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세라 감독은 지금 전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첨단의 영화 언어를 구사하는 시네아스트다. 예컨대,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이는 <내 죽음의 이야기>에는 카사노바와 드라큘라가 등장한다. 개별적으로 다뤄도 될 인물들을 한 영화에 출연시켜 재미를 배가하는 것이 할리우드를 비롯한 상업영화의 추세인데 <내 죽음의 이야기>는 그런 기대를 완전히 배제한다. 그것은 드라큘라와 카사노바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겠다는 계획만 있지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촬영장에서 즉석으로 영화를 만드는 알베르트 세라 만의 독특한 연출 방식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알베르트 세라는 자신의 영화 연출을 두고 ‘퍼포먼스’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실존 인물 카사노바와 허구의 인물 드라큘라가 한 세계에 공존한다. 흥미로운 만남이다.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내 죽음의 이야기>는 우연히 만들어졌다. 루마니아 출신의 프로듀서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으로 드라큘라를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평소에 드라큘라와 같은 장르물을 좋아하지 않아서 판타지물로 접근해 영화를 만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처음에는 좀 추상적으로 접근하다가 카사노바가 불현듯 떠올랐다. 드라큘라와 카사노바가 비슷한 주제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두 인물이 비슷하다고 느꼈나?
이 둘은 쾌락과 욕망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거기에 더해 18세기의 계몽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지점에서 삶과 죽음, 질병과 전쟁, 섹스와 폭력 같은 것들을 모두 묶다 보니까 공유하는 지점들이 확실해졌다. 그렇게 드라큘라와 카사노바가 살았던 시대의 공기를 담을 수 있다는 생각에 두 인물을 동시에 그리고자 했다.
안 그래도 <내 죽음의 이야기>는 당신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많은 제작비($1,200,000)가 들어간 영화다. 시대의 공기를 담으려 한 의지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게 고액이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전작들보다는 예산이 많아졌다. 일단 18세기의 성을 빌려야 했고 출연진들도 더 많아지면서 촬영도 길어졌다. 프랑스에서 카사노바의 부분을, 루마니아에서 드라큘라 부분을 찍어야 했기에 그에 따라 스탭들이 이동하면서 전체적으로 예산과 촬영 기간이 늘어났다.
카사노바가 등장하는 부분은 그의 회고록을 참조해 이야기를 꾸몄다. 반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드라큘라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존재이긴 하지만 이 장르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그려진다. 드라큘라의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었나?
원래 아이디어는 카사노바가 실존 인물이지만 그가 경험한 환상적인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는 데 있었다. 이를 통해 데카당스와 한 세기가 끝나는 것에 대한 암울함, 그리고 계몽주의가 도달하면서 이성을 바탕으로 한 사회가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에 대해 상상했던 카사노바의 꿈이 드라큘라가 몰고 온 어둠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상실되는 걸 보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묘사된 드라큘라보다 더 형이상학적이고 어두운 인물로 묘사했다. 그처럼 카사노바가 실존인물이면서 동시에 상상된 인물이고 상상된 영화이지만 실존했던 인물로 가지고 온 것처럼 그런 아이러니를 살리는 쪽으로 드라큘라 또한 가지고 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삶에 충실한 카사노바, 영생을 얻었지만 사람의 피를 빨아야 살아갈 수 있기에 사는 게 고통스러운 드라큘라처럼 <내 죽음의 이야기>는 영화가 전체적으로 아이러니의 몽타주라고 해도 될 정도다.
촬영분을 모두 모아보니 440시간이 나왔다. 내가 만든 영화는 기본적으로 퍼포먼스적인 측면이 강하다. 그래서 편집 과정에서 촬영한 부분들이 다시 태어나는 것 같다. 영화는 편집의 과정에서 창조된다. 그래서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다. 예를 들어,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면 처음에 이를 계획해서 촬영한 게 아니다. 촬영 분을 가지고 편집 과정에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촬영 중에 일어난 일은 실제로 발생한 것이지만 그것이 그대로 영화에 담기는 일은 절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생각이나 계획을 가지지 않고 촬영장에 온다. 그래야 영화가 신선해진다. 내게 영화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지점을 우연히 발견하는 것이라 퍼포먼스, 즉 촬영장에서 즉흥적으로 꾸려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는 연기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감독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매번 비전문배우를 고용해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번에는 어떤 비전문배우를 카사노바와 드라큘라 역할에 캐스팅했나?
카사노바는 바르셀로나 박물관의 관장이 연기했고 드라큘라는 친구의 친구를 캐스팅했다. <내 죽음의 이야기>의 경우, 프랑스와 루마니아에서 촬영이 이뤄지다보니 캐스팅에 좀 어려움이 따랐다. 가장 중요한 건 내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였다. 배우를 뽑기 전에 그들이 뭘 잘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촬영하는 과정 중에 계속 그들을 알아나가야 하고 감독으로서 그 환경에 적응해야만 한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은 이 캐릭터에 누가 어울리겠다, 미리 정해놓고 들어가는 게 아니다. 그저 본능에 따라 배우를 선택한다. 바르셀로나 박물관 관장은 카사노바와 풍기는 분위기와 풍채가 비슷했고 드라큘라는 난 잘 모르겠기에 이 사람이면 어떨까 해서 함께 하게 됐다. 그리고 나서 이들의 연기를 어떻게 살릴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갔다.
