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한국 장르문학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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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작가의 신작 <28>의 기세가 놀랍다. 6월 16일 발매 이전 예약 판매만 1만 부가 넘었고 12일 후 내가 이 책을 구입했을 때는 벌써 12쇄였다. 그러니까, 하루에 1쇄씩이 팔려나간 셈이다. 아마 이 글이 아레나에 실려 독자 들이 읽을 때면 <28>의 발행 부수는 30쇄를 훌쩍 넘기지 않을까 예상된다.

<28>은 화양(작가가 소설을 위해 고안해낸 가상의 도시다.)이라는 서울 근교 도시에 퍼진 정체불명의 전염병을 소재로 4주, 즉 ’28’일간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 공포소설이다. 연립주택에 사는 모씨가 이웃 몰래 개들을 사육하던 중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다. 걸리면 눈이 붉어지는 것이 특징인데 전염성이 얼마나 강한지 첫 번째 사망자 발생 이후 채 며칠 지나지 않아 병원에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환자가 많아지면서 도시 전체가 마비 상태에 이른다. 개들이 전염의 최초 발병지로 의심되자 화양에 투입된 군인 들은 도시를 봉쇄한 채 살(殺)처분하기 시작한다.  

나는 지난 5월호에 ‘한국의 스티븐 킹, 가능할까?’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스티븐 킹과 같은 대형작가의 출현이 침체에 빠진 한국 문학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요지의 기사였다. 그러면서 ‘한국의 스티븐 킹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했는데 <28>이 지금 시장에서 얻고 있는 폭발적인 반응만 놓고 보면 정유정을 한국의 스티븐 킹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마침 아레나의 편집부로부터 <28>과 관련한 기사를 청탁받게 됐다. 말하자면, ‘한국의 스티븐 킹, 가능할까?’에 이은 후속편 기사에 대한 의뢰였다. 정유정과 스티븐 킹을 한 번 비교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주제라는 생각에 써보겠노라고 했다. 한국 작가의 특정한 누군가를 한국의 스티븐 킹 운운하는 것은 일종의 자극적인 수사 같아서 실은 썩 맘에 들지는 않는다. 다만 이와 같은 비교를 통해 한국의 문학시장, 특히 장르문학이 한국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28>에 대해 공포라고 장르를 정의 내렸는데 스티븐 킹은 오래전부터 이미 ‘공포의 제왕’이라는 무시무시한 타이틀로 독자들에게 어필해온 작가였다. 이들은 공히 사람 들의 마음 속 지옥 같은 풍경을 끄집어내어 형상화하는 데 발군의 묘사를 선보인다. 정유정과 스티븐 킹이 발표하는 작품마다 큰 관심을 모으는 이유는 주목하는 공포의 정체가 바로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지만 두려워 애써 피하거나 외면해왔던 그 어떤 것, 바로 인간의 실체인 까닭이다.

인간의 본성은 시대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는 탓에 발현되는 공포 또한 그 모습을 달리하기 마련이다. <The Glass Gloor>(1967)로 데뷔한 이후 스티븐 킹은 50년 가까이 공포라는 감정에 전념해왔지만 작품마다 드러나는 ‘그것’의 정체는 천차만별이었다. 예컨대, <스탠드>(1978)가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 핵전쟁의 공포를 은유했다면 <언더 더 돔>(2009)은 여전히 9.11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미국인들의 정신적 외상을 건드렸다. 집단의 공포만이 아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소녀가 가정과 학교로부터 받는 스트레스와 불안을 기이한 방식으로 폭발시키는 <캐리>(1974), 남편을 잃은 후 홀로서기를 해야만 하는 부인의 혹독한 통과의례를 다룬 <리시 이야기>(2006) 등 개인의 공포를 소재로 한 작품도 꾸준히 발표 중에 있다.  

