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스튜디오의 작품들은 DC 코믹스 원작의 영화와 비교해 굳이 현실적이려고 하지 않는다. 예컨대, <다크 나이트>(2008)의 크리스토퍼 놀런은 기껏 허황한 코믹스에 불과했던 이 장르에 사실주의를 접목, 슈퍼히어로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DC 코믹스를 대표하는 슈퍼히어로 슈퍼맨과 배트맨이 영화상에서 지구를 위주로 활동하는 것과 다르게 마블 스튜디오의 슈퍼히어로들은 지구와 우주와 신계(神界)를 넘나들며 거대한 세계를 아우른다. 현실을 넘어서는 ‘초현실주의’로서 마블 스튜디오 영화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 이하 ‘<어벤져스 2>’)이다.
<어벤져스>(2012)에 이어 <어벤져스 2>의 연출을 맡은 조스 웨든 감독은 속편을 두고 “<대부 2>(1974)에서 영감을 얻었다”며 전편과는 다른 성격의 영화가 될 것을 자신했다. 그와 같은 자신감과 다르게 <어벤져스 2> 역시 여느 블록버스터 속편의 영화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한다. 뉴욕에서만 진행됐던 전편과 다르게 이번에는 서울을 비롯해 23개국 로케이션으로 촬영이 이뤄졌다. 또한, 등장하는 악당의 수도 <어벤져스>의 외계 종족 치타우리를 능가한다. 악당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진다.
이건 과장된 수식이 아니다. <어벤져스 2>의 슈퍼빌런은 울트론(제임스 스패이더)이다. 울트론은 실은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작품이다. <어벤져스>에서 치타우리의 지구대침공에 충격을 받은 그는 세계 평화를 위해 아이언맨 군단을 조성하려 든다. 토니 스타크는 이를 위해 자신이 개발한 인공지능 시스템 ‘자비스’를 돌린다. 그러던 중 악성 코드가 침입하고 오류가 발생하면서 울트론이 탄생한다.
울트론은 세계평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토니 스타크와 목적하는 바가 같다. 방법이 문제다. 토니 스타크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세계평화를 원한다. 그에 반해 울트론은 지구 상의 모든 인간을 제거하면 자연스럽게 세계평화가 따라올 것으로 판단한다. 인간의 안위를 두고 방법상 서로에게 모순을 취하다 보니 토니 스타크와 울트론은 세계평화를 공유함에도 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울트론은 스스로 결점을 보완해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물론 무한 복제 능력을 갖춰 자신과 모습이 같은 울트론 군단을 조직한다. 제거하면 할수록 그 수를 늘려가는 울트론 군단의 진가는 어벤져스 멤버와 맞붙는 소코비아 전투에서 드러난다.
소코비아는 가상도시로 극 중에서는 동유럽에 위치한다. 어벤져스의 오랜 숙적 중 하나인 하이드라의 본부이자 스칼렛 위치(엘리자베스 올슨)와 퀵실버(애런 테일러-존슨)의 고향이다. 울트론은 소코비아를 전진기지 삼아 인류 멸망을 위한 계획을 준비한다. 이를 알아챈 어벤져스 멤버와 최후의 전투를 벌이고 울트론은 자신을 무한 복제해 이에 맞선다. 복제 울트론들이 땅에서 솟아나고 특히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경은 <어벤져스 2>의 메인 포스터에도 장식되어 있다. 이는 르네 마그리트의 <겨울비 Golconda>(1953)를 참조한 듯한 인상이다.
벨기에 출신의 르네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유명하다. 르네 마그리트는 우리에게 친숙한 공간이나 일상적인 사물을 왜곡해 상식과 논리를 파괴하는 작품으로 눈길을 끌었다. 도심 위로 검은 중절모와 코트를 입은 신사’들’이 비처럼 떨어지는 <겨울비>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중 가장 인기 있는 축에 속한다. 르네 마그리트는 그림 속 신사들처럼 입고 다니기를 즐겼다. 그뿐 아니라 <겨울비> 외에 <교장 Le maitre d’ecole>(1955) <데칼코마니 Decalcomanie>(1966) 등에도 자주 등장시켰다.
