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말리사>(Anomali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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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초유의 섹스 묘사다. 캐릭터 인형들이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섹스를 나눈다. 엇! 내가 너무 흥분했다. 제목이 뭔지, 어떤 영화인지 소개도 못 했다. 제목은 <아노말리사>다. <이터널 선샤인>(2004) <어댑테이션>(2003) <존 말코비치 되기>(1999) 등을 연출한 찰리 카우프먼이 처음으로 손을 댄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이지만, 신나는 구석은 없다. 예의 찰리 카우프먼의 작품이 그렇듯이 고독한 현대인의 피로감이 스크린 곳곳에 성에처럼 차있다.

모두가 같은 얼굴에 같은 목소리

작가 마이클 스톤(데이빗 듈리스 목소리 출연)은 고객 서비스를 주제로 쓴 저서로 유명해졌다. 걱정일랑 이제 안녕, 하고도 남을 명성과 부를 얻었지만, 찡그린 미간에 우울함이 골수처럼 배어있다. <존 말코비치 되기>의 인형사 크레이그 슈와츠(존 쿠삭)처럼 아내가 있지만, 외로움을 떨칠 수 없고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짐 캐리)처럼 현 아내와의 결혼 전 헤어진 옛 연인에 대한 기억이 심장을 바늘처럼 콕콕 찌른다. 그도 다른 이들처럼 별다를 것 없는 현대사회의 꼭두각시 인형 신세일 뿐이다.

<아노말리사>는 찰리 카우프먼이 ‘프란시스 프레골리’란 필명으로 시나리오를 쓴 연극에서 시작됐다. 이 연극은 라디오 플레이라는 설정으로 시작해 목소리로만 진행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한 것으로 유명하다. 스태프진과 출연진의 면모가 엄청나다. 이 연극의 연출은 곧 개봉을 앞둔 <헤일, 시저!>(국내 개봉 3월 24일)의 코언 형제가 맡았고 <헤이트풀 8>의 제니퍼 제이슨 리와 <해리 포터> 시리즈의 데이빗 듈리스와 톰 누난 3명이 목소리 출연했다.

가만 출연이 단 3명이라고? 그렇다. 연극에서처럼 영화에서도 목소리는 이들 단 세 명뿐이다. 하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은 수십 명이 넘는다. 마이클 스톤과 리사의 목소리로 각각 출연한 데이빗 듈리스와 제니퍼 제이슨 리을 제외하면 톰 누난이 모든 사람의 목소리를 맡았다. 이는 연극 공연 당시 예산상의 문제로 한 명의 배우가 여럿을 연기한 것에 기인하지만, 찰리 카우프먼은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가 모두 같게 들린다는 설정이 독특해 이를 그대로 영화 <아노말리사>에 사용했다.

찰리 카우프먼이 <아노말리사>를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연출한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아무리 창작자의 섬세한 터치가 가미 되어도 실제 인간의 미묘한 표정을 묘사하기에 한계가 있다. 찰리 카우프먼은 바로 이 점에 착안했다. 극 중 스톤을 자신이 만나는 여러 사람이 사실은 변장한 동일인이라고 생각하는 ‘프레골리 망상 Fregoli Delusion’에 걸린 것으로 설정했다.

현대인들의 처지가 그렇다. 사회라는 시스템의 한낱 부속품으로 전락해 개성을, 감정을, 정체성을 거세당한 것이 꼭 꼭두각시 인형 같다. 기발한 상상력에 자아를 결합한 철학적인 주제를 접목하여 천재 작가로 평가받는 찰리 카우프먼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앞서 밝혔듯 연극 작업 당시 필명이 프란시스 프레골리였는데 바로 프레골리 망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니까, 극 중 작가로 등장하는 마이클 스톤은 찰리 카우프먼이 영화에 투영한 자신의 자아인 셈이다. 하여 스톤 눈에 비친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같은 얼굴에, 목소리마저도 똑같다. 단 한 명, 고객서비스에 대한 연설을 듣겠다고 부러 휴가를 내고 찾아온 리사(제니퍼 제이슨 리)만이 마이클 스톤에게는 유일하게 개성적인 존재로 부각된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섹스