킹과 비교해 발표한 소설은 많지 않지만 정유정의 작품 또한 동일한 성향을 띈다. 그녀의 이름을 가장 많이 알린 <7년의 밤>은 딸을 잃은 남자와 아들을 지켜야 남자의 대결이란 점에서 자식을 잃은, 그리고 자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부모의 공포와 증오가 맞부딪히며 이야기의 중요한 정서로 작용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진가는 두 남자가 부모로서의 지위와 감정을 모두 벗어던지고 순수한 ‘악 vs 악’으로 정면대결 하면서 마지막 순간에 드러내는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에 있다.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을 보는 결말의 구조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정글과 다르지 않다는 정유정의 세계관을 대변했다.

그러니까, 이 세계의 생존 피라미드의 꼭짓점은 인간이다. 그 어떤 천상의 피조물도 악에 있어서만큼은 인간을 제압할 힘을 갖지 못한다. 적어도 <28>의 세계에서는 그렇다. 개에게서 발병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원인불명의 전염병은 치사율이 거의 100%에 육박해 인간과 개 모두를 사지로 몰아간다. 그래도 끝까지 살아남는 건 인간이다. 이를 생존을 향한 인간의 의지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28>은 경우가 다르다. 생존하기위해 취하는 최후의 수단이라는 것이 개를 학살하고 원한 관계의 주변인들을 처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유정은 조류독감, 돼지독감 등 신종 플루와 같은 전염병에 대한 공포를 소재로 삼았지만 결말에 이르러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역시나 인간의 악함이다.

스티븐 킹과 정유정에게 공포는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고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다. 다만 소설로 구체화하는 데 있어서 표현하는 방식에는 큰 차이를 보인다. 스티븐 킹이 장르를 적극 활용해 이 세계를 반영하는 것에 반해 정유정은 장르를 ‘차용’하는 것에 그친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를 알아보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장르 genre’에 대해 따져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장르문학에 대해서는 정확히 떨어지는 정의는 없지만 대개 공포, 미스터리, Sci-Fi처럼 특정한 소재를 서술하는 면에 있어서 유사한 작품 군(郡)을 말한다. 장르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허구의 설정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분야에 있어서 발군의 실력을 뽐내는 작가는 단연 스티븐 킹이다. 핸드폰의 통화주파로 사람들이 좀비로 변한다(<셀>)거나 시간여행으로 1963년 11월 22일로 돌아가 존 F.케네디의 암살을 막는다(<11/22/63>)는 등의 기상천외한 허구의 설정으로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독자들이 그런 허구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용인해주는 문화가 필요하다. 그런 장르 문화가 너그러운 영미권이나 일본에서는 장르문학이 큰 인기를 끌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저변이 되어 재능 있는 장르 작가가 꾸준히 배출되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한국의 장르문학? ‘한국의 스티븐 킹, 가능할까?’ 기사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리얼리즘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순문학에 비해 작품의 수도, 독자의 관심도도 현저히 떨어지는 수준이다. 장르 특유의 허구의 설정에 대한 독자들의 거부감이 큰 것이 결정적인 이유다.  

그럼 <7년의 밤>과 <28>의 인기는 어떻게 설명하느냐고? <7년의 밤>은 두 남자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미스터리’ 구조를, <28>은 붉은 눈의 괴질이 도시 전체에 삽시간에 퍼져 사람들을 전염시키는 유사 ‘좀비물’의 형태를 가져간다는 점에서 장르의 기운이 엿보인다. 허나, 장르적 요소는 감지할 수 있되 장르문학의 매력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건 정유정이 허구의 설정과 묘사를 최대한 배제한 까닭이다. 비교하건데, 스티븐 킹의 작품에서 초능력, 외계인, 좀비, 시간여행 등이 연루된 특정 사건이 실제로 현실에서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는 반면 정유정의 소설 속 묘사는 상대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큰 편이다.

