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의 트렌드가 변했다

thewhiling

문제로 시작해보자. <아가씨> <곡성> <주토피아> <데드풀> <레버넌트>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올해 한국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차지했던 영화들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니다. 좀 더 생각해보시기를. 어려운가? 답은, 전에 본 적 없던 새로운 소재와 이야기, 그리고 이미지와 연출로 관객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은 작품들이다. 요컨대, 이들 영화는 한국 극장가의 흥행의 트렌드를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천만 영화를 견인했던 한국의 주류 제작사들에는 일종의 흥행 공식이란 게 있다. 소재의 다양성과는 상관없이 중반부까지는 웃음을 주고 뒤로 갈수록 눈물 콧물을 쥐어짜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맺음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톱스타가 등장해 웃겨주는데, 울려주는데 반응하지 않을 관객이 있어! 이런 식으로 크게 성공한 영화도 있었지만, 대개는 대형 제작사와 연계된 멀티플렉스의 지원을 받은 개봉 첫 주에 반짝했다가 사그라지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그런데도 고집스러울 만큼 새로운 시도에 인색한 이유는 ‘통계의 함정’ 때문이다. 이는 대형 제작사들이 천만 영화에 몰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년에 두 편 정도의 천만 영화를 기록하면 그동안 100만~200만 명 관객 동원 수준의 영화를 10편 이상 실패해도 숫자로 봤을 때 수익이 난다는 논리다. 그 결과,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한 방’을 바라는 사행성을 최우선(?)으로 삼게 되었다. 기존의 성공했던 요소를 분석하고 재활용하는 방식이 지배논리로 자리 잡은 배경이다.

천편일률적인 흥행 논리가 슬슬 힘이 빠지고 있다는 증거는 서두에서 언급한 영화들이다. 이들 영화는 기존의 흥행 공식과는 안녕을 고한 진화한 형식으로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모았다. <아가씨>는 동성애 소재와 파격적인 정사 장면으로 청소년관람불가라는 한계에도 불구, 승승장구 중이다. 특정 계층을 공략해서는 흥행이 힘들다는 편견과 달리 개봉 10일 만에 3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또한, 가족애, 남자들만의 의리, 남녀의 사랑 등 보수적인 가치를 옹호하는 영화가 판을 치는 상황에서 소수자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는 점도 <아가씨>의 흥행이 놀라운 이유 중 하나다.

<곡성>은 또 어떤가. 추상적인 형태로만 쉬쉬 되던 악(惡)에 구체성을 부여하는 <곡성>은 2시간 30분이 훌쩍 넘는 상영 시간 동안 어두운 분위기로 일관한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죽은 동물의 사체에서 내장을 빼먹는 악마를 그대로 노출한다. 악마에게 영혼을 뺏긴 딸이 아빠에게 쌍욕을 쏟아붓고 가족을 살해하려는 만행도 서슴지 않는다. 밝은 분위기가 아니면 관객이 외면할 거라는 편견과는 달리 <곡성>은 되레 영화적 힘으로 작용한 경우다. 안 그래도 대형 사건과 엽기적인 사고가 빈번한 한국사회에서 <곡성>은 가식적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는 대신 누구라도 악의 제물이 될 수 있다는 비극적인 결말로 수많은 관객의 설왕설래를 끌어내기도 했다.

