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과 공정위, ‘눈뜬장님화’를 규탄한다!

공정거래위원회와 법원이 ‘눈뜬장님’일 가능성이 높아 충격을 주고 있다. 문예진흥기금과 <그때 그 사람들>과 관련, 초딩들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뻔한 사안에 대해 눈뜬장님이 아니고서는 꿈도 꿀 수 없는 판결을 내린 것.

먼저 공정거래위원회. 지난 2004년 1월을 기해 문예진흥기금이 폐지됐음에도 극장들이 담합해 입장료를 인하하지 않고 부당이득을 취한 것에 대해 무혐의 처리를 내려 빈축을 사고 있다.
법대로라면, 지난해부터 극장들은 7,000원이던 입장료에서 문예진흥기금에 해당하는 500원을 인하한 가격 6,500원만 받았어야 한다. 그런데 이를 개무시하고 관객에게 여태껏 7,000원을 받아 처먹고 있으니 이는 명백한 부당이득이다.

하지만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는 이번 사태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는 “조사를 졸라 열심히 했음에도 특별한 혐의점이 없다”고 당당하게 발표해 화를 자초한 것이다. 더군다나 문예진흥기금의 폐지를 전후한 특정 극장의 입장권을 비교해 보더라도 극장측의 얍삽한 탈법행위가 뻔히 드러나는 마당에 무혐의 처리를 내렸으니 스스로가 ‘나 눈뜬장님이요~’라고 실토한 꼬라지가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공정거래위원회에 이어 법원마저 눈뜬장님 선언을 해 파문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박지만측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그때 그 사람들>의 상영금지소송을 제기한 것에 대해 법원이 생뚱맞게 3분 분량에 해당하는 필름의 삭제명령을 내린 것이 발단이다.

헌법이 금지하고 있는 사전검열이라는 점에서도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건, 왜.와이.뭐땀시롱 박지만 측이 지적한 특정 장면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부마항쟁과 박정희 전 대통령 장례식 다큐멘터리 장면 등에 대해 삭제명령을 내렸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판사가 눈뜬장님이었기 때문에 이번 판결이 가능했다는 논리를 펴 강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송인이 제기한 장면과 코딱지만큼의 상관도 없는 다큐장면을 들어 “현실과 픽션을 혼동할 염려가 있으니 삭제하라”는 등의 종로에서 닭발 먹고 영등포 와서 오리발 내미는 사운드를 지껄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일부에서는 이번 판결을 내린 당사자들이 과거 박정희 독재시절 해온 짓거리가 있어 이를 은폐하기 위해 삭제명령을 내렸다는 의견을 제시해 눈길을 끌고 있다. 허나 국민을 만만한 홍어 거시기로 알고 있다면 모를까 어찌 감히 국민의 종이랄 수 있는 정부기관에서 국민의 볼 권리와 알 권리를 침해하는 판결을 내릴 수 있겠는가. 에이, 설마 그럴 리야 있겠어…

공정거래위원회와 법원의 판결이 무효라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소리 높여 외치는 바이다. 공정거래위원회와 법원의 ‘눈뜬장님화’를 규탄한다!

*필자는?

딴지일보에서 영화전문기자로 활약하고 있다. 주머니 사정 되는 대로 영화관 들락거리기 수십년. 이제 눅눅해진 팝콘만 먹어도 어떤 영화관인지 알아내는 고수가 되었다.

(2005. 3. 6. <스포츠투데이>)

스크린쿼터 축소, 이건 음모다!

1.

영화의 유입이 늦고 산업이라는 측면에서 일찍이 접근할 수 없었던 한국은, 영화사 초기부터 산업과 대중문화의 차원에서 영화를 급속도로 발전 시켜 온 헐리웃과는 애초부터 경쟁이 되지 않는 상대였다. 그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영화를 상영하는 국가 중 인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가 몽창 헐리웃의 지배권 하에 있는 것만 봐도 자명한 사실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자국의 영화문화를 육성하고 헐리웃과 맞붙어 최소한의 게임 수준이라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자국영화에 대한 홈 어드밴티지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스크린쿼터였던 것이었던 거시기다.

우리는 1967년부터 이를 받아들여 자국영화 제작의 안정을 도모하였으나 파행을 거듭하다가 2001년 한국영화 점유율(서울 관객 기준) 46.1%, 2002년 45.2%, 2003년 6월 현재 46.2% 등 2000년대부터 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런 스크린쿼터가 지금 한국에서 뜨거븐 불감자가 됐다. 재정경제부에 따르면 한국경제가 위축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미투자협정(BIT)이 이뤄질 경우 40억 달러의 투자유치 효과를 볼 수 있어 당장의 국가경제에 이득이 되는데 스크린쿼터가 발목을 잡고 있으니 이것만 양보하면 조속한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거다.

우리 영화 점유율이 50%에 육박하고 한국영화 상영일이 1년에 147일이나 될 정도면 자생력을 갖춘 것이나 다름없으니 한국영화 의무 상영일수를 146일에서 73일로 줄이자는 얘기다. 근데 왜 영화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현행 제도를 끝까정 고집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재정경제부 이하 이 의견에 동조하는 몇몇 언론덜의 주장이다.

영화인들을 향한 곱지 않은 팬들의 시선 또한 스크린쿼터 축소에 강한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는 안타까운 결과 또한 나오고 있다. 평상시 사회문제는 돌(石)보듯 아랑좃하지 않고 있다가 스크린쿼터 문제만 불거지면 외제차 타고 쪼르르 몰려나와 투쟁하는 꼴이 영 밥 맛 없을 뿐 아니라 스크린쿼터로 생긴 사회적 이익이 오로지 특정인 몇 명에게만 돌아가는 꼬라지가 영화계의 밥그릇 지키기로만 비춰 진다는 거다.

이번 스크린 쿼터 폐지 반대할 때 또 얼굴을 내민 한석뀨. 자신의 개런티를 대폭 늘림으로써 울나라 영화 제작비 상승에 커다란 역할을 한 사람 아닌가. 하지만 스텝들의 처우는 최저 생계비 수준도 안 되는 게 울나라 영화판이다. 스크린 쿼터로 인해 생기는 사회적 이익이 이처럼 소수 사람들에 의해 독식되고 있는데 누가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겠는가?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엄따. 영화인들이 백번천번 잘못한 거다. 팬덜이 있기에 자신들도 존재하는 것이거늘… 팬의 지지가 중요한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시기에 지지는커녕 오히려 불신을 받고 있는 현실, 영화인 니덜이 초래한 결과다. 욕 바가지에 드럼통으로 쳐 먹어도 싸다, 씨파!

하지만 독자덜이여, 우리 오독하지는 말자. 작금의 스크린쿼터 문제는 한 나라의 정신이 걸린 일이지 영화인들의 빗나간 사회 연대의식을 탓하는 자리가 아니다. 근데 영화인에 대한 반감을 이유로 스크린쿼터 축소에 힘을 실어 준다면 이것은 소탐대실(小貪大失)이요, 쓰레기차 피하려다 똥차에 치이는 꼴이다.  

이런 영화인들의 문제, 스크린쿼터 논쟁이 해결된 후 추궁해도 늦지 않타. 본지 역시 그냥 좌시하지 않을 거시니 잠시 그 문제는 접어두도록 하자. 오케?  

2.

몇 년 전 국내에서는 영어공용화론으로 한바탕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영어를 외국어로 따로 배울 것이 아니라 국어로 채택해서 불필요한 소모도 줄이고 궁극적으로 국제화 시대에 두발 앞서 나가자는 주장이었는데 언어의 기능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어릴 때 한글 따로, 영어 따로 배우지 말고 그냥 영어만 가르쳐서 영어만 사용하면 얼마나 편하겠냐. 하지만 우리말 한글은 기능적인 측면에서만 볼 수 없는 우리의 정신과 얼이 깃든 고유한 문화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문화고 문화는 그 나라의 정신이다. 특히나 미국이 세계영화시장의 85%를 독식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의 영화를 지켜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 우리가 지켜야 하는 건 영화가 아니라 영화 속에 표현된 혹은 앞으로 표현될 우리들의 희노애락, 삶, 문화인 거다. 그런데 미국이란 나라의 영화산업은 세계에서 젤로 강해서 전 지구의 85%를 혼자 잠식해버린 거다.

물론, 다양성의 차원에서 미국의 영화도 존중하고 보호해줘야 한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오히려 전혀 그 반대다. 다양한 문화가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영화 하나가 그 다양성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는 상황인 거다.

최근 국제사회는 세계무역기구(WTO), 쌍무투자협정(BIT), 자유무역협정(FTA) 등 미국으로부터 문화정체성과 다양성이 공격받고 있는 작금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문화협약’ 체결이라는 제도를 제시함으로써 스크린쿼터제와 같은, 각 국의 현실에 맞는 다양한 문화정책을 국제법으로 지켜주려 하고 있다.

뿐인가, 최근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 영화인들은 “문화는 인권이며 인권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라는 졸라게 멋진 말을 남겼다.

그러타. 문화는 정신이기 때문에 교역의 대상도 아니고 더군다나 협상의 대상도 아닌 거다. 만약 그런 논리라면 프랑스가 가져가서 돌려주지 않고 있는 ‘직지심경’을 돈으로 대신 받아오면 된다. 나라가 돈 없어 쪼들린다면 우리나라 각종 문화재들 외국에 다 가져다 팔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한 나라의 문화는 그처럼 돈으로 쉽사리 환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지금 재정경제부에서, 언론에서 스크린쿼터의 축소를 언급하며 협상을 유도하려는 건 옳지 않다. 결국 한국영화가 자생력을 갖추고 스크린쿼터를 폐지해도 되는 그 날이 온다면 수치로 환산되는 양적팽창이 아니라 헐리웃과 같은 선상에서 경쟁을 할 수 있는 질적 성장이 담보되는 때라 이 얘기다.

하지만 한국의 재정경제부와 몇몇 언론들은 지들이 먼저 나서서 미국에게 스크린쿼터를 양보하라고 난리다. 참으로 미치고 환장해서 펄쩍 뛸 노릇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스크린쿼터를 폐지 할 경우 미국으로부터 40억 달러의 투자에 버금가는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고 게다가, 씨바, 럴수럴수 이럴수가, 세상에 이런 놀라운 일이!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자본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한반도를 지킬 것이니 전쟁 억제 효과까정 있단다.

아~ 스크린쿼터는 진정 우리 자주 국방의 적이요, 한반도 위기의 주범이었던 거시란 말인가…

그치만 근거는? 엄따. 그냥 그렇단다. 몇몇 신문들도 재정경제부의 주장만 곧이곧대로 듣고 아무런 지표 제시 없이 40억 달러 투자 운운하며 여론몰이를 하니 우리 같은 범인들은 그냥 그런갑다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웬지 음모의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원래 음모론은 그 내용이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 황당하며 그 증거 또한 부실하기 짝이 없는 법이다. 재정경제부의 스크린쿼터 축소론이 딱 그 짝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까정 스크린쿼터를 물고늘어질 리가 엄따.

스크린쿼터를 음해하기 위한 음모… 그 음모의 실체를 함 까밝혀보자.  

3.

스크린쿼터 축소가 재정경제부의 음모라는 사실은 한미투자협정의 내용이 얼마나 불공평한 지만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한미투자협정, 다시 말해 쌍무투자협정인 BIT(Bilateral Investment Treaty)는 외국인의 투자를 보호하고 규제하기 위해 체결된 투자국과 유입국 간의 16개의 조항을 담은 협정을 말한다. 중요한 건 이 협정이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투자에 관한한 ‘동등한 권리의 부여’를 원칙으로 한다는 거다.

동등한 권리의 부여, 근데 과연 한미투자협정이 양국 간의 동등한 권리를 보호하고 있을까?

한국영화 상영일수를 최소 103일에서 최대 146일로 정하고 있는 스크린쿼터가 문제가 되는 것은 한미간의 무역표준협정,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이 일방적으로 정한 투자협정문의 제6조 ‘이행의무부가금지’에 대한 것인데 외국의 투자자본이 들어와 있는 분야에서 국산품의 구매행위와 내국인의 고용을 강제로 유도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다.

