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경성, 나는야 낭만 ‘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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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우 감독, 박해일, 김혜수 주연의 <모던보이>가 1937년 경성의 모습을 공개했다. 비밀스러운 댄스홀 문화구락부의 풍경을 담은 막바지 촬영현장과 2008년 최고 기대작 중 하나인 <모던보이>의 제작 스토리를 공개한다.


두세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복도는 좁다. 음침한 조명까지 깔려 꼭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헐떡이며 달려오는 남자 뒤로 다급하게 쫓아오는 또 한 명의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박해일이다. 박해일을 보자마자 ‘풋!’ 웃음이 터질 뻔했다. 식민지 시대 경성의 문제적 신세대 청년 ‘이해명’을 맡았다더니, 2:8 가르마에 아줌마 파마로 강조한 헤어스타일이 과연 가관이다.

주변의 동요에도 불구하고 박해일의 연기나 이를 바라보는 정지우 감독, 핸드헬드 촬영에 여념이 없는 김태경 촬영감독의 움직임엔 변화가 없다. “조난실 지금 어디 있어!” 다급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남자의 등 뒤에 대고 소리치는 이해명. 둘의 간격이 좁혀지는 순간 서로 뒤엉키며 복도 바닥 위를 뒹군다. 박해일에게 초점을 맞추던 카메라는 그의 목 뒤로 시선을 옮겨 제3자의 손에 들린 권총 한 자루를 잡는다. “당신 누구야?” 불의의 일격에 당황한 해명의 한마디. “난…낭만의 화신이다!”

빼앗긴 나라보다 종적을 감춘 애인 조난실(김혜수)을 찾는 게 더 급한 이해명. 한마디로 희대의 ‘또라이’로 설정된 그에게 더 없이 어울리는 대사다.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정지우 감독은 “목소리 톤을 좀 더 강하게” “몸은 약간 카메라를 향하고” 등등 좀 더 디테일한 연기를 주문했지만 내심 만족해하는 눈치다. “실제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있어요.” <모던보이>는 식민지 시대를 견뎌낸 사람들의 엄숙한 투쟁기록이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으로 당시를 체화했던 개성 넘치는 남녀, 이해명과 조난실의 러브스토리다.


1937년 경성, 희대의 캐릭터

11월 23일 파주종합촬영소에서 공개된 영화 <모던보이>의 촬영현장. 한창 리허설을 진행하던 정지우 감독은 박해일, 김태경 촬영감독과 몇 마디 나누더니 카메라를 멈춘다. 그리곤 좁고 어두컴컴한 복도를 빠져나와 200여 개의 백열등이 만들어내는 화려함이 인상적인 문화구락부 세트로 자리를 옮긴다. 화면의 톤을 맞추기 위해 조명을 다시 설치하는 동안, 비밀 댄스홀로 설정된 문화구락부 장면의 동선을 체크하기 위해서다. 경성을 재현하기 위해 무려 77억 원을 투입한 대작을 스케줄에 맞춰 뽑아내기 위해선 일분일초가 아깝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이해명의 캐릭터를 놓지 않기 위해 건들건들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박해일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다. 정지우 감독은 “영화 속 이해명과 배우 박해일은 기질적으로 비슷하다. 박해일이 연기의 폭을 얼마만큼 넓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며 “정말 가관인 캐릭터가 만들어졌다”고 흐뭇해한다.

