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 오브 마인> 가해의 역사를 인정한다는 것

4월 극장가는 전통적으로 비수기다. 최근 몇 년 들어 이 시기에 극장을 찾는 사람은 더 줄었다. 볼만한 영화가 없어서? 아니다. 날이 좋아지면서 어두컴컴한 극장을 기피(?)하는 사람이 늘었기 때문이다. 봄기운이 완연해지다보니 벚꽃놀이 같은 나들이를 선호하고 프로야구 시즌이 개막하면서 야구장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렇다면 4월의 비수기를 극복할 극장가의 대안은? 대중성 있는 작품은 잠시 개봉을 미뤄두고 규모가 크지 않거나 빅스타가 출연하지 않지만, 작품성이 있는 영화로 틈새시장을 노린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이 코너의 제목처럼 정말 ‘보물찾기’의 영화를 만날 수 있는데 <랜드 오브 마인>(2016)이 그렇다.

<랜드 오브 마인>은 덴마크 출신의 마틴 잔디블리엣 감독 작품이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아카데미의 외국어 영화상 부문의 후보에 오른 작품들은 출품 국가의 정체성을 살리는 가운데 이를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해 좋은 점수를 받은 경우다.

덴마크의 서해안 해변을 배경으로 하는 <랜드 오브 마인>은 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바로 그 시기를 다룬다. 5년 간 독일의 강점(强占) 하에 있다가 해방된 덴마크는 그에 대한 보복 조치를 감행한다. 포로로 잡고 있던 독일의 소년병 2,600명 정도를 독일군이 덴마크의 해변에 매설해 놓았던 약 200만 개의 지뢰 해체 작업에 투입한 것. 이 과정에서 많은 소년병이 목숨을 잃거나 신체에 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전쟁 포로를 극심한 노동이나 위험한 작업에 내모는 것을 금지했던 제네바 협약을 위배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희생자는 10대 아이들이 아니었던가. 평소 2차 세계 대전을 말할 때 독일을 가해의 원흉으로만 인식해왔던 내게 <랜드 오브 마인>은 충격 그 자체였다. 전쟁이란 단순히 가해와 피해의 도식으로 구분할 수 없는, 그 자체로 비극이란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와 같은 사실이 왜 이제야 알려진 걸까. 개봉 당시 <랜드 오브 마인>을 두고 덴마크에서는 적지 않은 논란이 일었다고 한다. 영화보다는 이를 연출한 마틴 잔디블리엣 감독을 향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요지는 이렇다. 덴마크 입장에서 부끄러운 역사를 만천하에 공개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거다.

실제로 덴마크는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의 지배를 받으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영국과 대척에 섰던 독일은 영국군이 덴마크의 서해안을 경로 삼아 독일 본토로 들어올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상당 수의 지뢰를 덴마크 서해안 지역의 해안에 매설했고 2010년대에 들어서야 이 지뢰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었다. 독일을 향한 덴마크인의 앙금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렇다고 독일 소년병을 향한 덴마크의 가해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어느 기록에 의하면, 독일군이 덴마크를 점령했던 5년의 세월보다 1945년 5월부터 10월까지 5개월 동안 진행된 지뢰 해체작업에서 더 많은 독일 소년병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런 사실들을 알리지 않고 무언으로 남겨둔 채 자신들의 피해 사실만 강조하는 덴마크에게 책임을 물어 마땅하다.

다만 <랜드 오브 마인>이 덴마크의 문제로만 소년병의 희생을 다뤘다면 보편성을 확보하기 힘들었을 터다. 이에 대해 마틴 잔디블리엣 감독은 가해의 전쟁 역사를 가리는 행위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다며 이 영화는 바로 그와 같은 은폐의 시도들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의 아픈 역사를 통과한 한국인의 입장에서 <랜드 오브 마인>의 메시지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전선에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했던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국가 차원이 아니라 민간 영역에서 이뤄졌다며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는 일본 아베 정권의 태도는 전쟁 가해의 역사를 가리는 대표적인 행위다. 그런 일본 정부에 항의는커녕 질질 끌려다닌 박근혜 정부의 졸속적인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는 다음 정부가 바로 잡아야 한다.

이처럼 아픈 과거를 기억하고 바르게 세워야 하는 건 당연하다. 이에 동의한다면 한국 또한 참전했던 전쟁에서의 가해한 역사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와 같은 후속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 전 당시 한국군에 의해 약 9천 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베트남에는 한국군의 잔익한 학살을 잊지 않기 위헤 세운 증오비도 알려진 것만 다섯 군데다.

일본이 한국에게 가한 만행도, 한국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야만스러운 행동도 모두 가해의 역사다. 우리가 일본에게 일제강점기 당시의 역사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을 요구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베트남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에 합당한 배상 및 보상 절차를 진행해야만 한다. 일본에게 진심 어린 사죄를 요구하면서 우리가 저지른 가해의 역사를 부러 외면하는 건 결코 올바른 행위가 아니다.

<랜드 오브 마인 Land of Mine>의 제목은 일차적으로 ‘지뢰가 묻힌 땅’을 의미한다. 중의적으로 ‘나의 땅’이라는 뜻을 포함한다. 나의 땅에서 발생한 비극의 책임을 따져묻는 것만큼이나 ‘남의 땅’에서 행한 사건사고의 책임을 지는 것도 중요하다. 역사 청산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덴마크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진실이다.

 

ARENA
2017년 5월호

논란(?)의 정치영화를 보고싶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아니, 선거 시즌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봉인이 해제(?)되면서 한국영화계는 정치와 역사적으로 민감한 소재의 작품들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초유의 서울시장 3선에 도전하는 시장의 정치욕을 다룬 <특별시민>은 4월 26일 개봉을 확정했다. 1급 군사기밀에 얽힌 군 내부 비리 사건을 파헤치는 <일급기밀>과 독일 기자를 싣고 영문도 모른 채 1980년 5월의 광주 민주화 현장으로 달려가는 <택시운전사>는 후반 작업 중에 있다. 또한, 민주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소재로 한 <1987>은 주요 캐스팅을 마무리한 상태다.

탄핵 정국을 지나 대선을 앞둔 지금 이들 영화를 향한 관심은 꽤 높은 편이다. 박근혜 정권 들어 정치와 역사와 관련해 표현의 자유를 맘껏 누리지 못한 한국영화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위의 작품을 선보이지 않을까, 기대감이 높다.

안 그래도 올해 개봉작 중 사회정의를 소재로 했던 <더 킹>과 <재심>은 흥행 성적이 나쁘지 않았다. 정치 일인자에 빌붙으려는 검찰의 추악한 권력욕이 핵심인 <더 킹>은 531만 명을, 약촌 오거리 사건의 억울한 살인 누명자의 사연을 따라가는 <재심>은 242만 명을 동원, 정의 실현을 향한 우리 사회의 요구가 얼마나 큰지를 방증했다. 그렇다고 사회적인 현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는데 이들 영화가 감정적으로 접근한 탓이 크다.

<더 킹>은 악질 검찰을 조롱하는 한편 주인공의 드라마틱한 개과천선으로 사회정의라는 해피엔딩을 이끌어 관객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는 데 그쳤다. <재심>은 자기만 생각하는 변호사가 사건을 해결하며 정의를 깨닫는 익숙한 드라마투르기로 실화임에도 불구, 인위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감정적인 접근은 종종 이성을 마비시키고는 한다. 요는, 사회 변화가 절실한 이들이 행동하게끔 이끄는 중요한 ‘질문’이 빠져있었다.

이번 주제의 칼럼을 생각하며 오랜만에 <JFK>(1991)를 다시 보았다. 지금의 올리버 스톤은 <스노든>(2016) <파괴자들>(2012)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2010) 등 평범한 수준의 작품으로 연명(?)하고 있지만, <JFK> 시절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감독이었다.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플래툰>(1986)은 미군끼리 서로 총질하는 내용으로 미국 사회를 경악시켰다. <7월 4일생>(1989)에서는 국가를 위해 참전했다 총상을 입어 하반신을 쓸 수 없게 된 군인이 어떻게 국가에 버림받고 결국 반전주의자가 되는지를 살펴 공감을 일으켰다.

압권은 미합중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암살범을 추적하는 <JFK>다. 이 영화에서 올리버 스톤은 암살범으로 알려진 리 하비 오스왈드 대신 JFK의 뒤를 이어 대통령 대행에 오른 존슨을 비롯한 미국의 우파와 이에 동조한 언론, 그리고 지속적인 전쟁이 필요한 군수 산업체가 모의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올리버 스톤은 암살 현장에서 찍힌 시민의 홈비디오 화면, 정부가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 두던 관련 자료 등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해 자신의 주장에 논리를 부여한다.

당연히 미국에서는 <JFK>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그렇다고 기존의 사실을 뒤집는 진실이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올리버 스톤의 입장은 확고하다. 의혹이 있는 사건, 특히 국민의 삶과 직결하는 정치와 역사 문제에서는 어떻게든 의문을 제기하고 더 나아가 최대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 불의를 향한 분노로 가슴은 뜨겁게 불을 지피되 진실에 접근하는 태도는 냉정해야 한다는 게 올리버 스톤의 철학이다.