따라서 한미투자협정이 체결되어 미국인들의 투자가 이뤄진다면 스크린쿼터는 국산품의 구매행위를 강제하고 있기 때문에 협정위반인 셈이다. 물론 영화뿐만이 아니더라도 미국인들의 투자행위가 있는 분야에서 ‘국산품을 애용합시다’와 같은 문구사용은 협정 위반이 될 뿐 아니라 국가유공자 우대와 같은 특별채용도 내국인의 고용을 강제하는 것이 된다. 때문에 이로 인한 생긴 투자자 즉, 미국의 손실은 고스란히 우리가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BIT는 말이 동등한 협정이지 외국자본이 부족한 후진국들이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협정임으로 선진국은 자본투자를 빌미로 해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항을 마구마구 삽입한다.

윗썰에 예를 든 ‘이행의무부가금지’는 그 중 하나일 뿐이지 인권, 노동권 등 한 국가의 가장 기본이 되는 권리를 파괴하는 독소조항들이 열나 가뜩 포함되어 있다.

환경권도 마찬가지다. 이건 생존권과도 관련된 것인데 한국에는 자국의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규제장치덜이 있다. 한옥과 같은 전통가옥을 지키기 위해 일정거리 안에는 2층 높이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규제 같은 것덜 말이다.

그런데 이 가옥을 보호하기 위한 예산이 부족하여 미국의 투자를 받았을 경우 이덜이 10층 이상의 건물을 그 앞에 지어도 우리는 뭐라 제지할 수가 없다. 이러한 환경관련 규제조치가 투자자의 재산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제지하게 되더라도 투자자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상당한 양의 금전배상을 받을 수 있다. 건물도 짓지 않은 상황에서 말이다.

이런 불평등 조약을 금하기 위해 GATT나 OECD는 일시적으로 특정 조약상의 의무를 면제 해주는 세이프가드조항을 삽입하고 있는데 한미투자협정에는 이런 조항이 눈씻구 요기조기 구석구석 찾아봐도 엄따. 불평등인 거다.

한미투자협정은 10년 간 효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유효기간이 끝났더라도 그 기간 안에 투자가 이뤄진 사항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10년의 유효기간이 주어진다고 한다. 그니까 세이프가드조항도 엄꼬 이런 상황에서 한미투자협정이 체결되면 앞으로 20년 동안은 스크린쿼터라는 제도는 자취를 감추는 것이다. 자칫 한국영화의 씨앗이 말라버릴 수도 있다는 의미다.

한미투자협정의 실체, 이렇타…

4.

보셨다시피 한미투자협정 이건 동등하기는커녕 도리어 미국에만 유리한 조항인 셈이다. 아니나 달라 이와 같은 조항이 담겨진 협정으로 미국과 체결을 맺었던 아르헨티나는 채무불이행에 빠지고 경제도 파탄 난 것이 지금 완전히 조뙜다.

그 결과 웬만한 국가들은 BIT의 불평등한 조항을 시정하기 위해 지리한 협상을 벌이고 있으며 OECD에 가입한 국가 중 쌍무투자협정을 체결한 나라는 단 한군데도 엄따.

그런데 지금 한국정부는 어떤가? 이와 같은 불공정한 협정을 시정하려는 노력은 개코도 보이지 않고 한시라도 빨리 한미투자협정을 체결하려 난리법썩오도방정부루스를 추고 있다. 더더군다나 이렇게 한미투자협정과 관련하여 먼저 해결해야 할 불평등한 문제가 산적한 이 마당에 작다면 작은 부분인 스크린쿼터만을 물고늘어지면서 이 때문에 협상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건 무슨 이유인가?

스크린쿼터가 만만한 홍어조시라서 그런가? 그렇지 않고서야 근거도 없는 40억 달러 얘기에 전쟁방지책 등 몸통은 숨긴 채 깃털만 가지고 이야기 할 리는 없다. 무언가 음모가 있는 거다.

하지만 그 음모의 실체는 무얼까? 각계에서는 여러 가지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최근 유럽은 투자무역협정에서 문화를 예외조항으로 인정하자고 결의했단다. 근데 우리가 한미투자협정을 받아들여 스크린쿼터를 축소 또는 폐지하게 될 경우, 미국의 무역 협상 관계자덜은 아주 좋은 시범케이스를 갖게 되는 꼴이다.

‘한국도 하는 마당에 유럽 니덜은 왜 안 하고 뻐팅기는데… 도장 찍어!’ 이런 그림이 나오게 되는 거다. 미국이 만만하게 보이는 동방의 자그마한 나라 한국의 스크린쿼터 축소/폐지에 집착하는 이유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 정부가 재정경제부를 앞장 세워 스크린쿼터의 축소를 주장하는 건 미국의 똘만이 역할을 알아서 자처하고 있다는 거다.  

아니라고? 아니라면 재정경제부는 40억 달러가 어떤 근거에서 나왔으며 왜 다른 건 다 냅두고 스크린쿼터 축소만을 물고늘어지는지 그 실상을 국민에게 떳떳하게 밝혀야 할거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지금처럼 빙빙 둘러치기만 한다면…

스크린쿼터 축소, 이건 음모다!!

<딴지일보>

니네 B급 영화를 우습게 볼텨?

1.

열일곱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Aikido 챔프가 된 후, 미국으로 돌아와 이를 전수하던 중에 제자의 도움으로 <Above the Law>라는 영화에 출연하여 배우의 길로 들어선 스티븐 시걸.

헐리웃은 Aikido로 다져진 그의 액숑에 높은 점수를 주었고 계속해서 기회를 준 결과, 데뷔 2년째인 1990년에 출연한 <죽음의 표적>으로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고 결국 1992년 <언더씨즈>로 세계적 스타의 반열에 올라선다.

데뷔 이후 줄곧 올빽으로 넘긴 말꼬랑지 머리를 간직하고 있는 그의 매력이라면 육중한 몸에서 뿜어대는 굵직하지만 느릿한 액숑을 들 수 있겠지만 뭣보다 찌푸린 인상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무표정이 거의 예술의 경지에 올라있다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변화하지 않는 액숑과 연기 그리고 독특한 외모는 한국에서 많은 팬을 낳음과 동시에 ‘스티븐 씨발’이라 하여 놀림감이 되기도 했는데 미국에서도 역시 이런 점 때문에 래즈베리 시상식에 지금껏 총 8번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1995년에는 자신이 직접 감독까지 한 <스티븐 시걸의 죽음의 땅>이 최악의 감독상을 수상하는 불명예를 안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를 버리지 않은 채 계속 전진하고 있는 중이며 그가 출연하는 영화는 평단의 혹평에도 불구, 관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음으로써 상품가치가 있는 배우로 인정받고 있음이다.

2.

장 클로드 반담. 11세부터 무술을 익혀온 그도 역시 시걸처럼 액숑 전문배우이다. 얼라 시절 발레를 배운 까닭인지 유연한 몸동작에서 터져 나오는 360도 공중에서 뒤돌아 곧추 뻗는 날라차기가 일품인데다가 1979년 전(前) 유럽 프로 가라데 대회(European Professional Karate Association) 미들급 챔피언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그.

자신을 가리켜 가라데 계의 프레드 아스테어라고 지칭하고 있는 그는, 가라데 월드 챔피언 쉽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에서 생활하던 중 우연히 반담의 무술을 보고 이에 매료된 헐리웃 제작자에 의해 영화계에 입성하게 된다.

결국 입문 4년째 되던 1988년 <데스 게임>으로 존재를 알린 후, <지옥의 반담>, <더블 반담>, <유니버셜 솔져>를 거치며 액숑계의 스타급 대접을 받기에 이르는데,

하지만 그의 초기 배우생활은 늘어나는 인기에 비해 그 평가는 그닥 좋지 못한 편이었다. 영화에 대한 별다른 이해 없이 액숑으로만 몰아붙이는 <데스게임>에서의 그의 연기에 대해 래즈베리 어워드는 1989년 그 해 최악의 새로운 스타(Worst New Star) 노미네이트로 망신을 주었고, 그의 앞날은 단순한 액숑배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비춰졌다.

그러나 반담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액숑배우로써 단순 액숑에만 전념매진하지 않고 에쑤에푸나 판타지 쪽으로 범위를 넓혀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92년부터 94년까정 3년 연속 MTV Movie Award에서 가장 매력 있는 남자배우(Most Desirable Male)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였다. 그 후 딴딴대로, 2001년에는 Video Premere Award의 최고 남자연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영광을 안음으로써 비디오계의 최고 배우임을 인정받았다.

3.

극장의 스크린보다 비디오로 더 익숙한 배우덜. 오로지 액숑영화에만 출연함으로써 이름을 알려온 시걸과 반담. 이들은 공통적으로 섬세한 감정을 표현해내는 절제된 연기력은 한참 떨어지지만 액숑에 있어서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린 이들의 배우활동이 싸구려(?) 액숑영화에만 집중되어 있고 연기력보다는 오히려 액숑에 더 치중한다하여 편의상 B급배우라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시걸이나 반담말고도 우리에게 액숑만으로 익숙해진 배우는 꽤 많다. <레드 스콜피온>, <유니버셜 솔저>, <피스키퍼>의 돌프 룬드그렌이라든지 <섀도우 체이서>, <특명24시>의 프랭크 자가리노, <아메리칸 스트리트 화이터>의 게리 다니엘스와 <크라잉 프리맨>, <마크 다카스코스의 크로우>의 마크 다카스코스 등등.

이들 B급 배우들이 갖는 공통점은 또 있다. 모두 미국을 활동무대로 삼아 전 세계에 적지 않은 팬 층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

그럼 연기력도 영 신통치 않고 재주라고는 액숑밖에 없는 이들이 어떻게 전 세계로까정 인기의 범위를 늘릴 수 있었을까? 관객들이 원하는 바를 이들이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모타임 그럼, 관객들이 원하는 바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요즘 현대인들 살 낙이 별루 없다. 매일 아침 9시 출근해 정신 없이 일하고 나면 저녁 8시. 퇴근 후, 저녁 겸 술 한잔 빨고 집에 돌아오면 12시. 남편, 마눌과 힘겹게 빠굴 함 뜨고 잠들고 나면 또 다시 쳇바퀴 같은 하루의 시작. 절라 잼없고 따분한 반복생활을 벗어나 보려 로또도 몇 십 만원 어치 사보기도하고 주식에도 투자해보지만 오히려 더 가슴만 답답해지고 스트레스만 쌓임이다.

근데 이들 B급 배우덜이 출연하는 영화를 보면 이야기가 단순해 이해하기가 쉬우니 별 생각하지 않아서 좋고, 영화 내내 배우덜은 현란한 액숑에 전념하니 가슴이 뚜레뻥 시원해지며, 아낌없이 터져 나오는 폭발신에는 백년 묵은 변비 해소된 마냥 스트레스 싸악 내려갈 정도로 시원해짐이다.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정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액숑에만 살고 액숑에 매달리는 배우덜의 연기는 놀림감으로 삼기 딱 좋으니 만만하며, 또한 웬만큼 격식차려야하고 쩐도 꽤나 박살나는 극장과 달리 단돈 천 원에 디비져 고추 쪼물딱거리며 비됴 보는 즐거움은 그 어디에도 비할데가 엄따.

그러니 지쳐있는 현대인들에게 이들 B급배우덜이 출연하는 B급영화만큼 훌륭한 해방구가 어디 있으랴…

4.

사실 본 우원같은 경우 이들이 출연하는 영화 극장에서 보기는 쪼까 껄쩍 지근함이다. 최근에 개봉한 스티븐 시걸의 <하프 패스트 데드>, 솔직히 극장가서 보고 싶냐? 하지만 비됴로 나오면 그 어느 작품보다도 땡기는 매력이 있다. 만만하자너.

이런 카인드 오브의 영화를 만드는 제작사 측에서도 이를 잘 알고 있음이다. 그래서 원초적인 폭력에 강하게 끌리는 소비자의 본능을 간파, 이를 최대한 만족시켜 주기 위해 그것을 영화 속에 충실히 이행하고 있으며 그 결과 이들 영화들은 허접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비됴시장에서 꾸준한 인기를 모으고 있음이다.

