가다. <검사외전>이 천만 관객을 돌파한 2월 이후 <곡성>이 등장하기까지 한국영화의 관객 동원력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은 700만 가까운 관객 동원력을 보여준 <늑대소년>(2012) 조성희 감독의 차기작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았지만, 고작 1백만 명이 넘는 수준에서 그쳤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마케팅 과정에서 주연급으로 분류됐던 고아라가 정작 영화에서는 얼마 되지 않는 분량으로 출연해 배신감을 느낀 팬들이 적지 않았다. 결과론적인 가정이지만, 오히려 예상 가능한 홍길동 캐릭터와 다르게 홍길동이 속한 자선재단 활빈당의 황 회장(고아라) 비중을 높였다면 좀 더 다른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홍길동이 사고를 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완벽하게 뒷수습을 하는 황 회장 캐릭터는 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지금 극장가에서 주목받고 있는 한국의 다양성 영화는 <우리들>이다. <우리들>은 빈익빈 부익부의 갈등이 극에 달한 환경에 내몰린 여자 중학생들이 어긋난 관계를 그들 스스로 어떻게 회복하는지를 바라본다. 중학교의 작은 교실을 배경으로 우리 사회의 갈등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까지 짚어보는 섬세한 이야기가 강렬한 액션이 오가는 남자영화와는 다른 결을 제공한다. 비록 채 80개가 되지 않는 스크린 수에서 개봉했지만, 일주일 만에 1만 관객을 동원하는 등 의미 있는 성과를 이어가고 있다.

천편일률적인 영화로 넘쳐나는 한국영화계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이들 중 많은 수가 두세 편의 천만 영화보다 10여 편의 200~300만 관객 동원 영화가 더 중요하다는 의견을 내고는 한다. 영화는 산업이기 이전 예술이기 때문에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다. 여성 (배우가 중심인) 영화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하나. 다양성이 확보된 사회는 결국 원활한 소통이 전제된다. 우리 사회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의 사연과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여성 영화가 지금보다 더 많아져야 하는 이유다.

 

시사저널
(2016.6.25)

흥행의 트렌드가 변했다

thewhiling

문제로 시작해보자. <아가씨> <곡성> <주토피아> <데드풀> <레버넌트>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올해 한국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차지했던 영화들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니다. 좀 더 생각해보시기를. 어려운가? 답은, 전에 본 적 없던 새로운 소재와 이야기, 그리고 이미지와 연출로 관객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은 작품들이다. 요컨대, 이들 영화는 한국 극장가의 흥행의 트렌드를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천만 영화를 견인했던 한국의 주류 제작사들에는 일종의 흥행 공식이란 게 있다. 소재의 다양성과는 상관없이 중반부까지는 웃음을 주고 뒤로 갈수록 눈물 콧물을 쥐어짜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맺음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톱스타가 등장해 웃겨주는데, 울려주는데 반응하지 않을 관객이 있어! 이런 식으로 크게 성공한 영화도 있었지만, 대개는 대형 제작사와 연계된 멀티플렉스의 지원을 받은 개봉 첫 주에 반짝했다가 사그라지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그런데도 고집스러울 만큼 새로운 시도에 인색한 이유는 ‘통계의 함정’ 때문이다. 이는 대형 제작사들이 천만 영화에 몰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년에 두 편 정도의 천만 영화를 기록하면 그동안 100만~200만 명 관객 동원 수준의 영화를 10편 이상 실패해도 숫자로 봤을 때 수익이 난다는 논리다. 그 결과,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한 방’을 바라는 사행성을 최우선(?)으로 삼게 되었다. 기존의 성공했던 요소를 분석하고 재활용하는 방식이 지배논리로 자리 잡은 배경이다.

천편일률적인 흥행 논리가 슬슬 힘이 빠지고 있다는 증거는 서두에서 언급한 영화들이다. 이들 영화는 기존의 흥행 공식과는 안녕을 고한 진화한 형식으로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모았다. <아가씨>는 동성애 소재와 파격적인 정사 장면으로 청소년관람불가라는 한계에도 불구, 승승장구 중이다. 특정 계층을 공략해서는 흥행이 힘들다는 편견과 달리 개봉 10일 만에 3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또한, 가족애, 남자들만의 의리, 남녀의 사랑 등 보수적인 가치를 옹호하는 영화가 판을 치는 상황에서 소수자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는 점도 <아가씨>의 흥행이 놀라운 이유 중 하나다.

<곡성>은 또 어떤가. 추상적인 형태로만 쉬쉬 되던 악(惡)에 구체성을 부여하는 <곡성>은 2시간 30분이 훌쩍 넘는 상영 시간 동안 어두운 분위기로 일관한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죽은 동물의 사체에서 내장을 빼먹는 악마를 그대로 노출한다. 악마에게 영혼을 뺏긴 딸이 아빠에게 쌍욕을 쏟아붓고 가족을 살해하려는 만행도 서슴지 않는다. 밝은 분위기가 아니면 관객이 외면할 거라는 편견과는 달리 <곡성>은 되레 영화적 힘으로 작용한 경우다. 안 그래도 대형 사건과 엽기적인 사고가 빈번한 한국사회에서 <곡성>은 가식적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는 대신 누구라도 악의 제물이 될 수 있다는 비극적인 결말로 수많은 관객의 설왕설래를 끌어내기도 했다.

각각 <아가씨>와 <곡성>을 연출한 박찬욱, 나홍진은 한국영화계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 감독들이다. 박찬욱 감독은 한국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작업할 정도로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고 있다. 나홍진 감독은 <추격자>(2008) <황해>(2010) 단 두 편으로 자기 세계를 탄탄히 구축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대다수 감독이 투자사와 제작사의 입김에서 벗어나지 못한 환경에서도 박찬욱, 나홍진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창작자다. 박찬욱의 <아가씨>는 전 세계 판권이 무려 175개국에 판매됐고 나홍진은 할리우드의 20세기 폭스사의 제작 지원으로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신의 의도를 100% 가깝게 반영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창작자에게 창작의 자유는 영화와 같은 예술 분야에서 필수적인 조건이다. 영화를 상품으로 인식하는 일부 제작사들에는 오히려 상업성을 갉아먹는 방해요소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감독이 창작의 자유를 무기로 개성 있는 작품을 만들었지만, 대기업 자본이 충무로의 주류가 된 2000년대 중반 이후로 감독들은 급속도로 자기 목소리를 잃어갔다. 천만 영화의 등장으로 산업의 파이는 커졌을지 몰라도 그로 인해 대다수의 감독은 투자사와 제작사가 원하는 방향에 맞춰 영화를 ‘공정 工程’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뒷받침해준 것이 박스오피스로 대변되는 순위와 관객 수이었다.