<28>만 하더라도 극 중 묘사되는 전염병이 개로 인해 발병된다는 설정 자체가 특수할 뿐 동물로 인한 인간의 독감 발병은 이미 과거에 경험했거나 지금도 그 위험성이 심심찮게 제기되는 실정이다. 심지어 <28>에는 “사람하고 동물이 함께 걸리는 전염병. 이를 테면 광견병이나 이볼라 같은, 아니 어쩌면 이볼라보다 훨씬 강력할지도 모르지. 잠복기가 짧고 경과도 몇 배 빠르고. 개가 개한테, 개가 사람한테, 사람이 사람한테, 사람이 개한테 전염시키는 게 모두 가능할 수도 있겠다.”와 같은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사실 바탕의 대사가 등장할 정도다.

허구와 리얼리즘, 바로 그 차이가 스티븐 킹과 정유정의 작품 성향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다. 물론 그 차이가 누구의 소설이 더 뛰어나다는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이라는 매체 자체가 작가의 상상력에 기반을 둔 허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유정의 작품을 향한 독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은 우리 출판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로부터 리얼리즘 전통이 강했던 한국 문학이 장르적 요소를 차용함으로써 재미를 배가하는 것은 물론 그 결과로 높은 판매고까지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개인적으로 정유정의 <7년의 밤>과 <28>은 순문학과 장르문학 사이에 위치한 경계의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굉장히 영리하게 두 지점 사이의 장점을 취했기에 지금과 같은 결과를 얻어냈다고 본다. 다만 장르문학의 팬으로서 새롭다거나 신선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장르문학이 생소한 독자들에게 획기적으로 다가갔을지 모르겠지만 ‘유사 좀비물’이라는 나의 표현처럼 <28>이 보여주는 설정은 장르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꽤나 익숙한 것이다. 장르적 설정은 아니지만 전염병 발병 이후 벌어지는 화양의 아수라장 현장도 그렇다. 시청광장에 모인 시위대, 그들을 향해 무력을 행사하는 군인들, 시민들이 부르는 <아침이슬> 등은 어렵지 않게 광주민주화항쟁을 떠올리게 한다. 그 의도를 폄하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2013년에 발표된 소설에서 33년 전의 사건을 떠올린다는 것은 어쩐지 좀 구식의 인상이 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장르문학에 대해서 종종 터무니없는 얘기라는 반응들을 내비치고는 한다. 이는 어떤 면에서 장르에 대한 몰이해를 내포한다. 허구의 설정이 터무니없는 건 사실이지만 스티븐 킹의 경우처럼 현실의 공포를 반영하기 위한 장치의 성격이 짙다. 그리고 허구의 설정이 만들어놓은 세계 안에서 나름의 사실적인 묘사로 독자들의 적극적인 해석을 유도한다. 내가 <28>을 재미있게 읽었으면서도 아쉬웠던 건 바로 이 지점이었다. 이 책의 태그라인처럼 ‘치밀하고 압도적인 서사’와 ‘폭발하는 이야기의 힘’에 완전히 몰입되어 페이지를 넘기는 가운데서도 해석의 여지가 많지 않은 리얼리즘적 묘사는 사고(思考)를 경직되게 만들었다.  

그런 관점에서 정유정을 한국의 스티븐 킹이라고 한다면 방점은 스티븐 킹이 아니라 한국에 찍힌다. 한국에서 이 정도의 상상력과 이야기를 보여주는 작가는 흔치 않다. 벌써부터 정유정의 다음 작품이 보고 싶을 정도다. 대신 차기작에서는 ‘한국’을 넘어선 작품을 보고 싶다. 세계적인 소설을 쓰라는 얘기가 아니다. 한국 문학을 지배하는 리얼리즘 전통에서 지금보다 더 멀어져 자유로운 상상력이 돋보이는, 그래서 독자들에게 해석의 결이 풍부한 서사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스티븐 킹의 작품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그런 새로운 설정과 이야기로 말이다.

ARENA
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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