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베니스 인 서울] <귀>(orecchie)

orecchie

<귀 orecchie>(2016)는 알레산드로 아로나디오(Alessandro Aronado)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73회 베니스영화제의 신인육성프로그램 ‘비엔날레 컬리지 Biennale College’에서 처음 소개됐다. 비엔날레 컬리지 시네마는 베니스영화제가 매년 독창성이 돋보이는 저예산 프로젝트를 선정, 150,000유로의 제작비를 지원하고 출품 자격을 부여하는 섹션이다. 3편의 작품이 비엔날레 컬리지에 오르는 것이 보통인데 올해는 예외적으로 1편이 추가되어 총 4편이 되었다. 그 한 편이 바로 <귀>다. 영화제 측에 따르면, 예측이 힘든 이야기 전개와 독창적인 연출 스타일을 외면하기 힘들었다는 설명이다.

알레산드로 아로나디오에 대한 베니스영화제의 관심은 장편 데뷔작에서부터 남달랐다. 경찰차와 추돌 사고를 당한 젊은이를 다룬 <하나의 인생, 혹은 둘 Due vite per caso>(2010)에 ‘최고의 데뷔작 Best Debut Film’을 포함해 총 3개 부문에 후보로 올리며 애정을 드러낸 것. 2016년의 경우, 3편의 비엔날레 컬리지 작품이 신인감독의 데뷔작인 것에 반해 <귀>가 알레산드로 아로나디오의 두 번째 연출작인 것을 고려하면 관심의 정도가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수 있다.

확실히 1:1 화면비의 흑백화면으로 시작하는 <귀>는 처음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주인공은 무명의 젊은 남자다. 여자 친구의 집에서 잠을 자던 중 귓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깬다.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를 열려던 차 친구 루이지가 사망했으니 장례식에 참석하라는 여자 친구의 메모를 발견한다. 루이지가 누구지?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루이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에게 곧이어 부조리한 상황이 연달아 발생한다. 신을 믿느냐며 전도하러 온 수녀가 앞집 할머니와 싸움이 붙어 병원에 실려 가는가 하면 귀에 이상이 있어 방문한 병원에서는 임신이라는 둥, 자웅동체라는 둥 황당한 진단을 내린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농담 반, 진담 반 같은 상황이 종일 펼쳐지자 남자는 도대체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복잡한 심경을 정리할 겸 음악 하는 친구에게, 새로운 남자 친구를 사귀는 엄마에게, 담당 교수의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이들은 단번에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으로 점점 남자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루이지의 장례식장에서 남자는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그에 맞춰 알레산드로 아로나디오 감독은 관객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1:1의 화면비를 서서히 늘려가며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는 1.85:1까지 확장한다.

예사롭지 않은 연출과 이를 선도하는 이야기. 그리고 끝내 밝혀지지 않는 남자의 이름. 알레산드로 아로나디오는 <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다. “완벽히 무명인 그가 무지하고 어리석고 미쳤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과 타협하는 이야기다.” 그에 맞춰 영화는 익명의 사람들과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택일해야 하는 남자의 모험에 집중한다. “내 인생과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의견을 관객과 공유하기 위해서”라는 게 감독의 설명이다.

흥미롭게도 <귀>는 희비극의 요소를 유난히 강조한다. 희비극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몰린 인물의 면면을 드러내고 각성을 끌어내는 데 용이하다는 특징이 있다. 일련의 황당무계한 상황에 지칠 대로 지친 남자가 찾아간 교수의 부인은 거리에서 책의 성을 쌓는 노숙인을 가리키며 이런 얘기를 들려준다. “우리가 저 사람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저 사람 또한, 우리를 이상하게 볼 거에요” 이는 이상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에 대한 어떤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안 그래도 남자가 맞닥뜨린 복잡한 상황은 그 자신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와도 깊은 관련을 맺는다. 여자 친구를 사랑하지만, 아이를 낳아야 할지 확신이 없고, 철학 보조 교수로 근무하지만, 그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발표하고 싶어 잡지사 취직 면접을 준비 중이기도 하다. 게다가 루이지가 누구인지 기억을 못 하는 상황에서 장례식에 참석하려니 영 마음이 복잡한 것이 아니다.

세상사라는 게 그렇다. 진실은 단순한데 그를 깨닫기까지 넘어야 할 난관이 만만치 않다. 거짓은 복잡하고 가짜는 난무하며 사이비가 판을 치는 게 이 세상이다. 그런 사회에서 인간의 주체성을 발휘하는 건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맞춰 삶의 목적을 가져가는 건 더욱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런 배경에서 실존주의는 출발한다.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 남자가 찾아간 뮤지션 친구는 마침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는 중이다. 친구는 남자에게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가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인 이유에 대해 그저 태양이 강렬히 비췄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소설의 문장을 인용해 덧붙이길, 서서히 사라지기보다 한 번에 타버리는 것이 낫지.

인생은 긴 것 같아도 유한하다는 점에서 짧다. 삶이 두려운 이유 중 하나다. 그 때문에 혹자는 종교에 의지하고 신을 믿는다. 남자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루이지의 존재는 실은 맥거핀에 가깝다. 오히려 루이지로 인해 남자가 장례식, 그러니까, 죽음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삶은 생과 사가 하나로 연결된 직선 주로다. 그와 같은 유한한 삶을 무한하게 만들어주는 것. 수많은 ‘익명’이 모여 우리라는 커뮤니티를 이루게 해주는 것, 남자를 통해 이를 찾아가는 여정의 <귀>의 핵심이다.

<귀>에는 꽤 많은 예술가와 철학자가 언급되고 수많은 예술이 배경으로 흘러간다. 복잡한 인간 삶에서 예술은 인간에, 인간의 삶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게 해줄 나침반이 되어주고는 한다. <귀>가 또한, 그렇다. 이 영화는 신의 존재처럼 규명하기 힘든 문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술의 형태로서 단서를 제공한다. 예술은 그 안에 담기는 사랑을 전제로 한다. 신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 연인에 대한 사랑,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세상에 대한 사랑.

사랑은 인간의 삶을 가치 있게 할 뿐 아니라 이 세계가 하나라는 걸 증명하는 중요한 명제다. 그리고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다. 그래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다. 이를 깨닫게 될 때 복잡한 삶은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것이 알레산드로 아로나디오 감독이 말한, 세상과의 타협이 아닐까?)  귓속에서 정체 모를 잡음이 들린다고 괴로움을 호소했던 남자는 그제야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한다. 수많은 정보가 울긋불긋하게 넘쳐나는 컬러 화면과는 달리 선명하게 보이는 흑백필름처럼, 답답했던 1:1의 화면비가 끝내 1.85:1로 늘어나며 두 귀를 얻은 듯 시원하게.

 

월간 Cinematheque
(2016.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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