2016년의 박스오피스만 놓고 보면 그와 같은 논리는 즉각적인 폐기 처분의 대상이다. <곡성>과 <아가씨>가 드물게 창작의 자유를 누린 감독의 예외적인 흥행 사례가 아니라는 의미다. 올해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차지한 한국영화는 <검사외전> <귀향> <시간이탈자> <곡성> <아가씨> 모두 다섯 편이다. 이중 <검사외전>과 <시간이탈자>를 제외하면 기존의 흥행 공식을 따르지 않고도 박스오피스에서 큰 성공을 기록했다. (<귀향>은 역사 제대로 알기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는 시기와 맞아 떨어지면서 흥행에 성공했다.)

할리우드 영화로까지 범위를 넓히면 사례는 더욱 많다. <레버넌트>는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서부극이면서도 아들을 살해한 원수를 찾아 나선 아버지가 말의 배를 칼로 베어 내장을 꺼내 먹는 등의 전례 없던 극사실적인 묘사로 감탄을 자아냈다. <데드풀>은 슈퍼히어로라면 대개 개인적인 신념을 희생하고 정의라는 이념과 대의를 위해 복무한다는 그간의 인식을 완전히 뒤집었다. 자신에게 슈퍼파워를 선사했지만, 젊음을 앗아간 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슈퍼히어로가 된 남자. 정의 따위 안중에도 없는 이 안티 히어로는 집단보다 개인의 가치가 우선하는 작금의 시대정신과 조응하며 예상 밖의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데드풀>보다 더 극적인 1위는 <주토피아>였다. <주토피아>는 개봉 초기에는 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4주차에 이르러 비로소 1위를 차지했다. 이 영화의 흥행 추이에는 참 이례적인 데가 있다. 개봉 첫 주에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오르지 못하면 사라지는 영화가 부지기수인 환경에서 한 달을 버티며 입소문으로 끝내 1위를 차지했다. 동물을 의인화한 캐릭터로 다양한 종()의 조화를 이야기하는 <주토피아>는 그 내용처럼 영화에서 다양성이 왜 중요한지를 우회적으로 설득한다.

지금은 그야말로 다양성의 시대다.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다양한 성별과 인종이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고 그에 따라 관심사가 다변화되면서 세상은 빨주노초파남보 여러 가지 양상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무지갯빛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천만 관객이 볼 수 있는 영화를 공장식으로 생산하고 산업 환경을 그에 맞추는 건 폭력이다. 창작자의 개성을 거세해 영화를 몰개성한 산업으로 몰아가고 관객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은 채 비슷한 감성의 영화들로 멀티플렉스를 채우는 건 새마을 운동 시절에나 어울리는 풍경이다.

2016년 상반기가 지난 현재 한국 극장가는 <검사외전> 단 한 편만이 천만에 가까운 관객(970만 명)을 돌파했다. 같은 기간 동안 <국제시장>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두 편의 천만 영화를 기록했던 지난해와 비교해 떨어지는 수치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가 천만 영화로 기대를 모았지만, 8백만 관객을 넘기는 데 그쳤다. 비슷한 소재와 이야기 전개에 관객들이 피로감을 느꼈다는 반증이다. 하반기에는 천만 영화를 기대해볼 수 있을까. <암살>과 <베테랑>이 쌍 천만 관객을 기록했던 2015년에 비해 라인업의 무게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천만 영화가 총 4편이었던 2015년을 비교 대상 삼아 2016년의 극장가를 위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관객 숫자로 봤을 때는 그럴지 모르지만, 오히려 극장가가 건강해지고 있다는 방증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닐 테다. 올해는 박스오피스 1위 영화들의 성분도 그렇고 다양성 영화 중에서 유독 화제를 모으는 작품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음악으로 사랑을 나누고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싱 스트리트>가 그렇고, 대만판 ‘응답하라 1988’이라 할 만한 <나의 소녀시대>가 그러하며, 우아한 방식으로 여성과 여성의 사랑을 묘사한 <캐롤>이 그러했다. 한국영화계의 취약점으로 평가받는 음악영화, 청춘물, 동성 간의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의 다양성 영화 중에서도 돋보이는 작품이 있었다. 이준익 감독의 <동주>는 주류 영화에서라면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흑백 이미지 속에 윤동주의 삶과 시를 살려냈다. 정지우 감독의 <4등>은 1등에만 목을 매는 무한경쟁의 한국 사회에서 올바른 교육에 대해 따져 묻고 건강한 경쟁인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선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얻었다. 상업성만을 추구해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들이 시장에 나와 선을 보였고 이에 많은 관객이 호응했다는 건 감독의 개성을 억압하며 천만 영화에 올인하는 제작 환경에서 분명 의미 있는 성과다.

한때 디즈니는 전통적인 가치를 고수하는 이야기로 브랜드 가치를 잃어갔다. 그러다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겨울왕국>(2013), 동물 캐릭터로 계급과 차별의 문제를 다룬 <주토피아>, 컴퓨터 그래픽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CG 동물들로 익숙한 이야기의 한계를 극복한 <정글북> 등으로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최강자로 우뚝 섰다. 그 중심에 서는 건 창의적인 발상이다. 창작의 자유가 돋보이는 영화들이 한국 극장가 박스오피스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천만 영화의 물신 숭배에 빠져 감독의 창작의 자유를 훼손하고 기존의 흥행 공식을 따라 하는 건 실패로 가는 지름길이다. 한국 관객의 다양한 영화를 향한 욕구가 흥행의 트렌드에 변화를 이끌고 있다.

 

ARENA HOMME
2016년 7월호

한국, 청춘물에 열광하다

wangdaeruk

대만 영화 <나의 소녀시대>와 아일랜드 영화 <싱 스트리트>가 각각 31만과 36만 관객(6월 1일 현재)을 동원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가 865만을, <곡성>이 575만을 돌파하고 있는 상황에서 ‘에게’ 30만 조금 모은 걸 가지고 왜 이렇게 호들갑이냐고.

관객 수로만 따지면 그럴지 몰라도 이들 영화를 직접 비교하는 건 부당하다. 대형 제작사와 배급사를 등에 업은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와 <곡성>과 <엑스맨: 아포칼립스> 등이 한국 전체 스크린 수의 절반을 훌쩍 넘게 확보한 상황에서 <나의 소녀시대> <싱 스트리트>는 고작 5분의 1 수준으로 기록한 흥행이기 때문이다.

