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드>(The Kid)



“나의 이름을 듣고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허름한 옷 차림을 한 딱한 서민의 모습일 것이다. 찌그러진 중산모, 푸대 같은 바지, 큼직한 구두에 건방지게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 말이다.

내가 스크린 위에 내 보이는 가엾은 존재, 그 겁 많고 허약한 친구는 결코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의 희생양이 되지는 않는다. 그는 결연히 고통을 초극하여 일어선다. 희망, 꿈, 갈망이 덧 없이 사그라지고 나면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발길을 돌릴 뿐이다.


더할 바 없이 역설적이지만, 이토록 비극적인 모습의 인물이 다른 어떤 인물보다 많은 웃음을 자아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웃음이 눈물과 혹은 눈물이 웃음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 ‘떠돌이’를 분석한 위대한 예술가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의 변이다. 이 구절에는 채플린이 추구하는 영화의 목적이, 가난한 하층민의 삶을 대변하고 있으며 고단한 현실을 극복할 의지를 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와 같은 채플린표 영화는 81편의 방대한 이력의 역사를 거치며 ‘울음을 자아내는 코미디’, ‘웃음 속에 번져 나는 애수’라는 역설로 전 세계의 팬들로부터 폭발적인 지지를 얻어냈고 현재도 사랑 받고 있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1921년에 만들어진 <키드>는 채플린의 주옥 같은 작품들 중 가장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무분별한 남자관계와 정신분열증세를 보였던 어머니 탓으로 보육원 생활을 전전하였던 채플린의 불우했던 어린시절이 반영되어 있어 더욱 인상이 깊은 영화다.



<키드>는 가난한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은 고아(재키 쿠건 분)가 떠돌이에게 양육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연히 찰리 채플린은 떠돌이 역으로 분하여 예의 그 꽉 끼는 상의, 펑퍼짐한 바지, 얼굴보다 작은 중산모, 발을 잡아 먹었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큰 구두를 신고 콧수염과 지팡이를 뽐내며, 현실을 보여주고 조롱하며 꺽이지 않는 삶의 의지를 표명한다.


자서전「나의 삶」에 따르면 떠돌이는 한 때 채플린이 몸 담았던 키스턴 영화사의 제작자 맥 세넷의 요구에 의해 즉흥에서 만들어진 캐릭터라고 한다. 재밌는 건 그 떠돌이 바로 채플린이 살던 런던의 영국인들을 합쳐놓은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채플린은 분명 떠돌이의 외양이 급작스레 만들어 진 것이라고 누누히 밝혔지만 상하 옷차림의 상이한 모양새는 그가 웃음을 이끌어 내온 주된 방식인 ‘대조’를 그대로 따르고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떠돌이의 상징적인 차림새처럼 채플린의 영화에는 항상 선과 악이 존재하며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고 권력층과 서민이 대립한다.

<키드>역시 예외는 아니다. 어머니(에드나 퍼바이언스 분)가 아이를 몰래 버리는 장소는 상류층이 사는 화려한 저택 앞의 자동차이지만 떠돌이가 다니는 거리는 황폐하고 지저분한 뒷골목 풍경이다. 게다가 이 불쌍한 떠돌이 부자(父子)를 괴롭히는 이들이 경찰을 위시한 권력층임을 볼 때 채플린 코미디의 원류를 이해하기란 힘든 일이 아니다. 특히 떠돌이가 경찰의 등살에 못 이겨 아이를 양육하게 되는 부분은 경찰로 대표되는 권력층과 떠돌이에 투영된 서민간의 불편했던 관계를 극중에 그대로 되살린 설정으로 현실의 부조리를 꿰뚫어보고 있는 채플린의 뛰어난 통찰력이 돋보인다.


결국 그가 전혀 웃음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상황임에도 웃음을 창조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키드>에서는 가난을 웃음으로 치환하는 방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 방법의 한가지가 위에서 설명한 ‘대조’라면 또 한가지는 주변의 도구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줄 아는 ‘재치’이다. 누추한 이불을 덮고 추위를 피하던 떠돌이가 식사를 하기위해 이불의 뚫린 틈을 이용, 잠옷을 만드는 장면은 그 좋은 예이다. 이처럼 채플린의 코미디가 돋보이는 이유는 치밀한 극본과 극도로 계산된 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키드>에는 아이를 빼앗긴 떠돌이가 집 앞에서 잠이 드는 장면이 나온다. 고단한 현실이 사라진 꿈의 세계에서 천사가 된 그는 잠시 행복을 느끼지만 이내 악마의 계략에 빠져 천사들에게 린치를 당한다. 달콤한 환상에 현실의 날카로운 칼날이 개입한 것이다. 이 꿈 장면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채플린의 순수함, 초기영화의 우직함, 당시 보통 사람들의 순진함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우스꽝스런 복장을 한 악마의 꾀임에 천사들이 넘어간다는 설정, 천사가 하늘을 나는 장면을 화면 속에 실현하기 위해 떠돌이를 줄에 매달아 들어올리는 수십의 스텝들(보이지는 않지만), 그리고 여기서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정서.

채플린의 영화가 시대가 변하여도 많은 팬들에게 공감을 살 수 있는 이유는 가식과 속임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는 현실이 있으며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솔직한 감정이 있고 관객을 놀랍게 만드는 몸놀림이 있다.


플린이 일주일에 영화 두 편을 만들고 완성된 영화 외에 1센티의 필름이라도 소모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신경을 곤두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키드>는 바로 그런 스튜디오의 전속계약에 따라 영화작업에 제약을 받아왔던 채플린이 자신 책임하의 스튜디오를 설립하여 만든 6번째 작품이다. 하지만 <키드>의 필름은 관객에게 공개되기도 전에 사장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채플린은 <키드>의 여주인공이기도 한 에드나 퍼바이언스와의 몇 년간 이어진 연인관계를 청산하고, 16살의 여배우 밀드레드 해리스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당시 채플린은 32세였다). 그 이듬해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지만 이 아기는 3일 후 목숨을 잃고 만다. 둘은 이 일을 계기로 이혼을 하였고 채플린의 도덕성은 타격을 입게 된다. 더 큰 사태는 해리스의 변호인들이 이혼소송의 해결을 위해 <키드>의 필름을 담보로 잡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채플린은 가까스로 필름을 안전한 곳에 숨겨놓았고, 최악의 상황만은 피할 수가 있었다.


(2001. 11. 29. <무비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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