물론 <더 킹>이나 <재심>처럼 감정에 어필하는 영화도 필요하다. 그렇다고 이런 종류의 정치 영화들이 모두 관객의 감정에 호소하기 위해 뜨거워질 필요는 없다. <JFK>처럼 차갑고 건조한 영화도 필요하다. 아직 한국의 역사에는 정치적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적 사건들이 산적해 있다. 즉, 영화가 다룰 만한 정치적인 이슈의 소재가 많다는 얘기다.

2005년 봄, 한국 사회는 임상수 감독이 연출한 <그때 그사람들>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에 대해 유족인 박지만은 아버지 박정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를 들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이에 법원은 일부 장면을 삭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표현의 자유 문제에 대한 토론을 비롯하여 박정희 전(前)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등이 이뤄지며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의미 있는 논의가 이뤄졌다.

역사는 흘러간 것이라고 해서 과거형이 아니다. 미래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에 지금 현재 어떻게 바라보는 지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영화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계속해서 기획되고 만들어져 대중에 공개될 필요가 있다. 논란으로 시끄러울 수 있겠지만,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별시민> <일급기밀> <택시 운전사> <1987> 등 앞으로 개봉하는 정치 역사 소재의 영화가 흥행 성적에만 안주하지 않고 유의미한 파문을 일으키길 기대해 본다.

 

비즈엔터
‘허남웅의 아무말이나’
(2017.4.12)

여성 캐릭터 활용법

2017년 한국영화계의 화두 중 하나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다. 지난해 <우리들> <비밀은 없다> <미씽: 사라진 여자> 등이 좋은 평가를 받았고 올 초에는 <여교사>가 개봉하여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남성 영화 일색인 우리 영화 시장에 여성 영화의 등장은 그 자체로 반가운 소식이다. 브로맨스가 주목받는 한편에서 워맨스를 통해 한국영화 산업 다양성의 균형을 맞춰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하나 아쉬운 건 여성 영화들이 좋은 평가에 버금갈 만한 흥행 성적을 내놓지 못한다는 데 있다. 2017년 한국영화계의 과제라면 여성 영화가 관심을 받기 시작한 2016년의 흐름을 대중적으로 안착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 있다. 한국 여성 영화가 흥행 면에서 미흡했던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성공한 여성 영화를 살펴보는 것이 그 첫 번째가 될 것이다.

사실 한국뿐 아니라 할리우드에서도 여성이 원톱으로 나서거나 독립적인 캐릭터를 맡을 수 있는 영화들은 남성 배우들보다 상대적으로 그 폭이 좁다. 그런데도 그 좁은 틈을 뚫고 압도적인 박스오피스 기록으로 유의미한 결과물을 내놓는 것이 할리우드의 진짜 힘이다. 심지어 여성 혹은 여성주의를 굳이 강조하지 않으면서 영화 그 자체로 관객을 끌어모으는 노하우는 눈여겨볼 만하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이하 ‘<로그 원>’)와 <모아나>와 <컨택트>가 적절한 예라고 할 것이다. <로그 원>은 우주를 지배하려는 제국군에 맞서는 저항군 소속 진 어소(펠리시티 존스)의 활약을 다룬다. <모아나>는 모투누이 섬이 저주에 걸리자 이를 풀기 위해 바다로 나서는 소녀 모아나(아우이 크라발호 목소리)가 전면에 나선다. <컨택트>는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가 지구에 나타난 외계인의 언어를 습득하며 이들을 알아가는 내용이다.

모두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영화이지만, 그 사실을 애써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이 더 흥미를 돋울 만한 모험의 설정에 더욱 역량을 쏟아붓는 듯한 인상을 준다. <로그 원>은 우주에서의 전쟁을, <모아나>는 애니메이션의 모험을, <컨택트>는 SF가 주는 경이로움을 핵심 삼아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여성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영화가 특별하다는 인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설정이 일반적이라는 느낌을 선사한다.

철저히 대중의 관점에서 여성 캐릭터를 설정하고 다루는 할리우드와 다르게 한국영화의 경우,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독특하고 특별한 접근으로 포지셔닝 된다. 이는 한국영화에서 여성 영화와 여성 배우가 남성 영화와 남성 배우에 비해 차별받아왔다는 사실을 역으로 증명한다. 그것은 곧바로 영화의 설정과도 연결되는 것이어서 다루는 내용을 보면 대개 남성적인 지배 구조 속에 일종의 계급 투쟁을 벌이는 여성의 모습으로 단순화된다.

엇! 그렇다고 나의 견해가 한국 여성 영화의 성취를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아님을 밝히고 싶다. 개인적으로 <우리들> <비밀은 없다> <미씽: 사라진 여자> <여교사>를 흥미롭게 관람했을 뿐 아니라 이들 영화의 존재가 남성 영화 일색인 한국영화 산업에 유의미한 족적을 남겼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다만, 소수의 관객만이 여성 영화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관객의 관심을 끌게 만들어 좀 더 건강한 한국영화계를 만들자는 제언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로그 원>과 <모아나>에 대해 언급했지만, 이들 영화가 여성 주인공과 함께 하면서 큰 성공을 기록한 데에는 오랜 역사가 필요했다. 아시다시피, 이들 영화는 각각 <스타워즈> 시리즈와 디즈니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루카스 필름은 2009년 디즈니에 합병됐다!) J.J. 에이브럼스 감독은 이전 6편의 에피소드까지 백인 남자 일색이던 시리즈에 여성 레이(데이지 리들리)와 흑인 핀(존 보예가)을 투톱으로 내세워 새 시대에 걸맞은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를 선보였다. 그의 성공이 <로그 원>까지 이어진 셈이다.

그러니까,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의 말을 빌려 살짝 변형하자면, 지금은 2017년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주목받고 배려받는 것이 아니라 여성도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을 벌이는 시대라는 의미다. 시대는 그렇게 그에 걸맞은 정신을 요구한다. 흔히 보수적이라고 알려졌던 디즈니는 시대 정신에 발맞춰 <모아나>에서는 백마 탄 왕자 ‘따위’ 등장시키지 않는다. 주인공 모아나는 마우이(드웨이 존슨 목소리)와의 ‘공조’ 속에 섬의 저주를 푸는 데 성공한다. 힘들다고 울지도 않고 사랑에 더 신경을 쓰지도 않으며 그저 자신이 맡은 일에만 충실할 뿐이다. 이를 꿈과 모험의 측면에서 풀어가니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라도 부담감 없이 즐길 수 있다.

한국에서도 오락에 충실한 여성 영화가 등장해 흥행한 예가 있다. <암살>(2015)은 극 중 한국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을 주인공 삼아 1천2백7십만 명의 관객을 기록하며 여성 독립군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끌어내기도 했다. 그 흐름은 공교롭게도 여성이 주인공이 아닌 일제강점기 배경에서 독립 투쟁을 벌이는 영화의 유행을 불렀다. 이는 한국 여성 영화의 갈 길이 여전히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2월 중순에 <비밀은 없다>(2016)를 연출한 이경미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 적이 있다. 한 관객이 한국에서 여성 영화가 제작되기 힘든 이유에 관해 물었다. 이에 대개 이경미 감독은 여성은 남성보다 물리적인 힘이 약해 역동적인 이미지를 얻기가 힘들다는 요지의 답변을 했다. 그러면서 이를 극복하는 이야기와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는 얘기를 했는데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감지되는 분위기 중 하나는 남성 영화에 대한 관객의 피로도다. 브로맨스로 통칭하는 남성 투톱 영화에, 갈수록 자극적이 되어가는 남성 영화를 향한 관객의 발걸음은 조금씩 빠지는 추세다. 새로운 영화를 향한 기대감이 충만한 상태다. 아니, 제작 편수에서 독주하는 남성 영화와 균형을 맞춰줄 여성 영화의 출현이 절실하다. 판은 깔린 상태다. 좀 더 많은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이야기와 이미지의 여성 영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ARENA
2017년 3월호

교차편집의 보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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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추가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됐다. 당연한 결과지만, 이를 끌어내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했다. 드러나는 의혹 앞에서 거짓으로 일관하는 박근혜를 비롯한 청와대와 새누리당 부역자들의 태도를 무력화한 건 진실이었다. 진실 앞에서 박근혜 일당이 보인 행적은 가식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몰상식의 극치라 내가 이러려고 대한민국 국민 노릇을 하고 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드러나는 진실과 이에 대한 부인, 또 다른 진실 앞에 변명을 앞세우는 참과 거짓의 과정이 교차로 반복되면서 끝내 기념비적인 역사가 완성됐다. 그래서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야기된 그간의 TV 뉴스/시사 보도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하게 활용된 기법은 다름 아닌 ‘교차 편집’이다.

