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밀레니엄 브리지, 테이트 모던을 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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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학도였던 지인이 런던 행을 택한 이유는 그림 공부 때문이었다, 고 한다. 내가 아는 그는 공부와는 담 쌓고 지내는 인간인데 아무래도 영국의 미술관 입장이 공짜인 까닭에 런던에 온 것이 확실하다. (영국의 주요 미술관은 2001년 12월부터 무료입장을 실시하고 있다!) 안 그래도, 내가 멋진 공연을 소개해달라고 하니 공연은 무슨 공연이냐며 돈 들일 필요 없이 미술관에나 가자던 그다. 내가 언제 제 돈 드려서 공연 보여 달라고 했나, 그냥 추천해 달라고 했지. 추측대로 런던으로 온 이유가 있었다. 암.

그래서 가게 된 곳이 바로 테이트 모던(Tate Modern) 역시나 이동하는 동안 말이 많다. 많이 가봤다는 거지 모. 하도 재잘대는 통에 바늘로 입을 봉하려 했는데 웬일인지 지인이 들려주는 생생한 미술관 얘기가 자못 흥미롭다. 그의 말에 따르면, 테이트 모던은 철저히 프랑스를 의식한 영국 특유의 자존심 발로에 따른 문화적 결과물이란다. 날로 명성을 얻어가는 파리의 퐁피두센터(Pompidou centre)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략적인 미술관이라는 얘기. 영국이 프랑스와 라이벌 관계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흥미가 동했다.

한참 열변을 토하던 그가 St Paul’s 역에 이르러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난 영문도 모른 채 따라 내렸다. 테이트 모던에 가기 위해서는 Blackfriars 역에 하차해야 한다고 가이드북에 쓰여 있던데 이런 멍청한 녀석이 한 정거장 미리 하차한 거다. 내가 런던에 처음 온 여행자라고 무시하는 거야, 나도 웬만한 건 다 안다고. 나 다시 지하철로 돌아갈래. 지인은 그런 나를 향해 ‘닥쳐!’라는 의미를 담은 눈빛을 한 번 쏘아붙인다. 그러더니 세인트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을 가로질러 약 5분여를 걷다가 유서 깊은 이 도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래형 컨셉의 어느 다리에 이르러 다시 침을 튀기기 시작했다. 

“이게 밀레니엄 브리지(Millennium Bridge)라고. 밀레니엄을 기념하기 위해 2000년에 세워졌지. 하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어.” 국가정보원이 거대한 비밀을 털어놓듯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속삭이는 지인의 목소리가 맘에 안 들었지만 여기까지 참고 따라온 게 아까워 계속 들어주기로 했다. 

퐁피두센터가 들어서면서 파리의 대표적인 빈민가였던 마레지구가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한 것처럼 테이트 모던 역시 런던의 공장지구로 악명이 높았던 Bankside의 버려진 화력발전소를 개조해 문화단지로의 이미지 쇄신을 꾀하려 했다. 문제는 공장지구였던 까닭에 고립돼 있던 데다가 정면으로 템스 강이 흐르고 있어 사람들이 쉽게 통행하기 불편했다는 것. 테이트 모던이 처음 문을 열 당시만 하더라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바로 밀레니엄 브리지란다.

미술관에 관객이 없다고 다리를 세운다? 미술관 알기를 돌처럼 여기는 나 같은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었다. 그래서 더욱 지인의 얘기에 집중했다. 테이트 모던은 템스 강을 사이에 두고 세인트폴 대성당과 마주보고 있는데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밀레니엄 브리지다. 세인트폴 대성당은 런던의 주요 관광지로, 이곳을 찾는 관광객만 1년에 수백만에 달한다고 한다. 근데 밀레니엄 브리지가 생기면서 강북의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강남의 테이트 모던으로 이동하는 사람이 수백만으로 증가했다고 하니. 그 결과, 지금은 퐁피두센터보다 더 많은 관람객이 찾고 있으며 현대미술에 있어서만큼 작품의 질은 테이트 모던이 압도하는 수준이란다.

지인은 이를 두고 발전적인 라이벌 관계란 바로 이런 것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다. 덧붙여, 자신 또한 같은 과에 다니는 일본인을 가상의 라이벌 삼아 발전적인 작품 활동을 모색 중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댄다. (-_-;) 유머라고 하기엔 그는 너무 진지했고 진심이라고 하기엔 내가 본 그의 작품은… (지인이 충격 받을 것 같아 차마 이 지면에 밝히진 못하겠다. ㅜㅜ) 역시 모든 현상에는 양지와 음지가 있는 법. 영국과 프랑스의 라이벌 관계로 생겨난 발전적인 사례가 테이트 모던이라면 폐해는 고스란히 지인의 몫인 것 같았다. 나는 지인에게 언젠가 꼭 그의 작품을 테이트 모던에서 봤으면 한다고 덕담을 건넸다. 물론 입에 침을 바르지는 않았다. (^^;)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빌 브라이슨 지음 | 21세기북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실을 밝히면, 지인이 그림도 못 그리고 썰렁한 농담이나 나누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테이트 모던 얘기를 하면서 지인의 얘기를 빙자해 뻥을 보탠 건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에 워낙 감명을 받은 탓이다. 이 책, 읽다보면 포복절도한다. 여행수필 중 가장 재밌다. 뭔 놈의 성격이 그리 고약한지 가는 곳마다 불평이요, 묵는 곳마다 불만이다. 물론 코믹한 문체 덕에 전혀 고약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요, 백미다. 그래서 빌 브라이슨의 문체를 따라해봤다. (만약 제가 쓴 글이 재미없다면 그건 순전히 제 탓이지 이 책이 재미 없어서가 아닙니다. 강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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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2010.7.6)

2 thoughts on “(5) 밀레니엄 브리지, 테이트 모던을 살리다”

    1. 주변에서 하도 추천하길래 시큰둥했는데 막상 읽어보니까 웃기더라고요. 코믹 버전의 필립 말로 같다고나 할까 ㅋㅋ 요즘도 많이 바쁘신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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