말하자면 이 그림들 속 신사는 르네 마그리트의 분신이다. 르네 마그리트가 자신을 모델로 많은 그림에서 신사의 이미지를 ‘복제’한 것처럼 <어벤져스 2>의 울트론도 같은 방식으로 울트론 군단을 만들었다. <겨울비>라는 낭만적인 뉘앙스의 제목과 다르게 이 그림은 어딘가 섬뜩한 구석이 있다. 검은 옷을 입어서인가, 아니면 두 차례 세계대전의 격전지가 됐던 유럽 출신의 화가라는 이력 때문인가, 전쟁 중 도심에 투하되는 폭격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세계평화를 위해 탄생한 울트론도 차가운 금속 재질의 외양 탓인지 영 감정이입하기가 망설여진다.
<어벤져스 2>와 <겨울비>의 특정 이미지가 나타내는 주제는 산업화, 첨단화에 따른 현대 사회의 폐해일 것이다. 컴퓨터와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전 세계가 네트워크화되면서 현대 사회가 개인에게 빼앗아간 개성, 그로 인해 무너지고 와해한 일상의 삶들이 <어벤져스 2>는 슈퍼히어로물이라는 허구로, <겨울비>는 초현실주의로 은유 된다.
이의 핵심은 ‘낯섦’이다. 우리가 늘 속해 있고 경험하는 세계도 달리 보여주면 세상을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이 이뤄진다. 초현실주의라는 것은 상식이나 합리를 넘어서는 세계, 즉 잠재의식이나 꿈 등을 탐구할 때 사용되는 용어다. 한국인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서울이 <어벤져스 2>에 등장했음에도 낯설어 보이는 건 마포대교, 상암동, 강남 등지에서 어벤져스 멤버와 울트론이 벌이는 대결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설정인 까닭이다.
영화는 그렇게 상상에서나 이뤄질 것 같은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구현해 마법처럼 관객을 홀린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들이 개봉과 함께 압도적으로 많은 관객을 끌어모으는 건 그와 같은 초현실주의적인 설정과 이미지에 있다. <어벤져스 2>에서의 초현실적인 정체성은 소코비아의 도시 전체가 공중으로 부양되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울트론은 공중에 뜬 도시를 떨어뜨려 혜성의 지구 충돌과 같은 방식으로 인간 멸종을 시도하려 든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중에도 이와 흡사한 설정의 그림이 있다. <피레네 산맥의 성채 Le chateau des Pyrenees>(1961)다. <어벤져스 2>에서 소코비아에 위치한 하이드라의 본부를 연상시키는 성이 바위 정상에 솟아 있고 이 바위는 UFO처럼 해변 위에 둥둥 떠 있다. 이 그림의 제목은 르네 마그리트가 프랑스의 관용어 중 ‘실현되지 못할 백일몽’을 의미하는 ‘허공 위의 성곽’에서 가져와 비튼 것이라고 한다.
어벤져스 멤버들이 소코비아 국민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도시를 공중에서 폭파하면서 인류 멸망을 통해 세계평화를 이루려는 울트론의 야심은 ‘공중누각’으로 귀결된다. 당연한 결과다. 이건 정의의 문제와 상관없이 이 장르의 불변하는 법칙과 같은 거다. 아무리 사상 최강의 적이 등장한들 우리의 슈퍼히어로들을 이길 수 없다. 우리가 발붙인 세상이 전쟁과 폭력과 같은 불의와 비상식으로 가득하다 보니 영화에서나마 정의를 추구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이 상상 속의 슈퍼히어로를 창조하고 슈퍼히어로물에 열광하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겉으로는 견고해 보일지 몰라도 <피레네 산맥의 성채>처럼 언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지 모를 정도로 불안정한 게 사실이다. 세계평화를 바라마지 않는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조차 초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은 더욱더 슈퍼히어로물에 대한 대중의 욕망을 부추긴다. 그런 욕망을 대변한 듯 <어벤져스 2>에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을 연상시키는 장면과 설정이 등장한 건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마블 스튜디오는 웬만해서는 감독의 재량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해 7월 개봉이 예정된 <앤트맨>의 원래 감독이었던 에드가 라이트(<뜨거운 녀석들>(2008)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 등)가 마블 스튜디오와의 창작의 이견(creative differences)을 이유로 도중 하차한 일화는 유명하다.
