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코와 아키라

다카미네 히데코(1924~2010)와 구로자와 아키라(1910~1998) 감독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어요. 한국 팬들에게는 좀 생소한 이야기일 텐데요. 둘은 한 때 굉장히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다들 아시는 이야기였나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야 워낙 유명하니까 따로 설명 드리지는 않겠고요. 다카미네 히데코는 <부운>(1955)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1960) 등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페르소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와 모두 15편을 작업했는데요. 그 어떤 역경과 갈등에도 굴하지 않고 삶을 살아가는 나루세 미키오 영화 속 여인들 특유의 강한 생명력은 다카미네 히데코를 통해 극대화되었죠.

나루세 미키오가 그런 연기를 잘 끌어낸 면도 있지만, 다카미네 히데코의 연기 역시 동시대 배우들에 비해서도 탁월했다고 합니다. 워낙 미모가 뛰어난 배우이면서 굉장히 노력하는 배우로도 유명했다내요. 그럴 만한 배경이 있었답니다. 히데코는 태어날 때부터 가정 형편이 극도로 안 좋았습니다. 다섯 살 때이던 1929년부터 연기 생활을 시작했는데요. 히데코 집안에서 돈을 버는 사람은 히데코가 유일했답니다. 말하자면 소녀 가장이었던 거죠. 그녀의 가족은 히데코가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을 했던 겁니다. 후에 히데코가 돈을 좀 벌어 도쿄로 집을 옮긴 후에도 채무를 진 오빠 때문에 그 빚을 갚느라 또 고생을 했다죠.

그 때문에라도 다카미네 히데코는 굉장히 열심히 연기를 했답니다. 연기를 하지 않으면 가족들의 생계가 당장에 끊기는 지경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부모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다보니까 다카미네 히데코가 호감을 갖는 이성은 소위 말하는 아버지 상에 가까운 남자였다고 해요. 그중 한 명이 바로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었습니다. 다카미네 히데코는 1979년, 그러니까 55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배우 생활을 은퇴했습니다. 이후로는 주로 에세이를 쓰며 작가로 명성을 날렸는데요. 그 에세이 중 한 편에서 구로자와 아키라와의 인연을 밝혔습니다.

다카미네 히데코와 구로자와 아키라가 서로를 알아본 건 야마모토 가지로 감독의 <말>(1941)에서였습니다. 국내 팬들에게 야마모토 가지로는 감독의 명성보다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적 스승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는데요. 구로자와 아키라뿐이 아닙니다. <거미집의 성>(1957) <요짐보>(1961) <쓰바키 산주로>(1962) 등에서 구로자와 아키라와 함께 했던 배우 미후네 도시로를 처음 발탁한 것도 바로 야마모토 가지로였습니다. 야마모토 가지로 밑에서 조감독 및 작가 생활을 하던 구로자와 아키라는 그렇게 미후네 도시로와 인연을 맺게 된 거죠.

아무튼, <말>에서 히데코와 아키라는 각각 주인공과 조감독으로 참여를 했는데요. 히데코는 전혀 말을 탈 줄 모르는 상황이었다내요.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을 넣어야 했기에 야마모토 가지로 감독은 히데코가 말에 올라타는 장면만 찍고 스턴트맨에게 말을 타고 달리는 연기를 맡기려고 했는데요. 스탭 중 한명이 히데코가 말 등에 오르려는 순간, 말의 엉덩이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예고치 않은 상황이 발생합니다. 히데코를 태운 말이 무작정 달리기 시작한 거죠. 히데코는 거의 떨어질 지경으로 말에 매달린 상태가 되었겠죠. 그걸 받아준 사람이 바로 구로사와 아키라였습니다.

다카미네 히데코는 그 당시 아키라의 품에 안기던 순간을 두고 그에게 사랑을 느꼈다고 적었다네요. 그건 아키라도 마찬가지였나 봐요. 말 사건이 있던 다음 날부터 히데코는 말과 친해지려고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는데요. 아침 촬영이 시작되기 전 새벽부터 마구간으로 가 함께 촬영할 말과 많은 시간을 보낸 거죠. 그럴 때마다 구로자와 아키라 그 이른 아침시간부터 마구간으로 와 히데코를 반갑게 맞이해줬다네요. 그뿐이 아닙니다. 촬영현장을 이동할 때면 버스를 이용했는데 스탭들이 많아서 모든 이들이 앉아갈 수가 없었는데요. 덩치가 큰 아키라가 버스 통로에 양반다리로 앉아있으면 히데코는 그 품에 앉아서 갔다는 겁니다.

