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스카이폴>과 <전함 테메레르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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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은 영국의 대표적인 문화상품이다. 영국 런던 태생의 소설가 이언 플레밍이 <카지노 로얄>(1953)을 발표하면서 007 시리즈는 첩보 문학의 원형이 되었다. 이후 13권의 시리즈가 더 발표되면서 제임스 본드는 영국을 대표하는 캐릭터가 되었다. 이를 반영하듯 007 시리즈가 <007 살인번호>(1962)로 처음 영화화된 이래 본드를 연기한 배우는 모두 영국 출신으로 채워졌다. 1대 제임스 본드 숀 코너리(스코틀랜드 에든버러)부터 로저 무어(잉글랜드 런던), 티모시 달튼(웨일즈 콜윈베이), 피어스 브로스넌(아일랜드 나반)까지 모두 영국인 일색인 것이다.

<카지노 로얄>(2006)부터 6대 제임스 본드로 합류한 대니얼 크레이그 역시 잉글랜드 체스터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크레이그는 이전 제임스 본드 역할을 했던 배우들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선배 본드들은 위기가 닥쳐도 미녀와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등 시종일관 웃음을 거두지 않는 한없이 낙천적인 스타일의 신사였다. 그에 반해 크레이그는 무언가 어두운 비밀을 품고 이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신사라기보다는 거친 잡초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대니얼 크레이그를 캐스팅함으로써 노회한 007 시리즈에 변화를 추구하려는 제작진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다.

23번째 본드 영화 <스카이폴>은 현대의 본드가 과거의 본드와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를 증명하는 가장 극명한 사례다. 본드는 그가 속한 MI6의 소속 요원들의 정보를 탈취한 적에 맞서던 중 총에 맞고 행방불명되기에 이른다. 그동안 런던에 위치한 MI6의 본부가 공격당하고 요원들이 하나둘 죽어나가면서 영국정부는 조직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마침 본드가 극적으로 살아 돌아오는 데 성공하지만 어깨에 입은 총상과 그 충격 때문인지 예전만큼의 실력을 보이지 못한다. MI6 요원으로서 앞으로 임무를 잘 수행할지 자신조차 의문이 생긴 본드는 내셔널갤러리에 들러 ‘윌리엄 터너’의 어떤 그림을 한없이 응시한다.

윌리엄 터너(1775~1851)는 영국 근대미술의 아버지이자 국민화가로 불릴 만큼 영국인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작가다. (제임스 본드도 그에 못지않게 영국인들이 자랑하는 첩보원이다!) 그는 살아생전 2만 점에 가까운 스케치와 200여 권의 스케치북을 남겼을 정도로 다작의 화가였다. 이미 14세부터 왕립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해 20대에 성공한 화가로 명성을 얻었고 이후 죽을 때까지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영화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시리즈로 사랑받는 007의 운명과 닮지 않았나? 그리고 <스카이폴>은 영화 007 시리즈의 50주년 기념작이기도 하다!)

터너가 평생을 전념했던 소재는 풍경이었다. 자신의 고향인 런던은 물론 영국 전역을 넘어 프랑스, 이탈리아 등 그의 그림에는 전 유럽의 풍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제로 터너는 여름동안에 여행을 하면서 얻은 소재와 아이디어를 가지고 겨울동안에 자신의 집에서 작업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또한 전 세계를 무대로 첩보 활동을 펼치는 본드의 여정과 흡사하다!) 그래서 터너의 작품은 일부 판화 작업도 존재하지만 풍경화가 절대적이다. <맘스베리 수도원의 폐허 Ruins of Malmesbury Abbey>(1792년 경), <멀리 도시가 보이는 풍경 Psysage avec fond de Ville>(19세기 경), <노예선 The Slave Ship>(1840) 등 터너를 대표하는 작품은 모두 풍경화인 것이다.

이들 풍경(화)들이 공통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다름 아닌 과거에 대한 그리움으로 대변되는 향수다. 그것은 터너가 활동하던 당시 하찮게 여겨졌던 풍경화에 역사가 주는 교훈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다. 이를 위해 터너는 그림 속 사건의 특징을 자연에 빗대 표현하길 즐겼다. 예컨대, <눈보라: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1812)는 로마군을 격파한 한니발 장군이 무시무시한 눈보라 앞에서 초라해지는 모습을 묘사했다. 터너는 이를 통해 그림 작업 당시 수많은 전쟁으로 무고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나폴레옹 장군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를 바랐다.

안 그래도 나폴레옹은 <눈보라>가 발표되고 얼마 후 워털루에서의 패배로 몰락의 길을 재촉했다. 그것이 어디 워털루에서뿐이었을까. 나폴레옹은 1805년 10월 21일 영국의 넬슨함대와 맞서다가 트라팔가르곶에서 8,000명의 부하를 잃는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 이때 넬슨함대의 선봉에 섰던 전함이 바로 테메레르 호였다. 그리고 <스카이폴>에서 예전 같지 않은 몸을 이끌고 갤러리를 찾은 제임스 본드가 보던 윌리엄 터너의 그림은 다름 아닌 <전함 테메레르 호 Fighting Temeraire>(1838)다. 과거 전 세계를 호령했던 영국의 첩보원이 영국 국민화가의 대표적인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모습에서는 어쩐지 비애감이 감지된다.  

제임스 본드는 강력했던 전함의 모습을 보며 부활의 힘을 얻으려던 것이었을까. 하지만 <전함 테메레르 호>가 묘사하는 그림 속 테메레르 호는 실은 해체를 위해 예인되는 중이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도 이미 오래 전 일. 수명을 다한 테메레르 호는 해체를 위해 템스 강에 있는 조선소로 예인되는 중이다. 그런 테메레르 호에 경의를 표하고 명을 다한 역사의 한 페이지에 아쉬움의 작별을 고하듯 윌리엄 터너는 저물고 있는 태양을 대비시켜 상실과 향수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니까 본드는 <전함 테메레르 호>를 보며 퇴출 일보직전에 몰린 자신의 상황을 대입시키고 있던 중이었다.

이처럼 <스카이폴>에서 목격되는 제임스 본드의 비애의 정서는 전작들에서 목격할 수 없었던 007 시리즈의 새로운 면모다. 이때 그림을 보고 있던 본드에게 다가온 첨단 무기 개발요원 Q(벤 위쇼)가 던지는 말. “이 그림 멜랑콜리하죠. 한때 잘 나갔던 배가 불명예스럽게 끌려가고 있잖아요. 시간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법인가보죠?” 그러자 본드는 “빌어먹을, 그냥 큰 배일뿐이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어디 상상이라도 했었나, 톰 포드의 수트처럼 쿨하게 적을 처지하며 미녀들에 둘러싸여 사랑을 나눴던 본드가 세월의 힘에 못 이겨 끙끙대는 모습을.

<전함 테메레르 호>를 보는 본드에게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바로 동정심이다. 이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전제한다. 윌리엄 터너가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그림 속에서 감지되는 인간적인 정서 때문이다. 물론 <전함 테메레르 호>와 달리 본드는 세월을 이겨내고 다시 예전의 지위를 확보하지만 <스카이폴>에서는 완전무결한 면모를 버리고 좀 더 인간적인 첩보원으로 거듭난다. 이와 같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이는 이 영화를 연출한 샘 멘데스 감독. 그 역시 잉글랜드 레딩 출신이다. 영국인들이 가장 영국적인 것을 가져와 노쇠한 007 시리즈에 새바람을 불어넣는 연출은 과연, 영국적인 방식으로 손색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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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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