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으로부터 얻은 완전한 비극 – 임하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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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룡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영화배우가 돼 있었다. ‘도시의 천사들’ ‘변방의 북소리’ ‘내일은 챔피언’ ‘추억의 책가방’ 등, 우리의 기억을 사로잡은 걸출한 코미디를 양산한 그가 배우전업을 선언한 이유는 뭘까? <묻지마 패밀리>로 영화에 입문한 지 6년, 애절하게 ‘영화’를 앙망하는 배우 임하룡의 다른 얼굴을 본다.


임하룡은 영화배우다. 과거엔 인기절정의 코미디언이었지만 지금은 누가 뭐래도 배우요, 영화인이다. 1990년대 후반, 배우로 전향한 그는 코미디언의 영화 진출이 활발히 이뤄지는 최근 상황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구봉서, 서영춘, 김희갑, 곽규석 등과 같은 원로 코미디언들이 정극과 희극을 오가며 전방위적 연기활동을 벌인 건 이미 40여 년 전 일이다. 하지만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구분하지 않고 ‘희극인’으로 통칭하던 당시 분위기와 분야별로 전문화된 요즘 풍토를 비교할 수는 없다. 특히 임하룡처럼 코미디언 생활을 청산한 뒤 영화에만 전념하는 경우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특이한 경우다. 배우 임하룡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소시민의 페이소스

<브라보 마이 라이프>(2007)는 조직의 톱니바퀴 생활에 인생을 저당 잡힌 중년 회사원들이 한동안 잊었던 음악밴드의 꿈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임하룡은 소싯적 잘나가던 베이시스트의 꿈을 꺾고 경비원으로 업종 전환한(?) 최석원 역할을 맡았다. 원래 임하룡이 원했던 배역은 박준규가 연기한 박승재 과장. 코미디를 할 때와 달리 영화에선 늘 착하고 모범적인 역할만 맡아왔다고 생각한 그는 이참에 “껄렁하고 젊은 여사원에게 치근덕대기도 하는, 성격 있는 연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박영훈 감독은 최석원 역에 임하룡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고 단언한다. “동네 아저씨 같은 수수한 느낌이 서민적인 최석원에 딱 어울렸다. 임하룡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묻지마 패밀리>(2002) 중 하나인 ‘내 나이키’로 본격 배우전업을 시작한 그가 지금껏 맡은 역할은 소시민의 범주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2003)의 고모부, <아는 여자>(2004)의 반장, <맨발의 기봉이>(2006)의 백이장도 모두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이웃이었다. <웰컴 투 동막골>(2005)에선 인민군 하사관 장영희로 등장하지만 북한사람도 인간임을 보여주려는 영화의도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인물이었다. 역시 평범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임하룡에게 서민 혹은 소시민의 모습이 강하게 묻어나는 것은 코미디언으로서 악의 없는 연기를 펼친 전력이 크다. 임하룡 역시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코미디언으로 영화계에 들어왔던 까닭에 기가 센 역할보다는 착하고 무난한 역할 요구가 많았다. 내 자신도 아직까지는 그런 연기가 편하다.”


임하룡은 무리하게 코미디와 다른 지점에 놓인 연기를 하려 들지 않는다. “코미디언과 영화배우는 편의상 표현일 뿐이지 연기한다는 자체는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그는 코미디를 밑바닥 정서에 깔고 그 이상의 연기를 시도하는 데 주력해왔다. 예컨대, 소시민을 연기하면서 그는 매번 그 이면에 자리 잡은 감정을 표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악감정이 없는 임하룡의 소시민 연기는 관객의 눈높이에서 연민의 정을 자아내는 힘이 있다. 지친 현실을 꿈 하나로 이겨내는 대개의 서민들처럼 절대로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없고 늘 이상을 동경하는 역할로 등장했다. 아들에게 나이키 운동화를 사주기 위해 개인택시 운전사를 꿈꾸는 <묻지마 패밀리> ‘내 나이키’의 아버지 역할은 그의 연기를 설명할 수 있는 상징적인 작품인 동시에 영화배우로서 자신의 세계를 설명할 만한 출발점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이장호 감독의 <미스 코뿔소 미스터 코란도>(1989), 신승수 감독의 <엑스트라>(1998, 특별출연)와 <얼굴>(1999)에 출연한 경력이 있지만 임하룡은 본격적인 연기활동의 시작을 <묻지마 패밀리>부터라고 말한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최석원 역시 <묻지마 패밀리>의 아버지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허구한 날 젊은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는 경비원에 불과하지만 초라한 생활을 이겨낼 수 있는 건 불과 몇 분이라도 동료들과 연주호흡을 맞출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묻지마 패밀리> 이후 6년이 지났지만 임하룡은 여전히 눈물을 머금는 가운데서도 이를 밟고 일어서 꿈을 먹고 사는 소시민이다.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드러내는

