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다이어리>는 1994년 한국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던 지존파 사건이 중심에 놓이는 다큐멘터리다. 지존파는 돈 많은 부유층에 앙심을 품고 연쇄살인을 저질렀던 일당의 조직명이었다. 하지만 <논픽션 다이어리>는 지존파와 그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정윤석 감독은 지존파 사건이 미친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파장 등을 탐구하며 1990년대의 한국을 돌아본다.
미술과 영화 작업을 병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주로 쓰는 ‘미술’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예술'(Art)이라 표기한다. 이러한 예는 우리가 상상하는 미술의 범주가 훨씬 넓다는 점, 다시 말해 동시대적인 예술 그 자체로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종종 외국에서는 영화감독들이 극영화를 만들면서 동시에 다큐멘터리도 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쉽게도 한국의 교육은 아직까지 영화란 매체를 각각의 장르적 특수성을 구분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아마 내가 미술작가로 활동하면서 영화작업을 병행할 수 있는 까닭은 영화와 미술을 ‘시각예술’이라는 동일한 범주 안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논픽션 다이어리>의 경우, 전시보다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는 영화로 가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극장이라는 공간의 집단적 경험이 이 주제에 꼭 필요할 것이라 봤기 때문이다.
<논픽션 다이어리>는 어떻게 시작된 프로젝트였나?
2007년 대안공간 루프에서 범죄에 관련한 전시를 제안 받고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 나의 관심은 ‘지존파’라는 소재보다 연쇄살인범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데 목적이 맞춰져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모아 다이어리 형식으로 한 권의 책을 제작했었다. <살인의 추억>(2003)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사회에서 연쇄 살인은 시대적 환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렇기에 범죄라는 행위를 추적하다 보면 한국사회의 시대적 지형도를 그릴 수 있겠다, 라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그중 나는 한국의 1990년대에 관심이 많았고 자연스레 1994년에 발생한 지존파 사건에 주목하게 되었다.
<논픽션 다이어리>를 영화로 만들기 이전 전시의 형태는 어떤 것이었나?
현재는 잠실나루 역으로 바뀐 성수 역 쪽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허물어지기 직전의 재개발 아파트 단지였는데 그 안에 서 있으니 기분이 묘하더라. 사람들이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들 뿐이었지만 각각의 방에는 어린이들이 갖고 놀던 장난감이나 벽에 쓰인 낙서 등 그 공간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것들을 가만히 보면서 이 공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였다. 이미 공간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그 공간의 기억은 남아있는 상태, 이러한 모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자신이 연쇄살인범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살인에 대한 모든 정보와 자신의 범행을 일기장에 기록해놓았다. 그 일기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살인이라는 광기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차 있다. 동시에 그것은 인류에 대한 도전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한 권의 일기는 내가 만들어낸 상상의 기록이기도 하다. 바로 그렇게 만들어진 연쇄살인범의 다이어리를 우연히 발견한 뒤, 전시장에 옮겨놓는다는 설정, 그 책 제목이 바로 ‘논픽션 다이어리’였다.
지존파 사건은 1990년대를 설명하는 중요한 텍스트 중 하나다. 1990년대를 어떤 시대로 기억하나?
사실 1990년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이 영화에도 등장하는 성수대교가 무너지던 1994년 당시,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등굣길 마을버스 안에서 한 시간 정도를 서있었다. 평소와 달리 차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다보니 승객들이 짜증이 난 상태였다. 그때 갑자기 마을버스 라디오에서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속보가 들려왔다. 그 뉴스를 듣고 버스안의 모든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졌다. 다들 라디오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고 모두들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뉴스를 듣고 있던 중에 내 뒤에서 나이 드신 분이 “이게 다 빨갱이 짓이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라. (웃음) 그 순간이 너무나 강렬해서 아직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더욱 주목한 건 지존파 사건이었다.