이들에게 자연스러운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 어떤 방식을 고안했나?
카사노바를 맡은 바르셀로나 박물관의 관장은 이전에 시를 쓴 적이 있는 작가이기도 해서 대사를 잘 외울지 알고 (두 손을 넓게 벌리며) 이만큼의 대사를 줬다. 그런데 기억력이 너무 안 좋아 하나도 못 외웠다. (웃음) 처음의 방식을 결국에는 포기하고 이전 대사를 줄여서 그중 좋은 부분만 추리는 식으로 바꿔나갔다. 처음부터 아이디어를 가지고 캐릭터를 발전시키기보다는 그들이 뭘 잘하고 못하는지를 깨달은 다음에 잘 하는 부분만 골라서 이 영화에 넣었다.
바로 그 때문에 기존에 우리가 생각하는 영화와는 다른 형태가 됐을 텐데 비전문배우를 데리고 어떻게 그들에게서 자연스러운 연기를 끌어낼 수 있었나?
규칙 같은 건 없다. 모든 장면마다 다른 사람들이 나오기 때문에 항상 달라진다. 극 중 드라큘라가 여자에게 강을 건너자고 할 때 대화 장면만 두 개의 카메라를 돌려 찍었다. 촬영 분만 4시간이 나왔다. 계속 같은 주제와 관념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지만 테이크마다 대사가 약간씩 다 달랐다. 촬영된 소스를 편집실에 모두 가져와서 다시 종이에 썼다. 그런 다음에 질문과 답으로 다시 구성을 했다. 원래는 그 답이 아닌데 다른 질문에 가지고 와 붙여버리는 방식으로 편집을 한 것이다. 대사를 외운 상태에서 연기를 하게 되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배우들은 마치 공지를 하는 것처럼 말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질문과 답을 바꿔서 재편집을 하면 그런 느낌이 모두 사라진다.
그와 같은 규칙 아닌 규칙이 배우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원래부터 <내 죽음의 이야기>는 4:3의 화면비로 가져가려고 했다. 촬영감독에게는 이를 숨기고 2.35:1로 촬영하자고 부탁했다. 그런 후 촬영된 소스를 편집실에 가져와 내가 다시 4:3 비율로 잘라내며 화면비를 조정했다. (웃음) 처음부터 4:3으로 찍자고 하면 촬영감독은 그 화면에 최적화된 비율로 앵글을 잡을 텐데 그런 후에 바꿔버리면 다른 의미를 가진 화면으로 재탄생한다. 만약 감독이 영화를 만들기도 전에 그 영화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있다면, 내가 그 입장이라면 너무 예상가능하고 뻔해서 지겨울 것 같다. 아무도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채로 영화에 참여하는 것이 제일 재밌고 거기서 영화의 새로운 미학이 탄생한다. 나는 카메라 앞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지 마지막에 완성될 것을 미리 계산하고 그에 맞춰나가는 감독은 아니다.
<내 죽음의 이야기>를 통해 카사노바와 드라큘라의 얘기를 다뤘지만 개인적으로는 카사노바와 하인 폼페두의 관계가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돈키호테와 산초를 연상시키더라. <기사에게 경배를 Honour of the Knight>(2006)에서는 직접적으로 돈 키호테를 다루지 않았나. 당신 영화에서는 늘 돈 키호테의 영향력이 느껴진다.
이번에는 약간 다른 내용이긴 하지만 전작들처럼 <돈 키호테>에서 영향 받은 남자들의 우정을 <내 죽음의 이야기>에서도 가져가고 싶었다. 극 중에서 다루는 시대로 인해 인물들이 복잡한 갈등 속에 놓이지만 폼페두가 정직과 순수의 상징으로 관객에게 다가갔으면 했다. 특히 내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이 연기 훈련을 받은 것이 아니라서 폼페두나 산초와 같은 인물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구조다. 앞으로 만들 영화에서도 순수와 야생이 공존하는 캐릭터를 등장시킬 예정이다.
그럼 차기작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내 죽음의 이야기>로 역사극을 했기 때문에 다음 작품은 현대 사회의 미술에 대해 다뤄보려고 한다. 현대미술을 보고 있으면 어떤 작품이 훌륭하고 나쁜지, 작가가 의도한 게 진실인지 거짓인지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현대미술에 대한 판단은 불가능한데 이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만들어진 영화는 없는 것 같다. 현대미술은 성공과 비즈니스로 둘러싸인 현대사회의 상징 같은 것을 수도 있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폼페두와 같은 순수한 인물이 있을 거라고 본다. 이와 같은 주제로 다음 영화를 만들 생각이다.
부산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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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