교차 편집(cross cutting)은 다른 장소 혹은 시간대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시간상 전후 관계로 병치시키는 영화의 편집 기법을 말한다.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많이 쓰며 세밀한 심리 묘사에도 효과적이다. 이 기법의 효과를 인상적으로 활용한 방송은 시사고발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SBS)이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방영 전부터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살수차 9호의 미스터리’와 ‘대통령의 시크릿’에서 교차 편집을 활용해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살수차 9호의 미스터리’는 고(故) 백남기 농민의 사망사건의 진실을 다뤘다. 오프닝은 강신명 전(前) 경찰청장의 이임식과 국정감사 출석 당시의 장면을 교차로 편집해 구성했다. 강신명 전 경찰청장은 자신의 가족과 함께한 이임식에서 “경찰의 힘은 국민의 사랑에서 나옵니다”라고 말한다. 곧 이은 국정감사 출석 장면에서는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해서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자신에게 기쁜 날에는 모두가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고 의혹이 제기된 상황에서는 말을 바꾸는 가식적 태도가 교차 편집을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세월호의 숨겨진 7시간의 비밀을 파헤친다고 해서 <그것이 알고 싶다>의 10년 중 최고 시청률(19.0%)을 기록했던 ‘대통령의 시크릿’은 예고편에서부터 교차 편집으로 눈길을 사로잡은 경우다. ‘살수차 9호의 미스터리’가 강신명 전 경찰청장의 이임식과 국정감사 장면을 앞뒤로 교차한 것과 다르게 ‘대통령의 시크릿’은 장면의 좌측을 박근혜 대통령의 대통령 취임사를, 우측에 최순실 게이트에 따른 1차 사과를 배치한 교차편집을 선보였다.

“국민 모두가 함께 행복한 새 희망의 새 시대를 만들어갑시다” 대통령 취임사 연설 장면이 좌측에서 시작하면 이어 우측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립니다” 대국민 사과문 중 일부가 플레이된다. 그리고 좌우 동시에 고개 숙여 인사하는 장면이 펼쳐지면 편집의 의도가 선명히 드러난다. 국민의 편에 서서 정책을 살피겠다고 공개선언을 했지만, 비공개적으로 최순실과 붙어먹어 사리사욕을 채운 대통령의 적폐가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뷰파인더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이래 현대사의 굵직한 순간들은 카메라에 담겼고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기법은 주목을 받았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 New American Cinema’의 경우가 이에 해당할 터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는 1970년대 미국에서 태동한 영화 운동으로 사회 순응적인 이야기만 선보이며 스튜디오를 벗어나지 않는 기성의 가치에 반하면서 시작됐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선도한 이들은 기존 35mm 카메라에만 안주하지 않고 16mm (때로는 8mm 혹은 비디오) 시스템을 채택해 거리로 나왔고 사회 고발의 형태가 짙은 영화를 선보였다.

이의 바탕이 된 건 베트남전 파병을 둘러싼 신구의 갈등이었다. 명분 없는 전쟁에 참전을 결정하며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몬 미국 정부를 비롯해 기성세대에 대한 청춘의 반발은 국가 전 분야에 걸쳐 변화를 요구했다. 국가 시스템에 순응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학생의 본분(?)에 충실하던 젊은이들은 거리로 나와 전쟁 반대를 외쳤고 이를 기록하는 카메라는 미국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부조리와 비리를 고발하는 콘텐츠를 경쟁적으로 선보였다. 기성의 가치에 반하는 저항정신과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폭발하며 등장한 영화 운동이 바로 뉴 아메리칸 시네마였다.

프랑스의 ‘누벨바그 Nouvelle Vague’는 사회 변화에 대한 요구가 영화 운동에서 드러난 후 그 유명한 68혁명까지 이어진 경우다. ‘새로운 물결’이란 의미의 누벨바그는 소설 원작의 영화(?)나 만드는 등 매너리즘에 빠진 프랑스 영화 산업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됐다. <400번의 구타>(1959) <히로시마 내 사랑>(1959) 등이 선구자적 작품으로 기존 형식을 무시하는 태도로 대담하게 영화를 만들어 누벨바그의 기치를 세상에 알렸다. 그중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60)는 ‘점프 컷 jump cut’이라는 혁신적인 편집 기법으로 변화에 대한 열망을 ‘혁명적’으로 담았다.

점프 컷은 장면이 비약적으로 돌출한다는 의미의 편집 용어다. 보통 편집은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동작 및 사건이 연속적이 되도록 화면을 연결하여 한 장면이 끊어짐 없이 이어지는 게 보통이다. 그와 다르게 점프 컷은 연속성의 흐름을 깨뜨려 화면상의 연기 동작이 시간을 건너뛰거나 되돌아가는 듯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장 뤽 고다르는 새로운 시대로의 도약(jump)을 점프 컷의 미학으로 드러내며 누벨바그의 가장 중요한 감독으로 입지를 굳혔다.

장 뤽 고다르를 감독으로 키운 건 영화를 수집, 보관하고 상영하는 시네마테크였다. 시네마테크 운동을 최초로 설파한 건 앙리 랑글루아로 그는 1936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설립했다. 이후 1968년 2월 프랑스의 드골 정부가 앙리 랑글루아를 해임하면서 프랑스 영화인과 시민들이 반대 시위를 펼쳤는데 68혁명의 전초가 되는 중요한 사건으로 작용했다.

다시 말해, 과거와 안녕을 고하는 새로운 사회 변화의 움직임과 이를 기록하는 대중매체(mass media)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불만이 쌓일 대로 쌓였다가 폭발하는 민심의 지진은 종종 특징적인 카메라 기법의 여진을 강하게 동반하며 오랜 시간 깊은 인상을 남기며 회자되고는 한다. 기성의 가치에 더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미국의 젊은이들은 거리로 나와 반전과 평화를 외쳤고 카메라는 이들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새로운 세기에 대한 프랑스 시민의 열망은 점프 컷을 선도하며 헉명을 불렀다. 그리고 2016년 현재 한국은 청산되어야 할 구체제와 이로 인해 발목 잡힌 현재의 가치가 충돌하며 힘겨루기를 하는 상황에서 이에 관한 판단 근거로 교차 편집이 자연스레 등장했다.

그렇다면 교차 편집이 불러올 한국의 새로운 영상 운동은 어떤 형태가 될까? 개인적으로 추측건대, 뉴스 및 시사 프로그램에서 전에 없던 보도가 여론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사회 변화를 견인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최순실 게이트를 폭로해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으로 몬 것은  <뉴스룸>(jtbc)과 같은 뉴스의 힘이 컸고 <그것이 알고 싶다>와 <스포트라이트>(jtbc) 등과 같은 시사 프로그램들이 세월호 7시간과 같은 비밀을 파헤치며 시민들을 광장으로 끌어내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닌 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바꿔야 할 구습들이 산적한 까닭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언론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 몇몇 언론을 제외하면 정부와 여당의 철저한 통제 속에 박근혜 대통령과 부역자들의 입맛에 맞는 보도로 국민의 공분을 사 왔다. 이제 (타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부역 언론의 역사를 청산할 때인데 여기에 교차 편집의 미학이 유효한 이유가 있다. 권력에 부역한 이들은 과거와 현재의 말과 행동이 서로 맞지 않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교차 편집과 같은 비교를 통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라 할 만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은 그와 성격이 비슷한 ‘워터게이트 사건 Watergate Affair’과 비교되고는 한다. 워터게이트는 대통령 재선을 준비 중이던 리처드 닉슨 측에서 워터게이트 빌딩 내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하여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불명예 퇴진한 사건을 말한다.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던 닉슨은 이 사건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워싱턴포스트의 대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의 탐사보도에 힘입어 대통령 자신도 무마공작에 나섰던 사실이 폭로되어 결국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워터게이트 이후 미국인들의 자국 언론에 대한 호감은 급상승한 것으로 알려진다. 언론사에 지원하는 젊은이들의 숫자가 급증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최순실 게이트도 마찬가지여서 뉴스와 시사 보도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률은 그 어떤 때보다도 높다. 언론에 대한 기대치가 반영된 결과일 테다. 이들의 보도로 인해 그동안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한 담화의 내용 중 상당수가 거짓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여전히 밝혀져야 할 진실은 많다. 박근혜 정부 들어 세월호 사건을 비롯하여 산적한 거짓말이 많다는 의미다. 진실과 거짓, 진짜와 가짜를 밝힐 교차 편집은 한동안 뉴스와 시사 보도 프로그램에서 많이 보게 될 것이다. 교차 편집의 등장은 언론이 살아났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바야흐로 교차편집의 보도학이 이 사회를 바꾸고 있다.

 

ARENA
2016년 1월호

다니엘 블레이크 씨에게 보내는 편지

danielblake

(*영화의 관람을 방해할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다니엘 블레이크 씨당신의 사연을 담은 영화 <다니엘 블레이크>를 관람했습니다재밌게 보았다고 말씀드리기 송구할 정도로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이었습니다함께 본 이들의 감상도 다르지 않았어요하나같이 눈시울에굵은 눈물방울을 매달았더군요당신의 사연에 깊이 감정이입을 했다는 의미이겠죠

평생을 성실한 목수로 살아오셨죠심장병을 얻어 투병 중인 와중에도 어떻게든 일자리에 복귀하기 위해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목공 일이 아내를 잃은 후의 상실감과 외로움을 덜어주는 데 한몫했을 거란 사실도 짐작할 수 있었어요그렇죠노동은 인간의 신성한 권리이면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해 줄 최후의 자존심 같은 것이겠죠아내와의 사별과 갑작스럽게 찾아온 심장병그로 인해 일할 수 없는 상황까지얼마나마음이 안 좋으셨겠어요.  

