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의 지위 향상, 은밀하게 위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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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국에서는 <노예 12년 12 Years a Slave>이라는 영화가 화제다. <헝거>(2008) <셰임>(2011)을 연출한 스티븐 맥퀸 감독의 작품으로, 남북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뉴욕으로 팔려가던 흑인 노예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자유를 얻기까지의 길고 긴 투쟁기를 다뤘다. 아직 한국에서는 수입조차 되지 않은 상태라 영화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미국 유수의 시상식에서 주목하고 있고 특히 미국의 영화산업지 ‘버라이어티’가 내년 아카데미 작품상 부문의 가장 강력한 수상작으로 지목할 만큼 완성도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여기에 <노예 12년>에 대해 길게 언급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 영화가 미국에서 크게 이목을 받고 있는 데에는 수준급의 만듦새와 더불어 미국 역사와 관련한 특별한 배경이 있어 보인다. 지난해 11월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면서 미국 내에서는 흑인에 대한 재평가, 즉 흑인의 역사를 돌아보려는 시도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할리우드에서는 오바마의 재선을 전후해 남북전쟁 당시 노예 해방을 시작으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기까지, 흑인의 지위를 재조명하려는 시도가 줄을 잇고 있다.

결국 이들 영화를 살피는 건 흑인과 관련한 현재의 미국 내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시도와 다르지 않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여기서 주목하려는 작품은 <헬프>(2011) <링컨>(2012)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 이하 ‘<장고>’)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2013, 이하 ‘<버틀러>’), 그리고 앞서 언급한 <노예 12년>인데, 개봉 순서를 살짝 바꿔 <링컨> <헬프> <장고> <버틀러> <노예 12년> 순으로 영화를 보게 되면 흑인과 백인 간 미국 내 역학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변화 과정을 목격할 수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은 꽤 전략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 영화의 미국 내 개봉은 2012년 11월 9일이었다. 바로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11월 6일, 바로 그 주(週)에 공개된 것이다. 민주당 오바마의 승리로 끝났지만 공화당 맥케인의 추격도 만만치 않아 선거 결과는 오리무중이었지만 스필버그 이하 제작진은 어느 정도 오바마의 승리를 예상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남북전쟁을 통해 흑인 노예를 해방하고 미국을 통일한 링컨의 업적을 재조명함으로써 흑인 대통령의 뿌리가 백인에서 시작됐음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오해는 마시기를. 그런 점 때문에 백인인 스필버그가 백인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식으로 <링컨>을 만들어 백인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오히려 오바마에게 ‘링컨의 재림’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해 지금은 흑백의 차원을 넘어 소수의 가진 자와 다수의 못 가진 자로 분열된 미국이 다시 한 번 평등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해달라는 바람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메시지의 기저에는 인종에 상관없이 가치를 공유하는 이들이라면 서로 힘을 모아 더 나은 미국을 만들자는 연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흑인의 인권과 지위가 백인과 동등해졌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링컨의 노예해방 이후 지난(至難)한 과정을 거쳐 서서히 변화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만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흑인들의 희생이 절대적이었지만 그 변화의 물결에 백인들이 ‘연대’의 노를 함께 저어온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나 미국과 같은 다인종 사회에서 흑인과 같은 유색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확보하겠다며 그들끼리만 연대해서는 그 결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처럼 <링컨>이 보여주는 바는 남북전쟁 이후 백인과 흑인이 손을 잡고 이뤄낸 미국의 국가적 정통성이라 할 것이다. 결국 흑인 노예 해방으로 가시화된 흑인의 지위와 인권의 향상은 애초 백인이 함께 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가치다. 언급한 작품 중 <노예 12년>의 스티븐 맥퀸을 제외한 감독이 모두 백인이라는 점은 이와 같은 사실을 방증한다. 더불어 이들 영화들이 하나 같이 백인의 도움을 얻어 흑인들이 원하는 바에 한 발짝 나아가는 이야기상의 전개를 보인다는 것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흥미롭게도 <링컨> 이후 흑인의 해방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들은 스필버그의 영화와는 다르게 흑인이 전면에 나서고 백인은 조금은 뒤로 빠져 지지하는 모양새를 띈다. 예컨대, <핼프>는 흑인 하녀들이 백인 가정에서 겪었던 부조리한 경험을 백인에게 털어놓아 변화를 호소하는 과정을, <장고>는 노예 시장으로 팔려가던 흑인 장고가 백인의 도움을 얻어 탈출한 후 자신을 탄압하던 이들을 찾아가 응징하는 복수담을, <버틀러>는 34년간 백악관에 근무하며 8명의 백인 대통령을 수행했던 흑인 집사가 이들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는 사연을 이야기의 주요 골격으로 삼는다.  