타국의 청춘물에 열광하는 이유

<나의 소녀시대>와 <싱 스트리트>는 한국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청춘물이다. <나의 소녀시대>는 1994년을 배경으로 유덕화의 아내가 되는 것이 꿈인 소녀 린전신(송운화)과 학교 ‘짱’ 쉬타이위(왕대륙)의 풋풋한 사랑을 다룬다. 1980년대가 무대인 <싱 스트리트>는 규율이 엄격한 학교에 다니던 코너(퍼디아 월시-필로)가 첫눈에 반한 라피나(루시 보인턴)의 마음을 얻기 위해 교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밴드를 결성하는 이야기다.

이들 영화가 한국 젊은 관객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건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인기를 얻은 배경의 연장선에 놓인다. 이제는 기성세대가 된 30대 이상의 향수를 자극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공감을 얻은 것. 그와 동시에 자신들의 심정을 대변할 마땅한 콘텐츠가 없어 불만인 지금의 청춘에는 생소한 낭만의 정서를 제공한다. <나의 소녀시대>와 <싱 스트리트>는 먼저 극 중 시대를 볼거리 삼은 전략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대만판 ‘응사’라고 할 만한 <나의 소녀시대>는 극 중 린전신이 유덕화를 짝사랑한다는 설정에 착안해 금성무, 곽부성, 주성치 등과 같은 당시 인기 절정의 배우와 <슬램덩크> <북두의 권> <드래곤 볼>과 같은 만화를 슬쩍슬쩍 노출하며 1990년대에 대한 추억의 정서를 노골적으로 자극한다. <싱 스트리트>는 1980년대의 주옥같은 브리티시 팝을 소환한다. 코너는 라피나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아-하’의 <테이크 온 미 Take on Me>를 부르고 가족들과 함께 TV 앞에 모여 막 출범한 MTV 채널로 듀란듀란의 <리오 Rio> 뮤직비디오를 감상한다.

영화와 음악은 과거를 누리는 가장 좋은 매개체다. 특히 이것이 풋풋했던 첫사랑의 기억과 짝을 이루면 힘든 현실을 견디는 효과 좋은 진통제가 되기도 한다. <나의 소녀시대>의 린전신은 사실 쉬타이위보다는 그와 한때 친했던 오우양(이옥새)에 더 관심이 많다. 쉬타이위도 마찬가지. 린전신과 같은 반인 타오민민(간정예)이 더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린전신과 쉬타이위는 서로 좋아하는 이와 맺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의기투합한다. 그러면서 관심 있는 문화를 공유하게 되고 린전신과 쉬타이위는 유덕화를 중간 다리 삼아 애초 의도와 달리 좋아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싱 스트리트>의 경우, 라피나를 향한 코너의 마음은 일방적인 데가 있다. 라피나의 마음은 사실 딴 데 가 있다. 모델이 되고픈 마음에 고향 아일랜드를 떠나 영국 런던을 바라보고 있다. 이를 간파한 코너가 자신이 결성한 밴드 ‘싱 스트리트’의 뮤직비디오를 만드니 여기 출연해 인지도를 얻으면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며 라피나를 끌어들여 깊은 관계로 나아간다. 요컨대, <응팔>에서 폭발적으로 증명된바,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특정 문화와 사랑이 결합한 청춘물은 어느 정도의 완성도만 담보되면 국적에 상관없이 큰 인기를 얻는다.

한국영화에는 부재한 청춘물

그렇다고 <나의 소녀시대>와 <싱 스트리트>를 <응답하라> 시리즈의 아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대만은 나름 청춘 영화에 강세를 보이는 국가이다. <싱 스트리트>는 <원스>(2007) <비긴 어게인>(2013)으로 음악영화의 독보적인 흥행력을 쌓아가고 있는 존 카니의 신작이다. 이들 영화는 나름의 작품성과 개성을 가지고 한국 영화에는 부재한 청춘물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대만 영화 시장은 청춘물이 장악하고 있는 기형적인 형태를 띤다. 여기서 대만 영화 시장의 불균형을 언급할 생각은 없고 다만, 그러다 보니 젊은 층에 호감을 사는 청춘영화가 꾸준히 등장하는 추세다. 이미 국내에 재개봉 하며 주걸륜의 존재감을 알렸던 <말할 수 없는 비밀>(2008), 계륜미의 매력이 돋보였던 <여친남친>(2013), 극장 개봉 없이 VOD 시장으로 직행한 <5월 1일>(2016) 등이 국내 관객들의 지지를 얻었다.

언급한 영화들은 <나의 소녀시대>처럼 현재는 성인이 된 이들이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청춘 시절에 대해 회상하는 비슷한 전개를 보이지만,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피아노 배틀’, 비지스의 음악 ‘First of May’에서 모티브를 얻은 <5월 1일> 등 독특한 설정으로 차별점을 만들어낸다. <나의 소녀시대>만의 차별점? 유덕화가 극 중에 언급되는 것 이상의 역할을 맡는다는 정도만 알려드리겠다.

<싱 스트리트>에서 코너가 부르는 노래는 라피나를 유혹하는 수단이면서 이들을 억압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이다. 특히 코너가 부르는 1980년대 브리티시 팝은 뮤직비디오 시대의 출범에 맞춰 강렬한 외양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코너는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화려한 색깔의 옷을 걸치며 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학교장의 비위를 거슬린다. ‘남자가 계집애처럼’ 잔소리를 늘어놓는 학교장에 대한 코너와 라피나의 ‘원색 原色‘적인 저항은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보수주의자들을 향한 유쾌한 항의의 성격을 드러내며 <싱 스트리트>를 음악영화 이상의 작품으로 자리매김한다.

<나의 소녀시대>와 <싱 스트리트>가 과거를 거치지만, 퇴행이라기보다 현실의 반영으로 느껴지는 건 현실이 여전히 각박할지라도 잊힌 사랑을 소환해 살아갈 힘을 얻는 이야기로 맺음 되는 까닭이다. 이렇듯 청춘의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든 존재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청춘의 사연은 한국영화에만 부재한 게 현실이다. 충무로의 게으른 제작자들은 우리 청춘들이 대입을 준비하느라, 취업에 목을 매느라 영화화할 만한 특별한 사연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다 헛소리다. 젊은이들은 힘든 알바 속에서 시간을 쪼개 뜨거운 사랑도 하고 현실이 청춘을 속일지라도 힙합과 같은 그들만의 문화로 저항하고 반항하며 특유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1980년대, 1990년대의 청춘과는 다른 2016년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사연은 곳곳에 쌓여 있다. 다만 포착하지 못할 뿐이다. 한국영화의 청춘물 부재 상황에서 <나의 소녀시대>는 국내 개봉 대만 영화 중 최고 흥행을 기록하며 순항 중이다. <싱 스트리트>는 개봉 이후 줄곧 다양성 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굳건히 지키며 국내 젊은 관객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중이다.

