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유형의 배우가 있다(고 치자). 스크린 속에서 너무도 강렬한 개성을 발휘해 혼자만 빛을 뿜는 배우가 있다면 스크린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크지 않은 배우가 있다. 영화는 수십 명의 혹은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 만든 집단 창작물. 혼자만 잘난 듯 스크린을 독점하는 배우는 좋은 배우가 아니다. 여기 ‘반 스푼의 설탕’이 녹아든 커피처럼 자신을 액화하고 희미해진 맛만으로 은은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가 있다. 바로, 서영희다.
#1. 감춤과 녹아듦의 미덕
“확 변하기보다는 눈에 안 띄게 조금씩 변해가는 게 좋은 거 같아요. 그래서 요즘에는 제 연기가 영화와 함께 흘러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제 욕심 차리고 싶지는 않고요. 저만 잘한다고 영화가 잘되는 건 아니잖아요“
<무도리>의 포스터에서 서영희는 정면을 차지하고 있다. 공동주연을 맡은 박인환, 최주봉, 서희승과 함께지만, 이제 그녀는 당당한 주인공이다. 물론 포스터에 얼굴을 드러낸 건 처음이 아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 부부로 함께 출연한 임창정과 함께 포스터의 왼쪽 하단을 장식했다. 첫 눈에 알아볼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무도리>의 주연을 맡은 지금도 그때의 감격을 잊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소박한 그녀다.
<무도리>가 첫 주연인 작품은 아니다. 촬영은 먼저 끝냈지만 개봉을 먼저 한 작품은 <스승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서영희는 <스승의 은혜>에 출연하면서 영화를 보좌하고 받쳐주는 배우가 아니라 영화를 끌고 가는 배우로 성장했다. <질투는 나의 힘>, <클래식>, <라이어>, <마파도>,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연리지>까지. <스승의 은혜> 이전에 그녀는 말 그대로 ‘조연급’이었다. 그런 점에서 <스승의 은혜>는 서영희에게 특별한 영화다. 그 특별함을 만끽할 법도 한데 그녀는 의외로 부담감을 가장 먼저 얘기한다. “개봉을 하고 나서 홍보할 때 부담감이 생기더라고요. 제일 먼저 관객 앞에 나서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다보니까 감당해야할 말들 그런 것들에서 부담감을 강하게 느꼈나봐요”
연기자로써 자의식보다는 영화의 흥행을 걱정해 부담감을 먼저 앞세우는 그녀. 자신보다 영화를 먼저 걱정한다. 드러내지 않음. 서영희를 읽는 첫 번째 키워드다. 사실 주연으로 등장한 <스승의 은혜>에서도 그녀는 또래 주연배우들의 수면 아래 모래알처럼 드러내지 않는 연기를 펼치다 영화 막판 강력한 회오리를 일으키며 드러내지 않는 연기의 진수를 보여줬다. 그전에도 그랬다. 정신병 내력의 집안에서 태어난 <질투는 나의 힘>에서의 혜옥, <마파도>에서의 복권을 훔치고 달아다는 다방 레지 끝순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아이를 유괴하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의 가정주부 선애 등 강한 역할을 연기했으면서도 튀지 않고 일정 선을 유지하며 자신을 죽이고 배역을 스크린에 녹였다.
그래서일까. 서영희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역할의 성격을 막론하고 부드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공포영화 <스승의 은혜>에 출연해 의외의 역할을 소화할 수 있었던 걸까. “사람이 집에서 하는 행동과 밖에서 하는 행동은 다르잖아요. 그런 느낌인 거 같아요. 영화 속의 착한 모습은 밖에서의 이미지, 악한 모습은 집에서 저 혼자만의 시간이라고 느끼면서 연기를 했어요”
하지만 부드러움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되는 것이 배우에게 독이 되는 것은 아닐까. 질문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서영희는 손사래부터 친다. 한 번에 확 변하는 역할보다는 차츰차츰 조금씩 변해가는 역할을 하고 싶단다. 매번 볼 때마다 비슷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자신의 영화경력에 있어서 첫 번째와 마지막 영화를 놓고 보았을 때 비로소 큰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그런 배우. 서영희는 그런 변화를 좋은 배우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런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는 자신의 연기 경력이 굉장히 만족스럽다. 최고의 특권을 쥐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셈이다.