하지만 비됴시장을 주 타켓으로 하고 있는 만큼 제작비를 천문학적으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배우들의 출연료도 그렇게 크지 않다. 반담같은 경우 초기 영화 출연료가 7만 달러, 우리 돈으로 환산할 경우 8천 5백 만원 정도. 톰 크루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정도로 매우 적은 편이다.

그러나 비됴시장에서 인지도를 쌓고 영화 쪽으로 주 나와바리를 확장한 지금은 출연료가 5~6백만 달러로 대폭 올랐는데 이게 다 비됴 시장에서 상품성을 인정받고 영화계로 올라가 그만큼의 가치를 확인시켜준 까닭이다.

이처럼 B급액숑 비됴영화들은 이를 찾는 소비자를 위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한편 메이저로 가기 위한 인재들의 가교 역할을 동시에 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미국영화의 힘으로 볼 수 있는데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 같은 경우도, 그렇고 그런 B급 영화들을 만들다 실력을 인정받아 <유니버셜 솔저>를 기점으로 <스타게이트>, <인디펜던스 데이>, <고질라>와 같은 메이저 제작사의 블록버스터를 연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미국의 메이저 영화계로서는 B급영화로 인해 인재를 수혈 받게 되고 그로 인해 대형 프로젝트라도 안전하게 맡길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는 아주 합리적인 시스템이라 하겠다.

5.

하찮아(?) 보이는 B급영화가 미국 시장 내에서 가지게 되는 의미란 틈새시장을 공략하여 또 다른 관객 층을 창출, 미국 영화의 다양성에 한 몫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를 통해 재능 있는 인재들이 메이저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을 마련함으로써 종국에는 영화의 실패에 따른 손해를 미연에 최대한 방지한다는 점이다.

본 우원, 이렇게 미국의 B급영화를 어설프게나마 살짝 언급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울 영화계에도 이런 시스템이 정착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대박환상에 빠져 돈만 있으면 뭐든 만들 수 있다는 무대포 정신으로 무장, 기본이 전혀 안 되는 블록버스터를 양산하고 있으며,

시장이 조금 커졌다고 배포를 늘려 검증 안된 감독들을 투입하는 무리수를 두고 있고,

결국에는 조폭영화와 코미디 영화를 다시 우려 먹음으로써 다양성 확보에 실패

하고 있는 작금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얼마간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쫌 뜬금없는 결말이지만두 한국영화계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로 미국의 B급영화 시장이 보여주고 있는 구조적인 시스템 문제가 아닐까 한다.

(2003. 3. 7. <딴지일보>)

영화보다 덩치가 더 커버린 <씨네21>

1.

필자가 이 글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내용은 영화권력이 되어버린, 이상하게 영화보다 덩치가 더 커버린 영화주간지 <씨네21>을 비판하기 위해서다. 바로 이들의 과도, 무절제, 부적절 애무 행각에 대한 고발기사가 되겠다.

<씨네21>은 1995년 당시 외국 영화의 직배 이후 급작스레 늘어난 영화 개봉에 맞춰 이에 따른 대중의 정보욕을 총족시켜주기 위해 한겨레신문사에서 기획, 제작된 주간지 형태로 1995년 5월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게 된다.

다시 말해 이러한 태생적 배경은 <씨네21>의 존재 이유가 이 잡지를 구입하는 독자를 고객으로 모시고 있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들이 독자를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곧 대중에게 유리한 결국 대중의 입장에 선 기사를 전달하겠다겠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 <씨네21>은 자신들을 ‘영화 정론지’라 칭하였다.

그럼 우린 이 부분에서 ‘정론’에 대한 의미를 정확히 가릴 필요가 있다. 왜냐, 그것의 정의를 통해 최근의 아니 그 이전부터 <씨네21>이 ‘정론지’라는 이름을 내걸고 자행해 온 특유의 보도형태의 실태를 목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전에는 정론에 대해, ‘바른 언론, 이치에 맞는 의견이나 주장’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씨네21>이 그들의 주장대로 되기 위해서는 이치에 맞는 영화평이나 기사를 통해 독자가 영화를 선택하는데 있어 키잡이 역할을 제시할 때에 ‘바른 잡지’된 도리를 수행한다 평가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충실히 유지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씨네21>을 ‘정론지’라 부를 것이다.

2.

그럼 스스로가 영화정론지라 자처하는 <씨네21>의 그간의 족적은 어떤가. 과연 그들이 정론지의 신분에 어울리는 자세를 보였다고 할 수 있을까. 지난 8월말 정론지로서 <씨네21>의 허위가 극명히 드러난 사건이 있었다. 바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하 성소)>의 개봉을 앞두고 이들이 보여준 일련의 기사는 그 폐단이 집중적으로 부각된 경우였다.

<씨네21>은 이 영화의 개봉이 가시권 안에 들어오자 개봉 3주 전부터 ‘시사기’, ‘영화집중소개’, ‘감독의 신변잡기’, ‘찬반양론을 빙자한 호의기사’ 순으로 <성소>측에 서서 관객동원을  위한 홍보전단의 대안으로서뿐 아니라 최후의 수단으로써의 체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무엇보다 <성소> 개봉 1주전 특집이라는 미명하에 <씨네21> 368호에 소개된 ‘장선우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라는 무려 15쪽에 걸친 기사는 그들이 영화 잡지의 본분은 망각한 채 영화 팸플릿으로의 순간적인 업종전환을 보여준 극명한 사례라 할 만하다. 뿐인가, 영화업계의 쌍두마차 시네마서비스가 투자/배급하고, 태원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하여 2000년 여름 개봉한 <비천무>는 어땠나. 김혜린의 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이 작품은 각색의 미숙, 연출의 미숙, 연기의 미숙 누가 봐도 미숙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허접한 만듦새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영화전문가들이 모였다는 <씨네21>은 이 작품을 옹호해 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개봉을 1주 앞둔 시기에는 <비천무>의 가장 크나큰 실패요인이랄수 있는 주인공, 김희선을 앞세워 영화에 대한 걱정과 영화배우로서의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그녀의 소개기사를 실어 동정심을 부각, 관객들이 품고 있는 배우 개인에 대한 호감을 자극하여 극장관람으로 이끄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게다가 이와 같은 호의적인 기사와는 반대로 관객들의 성토가 절정을 이루던 개봉 3주차 <씨네21> 260호에는 이 영화에 대한 냉철한 분석 및 냉정한 평가는 온데간데 없고 되레 ‘외전 비천무 출정기’라는 13페이지에 달하는 특집기사를 구성, <비천무>를 소재로 한 가상소설과 감독과의 대화를 전면에 내세워 흥행분위기를 조장하였다. 특히 이 특집기사에서 한꼭지를 차지하고 있는 ‘온라인 <비천무> 논쟁-호평하면 관계자, 혹평하면 문화사대주의자?’라는 입장표명이 애매모호한 기사를 통해 관객의 분노 중 일정부분 책임이 있는 <씨네21> 자신들의 행적에 대한 쟁점을 교묘히 피해가는 술수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위의 <성소>, <비천무> 두 사례는 <씨네21>이 자신들의 입장을 확실히 밝히기보다는 감독의 서열이나 제작사의 덩치에 쉽게 좌지우지되는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결국 <씨네21>이 사리나 도리에 합당한 주장을 펴는 정론지가 아니라 영화 관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업계지로, 독자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영화 선택에 있어 하등 도움이 안되는 공론지라는 사실을 실토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3.

<씨네21>이 업계지로써, 공론지로써 두각을 나타낸 시기는 <단적비연수>와 <리베라매>가 동시에 개봉했던 2000년 11월, 276호에서였다. ‘블록버스터 대결전’이라는 허울을 쓰고 마련된 특집코너에 제작과정에서부터 장르소개, 스타분석, 감독의 인터뷰까지 두 영화에 대한 호의 기사는 민망할 정도의 작품성에도 불구, 기대 이상의 호성적을 거두며 관객의 뒤통수를 치는데 결정적인 첨병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씨네21>은 이같은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다만 2000년 11월부터 유독 그 활약도가 두드러진 건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의 폭발적인 흥행으로 촉발된 관객들의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이때부터 거대한 산업을 받쳐줄만큼의 커다란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즉, 국내영화에 대한 팬들의 관심이 그만큼 높아지자 영화잡지에 대한 의존도도 그에 비례해 높아져갔고 당연히 <씨네21>의 옳지 못한 경향 역시 선명해진 것이었다.

문제는 이로 인해 예기치 않은 수익을 벌어가는 영화사와는 달리 그 이득에 해당하는 만큼의 손해를 고스란히 <씨네21>의 구독자가 떠안는다는 점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네21>을 사보는 독자는 예나 지금이나 그 수에서 별다른 변동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를 막아줘야 할 후발 영화 주간지들조차도 이 점을 교훈 삼아 새로운 저널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씨네21>이 갈고 닦아온 그간의 행보를 답습하고 있다.

그 결과, <씨네21>은 여태껏 철옹성과 같은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독자들은 도토리 키 재기 보도 양상을 보이고 있는 여러개의 영화 주간지 중에서 썩어도 준치라며 차악으로써 <씨네21>을 꺼내들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4.

그래서 창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씨네21>을 정독해 온 필자가 보기에 그들이 지난 7년간 이룩한 공적이라면,

첫째, 주간지 시장을 힘들게 재척하여 고작 국내 유력 영화사들의 대변자로 우뚝 선 점. 둘째, 독자들로 하여금 영화 리뷰하면 의례히 영화 전문용어로 도배돼 있고, 주제를 알 수 없는 아리송한 인상을 줌으로써 이런 식의 글이 평론이라는 고정관념을 전파하는데 일조한 점, 두가지다.

그리고 이 두가지가 가능했던 그 기저에는 정론지라는 명분적 정의와 달리 업계지로의 내공을 착실히 쌓아왔던 <씨네21>의 과도, 무절제, 부적절 애무행각이 있었다. 결국 첫번째로 언급한 한국영화에 대한 무조건적 호의는 동종업계의 많은 이들에게 반발심을 불러 일으켜 필요 이상의 영화주간지가 난무하게 된 작금의 비정상적 시장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씨네21>과 영화관계자와의 밀착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보도관행은 두 번째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결국 <씨네21>은 스스로가 무덤을 파는 행위를 함으로써(그렇다고 그 속에 들어가 누운 것은 아니지만) 독자와 영화 평자 간의 건널 수 없는 루비콘강을 이룩한 것이다.

물론 <씨네21>이 영화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독자층을 넓히고 이들을 고스란히 영화관객으로 전환하여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일정 부분에 공로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주간지 시장의 1위 자리를 고수하기 위한 기사의 원천으로 업계의 상위권 영화사가 제작하는 영화에 많은 지면을 할애함으로써 그들의 앞잡이가 되고야 말았다. 그 결과, <씨네21>은 영화잡지시장을 넘어 한 영화의 운명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영화판의 권력으로 성장하였다.

이상스레 영화보다 덩치가 더 커버린 <씨네21>의 현재 모습이다.  

(2003. 1. 월간 북매거진 <텍스트>)

극장들아, 관람료 인하하란 말이다 씨바!