확실히 DC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와 비교해 마블 스튜디오의 작품들은 감독의 색깔이 떨어지는 편이다. DC코믹스의 대표적인 슈퍼히어로인 ‘배트맨’만 해도 팀 버튼, 크리스토퍼 놀런 등 할리우드에서 개성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감독들이 연출을 맡아 작품성을 한껏 높여 놨다. 개별 프로젝트로 기능하는 DC코믹스 원작 영화들이 감독의 비전을 우선한다면 마블 스튜디오의 작품은 제작사의 입김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한다. 워낙 시리즈가 방대해서 감독의 개성에 방점을 맞추었다가는 시리즈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개중 조스 웨든 감독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이야기의 효과적인 전개와 무수한 캐릭터의 경제적인 운용을 우선하는 마블 스튜디오의 전략에서 그나마 개성 있는 연출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개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곧 정체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조스 웨든은 <어벤져스 2>를 통해 초현실적인 마블 슈퍼히어로물의 정체성을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연상하는 이미지로 확실히 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여느 블록버스터 영화와 다르게 속편을 거듭해도 TV 드라마처럼 새로운 이야기로 관객을 유혹한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운용하는 방식까지 획기적인 시도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벤져스 2>만 해도 <어벤져스>와는 등장하는 악당의 성격도, 어벤져스 멤버들 간의 갈등 양상도 변화한 듯 보이지만, 전편보다 더 강력해진 악당, 더 허황해진 전투라는 스케일의 강박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대신 조스 웨든은 전편보다 늘어난 악당의 수를 <겨울비>로, 더욱 거대해진 규모의 전투 장면은 <피레네 산맥의 성채>의 이미지로 적용해 흥미로운 미학을 선보인다.
마블 스튜디오 영화의 트레이드마크처럼 굳어진 쿠키 영상은 다음 작품을 예고하는 실용적인 기능 외에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초현실주의와 맞닿아 있음을 드러내는 정체성의 역할도 수행한다. 아시다시피 마블 스튜디오 영화의 쿠키 영상은 대개 속편의 더 강한 적을 예고한다. <어벤져스 2>의 경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최고의 악당으로 평가받는 타노스(조쉬 브롤린)를 등장시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둔 상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비롯해 모든 슈퍼히어로물은 물리친 악당보다 더 강력한 악을 부르는 형태로 속편을 운용한다. 그래서 이 세계는 끝이 없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슈퍼히어로와 슈퍼빌런의 싸움이 끝없이 돌고 돈다. 르네 마그리트와 함께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M.C. 에셔의 <상대성>처럼 아무리 계단을 오르고 올라도 제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이 <다크 나이트> 삼부작으로 슈퍼히어로물을 현실에 발붙여 놓았지만, 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스템은 초현실이다. 그래서 무한의 공간으로 확장한다. DC 코믹스 원작의 영화가 이벤트성으로 개봉하는 것과 다르게 마블 스튜디오의 슈퍼히어로물은 <어벤져스 2>에 이은 <앤트맨>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2기를 마무리한 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년 6월 개봉 예정)부터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파트 2>(2019년 5월)까지, 무려 9편의 3기 영화들 라인업을 발표한 상태다.
조스 웨든은 이에 착안해 <어벤져스 2>에서 초현실주의의 정체성을 확실히 박아 놓았다. 이는 또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참여한 감독들을 기능인으로서 고용된 형태로 부려 먹는(?) 마블 스튜디오를 향한 조스 웨든의 무언의 저항으로 비춘다. 감독의 연출적 개성이 돌출되길 꺼리는 마블 스튜디오의 전략은 슬슬 관객의 피로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전까지 무수한 캐릭터와 방대한 이야기를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각인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겨울비> 속 검은 양복의 신사들처럼 반복되는 연출 패턴은 새로움을 바라는 관객의 변화 요구를 불러일으킨다.
<어벤져스 2>에서 조스 웨든이 보여준 연출은 그런 징후일지 모른다. 앞으로도 마블 스튜디오는 감독의 개성을 누르는 방식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유지하려는 전략을 취할 터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창작자의 입김이 더 크게 작용하는 영화를 보는 재미를 기대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앞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스튜디오의 대중성과 감독의 개성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상대성>처럼 유지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를 통해 좀 더 낯설어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로 지금과는 또 다른 차원의 재미를 느꼈으면 한다.
ARENA HOMME
2015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