삼중고를 견디게 해준 건 조만간 다시 연장을 들고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가구를 만들 수 있을 거란 희망 때문이었겠죠그런 이들을 도우라고 우리가 세금을 내고 정부로 하여금 마련한 게 복지제도입니다심장병을 치료하는 동안 일을 할수 없으니 대신 실업급여를 받아 생계를 유지해야 되겠죠

저도 그런 적이 있어요아차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늦었네요저는 영화를 보고 나서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영화평론가입니다그럴싸한 직업 같아도… 미래가 불안정한 비정규직입니다한때 잡지사에 정규직으로 소속되었던 때도 있었죠하지만가는 곳마다 폐간이었고 그럴 때마다 저 역시 실업급여가 절실해 관계 기관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좋은 기억은 아니에요내가 낸 세금을 실업급여의 형태로 돌려받는 것이라고는 해도 내 노동력이 잠시간 시장에서 효력을 잃었다는 증거와 같아 마음이 썩 좋지 않았어요무엇보다 그 절차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어서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지정된 시간 동안 재취업 교육을 받아야 했죠해당 서류에 인적사항과 기타사항을 적어내야 했어요실업급여를 받는 동안 재취업에 힘쓰고 있다는 사실도 증명해야 했죠이 모든 걸 충족하지 못할 경우실업급여를 받을 수없다니안 그래도 상실감이 클 이들에게 이중의 고통을 안겨주는 건 아닌가 불만이었어요

당신은 저의 경우와는 좀 달랐죠심장병으로 인해 일을 쉬어야 함에도 ‘노동적합’ 판정을 받게 돼 질병 수당이 아닌 실업급여를 받아야 할 상황이었죠세상에노동 적합이라뇨병원에서는 분명히 일을 쉬어야 한다고 했는데 관공서에서는제대로 된 확인 절차도 없이 노동이 가능한 상황이라고 당신을 몰아붙였죠정 힘들면 실업급여를 신청하라고 강요했어요

당신으로서는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그것마저 쉽지 않았던 건 전혀 컴퓨터를 해본 적 없는 당신이 인터넷에 접속해 관련 서류를 내려받고 공란에 기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죠이놈의 관료주의서류 한 장 프린터로 뽑아주는 호의가 뭐 그리 어렵다고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버리는 거죠?

전 세계의 많은 이가 최소한의 인간 존엄을 누리지 못해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게 현실이에요어쩌다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걸까요시장경제는 우리를 이런 재앙에 처하게 하였습니다노동계급을 자꾸 취약하게 만들어 착취하는 구조로 만들었죠죽어라 일해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은 다니엘 블레이크 씨의 경우만은 아니에요저를 포함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거죠독선적이고형식적이고억압적이고획일적이고무엇보다 비민주적인 관료주의 시스템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에겐 어떤 희망이 있을까요?

희망은 먼 곳에 있지 않더군요당신이 희망이었습니다당신 자신을 추스르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두 아이를 키우느라 끼니도 챙기지 못하는 싱글맘 케이티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먼저 나서 도움을 주는 모습에서 저는 희망을 보았습니다그게 바로 연대이겠죠결국중요한 건 힘든 이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죠관료주의는 되려 그들의 규정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배제하고 원 밖으로 강제적으로 밀어내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습니다저들의 보신과 편의를 위한 것이겠죠저들에게 원 밖으로 밀려난 이들의 존재는 낙오자로 통칭할 뿐이지 개인의 인격이나 존엄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당신이, ‘다니엘 블레이크라고 선언한 이유도 여기에 있죠

요즘 한국에서는 매주 주말이면 전국 곳곳에서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습니다참여한 사람들의 숫자는 100만에서, 160, 235만 등으로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국정을 농단하고 국민의 자존심을 짓밟은 이()의 하야를 요구하는 목소리인 거죠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이들의 마음은 이렇게 한결같지만집회에 나오기까지 그동안 겪었을 고통은 제각각이었을 겁니다그만큼 많은 비리와 부조리가 이 세상을 좀먹고 약자들을 괴롭힌 것이겠죠 

우리는 우리 각자가 누구인지 당신처럼 목소리를 높여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하나의 목소리가 두 개가 되고수만수십만수천 만의 함성으로 커진다면 세상은 거기서부터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겠죠.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라는 당신의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이 세상의 수많은 케이티와 손잡고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희망과 연대의 끈을 놓지 않겠습니다당신은 내게 영웅입니다하늘에서 우리를 응원해주세요

한국에서 허남웅 드림

 

예스24
(2016.12.8)

리더가 바로 서야 팀이 바로 선다

mourinho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공히 리더를 잘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지면에 안 그래도 쏟아지고 있는 정치 이야기 하나를 더 보태려고 하는 것인가. 그건 아니고. 리더 문제는 정치뿐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있는데 여기서는 스포츠 지도자, 즉 감독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이 주제를 떠올리게 된 계기는 영국 프리미어 리그(English Premier Legue)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의 경기였다. 맨유의 현(現) 감독이자 첼시의 전(前) 감독 조제 무리뉴로 인해 ‘무리뉴 더비’로 불린 이 더비에서 무리뉴는 전 소속팀에 0:4로 대패했다.

스코어 차가 말해주듯 맨유는 무기력한 경기로 일관했다. ‘스페셜 원 Special One’으로 불리면서 맨유 명가의 재건을 노리던 무리뉴. 첼시를 비롯하여 맨체스터 시티 등 라이벌 팀과의 경기에서 모두 패하며 ‘노멀 원 Nomal One’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지금까지의 결과(11라운드 현재 5승 3무 3패로 6위!)를 보자면 무리뉴와 맨유는 궁합이 맞지 않아 보인다.

포르투와 첼시와 인터밀란과 레알 마드리드와 (다시) 첼시를 거치며 보여준 무리뉴의 축구에는 특유의 스타일이 있었다. 우선 뒷선의 수비를 견고하게 구축한 후 중앙의 플레이메이커가 찔러주는 패스 한 방으로 윗선의 골게터가 득점하는 경제적인 축구로 무리뉴는 EPL을 비롯해 이탈리아의 세리에 A,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까지 유럽 3대 리그를 모두 석권했다.

그런데 맨유에서는? 수비진은 11경기에서 13골을 내주며 매 경기 한 골 이상의 실점을 기록 중에 있다. 미드필더는 거액을 주고 인터밀란에서 데려온 폴 포그바만이 매 경기에 출전 중이고 파트너로 마이클 캐릭, 마루앙 펠라이니, 후안 마타 등이 번갈아 가며 뛰는 등 확실한 플레이메이킹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스트라이커의 경우,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팀에서 가장 높은 6골을 기록하고 있지만, 예전 같은 파괴력에는 못 미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리그 일정이 아직 절반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확언할 수 없지만, 지금의 결과만 본다면 무리뉴 감독과 맨유는 궁합이 잘 맞지 않는 인상이다. 반면, 맨유와 ‘레드 더비’로 유명한 리버풀은 감독 한 명 바꿨을 뿐인데, EPL 출범(1992년) 이후 가장 인상적인 시즌을 보내고 있다. 독일 도르트문트에서 ‘벌떼 축구’의 진수를 보여줬던 위르겐 클롭 감독은 제라드도 없고, 수아레즈도 떠나고 라이벌 팀보다 이름값이 떨어지는 선수단을 이끌며 당당히 1위에 올랐다. 특정 선수에 의존하지 않고 피치 위의 선수 전원이 벌떼처럼 움직이며 승리를 쌓는 모습은 올해 리버풀의 전망을 밝게 한다.

팀의 선수 사정과 스타일을 고려해 감독을 선임하는 건 그렇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이름값이 보장하는 건 과거의 경력에 비추어 지급해야 할 돈의 액수가 높다는 사실을 빼면 별로 없다. 미래의 결과는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경기장 안팎의 온갖 변수를 감독과 감독의 지도를 받은 선수들과 이들을 총괄하는 프런트가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달린 셈이다. 리더의 선임에는 따져야 할 게 한둘이 아니라는 얘기다.

EPL 감독 선임 문제로 글을 연 건 실은 한국 프로야구(Korea Baseball Organization)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두산 베어스의 우승과 함께 스토브 리그에 돌입한 KBO는 이미 10개 구단의 감독 선임이 끝난 상태다. 두산과 NC 다이노스와 LG 트윈스와 기아 타이거즈와 한화 이글스와 롯데 자이언츠는 기존 감독이 내년에도 이끄는 것으로 결정 났다. 하지만 넥센 히어로즈와 SK 와이번스와 삼성 라이온즈와 kt wiz는 신임 감독으로 내년 시즌을 준비한다.

넥센은 파격적으로 프런트 출신의 장정석 감독을 사령탑으로 맞이했다. SK는 롯데의 제리 로이스터에 이어 KBO 역사상 두 번째 외국인 감독 트레이 힐만이 팀을 이끈다. 그리고 삼성과 kt는 각각 김한수와 김진욱 감독을 차기 감독으로 선임했다. 팀 재정 상황이 넉넉하지 않은 넥센은 지도력이 증명된 감독을 거액 주고 데려오기보다 돈을 아끼면서 좋게는 도전, 시쳇말로는 도박하는 쪽을 택했다. 김성근 감독이 물러난 이후 매년 성적이 내리막길인 SK는 쇄신 차원에서 외국인 감독을 영입하며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의지만큼은 확실하게 표명했다.