임하룡이 연기한 소시민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웬만해서는 전면에 부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영화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본 경우가 없다. 한국영화계가 워낙 젊은 배우들을 편애하는 탓도 있지만 동년배 배우들과 호흡을 맞춘 <브라보 마이 라이프> 같은 작품에서마저도 주인공과 동등한 위치를 점하지 못한 채 옆이나 뒤로 밀려나 있다. 이를 극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다는 의미로 곡해한다면 본인에게는 꽤나 섭섭한 일일 터.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등장하는 ‘갑근세 밴드’에서 최석원이 맡은 파트는 베이스다. 베이스는 밴드음악의 뼈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임하룡의 역할을 설명할 최적의 도구다. 메인 기타나 드럼처럼 전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노래의 분위기를 잡아주고 은근히 배경이 돼주는, 반드시 필요한 악기가 베이스다. 바꿔 말해, 그는 출연하는 영화마다 극중 인물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 캐릭터를 극대화하는 뼈대 역할을 주로 맡았다.


이는 영화 속에서 주변인물에게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도움을 제공하는 조력자의 모습으로 구체화됐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서 임하룡이 연기한 고모부는,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조카의 여자친구가 임신했다는 말 한 마디에 어떻게든 그 둘을 부부로 맺어주려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석원이 베이스를 수십 년 만에 연주하는 이유는 꿈을 성취하기 전 퇴직을 앞둔 조민혁 과장(백윤식)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함이다. 심지어 그는 손아랫사람에게 충고를 할 때도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예컨대, <맨발의 기봉이>의 백이장은 나쁜 짓을 일삼는 아들에게 “기봉이 반만 닮아봐라. 넌 입으로 효도를 하냐, 기봉이는 가슴으로 해”라며 철저히 자신을 죽이고 제삼자를 끌어들여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임하룡이 영화 전체와 주인공의 배경이 돼주는 조력자의 역할에 자신을 맞추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를 코미디 연기와 영화 연기의 차이점으로 설명한다. “코미디는 관객을 웃겨야 하는 매체 성격상 개인의 연기력이 부각되는 까닭에 애드리브에 많은 신경을 쏟는다. 반면 영화는 상대방과의 호흡이 중요한 만큼 리액션 연기가 가장 필요하다.” 하여 영화 연기를 할 때 그가 가장 신경을 쏟는 부분은 디테일이다. 코미디가 개인플레이라면 영화는 팀플레이라는 얘기.


안 그래도 영화와 달리 코미디언 시절의 임하룡은 많은 작품에서 코너 전체를 선도하는 인물로 등장했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그는 <쇼 비디오자키>(1986)의 ‘도시의 천사들’이나 <유머 1번지>(1987)의 ‘변방의 북소리’ 등 여러 코너에서 보스나 장군 등과 같은 리더형 인물을 연기했다. 그 시절 임하룡은 이미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여러 코너에서 심형래와 호흡을 맞추며 그의 천부적인 바보 연기를 이끌어내는 등 조력자 연기에 일가견을 보였다.


개인플레이가 가능했기에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던, 그래서 큰 인기를 얻었던 코미디를 경유한 임하룡은 영화에서는 철저히 팀플레이에 주력한 탓에 코미디언 시절과 달리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코미디언으로서의 전성기 시절 그가 누린 명성에 비하자면 영화에서는 함께 출연한 ??비해 큰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극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다. 주목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임하룡의 연기는 어떤 장면에서도 크게 두드러지는 게 없지만 그가 존재함으로써 주변인물의 디테일이 살고 이야기의 풍부함이 더해진다. 만약 우리가 배우로서 ‘임하룡적인 것’에 대해 정의를 내려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드러내는 연기’일 것이다.