문예진흥기금. 이것이 뭐시냐 하면, 말 그대로 국가가 문화와 예술을 진흥한다는 명목으로 외부로부터 조성한 기금이다. 1972년에 공포되어 1973년부터 시행된 문예진흥기금은 지금까지 2875억(지금의 소비자 물가지수로 환원하면 대략 5000억원)이 모였으며 이를 통해 각종 문화예술사업 및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해 사장 위기에 처한 분야를 지원함으로써 다양성을 도모하는 등 한국의 문화예술 발전에 졸라 이바지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경제발전이 국가적 최우선 과업이었던 박쩡희 담배 피던 새마을 운동 시절, 문예진흥기금은 그 중요성에 비해 누구 하나 도움의 손길을 보내지 않던 문화 분야를 지탱하기 위한 버팀목이요, 마지막 보루이자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이렇게 대략 살펴본 결과, 문예진흥기금은 별로 나쁜 제도가 아닌 것 같다. 한국처럼 경제성장만이 살길이라는 개발도상국에게 있어 반합따까리 취급을 받는 문화의 육성이라는 측면에서 졸라게 선진적인 제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말이다, 문제는 이 문예진흥기금을 거둬들이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영화, 음악, 스포츠, 고궁 등 관람과 관련된 모든 문화예술 입장료에 2~6.5% 정도의 세금을 부과하였는데 그럼으로써 문예진흥기금은, 문화를 사랑하는 단체나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던 일반인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럴수럴수이럴수가! 국민의 주머니 속에 오롯이 짱 박혀있던 푼돈에서 강제적으로 각출하게 되었던 거다. 먹고 싸기도 힘들었던 우리 국민은 경제발전을 명목으로 먹을 것 못 먹고, 빠굴 한 판 못 떠가면서 뼈 빠지게 일하는 것으로 모자라 문예진흥기금 조성의 역사적 사명까지 띄고 이 땅에 태어났던 거시었던 거시기다. 씨바!

근데 국민은 강팀인 우리가 이걸 가만히 냅둘 수 있냐. 당근, 없다. 그래서 부당하다고 소리쳤다. 이렇게 문예진흥기금에 대한 불만의 여론이 높아짐에 따라서 2003년 9월, 정부는 소비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징수하는 문예진흥기금에 절라게 문제가 많다는 판단 하에 준조세 폐지를 골자로 한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안을 준비하였고 뒤이어 2003년 12월 18일 헌법재판소가 문예진흥기금이 위헌이라고 판결하면서 결국 2004년 1월 1일을 기해 문제의 문예진흥기금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설명이 어렵냐? 에라, 이 문디 자슥아! 다시 한 번 설명할테니 잘 들어바바. 그니까 말이다, 아래의 극장 입장료 사진을 보면 빨갛게 표시한 부분에 오백 얼마/삼백 얼마라고 표시된 거 있지, 그걸 올 1월 1일부터 안 내게 됐다 이 말이다. 그럼 입장료가 얼마겠어, 대략 6,500원정도 하겠지. 그러니 얼마나 좋아. 만쉐이~

그래서 우리는 문예진흥기금으로부터 구원 받았… 는 줄만 알았다. 작년까지 7.000원 내고 영화를 봤는데 2004년부터는 6,500원만으로도 영화를 볼 수 있게 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알았는데… 2004년 1월 1일이 지나도, 2월 1일이 지나도, 삼일절인 3월 1일이 지나도, 만우절인 4월 1일이 지나도, 노동절인 5월 1일이 지나도 여전히 우리는 작년처럼 7,000원으로 영화를 보고 있다.

그럼 폐지됐다는 문예진흥기금은 어찌 된 것일까. 물론, 없어졌다. 근데 왜 영화관람료는 7,000원일까. 극장들이 폐지된 문예진흥기금에 해당하는 가격을 인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현재 스코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원래대로라면 관객은 6,500원정도의 가격으로 영화를 관람해야 정상인데 이런 닝길, 극장들이 입 싹 씻고 문예진흥기금에 해당하는 가격을 인하하지 않고 있기 땜시롱 지금은 오히려 6,500원의 가격에서 약 8% 인상된 7,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영화를 보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그림이 나와부린 거다.

그래서 결론을 얘기하자면 관객은 지불하지 않아도 될 500원(문예진흥기금은 서울 소재 극장, 지방 소재 극장에 따라, 그리고 요금 차등화를 실시하고 있는 극장에 따라 400원에서 500원 정도로 책정되고 있다. 이 기사에서는 계산의 편이를 위해 500원으로 통일한다)정도를 아무런 명분 없이 여전히 내고 있고 그 금액을 고스란히 극장측에서 꿀꺽하고 있다는 얘기다. 쉽게 말해 극장은 지금 부당이득을 취하고 있다.

그깟 구구콘 하나 사먹을 수 있는 500원, 별 액수도 크지 않은 돈 가지고 웬 호들갑이냐고 한다면 어허, 당신 아주 배불렀구먼. 쉽게 수치로 환산해보자. 2003년 작년 한해 1인당 영화 총 관람회수는 1.6편이다. 국민 한 명당 1년에 평균적으로 1.6편의 영화를 보았다는 얘기다. 그걸 고스란히 2004년에 대입해 극장들이 얼마 정도의 부당이득을 취하게 되는지 함 계산해보자.

우리 국민의 인구수를 대략 45,000,000이라고 치고 이 사람들이 영화를 각각 1.6편을 보았다고 계산하면 총 72,000,000명이 관람객 수가 나온다. 여기에 문예진흥기금에 해당하는 500원을 곱해부리면… 허걱! 36,000,000,000. 0이 9개니까 합이 360억!

{45,000,000(총 인구수)*1.6(1인당 한해 영화 관람편수)}*500(극장의 부당이익)

=36,000,000,000(한해 극장측 부당이익 총액)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올 한해가 지나가게 되면, 재주는 문예진흥기금 폐지가 넘었는데 돈은 관객이 되돌려 받는 것이 아니라 되려 극장이 손 안대고 똥 닦는 식으로 한해 360억의 부당 이익을 취하는, 이런 씨바스런 공식이 성립하게 되는 거다.

극장주들아, 니덜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문예진흥기금을 폐지한 건, 징수방법이 ‘강제’에 있었기 때문인데 문예진흥기금 폐지 고 틈을 이용해서 입장 표명이 모야, 소리 소문도 없이 그 해당분을 입장료 인상분으로 전환시켜서 다시금 관객에게 ‘강제’하고 있는 발상, 이거 조선시대 형벌로 따지면 치도곤 500대에 해당하는 아주 악독한 죄질인 거다.  

이에 대해 극장측은 타국가들에 비해 입장료가 상대적으로 월등히 저렴할 뿐 아니라 한국 영화 제작비가 날로 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입장료 인상하지 않으면 손꾸락 빨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문예진흥기금을 폐지해도 가격을 인하할 수 없다고 대구리를 들이민다.

본 우원 평소 같았으면 면상에다 대고 ‘니 뽕이다!’를 강력히 외쳐주겠지만 이게 감정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닌고로 마음을 가다듬고 극장주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고 하물며 똥물에도 파장이 있듯이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문예진흥기금이 폐지됐으면 그에 해당하는 부분을 입장료에서 삭감해라. 그리고 난 후, 니덜의 주장대로 터무니없이 저렴한(?) 영화 관람료에 대해 물가인상률을 대입하건, 맥도날드 지수를 갖다대건, 7,000원짜리 커피값과 비교하건, 입장료 30,000원 내고 관람하는 뮤지컬과 상대비교하건 해서 입장료 인상에 대한 당위성을 관객에게 알리고 동의를 구한 다음 관람가격을 올려라. 그렇게 순리대로 한다면 누가 모라 할 사람 아무도 없다. 그것이 올바른 순서이자, 바로 생산자와 소비자간의 상생을 기초로 한 올바른 상거래 질서인 거다. 알았니?

정치처럼 더 이상 꼼수 부리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속여먹는 시대는 지났다. 소비자는 왕이다. 그니까 극장들아,

어서 빨리 관람료 인하하란 말이다 씨바!

(2004. 5. 1. <딴지일보>)

<오마이뉴스>는 각성하라!

1. 인터넷 신문 <어마이뉴스>를 애독하는 회사원 배드나(31) 씨는 지난
5월 말경, 평소와 마찬가지로 근무시간 중 몰래 윗대가리덜의 감시를 피해 <어마이뉴스>에 접속함.

2. 여고생 시절부터 장국영을 좋아했던 배씨는 그의 유작이 된 <이도공감>이 전격적으로 개봉을 결정함에 따라 이 영화를 기다리고 있던 차, <어마이뉴스>에 이에 대한 기사가 노출되어 있자 즉시 클릭함.

3. 그러나 기사를 읽던 중 경악을 금치 못함. 개봉이 아직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영화에 대한 결말이 고스란히 나와 있는 것이 아님? 다시는 <어마이뉴스> 영화기사를 안 보겠다고 다짐함.

4. 2주 후, 배씨는 오랜만에 친구가 주선하는 소개팅에 나가는 관계로 상대방 남성과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선 영화 관람이 필수라고 생각, 무슨 영화를 볼까 고심하던 중 무의식적으로 <어마이뉴스>에 접속함. 비극의 전조였음.

5. 그런 배씨의 눈에 들어온 기사는 다름 아닌 ‘통제불능의 지하철, 롤러코스터처럼 즐겨라’라는 제목의 영화 <튜부>. 기사는 확신에 찬 어조로 <튜부>가 즐길만한 오락영화라고 평하고 있었음. 유레카! 배씨는 <튜부>를 관람하기로 결정함.

6. 소개팅 하던 당일, 얼굴도 잘 생기고 매너도 좋은 남성이 나오자 기분이 업 된 배씨, 좀 더 환상적인 시간을 갖기 위해 <튜부> 관람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자 상대방 남성도 흔쾌히 이에 동의함.

7. 결국 강남의 모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튜부>를 관람하게 된 배씨와 상대방 남성, 그러나 <어마이뉴스>의 기사와 달리 영화 <튜부>는 상당한 맷집의 내공소유자가 아니고선 제정신으로 버텨내기에 너무나 쒯한 영화였음.

8. 배씨는 자신이 왜 <어마이뉴스> 기사를 봤나 후회하기 시작함. 하지만 후회해도 때는 늦었음. 영화가 끝난 후 상대 남성이 찡그린 인상으로 “김서쿤씨를 아주 좋아하나봐요”라고 비아냥대자 무안해진 배씨,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그 남성을 뒤로 한 채 어딘가로 뛰기 시작함.

9. 그러나 그 남성은 자신을 따라 오지 않는 눈치였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었음. 판 깨졌음. 이에 배씨는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이 <어마이뉴스>에 있다고 판단, 격분한 나머지 본지에 민원을 접수시키기에 이름.

10. 그리고 본지는 알아냈음. <어마이뉴스>의 영화기사가 영화언론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조차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다음은 <어마이뉴스> 영화 기사에 대한 심층적인 검열보고 임.

                                                        (이하 상세보고)

1. <어마이뉴스>의 실태 및 문제제기

‘모든 시민은 기자’라는 모토를 내걸고 출발한 <어마이뉴스>는 창간 초기부터 누구나 기사를 작성할 수 있다는 점과 실시간 보도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많은 인기를 얻어 온 이너넷 신문임.

특히 기자라는 특권을 허물고 그 문턱을 낮춰 일반 시민에게 언론의 문호를 개방하자 그 결과가 어땠음? 독자덜은 좀 더 자신들과 밀착한 기사를 보며 울고 웃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들이 목소리를 높여 강력한 여론을 형성하는데 기여하며 결국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큰 힘을 발휘, 이너넷 신문의 위상을 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 높이 평가해줘야 할 부분임.

하지만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많은 관심을 끌고 누구나 기사를 작성할 수 있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함량미달의 기사가 대거 발생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됨. 특히 다른 분야에 비해 영화기사는 정말 눈뜨고 못 봐줄 정도로 그 도가 지나쳤음.

일단 하나 묻겠음. 신문의 기능이 무어라고 생각함? 계속 되풀이하는 얘긴데 바로 정확한 정보전달이 아님? 특히 영화기사는 어떤 부분이 좋고 어느 부분이 안 좋은지를 정확히 가려내어 독자들의 영화선택에 하나의 기준이 되어주는 역할을 해야하지 않음?

근데 <어마이뉴스>의 영화 기사는 어떻슴? 그런 기능은 이미 상실한지 오래고 이게 보도인지 스케치북에 그리는 낙서인지 분간하기 힘든 기사들이 난립하고 있는 실정임.

그러다 보니 독자들에게 하나의 잣대를 제공하기는커녕 보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어 제보자 배씨의 경우처럼 독자들을 도탄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있는 경우가 허다함. 뉴스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임.  