정지우 감독이 이해명을 만난 건 2000년, ‘5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인 이지형의 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에서다. 이미 그 전부터 영화 소재의 보고라 할 만한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매혹을 느꼈던 정 감독은 1937년 경성의 모던보이와 모던걸을 다룬 소설 광고를 접하고 즉시 판권을 구입했다. 원작을 읽으면서는 ‘시대’보다 ‘캐릭터’에 더욱 끌렸다. 친일과 반일, 찬탁과 반탁의 이분법이 정신세계를 장악한 것으로 믿었던 시대에 향락과 퇴폐에 빠져 첨단유행에 웃고 울었던 젊은이들이 있었다니. 어깨를 짓누르는 시대의 무게에 아랑곳없이 개인의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 이해명 같은 인물은 요즘 젊은 세대들과 비교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화구락부 장면은 이런 영화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를테면 사라진 조난실의 행방을 묻기 위해 문화구락부에 들른 해명이 눈 주위가 시퍼렇게 멍이 든 마담(이칸희)과 나누는 대화는 이런 식이다. “병원이라도 가. 예쁜 얼굴에 흉이라도 나면 어떻게 해.” “젠장 그 자식들, 공갈을 쳐, 날 우습게 봤다 이거지? 그렇다고 내가 눈 하나 깜짝할 줄 알아? 천만의 말씀이셔.” 193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했지만 요즘 말투와 다르지 않아 동시대 정서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지우 감독은 촬영 시작 전, “1937년의 경성을 그대로 재현해야 하나?” 고민했다. 안 그래도 경성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 상황(유사한 시대배경으로 <라듸오 데이즈>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코리아> 등이 제작 중에 있다)에서 “시대 재현만으로 영화를 완성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시대극의 전형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목한 것이 캐릭터. 현재의 인물을 묘사한다는 마음으로 원작의 인물을 가져와 캐릭터를 강화했다. 이해명은 더욱 우스꽝스러운 인물이 됐고 댄스단의 리더, 레코드점의 대리가수, 양장점의 디자이너 등 정체가 불분명한 의문의 여인 조난실(김혜수)에게는 춤과 노래를 뽐낼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줘 끼와 재능을 십분 발휘토록 했다. 그 엄혹한 시절에 저렇게 정신 나간(?) 인물이 있었을까 싶을 만큼 식민지 시대 경성을 ‘훼까닥’ 바꿀 희대의 캐릭터가 탄생한 것이다.


고증과 상상력으로 축조된 경성

촬영은 밤 12시를 넘겼다. 총 촬영 74회 중 72회까지 진행됐지만 밤샘 촬영도 종종 있다. “계획과 예산에 철저히 맞추는 모범적인 제작을 지향한다”는 정지우 감독의 말처럼 조명문제로 중단됐던 복도 장면이 밤늦게 촬영을 시작했다. 이게 다 ‘때깔’ 때문이다. 흔히 식민지 시대가 배경이라고 하면 흑백 비주얼을 상상하기 마련인데 정지우 감독이 본 문서자료에 따르면 “경성은 대단히 컬러풀한 세상이었다”고 한다. 캐릭터에 방점을 찍은 영화라고 하지만 <모던보이>를 논하는 데 있어 시대를 제외하는 건 불가하다. 변화무쌍한 시대의 풍경을 살리기 위해 가장 공들인 것은 화면의 톤. 과도한 조명을 지양하는 대신 자연스러움을 살리는 데 주력했다. 복도 장면 역시 벽에 부착된 전구가 낮게 내려와 인물이 과도하게 부각되는 까닭에 전구를 더 높이 다느라 촬영이 지연된 것이다.

그에 반해 문화구락부는 사방이 백열등 천지일 정도로 복도와는 대조적이다. 홀 천장에 점점이 박힌 전구는 물론이고 조난실이 자신의 댄스단과 공연을 펼치는 무대 앞에도 계단 열에 맞춰 알알이 전구가 박혀 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색색의 스탠드 또한 사방으로 은은한 빛을 발한다. 전구 하나 달랑 박힌 복도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인 풍경이다. 조명은 화려하게 장식돼 있을지언정 그 빛이 흘러넘치지는 않는다. 드라마 설정상 이곳은 지하에 만들어진 공간이지만 1930년대 근대 건축에는 지하 공간이 없었다. 다시 말해, 문화구락부는 당시에 존재할 수 없었던 허구의 공간이다.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병은 삿포로, 아사이 등 당대에는 없었던 브랜드들이고 여급으로 등장하는 여배우의 체형도 당시로서 보기 힘든 ‘44사이즈’ 마른 체형이다. 1930년대를 기준 삼아 보자면 참으로 ‘거짓말 같은’ 광경들인 셈이다.