우리 시대 아버지의 초상

극중 캐릭터를 철저히 녹이는 임하룡의 연기스타일상 <묻지마 패밀리>의 아버지에서부터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경비 최석원까지, 역할상 눈에 띄는 변화를 감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수수하고 털털한 일상인의 모습으로 일관해온 그의 연기는 역할별로 변화의 진폭이 그리 크지 않다. 영화마다 휙휙 얼굴을 바꾸는 여느 배우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넓지 않은 범위 안에서 세분화되고 다양한 감정이 포착될 만큼의 미세한 변화가 느껴진다. “순탄한 삶보다 굴곡 있는 삶에 관심이 많다. 아무래도 그늘진 감정을 품고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재미있다”는 그의 말이 단서가 될 만하다. 임하룡이 연기한 일상인들 사이에서 미세한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은 바로 상실의 감정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임하룡이 맡은 역할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인물들이다. 상실감은 두 가지 측면으로 드러나는데 하나는 꿈을 잃은 인물이요, 또 하나는 가족을 잃은 인물이다.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후자다. 특히 그가 아버지로 등장하는 영화는 어김없이 불구(不具)의 가족이 축을 이룬다는 점에서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가령, <묻지마 패밀리>의 ‘내 나이키’에서 그는 아들이 원하는 나이키 운동화를 쉽게 사줄 수 없을 만큼 형편이 넉넉지 못한 집안의 가장이었고, <맨발의 기봉이>에서는 부인과 사별 뒤 제 아들 제대로 간수 못 해 이웃의 기봉이에게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아버지였으며, <원탁의 천사>의 강영규는 순간 실수로 부인과 자식을 남겨둔 채 교도소에서 허송세월하는 불량아빠였다.


가장 먼저 임하룡의 얼굴에서 초라한 아버지를 봤던 건, 다름 아닌 박광현 감독(<묻지마 패밀리> <웰컴 투 동막골>)이었다. 장진 감독을 통해 임하룡을 소개받은 박광현 감독은 “그의 눈에서 애잔함을 봤다”며 주저하지 않고 ‘내 나이키’ 아버지 역에 임하룡을 캐스팅했다. 198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가 발표될 당시는 IMF 이후 한국의 경제사정이 바닥을 기고 있던 상황. 위상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가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꿈이라는 불확실함을 좇는 일뿐이었다. 애처로우면서 연약하기 그지없던 아버지를 표현하기에 임하룡의 애잔한 눈빛은 딱이었다. 밥벌이의 지엄함이 묻어나는 주름과 굴곡 어린 얼굴도 우리 시대 아버지의 초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적역이었다. 2007년, 유독 아버지의 추락을 담은 영화들(<좋지아니한가> <우아한 세계>)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그가 연기한 아버지만큼 현실적인 인물은 흔치 않았다.


다른 배우가 그 아버지 역할들을 대신했다면 카메라는 아마도 반쪽 면에 그림자가 져 있는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했을 것이다. 하지만 임하룡이 아버지로 등장하는 영화의 카메라는 이상하리만치 그의 등을 비춘다. 뒷모습을 통해 한스러운 감정을 표현한 장면이 많았던 셈이다.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맨발의 기봉이>의 불 꺼진 대폿집 장면이나 사람으로 환생해 아들을 교화하고 싶어 천사와 거래하는 <원탁의 천사>의 은밀한 옥상 장면이 그것. 코미디언 시절 임하룡이 얼굴을 드러낸 연기를 했다면 영화배우가 된 임하룡은 이제 뒤태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를 펼친다.


웃음으로 눈물을 빚다

코미디에 안녕을 고했다지만 임하룡의 연기를 논함에 있어 코미디가 빠질 수 없다. 사실 스크린에서 그는 전공을 살려 연기한 기억이 한 번도 없다. <웰컴 투 동막골>의 장영희는 남과 북의 이념 사이에서 죽음으로 산화할 수밖에 없었던 인민군 하사관이었고, <맨발의 기봉이>의 백이장은 마라톤 대회 1등을 위해 기봉이를 혹독하게 몰아붙이는 호랑이 코치였으며, <원탁의 천사>의 강영규는 아들의 탈선에 눈물짓는 변변찮은 아버지였다. 주요 작들만 일별해도 전직 코미디언이었다는 사실이 무색하다.


인간의 수천 가지 감정을 구성하는 바탕이 웃음과 눈물이듯 희극과 비극은 서로를 비추는 상(象)이다. 임하룡의 연기생활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코미디언으로서 그가 보여준 희극들과 영화배우로서 선보이고 있는 비극들은 비대칭의 거울이다. 실컷 웃어봤기에 진한 눈물이 가능한 임하룡의 연기는 우리가 한 번쯤 경험했던 감정의 정수를 건드린다. 사진 김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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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52호
(2007.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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