게다가 <어마이뉴스>의 영화기사는 <좃선>과 같은 재래식 찌라시와 <쒸네21>과 같은 주간 찌라지들이 주로 보여주고 있는 똥꼬 핥기, 보도자료 베끼기와 같은 나쁜 버릇이란 나쁜 버릇은 죄다 답습하고 있는 형국. 근데도 이를 판단하고 제지해야 할 <어마이뉴스> 편집부는 걍 손놓고 방관하고 있는 처지임.  

이거 이래서 되겠음? 당근 안 됨. 그러니 본지가 어떻게 똥침을 안 놓을 수가 있겠음? 그래서 언론의 임무를 망각한 <어마이뉴스>가 제 정신을 찾고 더욱 독자들에게 봉사하는 신문이 되라는 의미에서 본 소견을 작성하였음.

2. 사례보고

다음은 2003년 상반기 <어마이뉴스> 영화기사가 보여준 추태 사례를 3가지 유형으로 분석한 자료임.

                       
  사례1. 스포일러 노출

본 사례는 일명 ‘스포일러(spoiler)’라고 하여 개봉이 한창인 특정영화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용감무쌍대범하게 노출함으로써 이를 읽은 독자들로 하여금 해당 영화에 대한 흥미도를 현저히 낮춰 관람을 간접적으로 방해하는 보도형태임. 요렇게.

“그리고 마지막 림병호의 죽음은 갈라진 이데올로기와 체제 속에서 묻혀져 버리는 한반도의 역사를 보여주고자 하는 장면인 동시에 평화로운 바닷가 위의 도로에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영혼을 보며 이제는 달라지고 싶다라는 염원을 갖게 한다”

– 가슴에 남을 혁명 <이중간첩> 편 中 부분 발췌

“결국 파검이 비설의 칼에 찔려 죽을 때나, 비설이 자결할 때에도, 여월이 울며 달려 올 때에도, 무명이 죽음을 선택할 때에도 관객은 납득되지 않는다”

– 아름다운 동양화, 형편없는 영웅담 장이모 감독의 <영웅>을 보고 편 中 부분 발췌

“영화의 시작에는 메뚜기를 잡는 소년이 있었고 영화의 끝에는 소녀의 얼굴이 있었다. 우연히 처음 사건이 발생한 현장을 지나치게 된 박두만 그는 이미 형사를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머리가 희끗한 가장이었다. 혹 무엇이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 논두렁 배수로를 다시 보는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동네의 꼬마 여자아이였다.

그 여자아이는 박두만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건넨다. 며칠 전에도 아저씨처럼 그 논두렁 하수관을 살펴보는 사람이 있었다고.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냐고 박두만의 눈빛은 광채를 띠며 아이에게 다가간다.

“그냥 평범해요. 뻔한 얼굴인데…”

– 그 여인들을 죽인 자는 ‘누구’인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 中 발췌

이런 스포일러 노출의 영화기사가 기본적인 기자의 소양도 갖추지 못한 이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사실은 스포일러를 노출하는데 있어 해당영화의 개봉이 2주가 채 지나지 않은 한창 때를 노리고 있다는 점과 절대로 ‘주의’, ‘스포일러 있음’ 따위의 경고 문구를 넣지 않는다는데 있음.  

혹자는 갱제사정이 여의치 않아 영화를 못 보는 자들이 이런 유형의 기사를 보고 마치 영화를 본 양 떠들어댈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며 스포일러 노출의 당의성을 설파하지만 왜 이에 대한 경고 문구를 삽입하지 않아 영화를 보려는 순수한 독자를 다치게 하고 있음? 그렇게 독자덜이 물로 보이는 것임?  

특히 5월 21일자 <이도공감>에 대한 ‘짱국영의 마지막 작품, <이도공감>’이라는 기사를 보기 바람. 개봉을 무려 2주나 앞둔 상황에서 나온 기사로 <어마이뉴스> 영화 기사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경우임.

“짐의 앞에 나타나는 혼령의 정체는 그의 첫사랑에 대한 슬픈 기억뿐이다. 그녀가 죽은 후,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고 외롭게 지내왔던 짐. 끔찍한 모습의 원혼이 되어 나타난 그녀 앞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묻어두었던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데…”

– 장국영의 마지막 작품, <이도공간> 편 中 부분 발췌

어떻게 이럴수가 있슴? 아주 미치겠지 않슴…

  사례 2 삽질 테스킹

재래식 언론에서 특히 스포 찌라시에서 주로 애용하는 ‘삽질 테스킹’은 영화기사를 작성하는데 있어 자신의 머리를 쥐어짜는 노력 여하에 상관엄씨 남의 자료, 특히 영화 주최측에서 나누어주는 보도자료를 적극적으로 뽀리깡해와 자신의 창작 기사인양 행세하는 보도형태를 말함.

무슨 말이 더 필요 하겠슴? 6월 25일 <어마이뉴스>에 올라온 ‘<쩡풍명월> 주목되는 시도들’이란 기사와 이 영화의 보도 팜플릿을 비교한 다음의 표를 보기 바람.

<비교>

‘어마이뉴스’ <쩡풍명월> 기사                                <쩡풍명월> 보도 팜플릿

청풍명월이란 영화속에 나오는 가상의 부대로~     영화 <청풍명월>의 제      
                                                                   목 ‘청풍명월’은 영화를 위
                                                                   해 창조해낸 가상의 부대명
                                                                   입니다.

하늘을 나는 무사, 물 위를 걷는 무사는 없다.       하늘을 나는 무사도, 물위를
                                                                  걷는 검객도 없다.

조폭마누라로 최근 주목받고 있는 원진 감독       2001년 <조폭마누라>로 화려
<동방불패>, <신용문객잔>, <청사>, <황비       하게 데뷔한 원진 무술 감독.
홍> (3,4,5) 등을 맡았으며~                             <동방불패>, <신용문객잔>,
                                                                 <황비홍> (3,4,5)의~

또한 칼 외에도 채찍, 도끼, 창, 철퇴, 철편,         갑옷과 검, 채찍과 도끼, 창,  
사슬, 낫 등 다양한 특수무기들이~                    철퇴, 철편, 사슬낫 등 다양
                                                                 한 종류의 무기를 의뢰~

5년 전에 일어났던 반정의 1등 공신들이            그 후 5년, 반정의 공신들이
하나, 둘 살해된다.                                        차례차례 살해된다.

자객의 칼에 ‘淸風明月’이란 글자가 새겨           자객의 칼에 새겨진 ‘청풍명
져 있었던 것이다.                                         월’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
                                                                다는~

청풍명월은 태평성세를 바라는 백성들의          영화 속에서 태평성대를 바라
바람으로 결성된 조선시대 엘리트 무관            는 백성들의 바램으로 결성된
의 양성소 였으며~                                       조선시대 엘리트 무관 양성소
                                                               소인 ‘청풍명월’은~

인간 복사기의 재림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것임. 그렇다고 마냥 베끼는 것만도 아님. 단어의 순서도 요리조리 바꿔치기하고 있으며 태평성’대’를 태평성’세’로 얍실하게 바꾸는 눈속임도 하고 있고 또한 어조사만 뺐지 단어의 나열 순서를 같게 하는 등 세심하게 베낀 후 약간의 첨삭을 가하고 있는 것이 눈에 뻔히 보임.

정말이지 자신의 기사처럼 보이게 하려고 노력한 흔적엔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임. 하지만 이런 보도 행태의 문제가 몬지 아직도 모르겠음? 주최측에서 작성한 보도자료를 그대로 베껴 쓰는 관계로 자연스럽게 주최측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임.

주최측이 어디 지네 영화 ‘좃같아요, 쒯이여요’라고 쓰는 거 봤음? 그러니 어찌 독자들을 위한 기사가 나올 수 있겠음? 이런 기사를 쓴 장본인이나 이를 그대로 올린 <어마이뉴스> 편집부는 언넝 조짭고 반성하기 바람.

   사례 3 똥꼬 핥기

똥꼬 핥기란 쒯 영화들을 무한정으로 빨아주는 보도를 말함.  

특히 똥꼬 핥기는 한국의 유력 영화사가 제작을 하고 제작비가 천문학적인 숫자로 투입된 영화일수록 그 힘을 발휘하는데 악의적인 것은 재미라고는 개뿔도 없는 영화가 이런 기사의 도움을 받아 현상을 흐림으로써 제작비 회수의 원천을 죄 없는 관객의 주머니로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임.

그렇다면 이렇게 해서 7,000원을 날린 관객이 다른 관객들로 하여금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소연하는 곳이 어디임? 바로 시민이 기자가 되는 <어마이뉴스>임. 그것이 바로 <어마이뉴스>만의 장점이 아니겠음. 이걸 영화사와 공생하는 영화 찌라시들이 하겠음?

근데 이게 뭠?

“그러나 이번에 개봉할 영화 <블루>는 늘 다뤄왔던 잠수함 영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감독은 특별한 양념을 사용하였다. 해군의 특수 잠수부대 SSU(해난구조대)가 그것이다. 검푸르게 펼쳐진 바다와 군함과 훈련을 하는 잠수부대원들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고 관객들은 그 모습에 압도당한다.

또한 그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얼차려나 신현준의 X새끼 식의 저질스러운 언어)에서 관객들은 재미를 느끼고 그들의 삶에 동화된다. 이처럼 <블루>는 우리가 늘 먹던 잠수함 영화라는 음식들을 해양구조대와 인간적인 모습이라는 양념으로 새로운 그릇에 맛깔스럽게 담아냈다”

– 낯설지는 않지만 신선한 이유?, <블루> 편 中 부분 발췌

이거뿐이면 본지 말도 안 함. 또 있음.

“그러나 <튜브>의 오프닝은 처져있던 축축한 기분을 순식간에 증발시켜버렸다. <쉬리>의 도심총격전을 연상시키지만 더 화려했다. 긴박감 넘치는 그 도심공항터미널 총격씬은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높일만한 것이었다. 이후 통제불능의 지하철에서 펼쳐지는 최전선의 장면들은 <튜브>가 올 여름 영화시장에서 확실히 살아남을 가능성이 가장 큰 작품임을 보여준다.

<쉬리>의 액션과 <스피드>의 긴장감을 고루 갖춘 이 영화는 <쉬리>는 조감독 출신인 백운학 감독이 연출해 대중적 재미를 무엇보다 갖추었다. 여기에 소름끼치는 박상민의 악역 연기(<장군의 아들> 이후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호연. 그가 ‘홍길동’ 김석훈과 펼치는 세기의 대결은 패러디가 예견되는 명승부다.)와 김석훈의 마일드한 터프함, 이제는 흥행배우라고 소문내고 싶은 배두나의 명연기가 더해져 작품의 완성도가 더욱 탄탄해졌다.

이외에 중앙통제 실장역을 맡아 마치 홍명보처럼 전체를 꿰뚫어 보고 지휘하는 손병호, “도준아, 니가 윤봉길이냐, 안중근이냐! 그만둬.” 식의 대사로 긴장을 이완시키는 책임을 맡은 임현식(지하철 수사대 반장역)의 연기는 <튜브>가 긴장과 동시에 웃음도 유발하는 즐길만한 대중오락영화 노선을 걷고 있음을 드러낸다. 악역도 멋진 경찰서장 역의 기주봉과 또라이 깡패역도 나이쓰한 면도날역의 권오중의 역할도 긴장과 이완 작용을 하며 영화에 기여한다.

… (중략)

그럼에도 다행히 <튜브>는 선배의 작품을 적극 참고하면서도 감각이 다른 연출로 기존 액션영화와는 다른 쿨한 향기를 품고 있다. 또 <매트릭스 2>가 영화적 필요에 의해 도로를 직접 건설했듯이, 지하철을 만들어 찍음으로써 <튜브>는 이제까지 한국에서 맛보지 못한 살아있는 지하철 액션영화를 선보였다.

