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리오와 에밀리아>(Bons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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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출신의 크리스티안 히메네즈가 연출한 <훌리오와 에밀리아>의 원제는 ‘분재 Bonsai’다. 작은 분(盆)에 나무를 심어 가꾸는 그 분재가, 맞다. 그럼 이 영화는 분재를 소재로 다루나? 그건 아니고, 30대 초반의 훌리오(디에고 노구에라)가 대학시절의 첫사랑 에밀리아(나탈리아 갈가니)를 기억하는 방식을 분재에 은유하여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8년 전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훌리오가 기억하는 이들의 관계를 살펴본다.

8년 전의 훌리오는 서툴었지만 열정적이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었느냐는 교수의 질문에 주변 눈치를 보며 손을 들고는 수업이 끝난 후 도서관으로 달려가 책을 읽는 식이다. 에밀리아와의 관계도 그랬다. 파티에 참석했다 얼떨결에 키스를 나눈 후 뜨거운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반면 지금의 훌리오는 일도, 사랑도 능수능란하지만 어딘지 감정이 허해 보인다. 유명 작가가 쓴 글을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을 하지만 영 흥이 나지 않고 맘에 둔 이웃집 여인과 곧장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지만 뜨거운 감정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관계의 기술은 터득했지만 첫 만남의 설렘을 잊은 지 오래인 지금의 훌리오에게 첫사랑의 기억은 ‘잃어버린 시간’에 속한다. 기억이란 게 그렇다. 자기중심적이며 주관적이다 보니 불완전해서 온전한 복원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피로감에 젖은 감정을 회복하겠다며 떠올리는 기억 속의 에밀리아와의 관계는 서두가 없다. 바로 본론이다. 사귀기 전의 ‘밀당’의 관계는 생략된 채 잠자리를 갖고 좋아하는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등 굉장히 이상적인 형태로 보이는 것이다.

다만 지금의 훌리오가 갖는 고민은 이거다. 유명작가를 돕는 처지지만 장차 작가를 꿈꾸는 그에게 불완전한 기억을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는 건 솔직하지 못한 행위가 아니냐는 거다. 그때 깨달음을 주는 것이 분재다. 대학시절 에밀리아와 함께 화분을 가꾸기도 하며 분재에 관심을 가졌던 훌리오는 관련 책자에서 기억과 연계시킬 중요한 문구를 보는 것이다. 화분 밖의 나무는 이미 분재가 아니라는 것. 즉, 생각하지 못하는 ‘기억’, 아니 ‘지난 일’은 기억이 아니라는 거다.

대신 공백으로 남은 기억은 상상력을 동원해 채워 넣을 수밖에 없는데 그러다보니 훌리오에게 첫사랑은 은유와 상징이 가득한 문학에 가까워진다. 이건 개인적인 추론이 아니다. 실제로 훌리오는 극 초반 내레이션을 통해 자신과 에밀리아의 존재는 사실이지만 사귀었던 과정은 팩션의 영역에 속한다고 밝히길 주저하지 않는다. 하여 <훌리오와 에밀리아>에서 문학은 단순한 미장센의 영역을 넘어 관객이 훌리오와 에밀리아의 관계에 대해서 추론할 수 있는 중요한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한다. 

앞서 언급했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훌리오가 잊고 지내던 첫사랑에 대한 상태를 은유한 것처럼 제임스 엘로이의 <아메리칸 타블로이드>는 훌리오와 에밀리아가 대학생이던 1980년대의 칠레가 피노체트 독재 시절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레이먼드 카버의 대표적인 단편집 <대성당>은 훌리오가 닮고자 하는 이상적인 작가의 상(像)을 상징하는 것이다. 게다가 크리스티안 히메네즈 감독은 문학작품을 인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영화 자체를 문학으로 보이게끔 형식을 가져간다.

소설의 목차처럼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과거와 현재가 각각 1장, 2장 하는 식으로 총 8장 구성을 취할 뿐 아니라 결국 영화 자체가 극 중 30대의 훌리오가 쓴 자전적 소설의 초안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굳이 초안이란 설정도 예비 작가로서의 훌리오의 미숙함을 드러내는 것 외에 기억의 불완전함, 더불어 지금의 그가 가진 감정의 불안함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무엇보다 그렇게 완성한 소설의 제목은 다름 아닌 ‘분재’다. 줄기와 가지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길을 잘 잡아줘야 좋은 분재가 되듯 크리스티안 히메네즈 감독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첫사랑의 이야기 속에 기억과 문학과 관련한 다양한 층위를 쌓아 수작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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