각각 <아가씨>와 <곡성>을 연출한 박찬욱, 나홍진은 한국영화계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 감독들이다. 박찬욱 감독은 한국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작업할 정도로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고 있다. 나홍진 감독은 <추격자>(2008) <황해>(2010) 단 두 편으로 자기 세계를 탄탄히 구축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대다수 감독이 투자사와 제작사의 입김에서 벗어나지 못한 환경에서도 박찬욱, 나홍진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창작자다. 박찬욱의 <아가씨>는 전 세계 판권이 무려 175개국에 판매됐고 나홍진은 할리우드의 20세기 폭스사의 제작 지원으로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신의 의도를 100% 가깝게 반영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창작자에게 창작의 자유는 영화와 같은 예술 분야에서 필수적인 조건이다. 영화를 상품으로 인식하는 일부 제작사들에는 오히려 상업성을 갉아먹는 방해요소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감독이 창작의 자유를 무기로 개성 있는 작품을 만들었지만, 대기업 자본이 충무로의 주류가 된 2000년대 중반 이후로 감독들은 급속도로 자기 목소리를 잃어갔다. 천만 영화의 등장으로 산업의 파이는 커졌을지 몰라도 그로 인해 대다수의 감독은 투자사와 제작사가 원하는 방향에 맞춰 영화를 ‘공정 工程’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뒷받침해준 것이 박스오피스로 대변되는 순위와 관객 수이었다.

2016년의 박스오피스만 놓고 보면 그와 같은 논리는 즉각적인 폐기 처분의 대상이다. <곡성>과 <아가씨>가 드물게 창작의 자유를 누린 감독의 예외적인 흥행 사례가 아니라는 의미다. 올해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차지한 한국영화는 <검사외전> <귀향> <시간이탈자> <곡성> <아가씨> 모두 다섯 편이다. 이중 <검사외전>과 <시간이탈자>를 제외하면 기존의 흥행 공식을 따르지 않고도 박스오피스에서 큰 성공을 기록했다. (<귀향>은 역사 제대로 알기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는 시기와 맞아 떨어지면서 흥행에 성공했다.)

할리우드 영화로까지 범위를 넓히면 사례는 더욱 많다. <레버넌트>는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서부극이면서도 아들을 살해한 원수를 찾아 나선 아버지가 말의 배를 칼로 베어 내장을 꺼내 먹는 등의 전례 없던 극사실적인 묘사로 감탄을 자아냈다. <데드풀>은 슈퍼히어로라면 대개 개인적인 신념을 희생하고 정의라는 이념과 대의를 위해 복무한다는 그간의 인식을 완전히 뒤집었다. 자신에게 슈퍼파워를 선사했지만, 젊음을 앗아간 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슈퍼히어로가 된 남자. 정의 따위 안중에도 없는 이 안티 히어로는 집단보다 개인의 가치가 우선하는 작금의 시대정신과 조응하며 예상 밖의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데드풀>보다 더 극적인 1위는 <주토피아>였다. <주토피아>는 개봉 초기에는 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4주차에 이르러 비로소 1위를 차지했다. 이 영화의 흥행 추이에는 참 이례적인 데가 있다. 개봉 첫 주에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오르지 못하면 사라지는 영화가 부지기수인 환경에서 한 달을 버티며 입소문으로 끝내 1위를 차지했다. 동물을 의인화한 캐릭터로 다양한 종()의 조화를 이야기하는 <주토피아>는 그 내용처럼 영화에서 다양성이 왜 중요한지를 우회적으로 설득한다.

지금은 그야말로 다양성의 시대다.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다양한 성별과 인종이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고 그에 따라 관심사가 다변화되면서 세상은 빨주노초파남보 여러 가지 양상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무지갯빛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천만 관객이 볼 수 있는 영화를 공장식으로 생산하고 산업 환경을 그에 맞추는 건 폭력이다. 창작자의 개성을 거세해 영화를 몰개성한 산업으로 몰아가고 관객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은 채 비슷한 감성의 영화들로 멀티플렉스를 채우는 건 새마을 운동 시절에나 어울리는 풍경이다.