 

시사저널
(2016.6.4)

마블 대 DC 무비 워

marvelvsdc

마블 영화가 다시 한 번 상한가다. 반면 DC 영화는 연일 체면을 구기고 있다. DC 코믹스 원작으로 워너브러더스가 제작한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하 ‘<배트맨 대 슈퍼맨>’)과 마블 스튜디오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이하 ‘<캡틴 아메리카3>’)의 ‘코믹스 무비 워’는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모두 마블의 압승으로 끝났다. DC의 저스티스 리그는 야심 찬 ‘시작’이 무색하게 자중지란에 빠진 분위기다.

<배트맨 대 슈퍼맨>에 실망한 팬들은 이 영화를 만든 잭 스나이더가 이후 발표할 <저스티스 리그>에서 하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DC 코믹스의 또 하나의 대표 히어로 <플래시> 프로젝트도 시끄럽다. 세스 그레이엄-스미스(<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링컨: 뱀파이어 헌터>의 원작자) 감독이 워너브러더스 경영진과의 갈등으로 하차하면서 2018년 개봉에 차질을 빚게 됐다. <플래시>와 같은 해 개봉 예정이었던 <아쿠아맨>의 제작도 위태롭다. 감독으로 내정된 제임스 완(<컨저링> <쏘우> 등 연출)이 프로젝트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뜬소문이 돌고 있다.

제작 시스템의 문제라는 게 일각의 분석이다. 마블 스튜디오는 케빈 파이기라는 걸출한 제작자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를 총괄하고 있어 일이 척척 진행되는 것과 다르게 DC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DCCU’)는 사공이 너무 많다. 원작 측인 DC 코믹스에, 기획, 제작 측의 워너브러더스에,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런(<다크 나이트> 시리즈)에, 최근 총괄 프로듀서 역할까지 맡게 된 벤 애플렉까지, 의사 체계가 분산되어있다 보니 영화의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다. DCCU의 세계관은 <다크 나이트> 시리즈를 근간으로 한다. MCU가 만화적 상상력을 그대로 살리는 쪽이라면 DCCU는 슈퍼히어로의 사실적인 묘사에 신경 쓰는 편이다. <배트맨 대 슈퍼맨>의 시작만 하더라도 고층빌딩이 무너져 지상이 쑥대밭이 되는 장면은 9.11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흥미를 자아내는 오프닝에도 불구하고 잭 스나이더는 DCCU의 색깔을 밀어붙이는 대신 현실성이 떨어지는 ‘빌런’ 둠즈데이를 등장시켜 그 자신의 세계관에 균열을 일으킨다.

<배트맨 대 슈퍼맨>의 결정권자들은 이후 이어질 DCCU가 사실주의 슈퍼히어로, 즉 예술적인 블록버스터로 자리매김하는 것에 불안함을 느낀 듯하다. MCU가 철저히 대중적인 취향에 맞춰 순항, 아니 흥행의 고공행진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크리스토퍼 놀런과 잭 스나이더가 제시했던 애초의 비전이 대중적으로 수정되기를 바랐을 터다. 9.11의 현실 이미지로 시작했던 <배트맨 대 슈퍼맨>이 어느 순간부터 둠즈데이와 같은 공상과학적 세계로의 급우회전을 감행한 배경이다. 그렇게 영화는 기대와 다르게 산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결과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정 하나. DCCU도 처음부터 잭 스나이더와 같은 개성 강한 감독 대신 MCU처럼 자기 색깔을 지우고 스튜디오의 목소리를 충실히 반영할 수 있는 감독에게 메가폰을 맡겼다면 지금과 같은 처절한 결과는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흥행에서는 지금보다 조금 나았겠지만, 그렇다고 MCU를 넘어서거나 버금갈 정도의 성적으로 얻기는 역부족이었을 것 같다. 아무리 잭 스나이더가 <배트맨 대 슈퍼맨>을 뛰어난 영화로 만들었다고 해도 슈퍼히어로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이미 MCU에게로 넘어간 상황이다.

슈퍼히어로 영화는 시대에 민감하다. 리처드 도너가 1978년에 연출한 <슈퍼맨>의 성공은 개봉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떼놓고 설명할 수 없다. 미국과 구(舊)소련이 첨예하게 맞붙던 냉전의 한가운데서 미국은 자신들의 힘을 전 세계에 과시할 스펙터클이 필요했다. 슈퍼맨은 제격이었다. 크립톤 행성에서 지구로 이주한 슈퍼맨의 성장 배경은 신대륙을 발견하고 지금의 미국을 일군 국가 정체성과 맞아떨어졌다. 성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유니폼에서부터 슈퍼맨은 미국 그 자체였다.

정확히 명시한 건 아니었지만, 극 중 슈퍼맨의 적수인 렉스 루터는 구(舊)소련으로 치환해도 무방했다. 렉스 루터는 군사용 미사일을 조작해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국 서부의 해안 지역을 바닷속으로 가라앉힐 계획을 세운다. 외부의 침략에 민감한 미국은 이와 같은 설정을 전가의 보도 삼아 자신들을 선으로, 이에 반대하는 인물이나 집단을 악으로 규정하며 유리하게 여론을 이끌었다. 실제로 <슈퍼맨>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며 흥행에 성공했고 속편을 거듭했다. 그리고 구(舊)소련이 점점 힘을 잃어가자 <슈퍼맨 4: 최강의 적>(1987)을 끝으로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현실의 거대한 적이 사라지자 슈퍼히어로 영화의 미학을 결정짓던 미국의 시선이 달라졌다. 내적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적이 없어지면 평화가 찾아올 줄 알았는데 변한 것이 없었다. 너무 바깥의 정의에만 몰두했던 탓일까. 미국 내부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강력 범죄가 횡행했다. 구(舊)소련이 붕괴했다고 하는데 세계 곳곳에서는 여전히 크고 작은 전쟁으로 신음했다. 미국이 부르짖던 정의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미국은 세계 경찰의 자격이 있는 걸까? 이제 슈퍼히어로는 얼굴을 드러내는 대신 가면을 썼고 음지로 숨어들어 정체를 숨겼으며 그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했다. 바야흐로 배트맨의 시대가 도래했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배트맨을 ‘다크 나이트 Dark Knight’ 밤의 기사로 규정했다. 그가 보기에 미국의 정의는 반쪽짜리였다. 미국이라는 슈퍼히어로는 적이 있어야 자신을 증명하는 모순적인 존재였다. 흑과 백, 동전의 양면. 현실의 미국이 전쟁을 조장해 세계에 힘을 과시하듯 배트맨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악을 불렀다. 조커가 필요했던 건 그래서였다.