삼성은 류중일 감독이 유임될 거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김한수 전 타격코치를 감독 자리에 앉혔다. 2011년 삼성 지휘봉을 잡고 2015년까지 5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년 연속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의 기념비적인 성적을 거둔 류중일 감독을 이렇게 내칠 거(?)라고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에 반해 신생팀 kt를 팀 창단부터 이끌던 조범현 감독은 지난 시즌에 이어 올해에도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며 전 두산을 이끌었던 김진욱 감독에게 지휘봉을 넘겨줬다.

이들 팀의 감독 선택이 옳았는지는 내년 시즌의 성적이 말해주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기대보다 의문이 앞선다. 넥센은 파격적인 감독 선임도 물론이거니와 김동우 신임 배터리 코치는 전력분석팀장 출신으로 또한 모험적인 선택이다. 코치진은 현장 경험이 풍부한 이들이 맡을 것이라는 예상을 깬 중용(重用)이라 벌써 내년 시즌 넥센의 성적을 꼴찌로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주요 선수가 대거 빠져나간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한 염경엽 감독을 떠나보낸 넥센 프런트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반응이기도 하다.

삼성의 감독 선택은 또 다른 면에서 반감에 직면한 상태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를 살펴봐도 류중일 감독 만한 업적을 이룬 사령탑은 1983년 해태 타이거즈 감독 취임 첫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고 1986∼1989년까지 4연패를 달성한 김응룡 전 감독 정도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힘들다. 정규시즌 9위를 기록했다고 해서 올해를 제외하면 계약 기간 내내 팀을 우승으로 이끈 감독을 바로 내친다는 건 삼성 프런트가 사령탑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다.

지도자의 권위라는 건 감독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지만, 주변에서 보내주는 신뢰가 또한 밑거름이 된다. 크게 어려운 것도 아닌 것이 SK나 kt처럼 약속한 계약 기간을 준수한 후 리그 결과에 따라 재신임을 묻거나 아니면 아쉽지만, ‘마이웨이’ 각자의 길을 가면 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넥센과 삼성의 감독 선임 사례는 많은 씁쓸함을 남긴다. 선수단의 사정, 즉 스타일을 고려한 감독 선임도 아니고 전임 감독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차기 감독을 결정한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이 한국 프로야구의 프런트의 현주소를 가늠케 한다.

맨유의 레전드 중 한 명인 게리 네빌은 언론을 통해 올 시즌 맨유가 4위 안의 성적을 거두지 못하더라도 무리뉴 감독을 경질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강하게 비쳤다. 아직 무리뉴가 자신의 베스트 팀을 구축하지 못했다며 시간을 두고 장기적으로 맨유를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팀 맨유에 대한 개인적인 호오와 관계 없이, 지금까지의 성적과는 별개로 나는 네빌의 발언을 지지하는 쪽이다. 프로 스포츠는 성적으로 말하지만, 먼저 팬을 위해 존재한다. 팬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우승하는 것을 바라지만, 단 하나의 결과에 상관없이 성장해 가는 모습에 더 많은 감동을 한다.

프로야구를 포함해 한국 대부분의 프로 스포츠팀은 말로는 팬을 우선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성적에 기준을 맞춰 대부분을 결정한다. 그러다 보니, 어떤 팀의 프런트는 이미 지나간 업적을 기준으로 지도자를 꼽아 선수단을 만신창이로 만들기도 한다. 현대의 프로 스포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권 침해 방식의 훈련으로 과연 이것이 프로 스포츠에 합당한 것인지 팬들의 반발을 불렀을 정도다. 이것도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미 유효기간이 끝난 스타일은 퇴행을 불러올 뿐이다.

현대의 프로 스포츠에서 감독은 선수단을 조직하고 그에 맞는 전술을 구축, 좋은 성적을 거두는 임무에 앞서 팬들이 이해할 수 있는 팀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팀의 존재 이유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를 전제로 팬들과의 소통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소통은 말을 통해 전달되기도 하지만, 마음을 이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팬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우승하지 못한 것에 아쉬워해도 단순히 성적만을 위해 팀의 존재 이유를 해치는 결정에는 실망한다.

결국, 스타일은 역사다. 팀의 색깔은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승만을 생각한다면 아직 팀과 궁합이 맞지 않는 무리뉴는 경질되는 것이 맞다. 맨유 왕조를 이끌었던 ‘퍼기 경’ 알렉스 퍼거슨도 1986년 감독 부임 초기에는 실망스러운 행보로 팬들의 비아냥을 듣기도, 경질 위기도 겪었다. 결과적으로 2013년까지 27년의 재임 동안 EPL 13회 우승과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2회 우승을 달성했다. 감독이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아니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도록 기다려준 결과다. 이를 직접 경험한 맨유와 맨유의 팬들은 무리뉴의 실망스러운 행보에도 서두르지 않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것이 팀의 품격이고 팀의 리더를 대하는 태도이자 예의라는 생각이다. 팬들이 응원하는 팀에게 원하는 바로 그것이다. 한국 프로 스포츠에서도 퍼기 경처럼 장기간 팀을 이끌고 존경받을 수 있는 감독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를 절실히 바란다.

 

ARENA
2016년 12월호

가을은 더이상 멜로의 계절이 아니다

unknown-time

이맘때가 되면 많은 언론이 영화계에 제기하는 뻔한 레퍼토리가 있다. 멜로영화의 흥행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가을은 멜로의 계절’이라는 선입견을 적용해 개봉작을 살펴보니 눈이 가는 작품이 별로 없고 기간을 올해 초까지 확장해보니 흥행에 성공한 멜로영화도 없기 때문에 나온 지적이다. 이게 왜 뻔한 문제 제기냐 하면, 올해만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특정 시기가 흥행을 보장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특정 시기를 겨냥해 만들어지는 장르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여름에는 더위를 타는 관객을 오싹하게 만들자는 취지(?)에서 공포영화가 성행했다. 가을에는 멜로영화였다. 단풍잎 떨어지는 길이 연상되는 가을은 사람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계절이기 때문에 로맨스를 다룰 적기라는 풍토가 있었다.

다양성의 가치가 많이 떨어진 요즘에는 그런 공식 아닌 공식이 깨진 지 오래다. 블록버스터 영화가 집중되는 성수기와 다양한 영화들이 혼재하는 비수기 정도로 나뉘는 게 보통이다. 이것도 외형상으로 그렇지 특정 시기에 관계없이 될 영화는 되고 안될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는 것이 지금의 극장가 풍경이다.

예컨대, 대표적인 블록버스터 시리즈 <어벤져스>(2012)와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과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는 모두 비수기로 통하는 4월에 개봉해 적게는 700만, 많게는 1,000만 명까지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다. 올해 공포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200만)을 동원한 제임스 완 감독의 <컨저링2>는 9월에 개봉하며 공포물은 여름이라는 공식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영화가 산업이 되고 멀티플렉스로 극장가의 질서가 재편되면서 최대한 많은 스크린을 확보하는 것이 영화 배급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주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하는데 블록버스터의 경우, 블록버스터끼리의 맞대결을 피해 개봉일을 확정하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화려한 볼거리를 갖추지 못했거나 월등히 재미난 이야기를 어필하지 못하는 저예산 영화의 경우, 극장을 잡기도 힘들뿐더러 스크린을 확보해도 많은 관객을 끌어모으는 것이 힘든 상황이다. 멜로영화가 언제부턴가 힘을 못 쓰는 배경은 바로 이와 같은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멜로영화는 생각보다 만들기 어렵다

멜로영화는 블록버스터와는 먼 성격의 장르다. 사건이 중요한 블록버스터와 다르게 멜로영화는 심리 묘사가 이야기의 성패를 좌우한다. 스펙터클로 관객의 눈을 현혹하는 데에도 제한적이라 배우의 외모나 특색 있는 배경 정도가 볼거리로 기능한다. 요컨대, 멜로물은 이야기가 새롭거나 탄탄하지 않으면 흥행에 딱 실패하기 쉬운 구조다. 올 상반기 개봉했던 <나를 잊지 말아요>와 <남과 여>가 각각 정우성과 김하늘, 전도연과 공유 등 최고의 흥행 남녀 배우를 캐스팅했음에도 채 50만 명도 기록하지 못한 배경이다.

<나를 잊지 말아요>는 자식 잃은 젊은 부부의 화해와 사랑을 철 지난 신파로 무리하게 밀어붙이면서 참패를 기록했다. <남과 여>는 저 먼 핀란드까지 날아가 아름다운 설원을 배경으로 했지만, 각자의 배우자가 있는 유부남과 유부녀의 사랑을 기존 제도에 순응하는 뻔한 결말로 가져가 공감을 끌어내지 못했다.

반면 재개봉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쓴 할리우드 영화 <이터널 선샤인>과 <노트북>은 오히려 개봉 당시보다 더 많은 관객을 모은 것이 이채롭다. <이터널 선샤인>은 이별한 남녀가 연애 동안의 기억을 삭제한다는 SF적 설정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모았고, <노트북>은 실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로 눈물샘을 자극하며 한국 멜로영화가 흥행에서 실패한 지점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그러니까, 한국 멜로영화가 흥행에서 부진할 뿐 아니라 잘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워낙 정치 사회 이슈가 많이 터지는 데다, 경제 불황의 어두운 터널마저 앞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은 그럴싸해 보일지는 몰라도 적확한 분석은 아닌 셈이다.