만일 백운학 감독에게 제작비의 자유가 주어졌다면 그는 <더 록>, <진주만>, <블랙 호크 다운> 등으로 유명한 할리우드의 제작가 제리 브룩하이머도 군침을 흘렸을 작품을 탄생시켰을지도 모른다”

– 지하철 액션의 진수를 보이다. <튜브>편 中 부분 발췌

올해 가장 쒯스런 영화의 반열에 오른 <별루>와 <튜부>에 어찌 입에 담기도 힘든 용비어천가를 부르고 있음? 특히 <튜부> 기사의 마지막 단락은 정말이지… 영화에 대한 조건없는 무한사랑(?)이 아니고선 절대 나올 수 없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절로 듬. 그렇게 비위가 좋음? 아니면 <어마이뉴스> 편집부도 정말 이렇게 생각하는 것임? 물론 아닐꺼라고 봄.  

그런데 왜 이따구 기사를 재래식 영화 찌라시도 아닌 <어마이뉴스>가 내보내고 있음? 왜 기분 나쁨? 그래도 어쩔 수 없음. 니덜이 지금까지 영화기사를 통해 보여준 꼬라지가 이 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임.

지금까지 무슨 짓을 했는지 <어마이뉴스>는 감이 좀 잡힘?

3. 결론

그런 전차로 본지는 <어마이뉴스>에게 고함!

그대들 몸집도 커지고 영향력도 쎄지고 더군다나 시민기자도 많아져 이들을 관리하는데 애 먹고 있다는 거 모르는 거 아님. 다 알고 있음.

그렇다고 마냥 손놓고 있을 수는 없는 법임. 편집권을 강화하여 함량 미달의 기사는 과감히 삭제하기 바람. 특히 시민기자가 쓰는 기사들은 좀 더 신중하게 보고 올릴 필요가 있다고 사료됨.

물론 시민기자들이 그간 <어마이뉴스>를 통해 보여준 역량을 무시하는 것이 아님. 그대들의 힘의 원천은 바로 시민기자들이 발로 뛰고 마음으로 쓴 기사라는 거 천하가 다 알고 있음. 하지만 몇몇 ‘아닌’ 기사로 다수의 독자덜이 다쳐서는 안되는 법임. 그렇지 않음?

다시 한 번 말하건데 그대들은 언론임. 그리고 언론은 독자에게 신속정확한 양질의 기사를 제공할 의무가 있는 것임.

그러니 바쁜 시간 쪼개가며 니덜을 위해 특별히 지면을 할애한 본지의 쓴소리를 잘 명심하여 더 나은 행보 보여주기 바람.

알아들었슴?

                                                            (이상 보고 끝)

2003. 7. 15. <딴지일보>

<죽어도 좋아> 제한 상영가, 무효다!!

1.

<죽어도 좋아>가 결국에 다시 한 번 제한 상영가 등급을 받아 상영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역시나 극중 7분간의 섹스 씬 동안 등장하는 구강성교와 자지 노출이 국민정서에 반한다는 게 이유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9인의 등급위 위원들로 이루어진 첫 번째 심사가 5명의 찬성과 4명의 반대에 의해 쥐며느리 발꼬락 차이로 제한 상영가 등급을 받았다면, 이번 소위원회 위원 15명이 참가한 2차 심사에서는 찬성 10표와 반대 5표로 <죽어도 좋아>의 제한 상영가를 지지하는 수가 1차 심사에 비해 배로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잠시 심의 결정 방식에 대해 썰 풀고 들어가자면, 필름이 영등위에 제출이 되면 1차로 9인으로 이루어진 등급위원회가 등급분류 심사를 하게된다. 그런데 만약 1차 심의에 이의가 발생하게 될 경우, 필름 제출자는 상영등급을 분류 받은 날로부터 30일 이내에 영상물등급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러면 1차 심의와 달리 별도로 구성된 15인의 소위원회가 재심의 등급분류를 담당하게 된다.

1차 심의에 비해 재심의 등급위원이 더 많아진 건 전(前) 심의를 통해 드러난 문제점과 여러 계층의 의견을 수렴, 이를 반영해서 좀 더 탄력적인 심의를 가하겠다는 의도인데,

그렇다면 쫌 이상하지 않은가? <죽어도 좋아>의 제한상영가 등급 찬성표가 전에 비해 더 늘었다는 거, 그것도 두 배나…

전체적인 영화의 분위기는 아랑좃하지 않고 오로지 자지가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1차 제한 상영가 판정이 난 후 이에 분노한 많은 단체들은 <죽어도 좋아>의 제한 상영가 등급 판정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수 차례 모임을 갖았고 자체적인 시사회를 열어 토론의 장을 마련, <죽어도 좋아>의 음란성 여부는 전체적인 맥락을 보았을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합의를 이루어냈다.

영화진흥법을 보면 제한관람등급의 기준에 대해,

“내용 및 표현기법이 18세 관람가 기준을 벗어나 과도하게 일반 국민의 정서에 악영향을 끼치거나 반사회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경우”

라고 명시가 되어있다. 그러니까 결국 <죽어도 좋아>는 일반 국민의 정서에 아무런 악영향을 끼치거나 반사회적인 내용도 아니라는 사실이 1차 제한 상영가 판정 이후 활발한 의견교환을 거치면서 확인이 된 거다.

그리고 이는 분명 국민을 대표하는 우리의 영상물등급위원에게도 전달되었을 거라 본다. 아니 전달이 되었다. 모름지기 심의위원이란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들이고 그렇담 등급위는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인데 이를 모를 리 없자너.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일반국민들의 의견이 영등위에게 전달이 됐으니 다가오는 재심에서 <죽어도 좋아>가 18세 상영가 등급을 받을 것임을 당근 믿었다. 근데, 결과는…

그렇게 일반적인 정서를 호소했음에도 불구, 되려 <죽어도 좋아>의 제한상영가 등급을 찬성하는 수가 첫 번째 심사에 비해 배로 늘어나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는 지경이 발생하였다. 그렇다면 이는 이번 재심에 참가한 15인의 소위원회 위원들 중 10명은 국민의 의견을 썡까고 개인적인 호불호(好不好)로 등급을 내렸다는 야그가 되는데…

2.

“70대의 삶을 굳이 그렇게 초점화하고 부각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은밀한 것을 굳이 대중화할 필요가 있을까”

이번 재심에 참가한 15인의 위원 중 반대표를 던진 초등학교 교사 김숙현의 변이다.

말인 즉, 이 분의 생각엔 70대 노인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게다. 그냥 집안에 쳐 박아두고 감추어둬야 하는 그런 창피한 것이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 <죽어도 좋아>가 이해 될 리가 없다.

더 큰 문제는 영화에 등급을 부여하는 사람이 70대의 삶을 주제로 한 영화를 왜와이뭐땀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갸우뚱거린다. <집으로>도 이 분에게 걸렸다간 개봉조차 못 했을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은밀한 것은 몰래 숨겨두고 대중화하지 말랜다.

그렇게되면 지금 극장가에 깔려있는 영화 중 성을 소재로 했거나 뒷골목 폭력이 나오는 영화,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쥔공으로 나오는 영화는 싸그리몽땅 간판 내려야 한다. 그럼 극장가 꼬라지 참 골 때리겠다. 결국 표현의 다양성은 애시당초 생각하지도 말라는 소리다.

그래서일까, 지들이 개봉도 하기 전에 영화가 어떻다고 아예 재단해 버린다.

“… 이 영화에선 성기가 나오고 거기에 펠라치오가 나온다. 완전히 포르노다”

이번 재심에 참가한 15인의 위원 중 반대표를 던진 노계원의 말이다.

성기가 나오고 펠라치오가 나왔기 때문에 <죽어도 좋아>는 포르노란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든다. 지난 1993년 개봉한 닐 조단의 <크라잉 게임>말이다.

이 영화에는 극중에 자지가 나온다. 그렇담 <크라잉 게임>은 포르노 영화란 말인데, 당시 심의위원들이 뽕 맞고 약 떄렸는지 시중에 개봉이 되었다. 제한상영관이란 개념자체가 존재하지도 않던 그 때 우린 정신나간 심의위원들 덕에 포르노 영화를 일반 상영관에서 버젓이 본 거다.

게다가 포르노라면 섹스가 주가 되는 영화를 말하는데, 이 분은 <죽어도 좋아>를 성이 주제가 되는 영화로 본 것이다. 근데 우린 몇 번의 시사회와 언론의 보도를 통해 당 영화의 주제가 소외된 노인의 삶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이 분의 개인적인 기준엔 영화의 내용과 주제와는 상관없이 그냥 자지가 나오면 여하튼 뽀르노인 거다.

그니까 현재상황 우린 몇 명의 개인 생각 땀시 <죽어도 좋아>를 못 보는 지경에 몰린 거다.

“노인들의 성도 중요하지만, 손자뻘의 젊은이들이 보기에 노인들이 모두 색(色)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는 위험도 있다”

“노인층의 반발이 예상되서 제한상영 등급 의견을 냈다. 젊은 사람들이 그러면 안 되고 노인들이 하면 괜찮다는 식의 논리가 오히려 노인들을 인간적으로 무시한다고 봤다”

이렇듯 이번 <죽어도 좋아>의 재심에 참가한 의원들 중 당 영화의 개봉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밝힌 의원들 대부분이 영화의 전제적인 맥락 고려없이 그리고 국민의 의견은 코딱지만큼도 수렴하지 아니하고 단지 자기들 머리 속에 박혀있는 기준, 즉 개인적 취향에 따라 <죽어도 좋아>가 제한 상영가 등급이라고 의견을 밝힌 거시다.

아주 상식적인 사항이자 또 썰하면 입 아픈 얘긴데, 영상물 등급 위원회라는 곳은 개인적인 호불호로 영화에 등급을 부여하는 곳이 아니다. 이들은 영화가 12세 이상에 적합한지, 18세 이상만 볼 수 있는지를 판단해야지 자신의 극히 주관적인 취향을 내세워 영화를 검열해서는 안된다.

등급위 니덜은 그냥 나이에 적합한 등급을 주고 영화 상영이 가능하게 한 다음 그것의 음란여부에 대한 판단은 관객에게 맡기면 되는 거다. 그리고 대중의 의견에 따라 영화가 음란하다고 판단이 되면 그 때가서 검찰이 사법처리하거나 하면 될 일이다.

근데 보시다시피 하라는 등급분류는 안하고 개인적 취향에 따라 검열이나 하고 자빠져들 있으니… 과연 이들이 심의위원으로써의 자격은 제대로 갖추고 있긴 한건가?

영화진흥법 8조 1항에 위원회의 구성에 대해 이렇게 나와있다.

‘위원회는 영화예술 및 영화산업 등에 관하여 전문성과 경험이 풍부하고 덕망이 있는 자 중에서 문화관광부장관이 위촉하는 9인의 위원으로 구성한다’

2차 심의에 참여한 15인의 등급위 위원들 역시 이에 속하는 얘긴데, 이 조항에서 전문성이라 함은 분명 일반 대중보다 영화에 대한 속성을 더 잘 파악하고 있으며 그들보다 나은 감식안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 가능할 것이다.

근데 이들이 과연 일반대중보다 영화에 대한 전문성을 더 가지고 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아니 할 수 없다. 왜냐,

“… 부분적인 편집이나 모자이크 등의 방법을 통해 타협점을 찾을 생각은 없는지 아쉽다”

“성 또한 향유되어야 할 예술이라고 생각하지만, 다 드러내 보이면 예술성이나 미학성은 사라진다”

이거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분명 법에는 전문성이 풍부한 사람이 위원이 된다고 하는데, 한다는 소리가 <죽어도 좋아>의 섹스씬 동안 자지에다가는 하트 붙이고 구강성교에는 모자이크 처리하면 등급을 줄테니 타협하잖다. 그렇게 데코레이숑하면 영화 꽤나 볼 만하겠다.

<패션쇼> 생각나나, 영화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에다가 단지 홀라당 벗고 나온다는 이유로 해서 보지에다가 하트 처리해설랑 영화를 코미디로 기문둔갑시켰던 예전의 그 영화. 그니까 결론은 <죽어도 좋아>도 <패션쇼>처럼 코미디 영화로 만들라는 말이다. 우째 울나라 영화심의는 정체하지는 못 할 망정 가면 갈수록 뒤로 후퇴만 한다냐…

게다가 성을 다 드러내 보이면 예술성이나 미학성은 사라진다고 하는 건 또 어느 나라 법이냐? 그 말은 곧, <감각의 제국>은 비디오 가게 구석탱이에 처 박혀있는 에로비디오고 <칼리큘라>는 동네 애들끼리 서로 복사해서 나눠보는 뽀르노 비디오라 이 말이다.