마침 <다크 나이트>가 개봉했던 2008년은 조지 부시 이후 미국의 차기 대통령으로 버락 오바마가 부상하던 시기였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새 시대의 도래가 유력해지면서 미국에는 기대와 불안이 공존했다. 진보는 환호했고 보수는 기득권을 뺏길까 노심초사했다. 힘의 균형이 필요한 시기였다. 여기서 크리스토퍼 놀런은 배트맨과 조커가 호각세를 이루는 대립을 봤다. 슈퍼히어로물이 코믹스의 외피를 벗고 사실주의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현실에서 선과 악은 나와 너를 가르듯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선함과 악함이 공존한다.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과 조커는 상대적인 개념에서 선과 악이다. 배트맨은 조커보다 선한 존재고, 조커는 배트맨보다 악한이다. 정의를 위한답시고 배트맨이 조커와 맞설 때마다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한다. 고담의 여론은 배트맨에게 좋지 않다. 배트맨은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다. 그런 배트맨에게 많은 이들이 열광했다. 초인으로 알았던 존재에게서 인간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지금은? <배트맨 대 슈퍼맨>에 혹평을 쏟아내고 <캡틴 아메리카 3>, 그중에서도 아이언맨에 열광하는 걸까. 슈퍼히어로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다시 한 번 바뀌었다. 이제 슈퍼히어로는 하늘에서 뿅 떨어진 신이 아니라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는 입지전적 경지의 존재다. 토니 스타크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천문학적인 유산과 직접 무언가를 만들기를 좋아하는 재능을 더해 아이언맨으로 거듭났다. 실제로 토니 스타크의 모델이 엔지니어이자 발명가이자 거물 사업가인 일론 머스크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이들에게는 고민의 시간도 아깝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신소재의 슈트를 개발하거나 미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의미 있다. 아이언맨에게는 정의도 놀이요, 재미다. 아니, 정의 따위 지키지 않은들 무슨 소용이요. 어차피 정의가 문자로만 존재하는 시대 내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세상이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 하지만 내게 해를 입힌다면 복수만으로도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데드풀>이 그렇다. 개인의 행복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 작금에 세계 평화가 웬 말인가. <데드풀>의 성공이 뜬금없지 않은 이유다.

이제 슈퍼히어로에게도 개인적인 가치가 더 중요해졌다. <엑스맨> 이후로 슈퍼히어로가 팀을 이루는 것이 유행이지만, 슈퍼히어로의 개별성도 그에 못지않은 의미가 있다. 이를 간파한 것이 마블 스튜디오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 헐크, 앤트맨 등등 개별 영화로 슈퍼히어로 개인을 조망한 후 ‘어벤져스’를 통해 시리즈를 총정리하는 전략을 취한다.

요컨대, MCU의 슈퍼히어로들은 독립적인 존재다. 이는 캐릭터 설정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DCCU와 비교해도 더욱 확연해지는 대목이다.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 확인된바, 배트맨과 슈퍼맨은 여전히 아버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배트맨은 부모님의 죽음이 여전히 마음속 한쪽을 무겁게 누르고 있고 슈퍼맨은 우주의 아버지와 지구의 아버지 사이에서 갈팡질팡이다. 그러니 갈등하던 배트맨과 슈퍼맨이 어머니의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손을 잡는 설정이 자체 논리력을 갖더라도 관객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다가갈 수밖에 없다. 정의 실현에 목매는 슈퍼히어로가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니 덩치만 컸지 정신적으로는 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 반해 MCU의 슈퍼히어로들은 아버지를 넘었거나 맞서는 패기로 성인다운 면모를 보인다. ‘천둥의 신’ 토르만 하더라도 아버지의 명령에도 불구, 신의 전쟁을 일으킨 죄로 아스가르드 후계자의 지위를 박탈당한 채 지구로 추방당한 전력이 있다. 지구에서 토르는 잃어버린 해머 ‘묠니르’와 힘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허송세월하지 않는다. 여전히 아버지 잃어 슬퍼하고 엄마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DCCU의 슈퍼히어로가 MCU를 이길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다.

그동안 슈퍼맨과 배트맨으로 대변되었던 슈퍼히어로의 무게 중심은 아이언맨과 데드풀 등에게로 넘어갔다. DC의 슈퍼히어로가 군림하던 영화계에서 마블은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이는 마블의 슈퍼히어로가 잘나서도, DCCU의 세계관이 허술해서도 아니다. 시대는 마블을 요구하고 있다. <배트맨 대 슈퍼맨>이 아무리 지금보다 더 대중적이고 잘 만들어졌다고 해도 MCU를 넘어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 DCCU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일까.

<배트맨 대 슈퍼맨> 이후 DCCU의 영화는 <수어사이드 스쿼드> <원더우먼> <플래쉬> <아쿠아맨> <사이보그> <그린랜턴> 등 배트맨과 슈퍼맨 등 기존 캐릭터에서 벗어난 슈퍼히어로와 이야기로 기대감을 높인다. 물론 <닥터 스트레인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 <블랙 팬서> <캡틴 마블> 등으로 무장한 MCU와 힘겨운 대결이 되겠지만, 슈퍼히어로를 향한 시대의 요청이 언제 어떻게 또 변화할지 모를 일이다. 당사자들 간에는 박 터지는 싸움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슈퍼히어로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이 대결을 보는 재미 또한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arena homme
2016년 6월호

이야기, 인간의 최후의 보루

38

인공지능을 향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벌써 한 달도 더 전의 일이라 모두 잊으셨으려나.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말이다. 사실 인공지능에 관한 관심이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전 세계가 주목한 인공지능과의 대결 상대가 한국인이었다는 점 때문에 우리가 더 열광한 것 같다.