멜로영화는 보기와 다르게 이야기를 짜기가 꽤 힘들다.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다루지만, 관객들이 이를 특별하게 인식하게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멜로물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영화가 관객들의 용이한 감정이입을 위해 극 중에 멜로 라인을 장착하는 게 보통이라 로맨스 하나만으로 승부를 보려는 영화들은 웬만한 이야기로는 본전도 찾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11월에 개봉했거나 개봉 중인 멜로 관련 영화들은 장르를 굳이 로맨스 하나로 확정하지 않는다.

성인 멜로? 판타지 로맨스? 로맨틱 코미디?

김승우, 이태란 주연의 <두 번째 스물>은 그냥 멜로가 아니다. ’성인’ 멜로다. 스물 나이에 스물이 더해진 마흔 살에 옛 연인과 우연히 만나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다시금 사랑하는 내용이다. ‘성인’용으로 차별을 시도했지만, 짧은 내용 요약에서부터 새롭기는커녕 뻔한 냄새가 진동한다. 아니나 달라, 개봉과 함께 소리 소문도 없이 극장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강동원의 출연으로 흥행을 이미 예약한 <가려진 시간>은 ‘판타지’ 로맨스다. 아이들끼리 함께 공사장 발파 현장을 구경하기 위해 산으로 갔다가 모두 실종되고 수린(신은수)만 유일하게 돌아온다. 며칠 후, 실종된 아이 중 성민(강동원)이 성인이 되어 나타나 수린과 재회하고 주변 어른들의 편견에 맞선다. <가려진 시간>은 사실 로맨스보다는 실종된 아이들이 ‘멈춰진 시간’에 존재하는 판타지에 더 방점을 찍은 영화다. 무엇보다 성인이 되어 돌아온 성민과 중학생 수린의 관계는 로맨스이되 성적인 느낌은 완전히 거세된 순수 판타지 쪽에 가깝다.

<사랑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는 차태현과 김유정이다. 기억을 잃은 작곡가가 사랑에 서툰 사람들의 몸을 갈아타며 벌어지는 코믹 소동극이다 보니 극 중 차태현과 김유정의 관계도 <가려진 시간>처럼 우리가 상상하는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이런 식이다. <두 번째 스물>과 <가려진 시간>과 <사랑하기 때문에>는 개봉하는 시기가 가을이다 보니 홍보 차원에서 멜로를 전면에 내세운다. <두 번째 스물>을 제외하면 로맨스는 거들뿐 색다른 이야기와 소재는 판타지와 코미디로 무게중심이 넘어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려진 시간>과 <사랑하기 때문에>가 흥행에 성공할 경우, 이를 두고 ‘로맨스 영화의 부활’이라고 의미 부여할 수 있을까? 매년 되풀이되는 ‘멜로영화의 흥행 예전 같지 않다’는 종류의 기사를 보면 뭔들 안 나올까 싶다. 영화 시장의 패러다임은 이미 바뀐 지 오래다. ‘가을은 멜로의 계절’과 같은 낭만적인 공식도 유효 기간이 벌써 지났다. 그에 맞춰 기사들도 바뀌어야 한다.

 

시사저널
(2016.11.19)

젊음과 소통하려면 우디 앨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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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앨런의 영화를 좋아한다. <돈을 갖고 튀어라>(1969) <애니홀>(1977) 등 초창기 작품은 직접 출연까지 한 우디 앨런의 자기비하적인 유머가 재밌게 다가왔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 >(1985) <라디오 데이즈>(1987) <브로드웨이를 쏴라>(1994) 등의 1980, 90년대 작품은 영화, 라디오, 연극 매체 등을 끌어와 우리의 초라한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이야기가 꽤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리고 스칼렛 요한슨이 출연한 <매치포인트>(2005)부터 제시 아이젠버그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출연한 <카페 소사이어티>(2016)까지 2000년대 이후 최근작들은 우디 앨런 ‘할배’가 자식뻘의 젊은 배우와 호흡하여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흐뭇하게 느껴진다.

1935년생인 우디 앨런은 한국 나이로 올해 여든한 살이다. 1930년생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함께 할리우드 노장 감독의 저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감독으로 유명하다. 특히 우디 앨런은 1년에 적어도 영화 한 편씩을 연출, 지금까지 47편의 장편을 만들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우디 앨런(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나이 정도 되는 감독의 신작이라면 대개 언론에서는 예우 차원에서 평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젊은 감독들과 견주어도 전혀 뒤질 게 없다. 아니 평범한 영화조차 젊은 감독들의 최고작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길 때가 많다.

확실히 우디 앨런의 최근작들을 붙들어 버티는 건 연륜이라는 생각이 든다. 슬로우 스탭으로 인물에게 접근해 가벼운 잽을 날리는 이야기를 구사하는 것 같은데 영화를 보고 나면 강력한 훅을 한 방 맞은 것 같은 느낌이 신선하다. <카페 소사이어티>만 해도 1930년대 미국의 황금기를 대표했던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의 배경을 오가는 설정만으로 거대한 스케일을 과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는 명사들이 즐겨 드나들어 ‘카페 소사이어티’라고 이름이 붙은 제한된 공간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역시나 우디 앨런스럽다는 인상을 준다.

<카페 소사이어티>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바비(제시 아이젠버그)는 할리우드의 거물 에이전트이자 삼촌인 필(스티브 카렐)을 찾아 로스앤젤레스로 온다. 삼촌의 도움으로 영화 일을 통해 크게 성공하겠다는 야심 때문이다. 삼촌은 로스엔젤레스가 문외한인 바비를 위해 비서 보니(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붙여준다. 매력적인 보니에게 첫눈에 반한 바비는 그녀의 마음을 뺐은 데 성공하지만,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보니는 바비와 사귀기 전 유부남과 만나고 있었는데 그 대상이 바로 필이었고 끝내 그와 결혼하는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생활에 정나미가 떨어진 바비는 뉴욕에 돌아와 갱단에 몸을 담은 친형의 도움으로 카페 소사이어티를 차려 크게 성공한다. 그리고 몇 년 후 바비의 성공 소식을 듣고 필과 보니 커플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카페 소사이어티로 찾아온다. 이 커플을 바라보는 바비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만은 않다. 이들에게서 배신당했다는 마음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니와 단둘이 얘기를 나누고 묵었던 감정을 털어버린 바비는 내레이션을 통해 이런 식의 얘기를 한다. ”지나고 나면 다 꿈인 것을, 시간이 깨우는 현실”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전혀 새로운 메시지라고 할 수 없지만, 우디 앨런 영화의 경우라면 다가오는 바가 예사롭지 않다. 삶의 A to Z를 통달한 이의 지혜라는 생각에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고 싶은 심정이 든다. 그와 같은 인상이 더욱 강렬한 건 제시 아이젠버그와 크리스틴 스튜어트 같은 젊음의 빨간 점이 체온계를 뚫고 나올 것 같은 혈기왕성한 배우들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하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영화를 빌미 삼아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려고 하는 우디 앨런의 최근 작품이 주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실제로 우디 앨런은 <카페 소사이어티> 외에도 <이레셔널 맨>(2015)의 와킨 피닉스와 엠마 스톤, <로마 위드 러브>(2012)의 앨런 페이지, <미드나잇 인 파리>(2011)의 레이첼 맥아담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8)의 레베카 홀과 스칼렛 요한슨 등 거의 매 작품 젊은 배우를 캐스팅해왔다. 그냥 구색 맞추기가 아니라 이들이 극을 끌고 가는 주인공이라는 점에서도 우디 앨런의 영화가 지향하는 바를 우회적으로 짐작해볼 수가 있다.

우디 앨런이 영화를 만든다고 하면 할리우드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경쟁적으로 참여하지만, 이들이 출연료로 챙기는 건 평상시의 10/1~20/1 수준이다. 놀랍게도 우디 앨런의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저예산에 속한다. 제작비가 대략 2,000만 불, 우리 돈 300억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100억 원 대인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와 비교하면 거대 예산이지만, 전 세계를 배급망으로 두고 있는 할리우드를 고려하면 높은 액수가 아니다. 그런데도 빅스타들이 우디 앨런의 영화에 줄을 서는 건 얻는 게 있어서다. 그건 칸영화제 개막작과 같은 명예, 또는 <블루 재스민>(2013)의 케이트 블란쳇처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의 영예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디 앨런의 작품에 참여했다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느끼는 분위기다.

우디 앨런의 인터뷰를 엮은 책 <우디 앨런 뉴요커의 페이소스>(로버트 E. 카프시스, 캐시 코블렌츠 엮음 | 오세인 옮김)에 따르면, 우디 앨런은 촬영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락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저는 늘 배우들에게 말해요. 원하는 대로 대사를 바꾸세요. 저는 모든 배우가 나무랄 데 없는 연기를 보여주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우디 앨런은 배우를 존중한다. “배우들을 지도할 때, 한쪽으로 조용히 불러 얘기해요. 그냥 세트 한가운데서 ‘좀 더! 이렇게 좀 더 해보란 말이야!’라고 소리 지르지 않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우디 앨런이 어떻게 젊은 배우들과 꾸준히 작업할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에서 우디 앨런과 작업한 적 있던 골디 혼(<조강지처 클럽> <죽어야 사는 여자> 등)은 이에 대해 ‘좋은 양육법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그들의 모습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의 모습을 강요하려는 경향이 있죠. 뭘 해라, 뭘 하지 마라, 뭘 해야만 한다, 뭘 해서는 안 된다, 하면서 아이들의 영혼을 우리 안에 가두려 하죠. 우디는 배우들이 스스로 창의력을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을 내줘요.”