문화구락부가 고증과 상상력이 충돌하는 공간이듯 <모던보이>가 다루는 1937년 경성의 중요한 키워드는 ‘이중성’이다. 한복과 하이힐이, 양복과 상투가, 향락과 살육이 기승을 부리는 모순의 시대. 건축양식 또한 동서양이 혼재돼 있던 만큼 <모던보이>가 재현하는 시대는 현실 고증에만 치우치지 않고(조선총독부나 경성역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해명의 집은 1910년경에 지어진 대구 동산의료원의 2층 방갈로 ‘챔니스’ 가옥을 빌려 그대로 재현했다) 창의적인 상상력을 가미했다. 상상력이 최대로 발휘된 공간이 바로 문화구락부다. 90퍼센트 이상 허구로 지어진 까닭에 그 시대를 가늠할 만한 소품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보는 우리들이 21세기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의 공간이라 해도 거부감이 들지 않을 만큼 친근해 보인다. 이 같은 상상적 비주얼들은 “관객에게 영화적 재미를 제공하면서 시대를 자유롭게 반영하겠다”는 정지우 감독의 의지 표현이다. 아울러 이념과 가치가 뒤틀린 현재의 풍경을 1937년 경성이라는 전도된 시대로 재현하고자 하는 영화의 또 다른 목적을 숨기고 있다.


가장 대중적인 정지우 영화

박해일에게도 이해명 같은 캐릭터는 처음이다. 최근에 발굴된 당대의 영화 <미몽>(1936)을 보고 “올백 머리를 할까 하다가 당시 활동했던 시인 백석의 헤어스타일이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됐다”는 박해일. 한국영화에서 좀체 볼 수 없었던 인물인지라 캐릭터를 만들어갈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던 그에게 인물 창조에 큰 제약을 두지 않는 정지우 감독의 연출방식은 구원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정 감독은 시대극으로서는 드물게 인물의 생동감을 살리기 위해 핸드헬드를 빈번하게 사용했다. 2.35:1사이즈 화면을 사용한 것도 핸드헬드의 다이내믹한 움직임을 살리기 위해서다. “시대도 중요하지만 <모던보이>는 인물이 더 중요한 영화”라고 정의한 정지우 감독에게 2.35:1의 화면이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좌우 프레임이 길어 인물들 간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희대의 캐릭터와 독특한 시대 묘사로 호기심을 자아내는 <모던보이>의 또 다른 기대요소는 감독 정지우다. <해피엔드>(1999), <사랑니>(2005)로 창의력을 인정받은 정지우가 연출하는 거대한 시대극.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다. “대중영화에 어울리도록 캐릭터와 이야기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는 정 감독은 “대중이 이해하기 쉬울 정도로 단순화했다”고 말한다. “<사랑니>처럼 만들었다가는 영화를 다시는 못 만들 것 같다”는 농담에선 이 영화에 모든 걸 걸었다는 단호한 의지도 읽힌다.

7편의 전작(4편의 단편 포함)에 비춰 <모던보이>에는 유난히 처음 시도되는 것들이 많다. 현대극에서 시대극으로 무대를 옮겼고, 여성에서 남성으로 시선이 바뀌었으며, 감정보다 사건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오늘이 전부인 현실주의자 이해명이 내일이 중요한 이상주의자 조난실을 찾아나서는 미스터리로, 추격전이 많이 등장해 시대극치고는 이야기와 편집이 굉장히 빠르다”는 그의 말에서 정지우의 가장 대중적인 영화가 될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할 것 같다.

촬영은 다음 날 오전 9시에 재개돼 오후 1시가 돼서야 끝났다. 몇 시간 늦어졌지만 큰 차질 없이 계획했던 장면을 모두 찍은 것이다. 남은 촬영은 단 2회, 12월 초 크랭크업을 앞두고 정지우 감독과 스탭들은 더욱 분주하다. 촬영 후에는 CG를 비롯 후반작업에 쏟을 공력이 또한 만만치 않다. 제대로 고생하는 이들 옆에서 “낭만!”을 외치는 박해일의 이해명. 하지만 그의 철없음이 한없이 친근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이 정지우의 <모던보이>가 겨냥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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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64호
(2007.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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