<논픽션 다이어리>에는 지존파 사건부터 삼풍백화점 붕괴, 지존파의 고향인 영광지역의 민간인 학살사건, 5.18 광주 민주항쟁 등 여러 종류의 죽음들이 등장한다. 엄밀히 보면 지존파의 범행은 원한에 의한 살인이었지만 그들을 둘러싼 나머지 사건들은 국가 이데올로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 발생한 ‘예고된 살인’이었다. 나는 지존파 사건을 통해 ‘살인’이라는 범주를 좀 더 다양한 관점으로 확장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오늘날 한국사회에 대한 부채감을 느낀다. 알다시피 지난 5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갔지만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러한 사태를 정확히 진단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이 되는 1990년대를 주목해야한다. 한국의 1990년대는 민주화 운동 이후 개인이라는 주체와 함께 자본의 풍요를 경험했던 시기였다. 1980년대 독재정권을 비판하기 위해 <자본론>을 읽었던 사람들이 본격적인 자본의 소비주체가 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단군 이래 최대참사인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을 목격하기도 했다. 고도의 자본주의가 발달하던 시기에 ‘백화점’이라는 자본주의의 상징이 무너졌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상상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 등장한 지존파 사건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범행 동기로 표방한 최초의 연쇄살인범이자 한국의 압축 성장 과정에서 표면화 되지 않았던 계급적 블랙코미디에 가까웠다.
요 몇 년 전부터 한국 문화에는 TV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나 영화 <건축학개론> 같은 1990년대 돌아보기 붐이 일고 있다. <논픽션 다이어리>는 같은 시대를 공유하지만 문제의식은 전혀 달라 보인다.
질문처럼 오늘날 한국사회에 불어 닥친 1990년대에 대한 붐은 일종의 문화적 복고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논픽션 다이어리>는 1990년대를 문화적 복고주의가 아닌 동시대의 거울로 바라본다. 특히,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1997년 IMF 사태까지의 10년에 주목한다. 알다시피 오늘날 비정규직 합법화의 모태가 되는 노동법 개악 역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우리 세대에게 1990년대는 ‘서태지’로 대표되는 문화적 풍요로움으로 기억되지만 그 이면에 가린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1987년 ‘서울의 봄’ 이후 정치적 결과물이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나타났다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풍경들은 바로 1990년대의 실패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본다.
그래서 <논픽션 다이어리>는 1990년대를 전체적으로 조망하지만 형식적으로 하나하나 해체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비유하자면 이런 것이다. 각각의 구슬을 꿰어 하나의 목걸이로 만드는 것이 전통적인 영화라면, 각각의 구슬을 한 움큼 쥐어 바닥에 뿌린 뒤 그 흩어진 모양을 의미화 하는 것이 미술의 방법론이다. <논픽션 다이어리>는 이 양자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 영화이다. 알다시피 전통적인 내러티브 영화들은 캐릭터가 스스로 사건에 휘말리며 이야기를 끌고나간다. 하지만 <논픽션 다이어리>는 하나의 인물이 이야기를 끌고나가기보단 지존파가 가진 사회적 맥락들을 하나하나씩 해체해 나간다. 그러면서 사건의 본질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와 같은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했던 것은 이 영화가 1990년대에 대한 일종의 ‘풍경화’이면서 동시에 ‘국가’란 존재를 다시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굉장히 굵직굵직한 사건이 많이 발생했지만 지존파를 중심에 놓고 하나로 묶는다는 게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을 거다. 그로 인해 겪은 고민은 무엇이었나?
<논픽션 다이어리>를 만들면서 가졌던 가장 큰 고민은 살인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나를 포함해 이 영화에 등장하는 그 누구도 살인을 해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웃음) 이 영화는 지존파의 살인부터 5.18 광주 민주항쟁까지 숨 가빴던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작가로서 겪어보지 못한 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과 그 안에서 어떠한 균형점을 찾아내야한다는 중압감이 컸다. 개인적으로, 인간이 종교에 기대는 까닭은 자신의 욕망과 그로 인한 상실감이 충돌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결국 지존파가 사형당하는 마지막 순간에 용서와 구원이라는 키워드를 배제하고 연출자로서 어떠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지가 고민의 핵심이었다.
지존파와 삼풍백화점을 연결해 1990년대를 보여주지만 이 영화는 무언가를 정의내리기보다는 생각할 거리들을 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당위적인 질문을 좋아하진 않는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면 나는 그가 왜 착하게 살고 싶어 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인간이 선해야 한다’라는 당위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왜 선하고 싶은 것인가?’, ‘인간이 악하면 안 되는 것인가?’란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반문에는 ‘과연 당신은 다른가?’라는 질문이 내포되어 있다. 사실 예술이 종교와 구별되는 지점은 이러한 반문에서 출발하며 위와 같은 질문들을 통해 우리는 수많은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누구나 살면서 실수를 할 수 있다. 지존파 역시 마지막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렇기에 나 역시 지존파를 통해 새로운 질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건의 원인을 돌이켜봐야 하고 동시에 각자의 질문들을 끊임없이 수정해야만 한다. 나는 세상이 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논픽션 다이어리>는 바로 그런 질문들의 이어짐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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