그녀의 개성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는 얼굴 위의 흉터다. 그 흉터에서 스톤은 리사의 내면의 상처를 나름 짐작하는 데 같은 얼굴과 목소리와 생활 방식에 노출된 이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개성이라 할 만하다. 그렇게 스톤은 리사(의 흉터)를 인식하면서 흥분하기 시작한다. 자포자기의 권태로운 삶으로부터 탈출할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의 실현은 다름 아닌 섹스다. 스톤과 리사, 즉 두 명의 인형이 스톱모션으로 나누는 비(非)인간적인 형태이되 ‘아랫도리’가 먼저 반응할 만큼 인간적으로 흥분시킨다. 개성 없는 인간보다 사연을 가진 인형이 더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것. 사실 이는 인간과 비인간의 여부가 아니라 감정의 유무 문제다. 감정 교류는 곧 사연을 전제하는데 그래서 인형의 섹스일지라도 그들의 행위에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찰리 카우프먼은 <아노말리사>의 제작 단계부터 이들이 애니메이션 캐릭터이되 관객들이 감정적으로는 실제처럼 느끼게끔 설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목표는 관객들이 영화를 보았을 때 단순한 인형을 넘어 작지만, 감정적으로는 실제 사람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각 캐릭터에게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인데 디자이너들은 마이클과 리사를 포함한 모든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어 줬다.”

그중 마이클과 리사의 섹스 장면은 그 무엇보다 어려운 도전이었다. 서로의 옷을 벗겨주는 과정, 그럼으로써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맨살, 발가벗은 인형이 서로 접촉해 ‘피스톤 운동’을 벌이기까지, 이 모든 장면을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작업하기에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예컨대, 스톤과 리사 두 애니메이션 인형 캐릭터가 서로 발가벗은 몸을 밀착하는 순간부터 자세와 체위에 맞춰 디자이너들은 꼼꼼하게 손을 봐야 했고 좀처럼 끝나지 않는 이 둘의 섹스 시간이 길어질수록 작업량도 그에 비례해 늘어났다.

실제적인 묘사에 더해 찰리 카우프먼은 스톤과 리사의 섹스를 보게 될 관객들이 황홀경에 빠졌으면 하는 마음도 잊지 않았다. 두 캐릭터가 호텔 방문을 열고 함께 들어오는 순간부터 섹스를 나누기까지 하나로 이어지는 감정이자 행위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애니메이션으로는 파격적이지만, 섹스 장면이 지나치게 튈 경우, 감정선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게다가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섹스 장면을 연출하게 되면 자칫 우습게 보일 수 있다는 점도 심각한 고려 사항이었다. 대사를 줄이고 숨소리로 긴장감을 조성하며 모든 움직임을 세밀하게 가져가는 것이 중요했다.

인형들의 섹스에 반응하다니, 내가 너무 변태스러운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변태적인 성향도 그 사람의 고유한 개성이 될 수 있다. 스톤이 리사의 흉터에 뽀뽀하는 것은 변태 같아 보여도 그녀의 상처를 보듬어주겠다는 의미가 반영된 태도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건 바로 그와 같은 이해와 배려다. ‘아노말리 Anomaly’는 변칙 혹은 예외라는 의미가 있다. 찰리 카우프먼은 여기에 여주인공 리사의 이름을 합쳐 제목을 ‘아노말리사’라고 정했다. 예외를 인정하는 사회는 그래서 중요한 법이다. <아노말리사>는, 극 중의 스톤과 리사의 섹스는 쉽게 보기 힘든 애니메이션이자 장면이라는 점에서 예외적이고 특별하다.

 

시사저널
(2016.3.19)

2 thoughts on “<아노말리사>(Anomalisa)”

  1. 잘 읽고 갑니다.
    너무나도 신선한 평론이 머릿속에 딱딱 꽂히네요 🙂
    다음에도 허남웅씨가 올리시는 신선한 글 들을 자주자주 읽고싶게 되네요!

    1. 안녕하세요 이찬호 님 ^^ 칭찬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너지 얻어 더 잘 써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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