좀 시니컬한 반응인가.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 드린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바둑의 ‘바 ’ 자도 모르면서 나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 더 정확히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국이 파생하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세계적으로 활약하는 우리 선수에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이입하는 한국인 특유의 국민성도 이번 대국이 만들어 낸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였다. 나처럼 바둑의 문외한도 그와 같은 이야기 덕에 이번 대국을 재밌게 관전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뭐 이리 긴장감이 넘치던지. 이세돌의 표정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대국이 어느 선수에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다섯 번의 대결 중 한 번 정도 져줄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으로 1국의 경기장에 들어선 이세돌의 표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인사이드 아웃>의 감정 캐릭터들이 우왕좌왕하듯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침착함에서 긴장으로, 당혹감에서 낭패로, 그의 표정 자체가 대국을 설명하는 이야기의 요약판 같았다.

결과는 5전 1승 4패. 이세돌의 패배, 아니 인공지능의 4승 1패 최종 승리로 마무리되자 디스토피아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앞으로 10년간 1,000억을 투입해 한국형 알파고를 만들겠다는 정부의 무사안일한 소리는 무시하자!) 벌써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월등히 압도해버리니 조만간 인간은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었다. 그러면서 언급된 영화들은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 <블레이드 러너>(1982) <터미네이터2>(1991) <엑스마키나>(2015) 등과 같은 디스토피아의 걸작들이었다.

근데 이들 영화가 묘사하는 디스토피아는 인공지능의 유해함보다는 이를 활용하는 인간의 악마성이 더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능 게임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압도하는 지금, 인간의 삶을 지옥으로 변모시킨 원인은 다른 데 있다. 인간을 기계부품으로 소비하고 노예처럼 막 대하는 일부 사회 지도층과 재벌 인사들이 소위 ‘헬조선’의 원흉들이 아니던가. 오히려 이번 대국에서 증명된바, 각종 사건·사고로 다이내믹했던 한국사회에 모처럼 정신 건강에 이로운 이벤트로 재미를 가져다준 것이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인공지능을 활용하고 실생활에 접목한다면 유토피아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걱정하는 디스토피아는 예방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내가 이번 대국을 보면서 떠올렸던 작품은 <미저리>이었다. 롭 라이너의 영화를 떠올리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스티븐 킹의 원작소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다. 결론부터 말해, 나는 이번 대결을 보면서 인공지능에 맞서 인간이 우위를 보일 최후의 보루는 결국 이야기라고 확신했다.

<미저리>는 소설가를 집에 가둬두고 쥐덫에 걸린 쥐를 괴롭히는 고양이처럼 구는 미친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표면상 그렇지만, 그 기저에는 어떠한 순간에도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에 매혹되는 ‘호모 스토리텔러쿠스’와 ‘호모 리더쿠스’의 본능이 짙게 깔려 있다. 당연히 전자는 작가, 후자는 독자를 의미한다.

워낙 강렬한 작품이어서 대략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계실 텐데 그래도 다시 요악하자면, 폴 셀던은 <미저리> 시리즈로 베스트셀러에 오른 유명 작가다. 근데 폴은 부와 명성을 가져다준 <미저리>가 혐오스럽다. 대중의 기호에 영합한 싸구려 통속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리즈 마지막에 극 중 주인공 미저리를 ‘라이헨바흐 폭포’의 셜록 홈스처럼 사망 처리하고 신작 작업을 서두른다. 우매한 대중은 진가를 몰라봐도 평론가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진짜 문학작품을 말이다.

유레카! 자신이 평가하기에 최고 작품을 완성한 폴은 기쁨에 겨운 나머지 최고급 와인 병을 들고 운전을 하다가 눈 폭풍이 몰아치는 외딴 지역에서 전복사고를 당하고 만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두 다리는 울퉁불퉁 부러진 뼈가 살 밖으로 삐져나온 채고 현실의 ‘미저리’ 애니 윌킨스가 먹잇감을 살피듯 그의 눈앞에 우뚝 버티고 서있다. 그리고 이후 이어지는 상황은 기억하시는 그대로다. 갇힌 방에서 탈출하려다가 도끼로, 안 그래도 성치 않은 다리가 무릎 아래로 잘려나가고 신작 원고는 애니가 불에 태워 없애 버리며 미저리를 되살리라는 그녀의 강요에 폴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기어이 <미저리>의 신작을 완성한다.

근데 완성한 <미저리>를 처리하는 방식이 기상천외하다. 폴은 애니가 보는 앞에서 완성한 미저리의 원고를 불에 태워버린다. 힘들게 글을 써봤던 이라면 원고를 스스로 없애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잘 아실 거다. 그러니까, 폴에게 이는 인간으로서, 또한 작가로서 생명을 건 모험이다. 다만 승산 없는 게임이 아닌 것은 폴이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는 독자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애니는 단순 독자가 아니다. 광적인 독자다. 사람 하나 죽이는 걸 벌레 잡듯 여기는 애니는 사이코패스로 태어났다. 그와 다르게 이야기에 대한 욕구는 모든 사람이 갖고 태어난다. 이 두 개의 성향이 결합하니, 애니는 그동안 자신이 살해했던 사람들의 기사를 모아 일종의 자서전을 만들 정도로 이야기에 대한 이상 집착 증세를 보인다. 폴이 생명과도 같은 자신의 소설을 불태우면서까지 일을 꾸민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정상적인 경우지만, 인간은 그렇게 이야기에 살고 이야기에 죽는 이야기의 존재다. 이야기와 전혀 무관해 보이는 듯한 영역에서도 이야기를 강조하는 건 이유가 있다. 가령, 프로스포츠, 그중 스토브리그가 정규 시즌 못지않게 관심을 끄는 데에는 경기에서는 맛볼 수 없는 또 다른 이야기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1년 동안 맹활약한 선수는 대박 연봉을 기록하는가 하면 더 높은 리그에 진출해 전국민적인 관심을 끈다. 그와 다르게 활약이 미미해 코칭 스태프와 갈등을 빚었던 선수는 소속할 팀을 찾지 못해 안타까움을 자아내며 명성을 날렸지만, 새로운 리그에서  적응이 수월치 않아 제대로 된 출전기회를 얻지 못해 팬의 애간장을 녹이기도 한다.