만약 정말로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편집이나 모자이크, 예술성이나 미학성 이따구 소리를 들어 영화에 흠집 내는 말은 절대 할 수 없는 거다. 왜? 영화를 위시한 창작매체는 창작자의 자유의지를 절대 존중해야 하는 거니까. 그리고 작품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 거니까.

이런 기본에 아주 쌩기본도 모르면서 뭐가 잘났다고 저렇게 무식하게 짖어대고 있으니, 그러고도 니덜이 진정 심의위원이라고 할 수 있냐!!

3.

결국 이번 <죽어도 좋아>의 제한 상영가 등급은 알아본 바와 같이 자격도 안 되는 심의위원들이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취향을 내세워 만들어낸 구라심의임이 만천하에 판명이 되었다.

그러니 문화관광부는 즉시 지금의 심의위원들을 그 자리에서 축출하고 빠른 시일 안에 자격이 되는 심의위원을 영상물등급위원회에 위촉하여 <죽어도 좋아>의 재심의에 착수해야 할 것임을 정중히 요구하는 바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이번 <죽어도 좋아>의 제한 상영가 판정,

완전 무효다!!

(2002. 7. <딴지일보>)

DVD를 국회로!

놀랠 노자다. 국내 개봉 과정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 Volume1>을 두고 신체 분해 장면이 구체적이고 또한 전체적으로 너무 잔인하다며 12초의 삭제를 가했던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가 DVD 심의에서는 무삭제로 통과시키는 이변
을 연출하였다.

럴수럴수이럴수가! 한 영화를 두고 한달 사이에 같은 심의기관에서 어떻게 이렇게나 다른 평가를 내릴 수가 있을까.

이에 대해 영등위의 수장인 김수용 위원장은, 영화를 심의하는 심의위원과 DVD를 심의하는 심의위원이 다르기 때문에 결과는 다르게 나올 수도 있다고 말한다. 참으로 무식한 소리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는 심의에 대한 일정한 기준이 있기보다는 그 날 참석하는 심의위원의 성향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로서 우린 영등위에 대한 중요한 점 하나를 간파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영등위는 책임 있는 심의기관이 아니라 애들 소꼽장난하듯 그날 모이는 멤버에 따라 지들 꼴리는대로 영화를 심의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영등위는 결과적으로 <킬빌 Volume1>을 영화관에서 본 관객을 ‘두 번 죽이는 꼴’이 되었다. 12초를 삭제함으로써 관객의 볼 권리를 박탈했음으로 한 번, 한 달 후 문제의 12초를 DVD에서는 복원하여 이미 7,000원 내고 영화를 본 관객의 12초 분량에 해당하는 입장료를 갈취(?) 했음으로 두 번.

그러다보니 이와는 반대로 이번 <킬빌 Volume1>의 DVD 무삭제 통과는 영화계를 두 번 살린 셈이 되었다. 일단 이를 통해 책임 없는 영등위의 잘못된 점이 명확히 드러나 이 문제의 기관이 앞으로 나아갈 바에 대한 올바른 방향 제시를 간접적으로 했음으로 한 번, 영등위의 전신인 공연윤리위원회 시절부터 계속된 그동안의 무분별한 가위질 및 심의불허조치로 한국땅을 밟지 못했던 비운의 영화들이 빛을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두 번.

그런 점에 비추어 볼 때 한국에서의 DVD라는 매체는 영상에서의 혁명만을 몰고 온 것이 아니라 가위질과 수입불허로 얼룩진 국내영화시장에 ‘상식’이라는 또 하나의 혁명(?)을 가지고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시 말해 DVD는 국내관객에게 영화에 대한 개안(開眼)의 문을 열어줬는데 이것은 비단 <킬빌 Volume1> 사태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영화시장이 개봉영화에만 편중되어 있고 시네마테크가 활발하지 못한 상황에서 DVD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고전영화를 볼 수 있는 창구를 열어줬으며 또한 <부기나이트>와 같은 작품을 온전하게 볼 수 있는 장까지 마련해주었다.

게다가 <킬빌 Volume1>의 무삭제 출시로 인해 스탠리 큐브릭의 <A Clockwork Orange>나 <샤이닝>과 같은 작품이 조만간 합법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들려오고 있다. 이 정도나 공헌을 했으니 이쯤에서 필자 DVD를 위해 한마디 안 할 수 없다.

DVD를 국회로!

(2003. 11. 영화 월간지 <DVD21>)

영등위, 이 고짓말쟁이들아!

1.

거짓말 사례 첫 번째. 지난 2002년 7월, 現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의 김수용 위원장은 <죽어도 좋아> 사태가 발생하기 한 달 전 영화주간지 <필름 2.0>과 이너뷰를 갖는다(관련기사).

<필름 2.0>은 영등위의 초대 위원장이었으면서 두 번째 임기에도 연이어 위원장직을 맡은 사실을 빌미 삼아 김수용 감독에게서 영등위 운영방안에 대해 알아보고 뭣보다 과거 검열의 최대 피해자였던 장본인이 그 문제의 기관에 수장으로 임명된 얄궂은 운명을 통해 앞으로의 울나라 표현자유에 대한 희망적인 발언을 유도해 보려했던 것 같다.

참고로 김수용 위원장이 감독시절 얼마나 심한 가위질에 몸살을 앓았냐하면, 1973년 제작된 <야행>의 경우, 당시로선 파격적인 여성의 응응응 일탈을 다루었다고 해서 개봉허가가 나지 않아 필름을 창고에 묻어두어야 했고, 4년이 지난 1977년이 되어서야 무려 52군데가 삭제 당한 끝에 개봉을 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김수용 위원장은 1987년 잠정적인 은퇴선언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중광 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허튼 소리>를 두고 당시의 영등위라 할 수 있는 공연윤리위원회가 “관객은 감독보다 무식하기 때문에 필름을 삭제해야 한다”는 뻘소리를 하면서 10군데가 넘게 가위질을 가했기 때문이다. 이에 분노하여 그는 오랜 시간 감독생활을 접게 된다.

그런 그이니 검열기관의 가위질에 얼마나 한이 맺혔겠고 그 아픔이 뼈에 얼마나 깊게 사무쳤겠냐. 그동안 유무형의 검열피해를 받아왔던 후배 영화인들이 김수용 위원장에게 거는 기대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던 건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하겠다.

그래서 <죽어도 좋아>의 섹스씬이 검열에 걸리지나 않을까 마음에 걸렸던 <필름 2.0>은 김수용 위원장에게 묻는다.

오동진 : 심의규정에 성기 노출은 안 된다고 규정돼 있나요?
김수용 : 그렇죠.
오동진 : 그걸 고치지 않는 한 <죽어도 좋아>는 죽어도 안 되겠군요.
김수용 : 때에 따라서는 괜찮아. 과도하게 나와도 괜찮을 수 있는 거지. <
          친구>에서 ‘과도하게’ 칼로 수십 번 찔러서 죽여도 그냥 다 내보냈
          잖아. 물론 클로즈업 되서 나오는 성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토
          론이 필요해요.  

“때에 따라서 괜찮다”는 얘기는, 많은 이의 공감을 살 수 있는 보편적 정서가 바탕이 된 스토리의 문맥상 성기노출이 필요하다면 허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발언일 테다. 게다가 <죽어도 좋아>에서의 성기 노출 장면은 원본 필름에서부터 조도가 낮게, 그니까 어둡게 처리가 되어 있어 클로즈 업이 갖는 적나라한 느낌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 이너뷰를 읽고, 또한 <죽어도 좋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 영화가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을 것이라 아주 당연히, 지극히 당연히 믿고 있었다.

아니 저렇게 김수용 위원장님께서 잡지의 이너뷰에 증거가 남을 정도로 확실한 말씀을 주셨는데 감히 어느 무례한 것들이 위의 발언이 거짓말이었다고, 구라였다고, 야부리였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냐.  

그런데 김수용 위원장은 그런 예상을 깨고 뒤통수를 날려버린다. 결과는.. 1차 심의에서 제한상영가 등급을 때려버려 사실상의 검열을 가하였고 결국 제작사측이 문제가 된 성기노출 장면을 더욱 어둡게 처리해오자 그제서야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내주었다. 성기노출이 “때에 따라서 괜찮다”고 말씀하신 김수용 위원장이 수장으로 계신 영등위에서 말이다.

2.

거짓말 사례 두 번째. 영등위가 <죽어도 좋아>의 1차 심의에서 성기 노출을 꼬투리 삼아 상영불가나 다름없는 제한상영가 등급을 내리자 전국은 난리가 났다.  

영화인들이 거리로 나와 영등위 궐기대회를 가졌으며 많은 시민들이 이에 호응을 하였고 <죽어도 좋아>의 비공식 시사회에는 이례 없이 많은 관객들이 모여들어 관람 후 영화에 대해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를 쏟아냈다.

이렇게 <죽어도 좋아> 사태가 사회문제화 되자 2차 심의에 쏠린 관심은 실로 대단했다. 그러나 2차 심의에서 또 한번의 제한상영가 등급. 이후 2차 심의에 참석한 15인의 심의위원들은 이례적으로 <씨네21>에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 중 <죽어도 좋아>의 18세 관람가 등급에 반대표를 던진 노계원 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 이 영화에선 성기가 나오고 펠라치오가 나온다. 완전히 포르노다”

성기가 나오기 때문에 포르노라는 주장이다. 김수용 위원장의 의견 역시 노계원 의원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다시 한 번 확인사살 해 주신다.

“성기가 나오니 포르노 그라피다. 이 영화 전체를 완전 포르노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성기가 나오고 구강성교가 나오니 포르노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나?”

이 일로 인해 우리는 영등위의 검열사례 유형 한 가지를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성기가 나오면 포르노. 포르노는 제한상영가등급. 결국 제한상영가등급 전용관이 없으니 성기가 나오는 영화는 그 부분을 짤라내지 않으면 상영을 할 수가 없다는 사실.

그로부터 1년 후. <써클>이란 영화가 개봉을 하였다. 희대의 연쇄살인범과 이를 수사하는 쥔공이 전생에 얽혀있다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중요한 건 당 영화에 모형이지만 자지가 나온다.

이 자지는 반전영화인 당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키포인트 역할을 하는데 얼마나 사실적이고 적나라하며 그것도 모자라 클로즈업으로 몇 차례 비추던지 제작사 측에서는 심의에 통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레짐작, 시나리오 수정까지 검토했다고 할 정도다(관련기사).

영등위의 이전 주장을 바탕으로 한다면 자지가 나오면 포르노. 그러니까 <써클> 역시도 포르노. 자지가 나오는 부분을 짤라내지 않으면 일반상영관에서 상영할 수 없다. 당 영화의 제작사측이 걱정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영등위는 그런 예상을 깨고 다시 한 번 뒤통수를 때린다. 결과는… 관련기사의 표현대로라면 ‘심의위원의 호평 속에 무삭제로 통과’. 성기가 나오면 포르노라고 입에 거품을 물며 <죽어도 좋아>의 상영을 그렇게 막았던 김수용 위원장의 영등위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말을 뒤집기 한판, 이번엔 ‘호평’ 속에 무삭제로 통과시켰단다.

짐작컨대 아마도 그 통과의 기준이 모형이라는 점에 있는 것 같은데 똑같은 자지라도 진짜는 불허하고 가짜는 허용하는 잣대. 이런 논리대로라면 실제를 방불케 하더라도 실제가 아니면 문제없다는 논린데…  

그러나 이런 태도 역시 위선적이다. 믿을 수 없다. 다음 사례를 보자.  

3.

