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


‘스필버그가 가장 사랑한 영화’. <멋진 인생>을 소개하는데 있어 이것만큼 영화에 강한 흡입력을 부여하는 문구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스티븐 스필버그인가? 그는 <멋진 인생>이 개봉한 1946년 12월 말하지도, 걷지도 못할 나이인 고작 1살이었다. 이 말은 곧 <멋진 인생>의 극적인 운명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상징적인 예일지도 모른다.


<멋진 인생>의 개봉당시 배급을 맡았던 RKO는 ‘뉴스위크’나 ‘라이프’ 등 유력 언론지(紙)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벌였지만 막상 뚜껑이 열린 흥행결과는 초라할 정도였다. 마치 지금의 한국관객들이 희망 없는 현실을 잊으려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외면하고 <조폭 마누라>에 몰리는 것처럼, 현실에 불어닥친 격한 폭풍우를 참아가며 삶의 한줄기 햇살을 이어가는 한 개인의 순수를 담은 프랭크 카프라의 이 ‘순진한’ 영화는 대공황과 2차 대전을 거치며 희망에 대한 시각을 하향 조정한 미국인들의 얼어붙은 감성을 자극하기에는 너무나 유아적인 발상이었던 셈이다.


‘순진한 이상주의자’라는, 냉소의 의미가 내포되어있는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별명은 <멋진 인생>이 발표되기 이전부터 따라다녔다. 지난 8월 서울 시네마테크 주최로 열린 ‘영화사 강의’를 통해 상영된 1936년 작품 <디즈 씨 도시에 가다 Mr. Deeds Goes to Town>는 그 기원을 가장 적절히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 같다.


작은 도시의 사업가이며 시인이자 소방수인 디즈는 생전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친척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받는다. 갑작스레 벼락부자가 된 그는 막대한 부를 등에 업고 뉴욕으로 진출하지만 그의 눈을 통해 보이는 거대한 도시란 살아있는 지옥을 연상케 하는 비틀린 모습뿐이다. 이에 실망한 우리의 디즈 씨, 상속받은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기로 마음먹는다.


그의 영화는 거의가 이런 식이다. 도덕의 최고가치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는 우리이지만 막상 그 선(善)을 실현할 도구(대개가 돈)가 쥐어지면 현실과 윤리사이의 이중적인 잣대 속에 갈등하게된다. 하지만 그와 달리 프랭크 카프라 감독은 아주 태연히 유토피아 혹은 이상주의의 실현으로 극을 마무리한다. 아무리 세상이 삶을 파괴하고 정신을 타락시켜도 인간 본연에 자리 잡고 있는 ‘순수’라는 본성은 비극의 순간에도 빛을 발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그런 대책 없는 희망찬가는 그래서 현실주의자들에게 조소의 대상으로 비하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카프라는 자신의 영화가 정신적 공황에 빠져있는 미국인들의 절망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주의적 ‘믿음’을 굳게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디즈씨 도시에 가다>가 그랬고,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Mr. Smith Goes to Washington>가 그랬으며, <멋진 인생> 역시 그랬다.

결국 이상주의자 감독의 ‘순수’에 대한 자국민의 대답은 30년이 지나자 비로소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계기는 참으로 엉뚱했다. 1974년 <멋진 인생>의 판권을 가지고 있던 영화사의 한 직원이 판권연장에 관한 서류에 그만 오기(a clerical error)를 범하게 된 것이다. 이에 TV 방송국은 단 한푼의 판권료 지불 없이 영화의 소유권을 넘겨받게 되었다. 그 후 수시로 TV 전파를 탄 <멋진 인생>은(주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단골로 방영되었다) 시청자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며 ‘미국 영화 역사상 가장 극적으로 재발견된 영화’로 등극하게 된다. 카프라의 유토피아에 대한 계몽이 마침내 동의를 얻어낸 것이다.

‘위대한 선물’이라는 두 페이지 분량의 짧은 이야기에서 출발한 <멋진 인생>은 죠지 베일리(제임스 스튜어트 분)라는 한 젊은 청년의 좌절과 극복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그것을 이끌고 가는 주된 에피소드가 대자본가 헨리 포터(라이오넬 베리모어 분)와 노동자 계급을 대표하는 베일리와의 대립을 축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감독이 세상을 살아본 결과 현실의 무질서는 자본계급의 착취과 부의 독점에서 야기되었으며, 이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는 계급은 노동자라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감독은 문제를 제기하며 해결과정으로(영화 속에서나마) 도덕적·사회적 이상 실현에 관한 요소로 <멋진 인생>을 받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속에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학업의 꿈을 포기하고 부친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는 아버지와 자식간의 도리가 있으며, 부호로부터 인생을 바꿀만한 놀라운 제안을 받지만 이웃을 위해 실리를 거절하는 우정이 있고, 위기에 빠진 남편의 사업을 돕기 위해 신혼여행비를 포기하는 아내의 헌신 등이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순수한 인간애(人間愛)의 이상(理想)이다.


며칠 전 EBS에서 영화사 100년을 기념하여 10부작 시리즈로 방영되었던 ‘영화사 100년, 100대 영화’의 ‘가족의 초상’ 편에서 마틴 스콜세지는 <멋진 인생>을 두고 긴장감이 돋보이는 수작이라고 평하였다. 비(悲)와 희(喜)의 에피소드가 끊임없이 교차, 반복되는 이 영화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집중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비단 <멋진 인생>이 아니더라도 1935년과 1937년 그리고 1939년 세 번의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과 세 번의 노미네이트 경력이 말해주듯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정교한 구성과 흡입력 있는 이야기는 당대 최고였다.

또한 이 프로에 출연한 영화제작자 데이비드 퍼트남은 많은 사람들이 <멋진 인생>을 사랑하는 결정적인 이유로 신화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오딧세이아」의 오딧세우스가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신의 도움을 받아 부인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있는 고향 이타카까지 갈 수 있었던 것처럼, 죠지 베일리 역시 파산 및 횡령 이라는 감당하지 못할 현실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자살을 결심한 순간 신의 개입으로 삶의 가치에 대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같은 신화의 차용이 보는 이들에게 ‘희망’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귀중한 시간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2001. 11. 22. <무비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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