2016년 상반기가 지난 현재 한국 극장가는 <검사외전> 단 한 편만이 천만에 가까운 관객(970만 명)을 돌파했다. 같은 기간 동안 <국제시장>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두 편의 천만 영화를 기록했던 지난해와 비교해 떨어지는 수치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가 천만 영화로 기대를 모았지만, 8백만 관객을 넘기는 데 그쳤다. 비슷한 소재와 이야기 전개에 관객들이 피로감을 느꼈다는 반증이다. 하반기에는 천만 영화를 기대해볼 수 있을까. <암살>과 <베테랑>이 쌍 천만 관객을 기록했던 2015년에 비해 라인업의 무게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천만 영화가 총 4편이었던 2015년을 비교 대상 삼아 2016년의 극장가를 위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관객 숫자로 봤을 때는 그럴지 모르지만, 오히려 극장가가 건강해지고 있다는 방증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닐 테다. 올해는 박스오피스 1위 영화들의 성분도 그렇고 다양성 영화 중에서 유독 화제를 모으는 작품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음악으로 사랑을 나누고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싱 스트리트>가 그렇고, 대만판 ‘응답하라 1988’이라 할 만한 <나의 소녀시대>가 그러하며, 우아한 방식으로 여성과 여성의 사랑을 묘사한 <캐롤>이 그러했다. 한국영화계의 취약점으로 평가받는 음악영화, 청춘물, 동성 간의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의 다양성 영화 중에서도 돋보이는 작품이 있었다. 이준익 감독의 <동주>는 주류 영화에서라면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흑백 이미지 속에 윤동주의 삶과 시를 살려냈다. 정지우 감독의 <4등>은 1등에만 목을 매는 무한경쟁의 한국 사회에서 올바른 교육에 대해 따져 묻고 건강한 경쟁인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선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얻었다. 상업성만을 추구해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들이 시장에 나와 선을 보였고 이에 많은 관객이 호응했다는 건 감독의 개성을 억압하며 천만 영화에 올인하는 제작 환경에서 분명 의미 있는 성과다.

한때 디즈니는 전통적인 가치를 고수하는 이야기로 브랜드 가치를 잃어갔다. 그러다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겨울왕국>(2013), 동물 캐릭터로 계급과 차별의 문제를 다룬 <주토피아>, 컴퓨터 그래픽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CG 동물들로 익숙한 이야기의 한계를 극복한 <정글북> 등으로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최강자로 우뚝 섰다. 그 중심에 서는 건 창의적인 발상이다. 창작의 자유가 돋보이는 영화들이 한국 극장가 박스오피스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천만 영화의 물신 숭배에 빠져 감독의 창작의 자유를 훼손하고 기존의 흥행 공식을 따라 하는 건 실패로 가는 지름길이다. 한국 관객의 다양한 영화를 향한 욕구가 흥행의 트렌드에 변화를 이끌고 있다.

 

ARENA HOMME
2016년 7월호

4 thoughts on “흥행의 트렌드가 변했다”

  1.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곡성과 아가씨의 성취가 정말 자랑스럽네요 사실 소위 한국 텐트폴 영화들 대부분 극장에서 안보거나 아예 안보는경우가 많아서 곡성과 아가씨의 성과에 더 관심이 가는것같아요^

    1. 안녕하세요 이승영님 ^^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과 도 그렇고 계속해서 흥미로운 한국영화들이 나와줬으면 하네요. 요즘에는 좋더라고요. ^^

  2. 맞아요ㅎㅎ 근래에는 다양한영화들이 많이나와서 무엇을 보러가야하나 고민할정도에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반가운일이에요! 아참 지난번에 추천해주신 영화’분노의주먹’ 보았어요! 영화를보구 나니 20자평이 이해가 가고 ㅎㅎ 특유의 흑백이 잘 어울리는 영화인것같아요~! 또 Intermezzo 곡 많이 연주해봤었는데 그 곡이 분노의주먹 ost로 나오니 무지 반갑기도했구요ㅎㅎ 좋은영화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 와~ [분노의 주먹] 보셨군요! 영화 좋게 보셨다니 다행이네요 ^^ 예, 흑백이 정말 잘 어울리는 영화죠.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기나이트]의 마지막 장면도 [분노의 주먹]을 그대로 따온 거라 [분노의 주먹] – [부기 나이트] – [본 투 비 블루] 계보를 그리며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조만간 다시 봐야겠어요. 말씀주신 Intermezzo, 저는 음악에 문외한이라 잘 모르는데 이번에 보게 되면 기억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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