그렇게 <말>에서 인연을 맺었던 둘은 차곡차곡 애틋한 감정을 쌓아갔는데요. 당시 17세였던 히데코는 3편의 영화에 동시에 출연할 정도로 바쁜 몸이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들었으니까요. 그래서 히데코와 아키라는 <말>의 촬영을 마친 후에는 그렇게 자주 볼 수가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죠. 대신 아키라가 히데코에게 매일 같이 편지를 써서 보냈답니다. 그 내용이 참 싱거웠대요. 지붕에 올라가 오줌을 눴다, 그래서 지붕 아래 사는 사람들이 경악을 했다, 뭐 그런 식의 내용이었다네요. 아키라는 편지만으로는 마음을 전할 수가 없었던지 급기야 히데코의 집 근처에 하숙집을 얻었답니다.

기쁜 마음에 히데코는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키라를 찾아갑니다. 근데, 아뿔싸! 히데코의 어머니가 미행을 했대요. 아키라의 하숙집에서 히데코와 그가 만나는 순간, 어머니가 훼방을 놓았던 거죠.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어머니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좀 있었답니다. 하숙집에서 큰 소동이 벌어졌다내요. 그 일을 계기로 히데코와 아키라는 서로 만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답니다. 아무래도 히데코는 당시 가장 잘 나가는 여배우였고 아키라 또한 전도가 유망한 감독이다 보니 소속 영화사에서는 스캔들이 날 것을 우려, 앞으로는 만나지 않겠다는 각서를 둘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 (아마 아키라의 영화에 히데코가 출연한 적은 없었죠?)

그러다가 오랜만에 만난 게 야마모토 가지로(1902~1974) 감독의 장례식에서였대요. 굉장히 조촐하게 이뤄진 자리였다는대요. 상주 역할을 한 건 미후네 도시로였습니다. 구로자와 아키라는 당시 촬영으로 바쁘던 시기라 장례식 마지막 날 늦은 시간에서야 식장에 도착을 하게 되죠. 촬영을 마치고 급하게 방문하는 바람에 작업복 차림으로 예도 갖추지 못했답니다. 다카미네 히데코는 그렇게 헐레벌떡 가지로 감독의 장례식장에 들어서는 아키라를 보면서 교차하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안타까우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죠. 저는 히데코와 아키라의 사랑 이야기를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습니다.

한편으로 히데코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 보여준 성숙한 여인상은 그런 아픈 사랑이 있었기에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는데요. 그밖에도 그녀가 쓴 에세이에는 히데코가 활약했던 당시 영화계에 대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일화들이 굉장히 많이 있다고 해요. 게다가 히데코가 글도 재미있게 잘 써서 읽는 재미 또한 뛰어나다고 하는대요. 혹시 관심이 있는 출판사가 있다면 다카미네 히데코의 에세이를 번역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 지금 한국에서 그녀가 쓴 에세이가 얼마나 팔릴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면, 아쉽네요.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보게 된다면 그녀가 연기가 좀 더 다른 차원에서 보일 것 같습니다.

ps. 다카미네 히데코의 사진은 javaopera님의 블로그(http://javaopera.tistory.com/687)에서 가져왔습니다.

4 thoughts on “히데코와 아키라”

    1. 미연씨도 몰랐던 얘기죠. 저도 저거 듣고 잊어버릴까봐 바로 쓰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다고요 ㅋㅋ 일본에서는 히데코가 이 내용을 가지고 에세이를 썼다고 해요. 그 얘기를 들은 거예요. ^^

  1. 다카미네 히데코…와카오 아야코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일본 여배우에요. 필력도 있는 분인지 몰랐어요. 저도 그녀의 글이 정말 궁금해지네요

    1. 다카미네 히데코가 글도 굉장히 재미있게 쓴데요. 그래서 일본에는 그녀가 쓴 에세이가 몇 권 있다고 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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