#2. 드러내지 않는 워커홀릭
“아~ 죽고 싶다.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정말 스스럼없이 해요. 하지만 정말 죽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은 살아가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나온 말이거든요. <무도리>는 그런 얘기인 거 같아요”
<무도리>는 사회의 비정함을 이기지 못하고 강원도 산골 마을 무도리에서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서영희는 자살을 생각하고 무도리에 들어왔다가 특종에 사로잡혀 삶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는 초보 방송작가 미경으로 출연한다.
<무도리>는 두 번째로 타이틀 롤을 맡은 작품이어서 <스승의 은혜>에 비해 영화 흥행에 대한 부담감이 ‘약간’ 덜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생애 첫 번째로 맞이하게 된 코믹 연기이기 때문에 그 이상의 걱정이 앞선다. 자신의 코믹 연기가 관객들에게 잘 받아들여질지 그것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제가 코믹이라는 요소를 잘 몰라요. 자신이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내가 너무 오버해서 연기한 것은 아닐까, 내가 사람들한테 우스워 보이려고 노력한 것처럼 보이면 어떡할까. 원래 노력하는 건 좋지만 노력한 티가 보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출연을 결심할 수 있었던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먼저, 시나리오가 재미있어서다. “재미있는 게 좋거든요. 제가 재미있어야 보는 사람도 재미있을 거고. 제가 이해가 가야 그 사람도 이해하듯이요. 딱 봤는데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이 연기할 미경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것 같았다. 극중 미경처럼 실제로 자살을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그럴 정도로 힘든 적이 서영희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음, 의외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배우는 아니지만 <질투는 나의 힘>으로 데뷔한 뒤 그녀는 별다른 휴식 없이 꾸준하게 영화에 출연해왔다. “사실 3일 이상 저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면 내가 도태된 것 같아요. 평생 연기라는 것을 해보고 싶은데 이게 평생이 되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도 들고요”
서영희, 알고 보니 3일 이상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굉장한 일 중독자다. 아마도 그런 일중독 증세가 부침이 심한 영화계에서 <질투는 나의 힘> 이후 4년간 꾸준한 연기생활을 가능케 한 힘일 테다. “이렇게 말하면 우스울지 모르지만 전 가늘고 길게 가는 게 좋아요. 제가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건 아니지만 계속 연기를 할 수 있다면 굵고 짧게 끝나는 배우보다 더 좋은 거잖아요”
그런 점에서 <무도리>에 함께 출연하는 박인환, 최주봉 등 ‘어르신’ 배우들은 그녀에게 그 존재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수십 년 간 연기생활을 해온 배우에게나 나올 수 있는 생활적인 대사하며 살아온 모습들이 그대로 얼굴에 새겨져 있는 그들은 서영희에게는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연기교본이요 지침서이자 역할 모델이다. 오히려 눈치를 봐야하는 또래 배우들보다도 다가서기 쉬운 나이 든 배우들이 더욱 편하다는 그녀다. 거기다가 굉장히 칭찬을 많이 해주시는 탓에 힘든 역할에도 불구하고 힘도 많이 얻는단다.
그래서 그녀는 <무도리>에 합류한 것이 좋다. 함께 연기하기 좋은 배우들이 있고 자신이 재미있어 좋은 이야기가 있으며 이것들이 합해져 굉장히 흥미로운 영화로 탄생한 <무도리>가 좋다. 그런 <무도리>가 개봉한 지금, 한 계단 한 계단 차분히 목표를 향해 올라서고 있는 그리고 언젠가 가장 높은 층에 서있을 그녀의 연기를 보는 것이 좋다.
(2006. 9. 8. <스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