거짓말 사례 세 번째.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 Volume 1>. 개봉 전부터 잔인한 묘사와 핏빛 영롱한 화면으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그리고 ‘헤모글로빈 시인’이라는 별명의 타란티노 작품답게 영화 내내 주인 잃어 방황하는 절단 난 팔다리와 대구리가 눈앞에서 왔다갔다 거리고 여기서 뿜어져 나온 피분수덜이 화면을 붉게 수놓는다.  

그러나 너무나 노골적으로 폭력적이고 잔인하여 전혀 실감나지 않고 오히려 만화스러워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영화가 바로 <킬빌 Volume 1>이다. 게다가 화면에 굴러다니는 분해된 팔과 다리와 대구리가 실제일리 없다. 전부 다 모형들. 타란티노는 여기에 한술 더 떠 심하게 잔인하다 싶은 장면은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든가 흑백처리를 하여 안전장치까지 마련한다.

그래서 우리나라보다 먼저 개봉했던 다른 여러 나라 중에서 당 영화 <킬빌 Volume 1>의 표현수위를 두고 심의에서 논란이 인 경우는 단 한군데도 없다. 아무 문제없다고 판단한 국내 수입사측, 영등위에 <킬빌 Volume 1>의 수입추천을 의뢰한다. 예상대로 별 반발 없이 수입추천을 받는 수입사측, 제한상영가 등급이 웬 말이냐, 심의에서 18세 이상 관람가는 무리 없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뒤통수 때리기의 명수인 영등위가 그냥 넘어갈리 없다. 실제와 거의 비슷하더라도 모형은 된다고 <써클>의 심의과정에서 무언으로 입장표명을 했던 그들이 이번엔 영화가 신체 분해 장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했고 또한 전체적으로 잔인하다며 태클을 건다. <킬빌 Volume 1> 제한상영가 등급. 같은 기관에서 수입추천은 허가해주고 상영은 불허하는 이 심뽀 고약함.

뒤통수 맞은 수입사측, 등급결정에 불복하여 같은 필름으로 재심의를 낼지 아니면 특정부분을 삭제하여 첫 심의를 없었던 일로 할지 두 갈래 길에서 고민한다. 그러나 전자를 택할 경우, 이미 극장까지 잡아가며 개봉일을 일주일 남겨놓은 상태에서 재심의까지 15일을 지둘려야 하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필름삭제를 결정,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으로 통과만 되면 바로 극장에 필름을 걸 수 있는 후자를 선택한다.

그래서 수입사 측은 고고 유바리(구리야마 치아키 분)가 자신을 따먹고 싶다고 껄떡대는 중년남의 배를 검으로 쑤시자 내장이 튀어나오는 장면, 오렌 이시이(루시 리우 분)가 불만을 얘기하는 야쿠자 보스의 대구리를 단칼에 베어버리자 짤린 대구리에서 피가 솟구쳐 나오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 청엽옥 결투에서 #%?(우마 써먼 분)가 적의 눈알을 냅따 뽑아버리고, 몸뚱이를 반으로 가르는 장면을 포함하여 12초 분량을 삭제한다.

물론 런닝타임이 1시간 51분인 영화를 12초 삭제한다고 해서 신체 분해 장면의 구체적인 묘사가 비구체적이 될 리가 엄꼬 또 전체적으로 잔인한 영화가 안 잔인해질리 없다. 영등위의 당 영화에 대한 첫 번째 제한상영가 등급 결정 이유대로라면 <킬빌 Volume 1>이 12초를 삭제한다고 해도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기는 무리.

아~ 그러나 결과는… 며칠 전의 주장을 가볍게 뒤집기 한판하며 <킬빌Volume 1>에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내어준다.

근데 <킬빌 Volume 1>과 관련해서 또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이렇게 18세 이상의 성인들 정서를 과잉으로 보호하는 영등위가 어쩐 일인지 이 나라의 꿈나무인 15세 이상의 청소년들 정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는 거다. 무슨 소린고 하니…

15세 이상 관람가인 우리 영화 <천년호>. 당 영화에는 <킬빌 Volume 1>과 비교해 양적으론 째바리가 안되지만 질적으로는 거의 삐까삐까한 팔다리대구리 절단 나는 장면이 나온다.

짤린 대구리가 단독으로 두어 차례 출연할 뿐 아니라 짤리는 순간의 묘사가 얼마나 구체적인지 관객들 사이에선 비명소리가 상영관을 난무하며 심지어는 <킬빌 Volume 1>에서조차 잔인하다고 드러낸 모가지에서 피분수가 치솟는 장면이 여과 없이 등장한다.

18세 이상 관람가 영화에서는 잔혹묘사라고 강제로 짤라낸 장면이 15세 이상 관람가 영화에선 버젓이 나오는 이 우끼고, 환장할 만한 아이러니…

<써클>에선 실제가 아닌 모형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허용했던 그들이 <킬빌 Volume 1>에선 신체 절단 장면이 모형임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이라는 이유로 상영을 불허한다. 그리고 이걸로도 모자라 전체적으로 잔인한 영화가 12초 짤렸다고 그 느낌이 순화됐다며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내주었던 그들이 15세 이상 관람가인 <천년호>에서의 잔인한 장면은 그대로 묵과해 버린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계속되는 영등위의 거짓말 앞에선 이 분야의 신화적 인물인 양치기 소년도 울고 갈 일이다.  

4.

그럼 영등위 얘네들이 이렇게 밥먹듯 말 바꾸며 갈지 자 거짓말을 해대는 이유가 몰까?

딴 거 없다. 한동안 가위질을 안 하니 손이 근질근질해서 그런다. 다시 말해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영등위가 그들의 전신인 공연윤리위원회 시절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자랑스런 가위질 전통을 고작 간판 바꾸었다고 해서 순순히 포기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2001년 12월 개정된 영화진흥법은 이전과 달리 모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며 가위질을 일체 금하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의 영등위, 가위질 안 할 리 없다. 게다가 제한상영가 등급이라고 아주 골 때린 법이 생긴다. 이거 잘만 이용하면 지들 손 안대고 똥 닦는 효과를 볼 수 있게 생겼다. 직접 가위질 안 하고 가위질에 버금가는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 어떻게?

어떻게는 모, 위에 열거한 사례들처럼 거짓말 보태기 트집 좀 잡다가 결정적일 때 제한상영가 등급 멕여버리고 시간 좀 끌면 영화사측이 알아서 필름 자르거나 순화해서 오는 거지. 지들이 직접 자를 필요가 없다. 게다가 이제는 간이 배 밖으로 튀나왔는지 가위질을 해오라고 아예 유도를 한다. 이를 증명하는 결정적인 사례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이제 법적으로 등급외등급이 생겼거든요. 그러니 영화를 자르는 일은 절대 없어요. 등급외등급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니까. 그 등급을 받으면 그만입니다.” 여기를 순화해서 18세로 하시죠” 같은 이런 권고는 요즘 절대 안합니다.”

김수용 위원장이 이전 <필름 2.0>과의 이너뷰에서 했던 말이다. 요즘은 여기를 순화해서 18세로 하시죠와 같은 그런 가위질 권고는 안 한단다. 그런데 이 역시 거짓말이었음이 뽀록나고 말았다. 권고는 안하고 대신 가위질해오라고 비법은 갈쳐준단다. <킬빌 Volume 1>이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은 후 국내 수입사 측과 영등위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다.

“… 어실장은 난감해하는 자신들에게 영등위가 ‘비법’을 귀띔해줬다고 말했다. “재심의를 신청하는 대신 심의 자체를 취하하는 방법도 있다”고 가르쳐주더라는 것이다. 심의를 신청한 사실 자체를 취하하면 자연히 심의 결과도 무효가 된다. 따라서 프린트를 손질해 다시 심의를 신청하면 같은 영화의 재심의가 아니라 새로운 영화를 심의하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

– <필름2.0> 153호 ‘긴급리포트 <킬빌> 등급 논란’에서 부분 발췌

처음엔 잔인하다며 제한상영가 등급 줘 버리고 나중에 필름 몇 군데 짤라오자 그제서야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내준 영등위의 교묘함. 앞에선 가위질 안 한다고 공표하면서 뒤에선 교묘하게 삭제를 유도하는 영등위의 가위 안 들고 가위질하는 저 위선.

칼 안든 강도가 따로 없다. 차라리 가위질하고 싶다고 대놓고 얘기를 해라, 이 영등위 거짓말쟁이덜아!

5.

이렇게 해서 우린 영등위의 계속된 거짓말 행각의 목적이 결국 가위질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 수준 떨어지는 영등위를 갖고 있는 이 땅의 관객들. 진짜 관객해먹기 짱난다.

좋은 말로 경고한다. 거짓말쟁이 영등위야. 확 사기죄로 고소하기 전에 이제 그만 개과천선하지 않을래? 앙?

(2003. 11. <딴지일보>

<스위밍 풀> ‘무삭제’ DVD?

<스위밍 풀> ‘무삭제’ DVD가 출시된다고 한다. 개봉 당시 필름이 삭제 돼있었다는 얘기다. 누가 삭제했을까?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를 의심할 수도 있겠으나 그랬다면 이슈가 되었을텐데 그런 소식이 들려온 적은 없다. 이 영화는 1차 심의에서 18세 상영가를 받았다. 부분 삭제된 필름으로 심의를 받았던 것이다.

의문이 든다. <스위밍풀> 수입사측에서 등급을 받지 못할까봐 지레짐작, 문제가 될만한 부분을 미리 삭제하고 심의를 받은 것은 아닐까? 정말 그렇다면 문제다. 영등위가 직접적으로 필름을 자를 권한은 없지만 <죽어도 좋아>, <킬빌 Volume1> 등에서 보여준 전력을 볼 때 간접적으로 가위질을 하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 도리가 없다.  

무엇보다 특정부분을 삭제했다고 해서 <스위밍 풀>측은 어떻게 등급통과를 자신할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그동안 영등위가 심의에서 보여준 기준을 보건데 말이 기준이지 그 해석은 들쭉날쭉 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개봉 당시 과도한 폭력성을 문제삼아 12초 분량을 삭제한 끝에야 겨우 18세 관람가 등급을 받았던 <킬빌 Volume1>이었거늘 후에 벌어진 DVD 심사에서는 무삭제 통과되었으며 또한 그 수적인 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으나 사지절단이라는 잔인한 강도 면에서 결코 뒤질 것이 없었던 <천년호>의 경우는 15세 관람가라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도대체가 상황을 판별할 정확한 기준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밍 풀> 수입사 측이 미리 필름을 삭제하고 심의를 넣은 의도가 자뭇 궁금해진다. 어쩌면 디비디 시장에서 ‘무삭제’가 가지고 있는 홍보효과 때문은 아닐까?

그 진위여부를 이 지면에서 따지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 가능성만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착잡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 ‘삭제’라는 떳떳치 못한 행위가 마케팅에 이용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다니. 그 이유는, 제한상영관은 단 한군데도 없으면서 제한상영가라는 웃지 못할 등급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급보류와 같은 심의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영등위 관계자들이 방어용으로 흔히 써먹는 레퍼토리가 있다. ‘제한상영가도 등급이다. 우린 기준에 맞춰 등급을 부여할 뿐이다. 제한상영관이 없는 건 우리가 알 바 아니다“

악법도 법이란 얘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법을 계속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올바른 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제한상영관이 단 한군데도 없는 이 땅에서 제한상영가 등급은 누가 봐도 악법이다. 이를 올바로 잡기 위해서는 제한상영가 등급을 없애거나 제한상영관을 세우면 된다.

그럼 이것은 누가 해야 하나? 제한상영가 등급이라는 부당한 제도에 반대하거나 피해 받는 이들이 해야한다. 그렇다면 불합리한 제도 속에서 심의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욕을 먹는 영등위 관계자들도 이 대열에 동참해야 함은 물론이다. 사실 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있다면 제도에 따라 등급을 부여한 죄 뿐이지. 다시 말해 영등위 위원들도 피해자다.

그러니 영등위 위원들이여, 당신들의 멍에를 풀기 위해서라도 제도 뒤에 숨어 안주할 것이 아니라 제한상영가 등급 폐지/제한상영관 건립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줄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2004. 2. 영화 월간지 <DVD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