혼자 살 수 없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관계에서는 늘 이야기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고로 이야기는 인간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매체다. 감정 습득이 쉽지 않은 인공지능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이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 이후 언론은 인간의 창의적인 영역까지 넘보는 인공지능의 능력을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소설 쓰는 인공지능, 그림 그리는 인공지능, 심지어 예능 프로그램에서 끝말 잇는 인공지능까지, 이런 식이면 얼마 못 가 인간이 설 영역이 모두 없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도 문제는 아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공포를 만드는 것이 결국 이야기다. 나는 여기에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너무 거창하게 말했나.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미래 사회에 대한 불안은 앞서 언급했듯이 인공지능을 악용하는 인간의 악마성을 전제한다. 이는 역으로 인공지능이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이처럼 다채로운 감정을 효과적으로 담아내는 인간 삶의 방파제 같은 것이다.

감정이 존재하는 한 사람은 이야기를 떠나서 살 수 없다. 이야기는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출근길의 버스에서, 퇴근길의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정신없이 들여다보는 것도 결국 이야기에 대한 욕구 때문이다. 손 한 뼘 크기의 액정에 담긴 연예인의 가십 기사에서도 우리는 이야기를 발견하고 ‘카톡’거리면서 키득키득 주고받는 메시지 속에 관계를 생성해 상대방과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결국, 이야기는 인간이 살아가는 원동력이자 동굴에 갇힌 삶에 비추는 빛과 같다. <미저리>의 폴 셀던이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와중에도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그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를 알리겠다는 욕구의 발현이었을 테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이유는 살아생전 쉽게 볼 수 없었던 이야기가 거기에 존재했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연필을 들고 종이에, 엄지손가락으로 스마트폰 액정에, 키보드를 두드려 모니터에 쓰고 또 쓰고, 그렇게 쓰고 있다. 모두가 하나같이 자신의 삶의 작가인 것이다. 그래서 인류 최후의 날에도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 애쓸 것이다. 인공지능은 넘볼 수 없는 이야기를 각자의 영역에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인간이 살 길이 아닐까.

 

ARENA HOMME
2016년 5월호

덕후가 만드는 아름다운 세상

74

한때 ‘셜로키언’이라고 엄청나게 뻐기고 다닌 적이 있다. 코난 도일이 살아생전 발표했던 장편 4편과 단편 56편을 적어도 2번 이상 읽었고 영화 속 주요 공간은 물론 홈즈와 관련한 박물관 등을 찾아 직접 유럽 여행을 감행하기까지 했다.

가장 먼저 영국 런던에 도착, 셜록 홈즈 동상이 맞이하는 베이커 스트리트 전철 역을 나와 ‘베이커가 221b’를 방문했다. 그 부근으로 이동해 셜록 홈즈 컬렉션으로는 최고로 평가받는 ‘메리본 도서관’에서 귀중한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또한, 추리소설만 전문으로 다루는 서점 ‘머더 원’에도 부러 찾아가 영국인들의 추리소설 사랑을 직접 목격했다.

셜록키언이라면 빠질 수 없는 성지, 스위스의 ‘라이헨바흐 폭포’에도 다녀왔다. 라이헨바흐 폭포는 루체른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마이링겐의 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1893년 출간된 <셜록  홈즈의 회상록>의 마지막 장에 실린 ‘마지막 사건’에서 셜록 홈즈가 범죄의 왕 모리아티 교수와 혈투를 벌이다 떨어져 죽은 장소다. 소설에서 상상했을 때보다 직접 찾았을 때 느낀 감동이 더 컸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산 초입에서는 그저 자신의 의지에 반해 힘없이 흘러내리는 물줄기로만 보였던 폭포가 산 중턱에 오르자 다르게 보였다. 눈앞에서 위용을 드러낸 라이헨바흐 폭포의 거대함에 그만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험한 물 구절 질에 압도당하던 그 순간, 흡사 내가 모리아티 교수와 최후의 결전을 앞둔 것처럼 현실과 소설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그랬다. 나에게 셜록 홈즈는 그저 소설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셜록 홈즈를 현실의 인물로 감정 이입했다. 내 마음속의 셜로키언 협회에서 회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귀국해서는 라이헨바흐 폭포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떠들어댔다.
“선배, 여행 갔다 오셨다면서요?”
“셜록 홈즈가 모티아티와 싸우다 떨어져서 실종된 장소 있잖아, 라이헨바흐 폭포 갔다 왔어”

여행 관련한 글을 청탁받을 때도 무조건 라이헨바흐 폭포였다.
“저희가 이번 여행 특집으로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했던 장소를 다루고 있는데요.”
“셜록 홈즈의 ‘마지막 사건’ 배경이 됐던 라이헨바흐 폭포 어떠세요?”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셜로키언에도 나름의 등급이란 게 있다. ‘소설 속 내용을 줄줄 꿰고 있는 사람 < (나처럼) 소설 속 장소를 직접 방문하는 사람 < 읽고 방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홈즈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광의 단계를 두고, 처음엔 영화를 좋아하고 그다음엔 영화에 관한 글을 쓰고 마지막으론 영화를 만든다고 정의했다. 셜로키언의 단계도 이에 빗대어 정할 수 있을 듯하다. 셜록 홈즈 소설을 좋아해 이를 소장하고, 이후 관련한 실재 장소를 찾아가고, 결국 그와 같은 경험을 토대로 책, 드라마, 영화와 같은 콘텐츠를 생산하는 것.

<주홍색 연구>가 1887년 출간된 이후 셜록 홈즈가 130년 가까이 사랑받을 수 있었던 건 원작의 우수성과 더불어 이를 재생산하고 재창조하는 문화가 널리 퍼졌기에 가능했다. 그러니까, 셜록 홈즈는 여전히 진행형인 콘텐츠다. 단적으로 빅토리아 시대 배경을 현대로 옮긴 영국의 BBC 드라마 <셜록>은 시즌마다 시청률을 경신하고 있고 이미 내년 방영 예정인 시즌 4를 예고해 시청자의 기대감을 한층 더 끌어올린 상태다.

