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 투 유마>(3:10 to Yuma)


사용자 삽입 이미지서부극은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 춤을>(1990),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1992) 이후 간간히 명맥을 유지해오던 장르였다. 최근 이 전통적인 미국식 장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앤드류 도미닉의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과 같은 정통 서부극은 물론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 등 변종 서부극까지 붐을 이루고 있는 것. 1957년 개봉한 델머 데이비스 감독의 동명작을 리메이크한 제임스 맨골드의 <3:10 투 유마>는 이 서부극 러시의 선두에 선 작품이다.

1953년 ‘다임 웨스턴 매거진 Dime Western Magazine’에 발표된 엘모어 레너드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3:10 투 유마>는 정해진 시간 안에 범인을 무사히 호송한다는 점에서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하이 눈>(1952)을 연상케 한다(엘모어 레너드는 TV용 영화 <하이 눈 파트 투: 윌 케인의 귀환 High Noon, Part Ⅱ: The Return of Will Kane>(1980)의 각색을 맡기도 했다!). <하이 눈>에서 보안관 케인(게리 쿠퍼)은 자신에게 앙심을 품은 악당을 실은 죄수 호송 열차가 12시 정오에 역을 무사히 통과하도록 해야 한다. 이 같은 시간 게임의 상황을 서스펜스와 연결하며 <하이 눈>은 선과 악의 선명한 대립을 통한 극적 재미를 주었다. 반면 <3:10 투 유마>는 제한된 시간이 주는 긴장감은 크지 않은 대신, 선악 구별이 혼재한 요지경 세상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사건보다 영화 내내 충돌하는 두 캐릭터 벤 웨이드와 댄 에반스의 묘사에 더욱 신경을 쓴 건 이 때문이다. <3:10 투 유마>는 서부극이면서 동시에 캐릭터영화다. 남자들의 세계를 다룬 서부극 속 인물은 섬세한 내면보다 선 굵은 외면 묘사에 신경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외양 못지않게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는 데도 많은 공을 들인다. 예컨대, 22건의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며 200여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낸 벤은 표면상 악인이지만 일차원적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다. 틈만 나면 수첩에 그림을 그리고, “그 눈을 깊이 바라다보면 세상의 색깔이 바뀔 정도예요” 따위의 시적 대사를 읊조리는 그에게서는 악당에 어울리지 않는 신비로움이 묻어난다. 이는 댄도 마찬가지. 목장주에게 억압당하며 힘들게 가족을 부양하는 한낱 목동에 불과한 그도 알고 보면 남북 전쟁에 참전한 군인 출신으로 의족까지 하게 된 피치 못할 사연을 숨기고 있다. 즉 사건보다 캐릭터가 충돌하며 이야기와 분위기를 형성하는 영화인 것이다.

<3:10 투 유마>에는 통념적인 선악 구도를 뒤집는 전복의 재미가 있다. 벤 웨이드를 절대적인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은 것을 넘어 댄의 아들 윌리엄(로건 레먼)의 눈을 빌려 그에게 호감을 보낸다. 오히려 벤이 동정적으로 그려지는 것에 반해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보안관과 목장주가 비열하거나 더한 악한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벤 역시 돈을 노린 보안관의 인정머리 없는 처사에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한 것으로 등장할 정도. 악인을 영웅시하고 공권력을 공공의 적으로 묘사하는 영화의 태도에는 전통적인 장르의 가치 기준을 위반하는 재미가 있다.

<3:10 투 유마>는 한 발 나아가 이들이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마저 제시한다. 댄이 벤의 호송을 맡은 건 그가 정의에 불타는 도덕군자기 때문이 아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당장에 현금을 손에 쥘 수 있는 일이라고는 벤의 호송에 참여하는 것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정의를 위해 나라 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 돈을 위해 정의를 도모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 초기 서부극이었다면 마땅히 정의의 용사로 그려졌어야 하는 캐릭터지만, 세월이 변한 만큼 서부극이 품고 있는 함의 역시 변했음을 벤의 캐릭터는 증명해 보인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걸까. 해답은 대장의 탈출에 목숨을 건 부하들을 바라보며 댄에게 던지는 벤의 대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내가 악당이 아니었다면 부하들이 나를 도와주지 않았을 거야.”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부려먹는 약육강식의 세계, 악당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결국 먹힐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이치를 보여주는 것이 영화가 진정 노리는 지점이다. 영화의 결말은 이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아군과 적군의 구분 없이 자신이 획득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상황을 보여준다.

더욱 의미심장한 대목은 이런 불합리한 현실이 다음 세대에도 거듭할 만큼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이라는 사실이다. 댄의 14살 아들 윌리엄의 존재가 중요하게 부각되고, 특히 마지막 대결이 그의 시점으로 비춰지는 건 이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미국의 신화를 옹호하는 장르였던 서부극은 선악의 경계가 역전된 수정주의 서부극을 거쳐 이제 현재의 비극이 대물림되는 ‘신수정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3:10 투 유마>는, 그 결정적인 증거다.


Tip!  디트로이트의 디킨스, 엘모어 레너드


사용자 삽입 이미지1925년 10월 11일 뉴올리언스 출신인 엘모어 레너드는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 중 한 명이자 할리우드 작가다. 1953년 소설가로 데뷔, 총 44편의 장편과 2편의 단편을 발표했고, 그중 21편의 작품이 영화화됐으며(TV 포함), <The Big Bounce>(1969) ‘Three-Ten to Yuma'(1953)는 두 차례씩 영화화되기도 했다.

<Rum Punch>(1992)를 원작으로 한 <재키 브라운>의 쿠엔틴 타란티노, <Out of Sight>(1996)를 원작으로 한 <조지 클루니의 표적>의 스티븐 소더버그 등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감독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엘모어 레너드는 현재 82세에도 불구, 지난해 <Up in Honey’s Room>(2007)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1930년대 신문 헤드라인을 연일 장식했던 ‘보니 앤 클라이드’ 사건과 당시 메이저리그를 주름잡던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야구단의 경기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그는 지독할 정도의 현실성과 생생한 대화로 할리우드의 구미를 당기고 있다. ‘디트로이트의 찰스 디킨스’라는 별명을 가진 엘모어 레너드의 작품은 도시에 사는 인물들을 주로 다루는 까닭에 하드보일드 혹은 누아르 이미지로 전환하기 쉽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종종 ‘뻣뻣한 레이몬드 챈들러 소설’이라는 혹평에 시달리기도 한다. 하지만 <Freaky Deaky>(1988)가 배우이자 감독인 찰스 매튜에 의해 영화화가 진행 중에 있는 등 그의 명성은 여전히 확고하다. 국내 출간된 엘모어 레너드의 작품으로는 <마지막 모험> <악어의 심판> <보안관과 도박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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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 375호
(200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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