청년 세대와 노년층이 서로에게 등을 돌리며 전선을 그은 우리에게는 꽤 부러운 풍경이다. 청년들은 자신들을 이끌어줄 리더가 없다고 어른 부재의 상황에 아쉬움을 진하게 느끼는 터다. 기성세대는 그런 젊은이들을 향해 어른의 말을 무시한다며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 바탕 중 큰 줄기에는 장유유서를 빙자한(?) 상명하복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무슨 일이 발생하든 젊은이들을 향해 ‘가만히 있으라!’며 손발을 묶은 후 자신들의 안위와 이득은 귀신같이 챙기는 어른들이 신뢰를 잃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세월호 사건의 후유증이 여전한 상황에서 대형지진이 발생하자 학생들의 대피 길을 마련하기는커녕 자습을 시켜 도마 위에 오른 선생이 있었다. 리틀야구단을 이끄는 어느 지도자는 세계대회 결승에 나선 어린 학생들을 독려하고 힘을 북돋워 주지는 못할망정 기대에 못 미치는 플레이를 한 선수를 야단치고 윽박지르는 등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모 국회의원은 백남기 농부의 사망에 대해 물대포를 맞고 뼈 안 부러진다며 막말을 해 논란을 일으켰다. ‘어버이’를 사칭하는 깡패 집단은 한일 위안부 졸속 협상 무효를 주장하는 대학생들을 향해 종북좌파를 외치고 협상을 수용하라는 등의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국민의 분노를 샀다.

물론 모든 어른이 그런 것이 아니다. 또한, 몰지각한 일부 어른들이 행하는 잘못된 행동만큼이나 젊은 세대가 저지르는 악행 또한, 위의 예처럼 열거할 수 있을 정도다. 결국, 서로가 평행선을 그으며 각자도생의 길로 나아가는 기저에는 애초부터 실종된 대화 혹은 소통의 기술에 있다. 그렇다고 이상적인 형태의 소통에 대해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대화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즉 서로가 동등할 때 이뤄지는 법이다. 근데 우리 문화라는 것은 서로서로 마주함에 있어 서열을 따지다 보니 자신보다 신분이 높거나, 나이가 많은 경우,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이럴 때 어른의 역할 중 하나는 분위기를 누그럽게 가져가 대화를 이끄는 데 있다. 혹자는 아랫사람을 향한 대화를 충고와 야단으로 혼동해 관계를 망치고는 한다. 그러다 보면 아랫사람들은 행여 윗사람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하게 된다. 그렇게 서로가 눈치를 보는 관계가 지속하다 보면 이들이 속한 집단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형태가 대개는 이런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뤄지고 있음은 명약관화하다.

우디 앨런은 촬영 현장에서 배우의 연기에 대해 두 번 이상 테이크를 가는 경우가 별로 없다고 한다. “보통은 배우들이 알아서 하는데, 만일 그렇지 않을 때에는 제가 교정을 해주죠.” 교정을 해도 효과가 없을 때 우디 앨런이 대처하는 방식이 압권이다. “제가 설명을 해주면서 이렇게 말하죠. ‘그 대사를 제가 다시 한 번 볼게요. 아마도 시나리오를 쓰면서 뭔가 실수를 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곤 그 대사를 저 스스로 소리 내어 읽어요. 그저 독백으로 읽는 것처럼 하지만, 동시에 배우들도 듣게 하는 거죠. 그리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설명하는 대신 제가 직접 연기를 해 보여요.”

언제부턴가 한국사회의 의사 결정은 한 사람의 지시에 의해 이뤄지는 경향이 짙다. 그의 말 한마디에 따라 아래에서는 정확한 의중을 파악하느라 혼선을 빚고 이것이 이념과 정파에 따라 결정되다 보니 늘 편을 가르는 방식으로 정책이 마련되어 사회 곳곳에서 갈등을 빚는 것이 다반사다. 여기에는 맨 윗사람을 제외하고는 개인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모두가 하나로 매도되는 상황에서 개인을 향한 존중과 대화의 성립은 불가능하다. 나 같이 혼자 움직이기 좋아하는 사람조차 지금의 상황이 숨 막힐 정도인 걸 보면 심각하다는 얘기다. 그래서 젊은 배우들과 환상의 호흡을 맞추는 우디 앨런의 영화에 더 눈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ARENA HOMME
2016년 11월호

확장판이 각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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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블레이드 러너>(1982) 얘기다. <마션>(2015)을 연출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블레이드 러너>는 미국 개봉 당시 제작비의 절반도 건지지 못하는 흥행 참패를 기록했다. <블레이드 러너>가 지금 누리는 지위를 고려하면 믿기 힘든 이야기다. 개봉 당시 철저히 외면받았던 영화가 이후 걸작의 반열에 오른다? 2차 판권 시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디지털 온라인 시장에서 부활하다

올해 상반기 최고의 문제작을 꼽으라면 단연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하 ‘<배트맨 대 슈퍼맨>’)이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앤트맨 등 마블 슈퍼히어로들의 독주에 맞서 배트맨과 슈퍼맨, 즉 전통의 슈퍼히어로가 힘을 합친다는 것만으로 팬들의 기대감은 상당했다. 결과는?

마블 영화의 경우, 슈퍼히어로 각각의 개별 작품을 먼저 선보인 후 ‘어벤져스’에서 뭉치는 방식으로 팬들의 기대감에 부응하는 데 성공했다. 그에 반해 <배트맨 대 슈퍼맨>은 배트맨과 슈퍼맨 외에 원더우먼, 플래시, 아쿠아맨, 사이보그 등 ‘저스티스 리그’의 히어로들을 모두 소개하려다 보니 151분의 상영 시간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혹평에 시달렸다. 비슷한 시기에 국내 개봉했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가 86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것에 반해 <배트맨 대 슈퍼맨>은 고작(?) 225만 명에 그쳐 체면을 구겼다.

<수어사이드 스쿼드> <원더우먼> <저스티스 리그> <그린랜턴 군단> 등 2020년까지 10편의 영화를 차례로 선보여야 하는 DC의 저스티스 리그의 입장에서는 출발부터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해결책은? 기존의 극장판에 30분의 추가 장면을 더해 181분의 확장판을 선보이자 기존과는 다른 평가가 줄을 이었다. 극장판에서 설명이 부족했던 설정들, 예컨대, 극 중 배트맨과 슈퍼맨을 파멸하려는 악당 렉스 루터와 슈퍼맨의 연인 로이스 레인을 미끼로 삼는 테러 조직과의 연관성, 클라크 켄트가 어떻게 렉스 루터가 연설하는 자선 행사장을 찾아 브루스 웨인과 만나는지 과정이 더해지자 이야기의 개연성이 높아졌다.

<배트맨 대 슈퍼맨> 확장판은 IPTV와 디지털 케이블TV와 인터넷 VOD 서비스(이하 ‘디지털 온라인 시장’)를 시작한 첫 주에 3위를 기록했다. 실망스러운 극장 흥행을 고려하면 꽤 선전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향후 ‘저스티스 리그’의 개봉이 줄을 잇고 있어 개봉 때마다 연관성을 찾기 위해 관객들이 디지털 온라인 시장을 통해 <배트맨 대 슈퍼맨>을 더 찾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극장 개봉 이후 잊힐 운명이었던 <배트맨 대 슈퍼맨>은 2차 판권 시장에서 일종의 패자 부활전을 통해 기사회생했다.

변화한 2차 판권 시장

이는 극장 개봉 수익에만 의존했던 2000년대만 하더라도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디오 시장이 궤멸하고 불법 다운로드가 비일비재했던 당시 극장이 아니면 영화로 수익을 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종종 DVD로 극장에서와는 다른 버전이 소개되어 영화 팬의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극장 입장료의 2~3배를 선회하는 판매 가격은 마니아를 제외하고는 애초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 후반 들어 디지컬 케이블과 IPTV가 도입되고 인터넷 VOD 서비스가 일반화되는 등 2차 판권 시장이 살아나면서 극장의 판도 또한 급격히 변화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한국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2010년 이후 IPTV 및 디지털 케이블의 매출액은 2010년 491억 원에서 2014년 2,254억 원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인터넷 VOD 또한, 2010년 267억 원에서 2013년 729억 원의 매출액 상승을 기록하며 2차 판권 시장의 부활을 견인했다. (2014년에는 무려 31.5%가 떨어지며 499억 원에 그쳤다!)