나도 <셜록>의 국내 방영 때면 실시간 시청하는 열렬한 팬이지만, 더 관심이 가는 콘텐츠가 있다. 코난 도일이 창조한 홈즈로 현재의 작가들이 새롭게 쓴 ‘홈즈 소설’이다. 국내에도 꽤 많은 홈즈 소설이 출간된 상태다. 대표적으로, 코난 도일 재단에서 공식으로 인정한 작가 앤터니 호로비츠는 <셜록 홈즈 실크 하우스의 비밀>과 <셜롬 홈즈 모리어티의 죽음>을 발표했다. ‘간달프’로 유명한 이안 맥켈런이 93세의 홈즈로 분한 <미스터 홈즈>(2015)의 원작소설 <셜록 홈즈 마지막 날들>도 꽤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가장 인상깊게 읽은 셜록 홈즈 소설은 그레이엄 무어가 쓴 <셜로키언>이다. 셜록 홈즈 소설을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워온 그레이엄 무어는 첫 번째 소설 <셜로키언>을 발표하자마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른 1981년생의 젊은 소설가다. 우리에게는 2015년 아카데미에서 각색상을 받은 <이미테이션 게임>의 시나리오 작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셜로키언>을 읽고 있으면 재미는 둘째치고 셜록 홈즈와 관련한 그레이엄 무어의 대서양 같은 지식에 라이헨바흐 폭포 한 번 다녀온 걸 가지고 셜로키언 운운한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그레이엄 무어에게 <셜로키언> 집필의 실마리를 제공한 건 저명한 셜록 홈즈 학자 리처드 랜슬린 그린의 사망이었다. 코난 도일 사후 사라진 문서를 두고 코난 도일 가문과 갈등을 겪던 중 발생한 사건인데 셜로키언 사이에서 꽤 유명한 일이라는 걸 난 이번에 처음 알았다.

코난 도일과 <드라큘라>의 저자 브램 스토커가 절친한 관계였다는 것도 <셜로키언>을 읽기 전에는 금시초문이었다. (줄리언 반스는 이 둘의 관계로 소설 <용감한 친구들>을 썼다!) 그레이엄 무어는 역사적 사실에 허구의 상상력을 보태 각각 1900년과 2010년을 배경으로 삼는다. 자신의 집에 배달된 소포 폭탄의 범인을 잡으려 나섰다가 의문의 연쇄살인에 휘말리는 코난 도일과 브램 스토커의 사연을, 코난 도일의 사라진 일기장을 두고 벌어지는 셜로키언 추격전을 교차로 서술하며 근사한 또 하나의 셜록 홈즈 소설을 완성했다.

그래서 이 글은 자격도 없이 셜로키언임을 자처하며 입방정을 떨어댔던 내 지난날에 대한 반성문인가. 셜로키언이 되려면 한참 멀었지만, 준(準)셜로키언으로서 (곧 죽어도 셜로키언이라고 자처하는 나!) 진화하고 발전하는 셜록 홈즈 콘텐츠를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언젠가 나 또한 셜록 홈즈 콘텐츠를 생산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 비로소 세상의 중심에서 ‘나는 셜로키언이다!’ 자신 있게 외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안 그러면 또 어떤가. 동시대에 가장 사랑받는 콘텐츠를 누리는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만도 삶이 즐겁다. 특히 내게는 소설이 그러한데 종종 ‘그런 거’ 읽으면 얻는 게 무엇이냐, 는 얘기를 들을 때면 막 항변하고 싶어진다. 지식 습득에 한정한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지식을 시험에 좋은 점수를 얻거나 돈을 벌 유용한 수단으로 정의한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한국에서 갈수록 독서 인구가 줄어들며 독서 문화가 경직되는 건 그와 같은 배경이 결정적이다.

독서의 더 중요한 기능은 오락이다. 독서는 공부가 아니라 즐기고 향유하는 문화다. 누구나 이야깃거리를 찾고 그중 누구는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이야기를 만들기도 한다. 소설은 그렇게 누구에게나 접근 가능한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스마트폰에 밀려, 영상매체에 치여, 무엇보다 책 읽기를 공부와 동일시하는 사회적 환경에 함몰되어 갈수록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셜록 홈즈와 같은 콘텐츠가 더 주목받는 것이리라.

즐기는 건 순간이지만, 셜록 홈즈와 같은 콘텐츠는 순간의 유희로 휘발하지 않고 가능한 오래가도록 만든다. 문화가 가진 저력은 오락의 지속성에 있다. 세상에는 불행과 비극이 넘쳐난다. 그런데도 살 만하다고 느끼는 건 우리 가까이에 즐길 수 있는 문화 ‘꺼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화가 세상을 바꾼다는 거창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적어도 문화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 문화는 그 자체로 ‘공유’를 포함한다. 재생산과 재창조는 문화의 본질이기도 하다. 셜록 홈즈 콘텐츠는 그와 같은 문화의 본질을 제대로 증명하는 사례다. 그 바탕에 있는 것이 바로 소설이다. 지금은 셜록 홈즈 소설을 읽는 독자보다 드라마와 영화로 즐기는 팬들이 더 많지만, 코난 도일이 소설을 통해 셜록 홈즈를 창조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셜록 홈즈 콘텐츠도 존재하지 않았을 터다.

확실히 여러 모에서 미래가 잿빛인 작금에 소통의 다리를 놓아주는 건 셜로키언과 같은 팬덤, 즉 덕후 문화다. 국민의 하나 됨이 주입식으로 전달되는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율적으로 형성되는 덕후 문화가 시사하는 바는 확실하다. 팬덤은 해당 팬들의 성격에 따라 폐쇄적이기도 하지만, 즐긴다는 목적에 따라 형성된 만큼 이루려는 방향이 일치하면 어렵지 않게 합종연횡으로 진화를 거듭한다

예컨대, 오랜만에 정치를 혐오가 아닌 오락의 시선으로 접근하게 만들어 준 건 필리버스터에 열광한 이들이었다. 필리버스터 그 자체로도 긍정적이었지만,‘마이 리틀 텔레비전’과 같은 1인 방송 프로그램에 익숙한 이들은 이를 감상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 회 레비전’로 오락화하며 더욱 재미있는 콘텐츠를 재생산, 재창조하며 정치에 대한 참신한 접근법을 제시했다. 정치를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우리가 즐기고 소비하는 문화로 만들어 친근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이다.

요는, 아무리 둘러봐도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요즘의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그나마 아름답다고 할 만한 것들의 상당수는 셜로키언과 같은 덕후들이 만들어가는 것이지 않나 싶다. ‘국민의 하나 됨’과 같은 일방향적이고 폭력적인 구호가 아무렇지 않게 난무하는 이 시기에 팬덤이야말로 순순히 오락적인 힘으로 이 세상을 자발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문화는 그래서 중요하고 이의 가치를 나누고 재생산하는 팬덤의 가치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나는 앞으로도 ‘셜로키언이다’라고 주장하고 다닐 생각이다. 우리 모두가 셜로키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국민의 단합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라는 새마을 운동 시대의 구호보다 더 건강하다.

 

ARENA HOMME
2016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