이의 핵심은 그동안 맘에 담아두고 밖으로 끄집어낼 수 없었던 흑인들이 자신들의 사연을 밝히고 우리는 이를 경청한다는 데 있다. 남북전쟁으로 인해 흑인 노예가 해방이 됐다지만 1900년대 중반까지 흑인들은 백인들의 하인이자 하녀로 2등 시민 취급을 받았고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백인들에게 짓밟히고 무시당하며 억압받아온 그 오랜 세월 동안 흑인들의 마음속에서 응어리진 사연이 얼마나 많을까. 집안에 물건이 없어졌다며 의심을 받고는 그날로 바로 해고된 사연(<헬프>), 흑인 결투를 즐기는 백인을 위해 동료 흑인을 죽여야만 하는 기구한 운명(<장고>), 흑인 해방을 위해 저항하던 아들이 체포됐지만 직업상 찾아갈 수 없는 비애(<버틀러>)까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첫 번째 단계는 상대와 눈높이를 맞추고 얘기를 들어주는 것에 있다. 최근 1~2년 사이에 개봉한 일련의 흑인 관련 영화들이 극 중 흑인 주인공의 내레이션을 중요하게 삽입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몇 편 되지는 않지만) 영화가 더해질수록 흑인들이 말하는 사연의 강도(?)는 점점 세지는 추세다. <헬프>에서는 억울한 사연을 폭로하는 정도였다면 <버틀러>에서는 좀 더 과감하게, 그동안 백인 대통령의 뒤에는 흑인이 돕는 역할을 했다면 버락 오바마의 등장과 함께 이제는 전면에 나섰음을 선언한다.  

이렇게 몇 편의 영화를 살펴본 바, 여기에는 흑인과 백인 간의 인종적 역학관계에 대한 중요한 흐름이 감지된다. <링컨>은 속된 말로 흑인 대통령의 기원은 결국 ‘백인’ 링컨의 노예 해방에 있다고 말한다. 이어 <헬프>와 <장고>는 극 중 흑인들이 백인의 도움을 받으며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투쟁한다. <버틀러>에 이르면 백인 대통령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음지에서 보좌한 건 흑인이라며 마지막 순간, 양지로 내세운다. 백인의 보호 아래에 있다가(<링컨>) 점점 이에서 벗어날 채비를 갖추고(<헬프>와 <장고>) 결국 독립에 이루는 것(<버틀러>), 그 과정은 곧 지금 흑인의 미국 내 위상의 변화를 그 흐름대로 반영한 것일 테다.  

그것은 흑인의 지위가 과거에 비해 상승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마 ‘그렇다’고 대답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족할까. 아니다. <링컨> <헬프> <장고> <버틀러>는 흑인들의 사연을 듣고 백인이 쓴 흑인의 역사라는 형태를 띈다. 이제 필요한 건 흑인이 직접 경험하고 목격한 그들 자신의 역사다. 그리고 그런 작품이 지금 미국에서 개봉을 하고 호평을 받으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서두에서 언급한 <노예 12년>이다.

이 영화를 연출한 스티븐 맥퀸은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흑인이다. 데뷔작 <헝거>를 통해 흑인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IRA(아일랜드 공화군) 소속 보비 샌즈의 실제 옥중 투쟁을 다루며 탈골된 인간 평등의 가치를 위해 노력한 이에게 헌사를 보냈다. <노예 12년>도 그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비록 남북전쟁 당시를 배경으로 하지만 이 영화가 현실에도 유효한 건 극 중 흑인의 고난과 극적으로 획득한 자유의 과정이 그동안 미국 내 흑인이 펼쳤던 투쟁의 역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백인이 아니라 흑인 감독의 시선에서 담아냈다는 것 역시 앞선 흑인 관련 영화와 다르게 미국 관객들에게 좀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갔을 공산이 크다.

얼마 전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 도중 재미한국인이 불법 이민자 추방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여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그와 같은 돌발행동을 저지하거나 문제의 청중에게 어떠한 불이익도 가하지 않은 오바마의 대처가 미덕처럼 보도되고 있다. 그것이 진심이었는지, 단순한 제스처였는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그 자신이 소수자였고 그로 인한 아픔을 경험했기에 오바마가 보여준 태도는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그 당연함을 손에 쥐기 위해 흑인들이 겪었을 그 말 못할 고생의 일부를 우리는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 당연함의 가치가 날로 떨어지고 있는 우리네 현실과는 너무 대비되어서는 아닐까. 흑인 관련 영화들이 수호하려는 가치는 비단 흑인에게만 한정하지 않는다. 그들 영화의 파장이 미국에만 머물지 않고 바다 건너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arena homme
201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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