이와 같은 디지털 온라인 시장의 급격한 팽창은 수입 영화의 확대를 불렀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매주 개봉하는 신작이 10편을 넘지 않았던 것에 비해 지금은 무려 20편 이상이 될 정도로 디지털 온라인 서비스가 극장가에 불러온 파급효과는 대단하다. 영화를 제작하는 것과 달리 수입할 경우, 상대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지 않을뿐더러 극장 개봉 수익이 여의치 않더라도 디지털 온라인 시장에서 이를 만회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다 보니 외화를 수입하는 회사가 늘어났고 꼭 극장 개봉이 아니더라도 예술영화로 분류되어 극장에서 외면받은 작품, 남의 눈을 피해 안방에서 안심하고 볼 수 있는 성인영화들이 디지털 온라인 시장에서 높은 수익을 기록하고 있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2차 판권 시장의 윈윈

디지털 온라인 시장이 확대되고 매체와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새로운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 <배트맨 대 슈퍼맨>처럼 극장 흥행에서 재미를 보지 못한 작품의 확장판뿐만 아니라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도 디지털 온라인 시장 이용자를 위한 새로운 버전으로 관객몰이에 나선다. 바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다.

<아가씨>는 극장 개봉 당시 428만 명 관객을 동원하며 박찬욱 감독의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중에서 최고 수익을 올렸다. 박찬욱 감독은 기존의 144분 버전에서 20분을 추가한 감독판으로 2차 판권 시장을 공략한다. 이는 제작사와 감독에게 디지털 온라인 시장이 극장 개봉만큼이나 중요해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개봉 당시 흥행에 성공한 작품은 디지털 온라인 시장에서 그 기세를 이어가는 게 보통이다. <곡성>이 디지털 온라인 시장에 풀린 6월 말 이후 한동안 순위 1위를 기록했던 게 증거다. 그런 상황에서 감독판이나 확장판으로 새롭게 선보일 경우, 이미 극장에서 본 관객을 디지털 온라인 시장으로 다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판권을 가지고 있는 제작사의 입장에서는 수익이 늘어나니, 감독은 애초 자신이 의도한 버전을 소개할 수 있으니, 디지털 온라인 업체는 다양한 콘텐츠로 이용자의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으니 모두에게 ‘윈윈’이 되는 셈이다.

물론 이에 대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극장에서의 마이너스 수익을 디지털 온라인 시장에서 만회할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은 영화의 수입가를 천정부지로 치솟게 만들어 시장의 건전성을 악화시킬 위험이 있다. 더군다나 케이블 TV 간의 과열 경쟁으로 시장의 적자 폭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도 큰 문제다. 제2의 <블레이드 러너>는 건강한 2차 판권 시장이 존재할 때 가능한 현상이다. 극장에서 이뤄지는 1차 시장과 디지털 온라인 서비스를 안방에서 즐길 수 있는 2차 시장이 서로 균형을 이룰 때 영화 산업은 비로소 안정을 꾀할 수 있다.

 

시사저널
(2016.7.16)

<밀정> 할리우드 로컬 프로덕션이 한국영화에 미치는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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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감독의 신작 <밀정>이 시작하면 ‘워너브러더스’ 로고가 스크린에 뜬다. 엇! <밀정>은 한국영화 아닌가? 맞다. 근데 왜 할리우드 6대 메이저 제작사 중 한 곳인 워너브러더스의 로고로 시작하냐고? <밀정>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워너브러더스는 <곡성>을 제작한 폭스에 이어 한국에 로컬 프로덕션을 세운 두 번째 할리우드 스튜디오다.

한국영화에 투자하는 이유

<밀정>은 지금 한창 한국영화계가 주목하고 있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실제로 1923년에 발생했던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을 토대로 당시 무장독립운동 단체 의열단과 관련한 몇 가지 사실을 엮어 극화했다. 주인공은 의열단의 뒤를 캐는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이정출(송강호)이다.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경무국 부장의 명령을 받은 이정출은 의열단의 리더 김우진(공유)에게 접근한다. 보자마자 서로의 정체를 알아차린 정출과 우진은 속내는 감춘 채 친하게 지내자면서 각자 제안 하나씩을 한다. 우진은 상해에서 경성으로 물건을 들여오게 루트를 봐달라고, 정출은 의열단에 접근하게 중요한 인물과 연이 닿을 수 있게 다리를 놓아달라고 요구한다.

이를 통해 우진은 폭탄을 들여와 경성 내 일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할 계획이다. 정출은 의열단을 결성한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을 생포해 그 공로로 조선총독부 내 더 높은 직위를 얻을 심산이다. 그렇게 정출와 우진은 경성을 떠나 상해로 향하는 가운데 또 다른 밀정이 이 둘을 쫓는다.

“서구의 냉전 시대 못지않은 질곡의 근대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도 근대사를 소재로 한 스파이 영화를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는 김지운 감독의 말처럼 <밀정>은 영화 팬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스파이물’을 장르로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밀정>은 한국 관객들이 더욱 감정이입하고 깊이 이해할 만한 한국의 특수한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암살>(이상 2015) <아가씨>(2016) 등을 잇는 ‘경성 영화’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할 듯싶다.

요컨대, 한국적인 배경과 소재의 영화를 할리우드의 워너브러더스가 제작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할리우드는 2010년대 들어서면서 자국 극장 매출이 줄어들고 부가 판권 시장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해외 시장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단적으로, 미국의 영화 흥행 정보 사이트 ‘박스오피스 모조’의 자료에 따르면, 할리우드의 2015년 전 세계 박스오피스 상위 10위권 영화의 수익 비중은 해외 시장이 66%를 차지하면서 자국 시장의 수익률을 훌쩍 넘어섰다.

그러면서 할리우드는 해외 시장에 더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글로벌 팬층을 가진 할리우드 배우와 감독의 해외 시장 방문을 늘렸고 관련 국가의 배우와 감독을 할리우드 영화에 기용하고 지역 로케이션을 적극적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또 하나. <밀정>의 경우처럼 해외 시장 현지에 로컬 프로덕션을 세우고 영화를 제작한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한국처럼 자국 영화 시장의 점유율이 높아야 한다.

한국 시장에서의 로컬 프로덕션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알아본 건 20세기 폭스였다. 폭스는 ‘폭스 인터내셔널 프로덕션 코리아’를 설립하고 <런닝맨>(2012)을 시작으로 <슬로우 비디오>(2014) <나의 절친 악당들>(2015)을 거쳐 <곡성>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폭스의 뒤를 이어 워너브러더스는 ‘워너브러더스 코리아’를 세우고 <밀정>을 첫 번째 작품으로 선택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김지운 감독 연출, 송강호, 공유, 이병헌 등 빅스타 출연, 지금 한창 인기 있는 경성 배경의 영화, 다가올 추석 시즌의 기대작 등 여러 모에서 <밀정>은 흥행 가능성이 큰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한국영화계에 미치는 영향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의 최재원 대표는 영화주간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제작사·투자사와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로컬 프로덕션에서 일할 때의 차이’를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워너브러더스에선 시나리오가 가진 장점을 많이 본다. 영화의 본질에 더 접근한다고 해야 할까. 영화 이외의 것에 눈치를 좀 덜 본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말인즉, 시장에서의 흥행 가능성보다 작품이 지닌 힘에 더 주목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실제로 폭스가 제작한 <곡성>은 천편일률적인 만듦새로 우려를 자아냈던 대다수 한국영화와 비교해 상당히 모험적인 작품이었다. 해피엔딩을 선호하는 산업 환경 내에서 악마의 정체를 따져 묻는 이야기는 워낙 어두운 데다 비극적이었다. 생애 첫 단독 주연을 맡은 곽도원은 흥행에서는 검증이 되지 않은 배우였다.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은 2시간 안에 영화를 끝내야 상영 횟수를 늘려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극장의 전략과도 맞지 않았다. 결과는? 작품성은 물론이고 700만 가까운 관객을 모으며 일찌감치 올해의 영화라는 극찬을 받았다.

140분 동안 상영되는 <밀정>은 선악이 구분되지 않는 이정출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조선총독부에 중용된 이정출은 김우진과의 만남 이후 의열단을 위해 활동하는 등 도대체가 정체를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는 <밀정>과 함께 경성영화로 분류되는 <암살>과 비교해 확연히 차이가 나는 지점이다. <암살>은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의 대척점에 친일파 염석진(이정재)를 위치해두고 선악 구도를 이야기의 추동력 삼아 민족 감정을 자극(?), 1,270만 관객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잠깐, 오해는 마시길! <암살>의 설정이 구식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친일과 반일의 선악 구도 속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봤으니 좀 더 ‘새로운’ 캐릭터 설정의 경성 영화도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확실히 정체가 불분명한 정출은 관객들에게 ‘그는 어느 쪽의 밀정인가?’ 추측하게 하는 가운데 예상치 못한 전개로 영화적 재미를 선사한다. 그러니까, 할리우드 로컬 프로덕션의 존재는 그동안 잊힌 한국영화의 새로움을 되살릴 좋은 기회다.

그와 같은 새로움은 이미 시장에서 검증된 김지운 감독 같은 노련한 연출자가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신인이, 한동안 시장에서 잊혔던 감독이 갑작스럽게 출현해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워너는 <밀정>에 이어 신예 이주영 감독의 <싱글라이더>를 두 번째 제작 작품으로 선택했다. <곡성>으로 재미를 본 폭스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 이후 장편영화를 발표하지 못했던 정윤철 감독의 사극 <대립군>을 선보일 예정이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로컬 프로덕션이 한국 영화 시장의 지형도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다.

 

시사저널
(2016.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