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Gentleman prefer Blobdes)


전설적인 갱의 이야기를 담은 <스카페이스 Scarface(1932)>, 로맨틱코미디 <Bring Up Baby(1938)>, 하드보일드 영화의 수작 <빅슬립 The Big Sleep(1946)>, <붉은 강 Red River(1948)>, <리오 브라보 Rio Bravo(1959)>와 같은 서부극, 그리고 뮤지컬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이처럼 특정분야를 집어 낼 수 없을 만큼 헐리웃을 대표하는 다양한 장르에 카메라를 들이밀었으며, 손을 대는 작품마다 장르의 걸작을 만들어낸 이는 다름 아닌 미국고전영화의 대표적인 작가 하워드 혹스(Howard Hawks)감독이다.

그런 그의 작품성향을 가르쳐 미국의 한 평론가는 “혹스 영화의 주인공들은 두 번 다시 같은 모퉁이를 지나치지 않는 사막의 캐러밴과 같다. 항상 낯선 곳을 여행하며 이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배회하고, 아주 잠시 머무를 뿐이고, 결코 되돌아가는 법이 없으며, 끝없는 혼란에 사로잡힌 채 항상 돌아다닌다”고 평했다.

다양한 장르에 걸쳐 평생 50여 편의 영화를 만든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불행히도 단 한 편의 영화만이 비디오로 처량히 출시되어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그의 명성을 확인하기 위해 많은 영화팬들은 여러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혹스 영화의 실체를 확인하였으며, 지금도 그를 만나기 위한 맹목적인 시도를 진행 중에 있다.

그 한편의 영화만을 가지고 고전기 미국 영화사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하워드 혹스 감독의 깊은 ‘장맛’을 표현하기에는 ‘새 발의 피’일 만큼 무모한 접근이지만 어쩌랴! 이 땅에 태어난 죄인 것을. 맛배기로나마 그 한 편의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를 살펴보기로 하자.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는 뮤지컬 장르로 감싼, 로렐라이 리(마릴린 먼로 분)와 도로시 쇼우(제인 러셀 분)의 사랑 찾기 과정을 그린 로맨틱코미디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하워드 혹스 감독의 작품이기 이전, 이제는 신화의 중심에서 쉼 없는 활약을 보이고 있는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의 출연작으로 더 유명하다. 다시 말해 작품의 질적 수준을 떠나 마릴린 먼로가 출연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는 고전으로 남을 가치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영화에서 마릴린 먼로가 맡은 역은 로렐라이 리로, 전구가 켜진 듯 환하게 빛나는 금빛의 머리에 미끄러질 듯 잘 빠진 몸매를 가진 미녀이지만 유럽이란 나라가 프랑스 대륙에 위치하고 있는 줄 아는 백치미의 소유자다.


하워드 혹스 감독은 <나이아가라 Niagara>로 이제 막 스타로 발돋움한 마릴린 먼로의 장점을 100%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장점을 120% 발휘할 배역을 마련하였다. 그는 우선 마릴린 먼로가 가지고 있는 ‘섹스 심벌’로써의 외형적 이미지를 그대로 극중에 끌고 왔으며, 성적 대리만족 이외의 금발과 큰 가슴이 주는 또 하나의 고착된 관념인 ‘텅빈 머리’를 합쳐 로렐라이 리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배역에 부여된 임무가 다름 아닌 하드보일드 장르의 ‘팜므 파탈’이 가지고 있던 그것 – 외모를 이용해 상대남성을 몰락시키는 – 을 희화화한 경우로, 로렐라이는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자신의 성격상 부호의 남성을 만날 경우 육체적 매력을 적극 활용한 ‘작업’에 들어간다. 한편의 영화임에도 혹스 감독은 여러 장르의 특정 요소를 비틀어 하나로 융합하는 농익은 연출력을 과시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랑의 부조리가 만연되어 있는 당시의 의식을 풍자하기 위해 뮤지컬을 변주하는 솜씨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로렐라이 리는 상징과 관념, 장르가 만들어낸 남성들의 환상이다. 게다가 로렐라이가 결혼상대로 갈구하는 돈 많은 남자나 도로시가 찾는 잘 생긴 남자도 역시 여성이 꿈꾸는 사랑의 환상에 불과하다. 한편 장르 중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것이 바로 뮤지컬이다. 대개 뮤지컬은 고단한 현실을 탈피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춤과 노래로 불쑥 ‘지금’에 끼여들어 잠시나마 황홀한 꿈에 젖게 해준다. 중요한 건, 뮤지컬이 만들어내는 화면과 마릴린 먼로, 두 여자가 찾는 배우자 모두 ‘환상’이란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에 뮤지컬 장르를 도입한 이유는 밝혀진 셈이다.

그런데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에서 하워드 혹스 감독은 현실을 ‘잊기’ 위한 장치로 뮤지컬을 이용하는 동시에 환상을 ‘깨기’ 위한 작업으로도 뮤지컬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주인공인 두 여배우의 상반된 외모(금발과 흑발)와 성격(멍청함과 똑똑함) 그리고 배우자의 성향(돈으로 여자를 유혹하는 부호 에드먼드, 비크먼과 마음으로 여자를 사로잡는 탐정 말론)으로 더욱 구체화된다.
결국 감독은 뮤지컬 장르라는 풍선 속에 허영과 빗나간 욕망으로 잔뜩 바람이 든 로렐라이와 그녀를 쫓는 남성들을 불어넣고 부풀린 후, 도로시와 말론(엘리엇 라이드 분) 커플로 하여금 그것을 터뜨리게 하는 ‘바늘’로 작용하게 한다. 그래서 마지막 로렐라이 커플과 도로시 커플의 합동결혼식 장면은 전형적인 뮤지컬 장르의 해피엔딩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반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역시 ‘돈’이 아닌 순수한 ‘감정’으로서의 사랑은 구하기 힘들다는 어떤 ‘함의’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나보다.


사족. 이 영화는 안티아 루스(Antia Loos)의 「Gentleman Prefer Blondes」가 원작인 작품으로 1928년 말콤 클래어(Malcolm St. Clair)에 의해 먼저 동명의 영화로 연출되었다.


(2001. 11. 12. <무비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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