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궁>과 <돈의 맛>에 비친 우리 시대의 욕망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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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제왕의 첩>(이하 ‘<후궁>’)의 흥행 속도가 놀랍다. 개봉 첫 주 1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기세를 올렸다. 개봉 전부터 빠르게 퍼진 조여정의 노출연기가 ‘야하다’는 입소문이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그래서, <후궁>은 야한 영화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힘들다.

김대승 감독은 <후궁>에 대해, “우리가 사는 세계를 궁이라고 할 때 우리 속마음의 무궁무진한 탐욕들의 참형을 한번 보여주자는 생각으로 찍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영화 속 섹스 장면은 욕망의 한 형태일 뿐이지 다양한 욕망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후궁>은 사극이라는 형식을 빌어 현대를 사는 우리의 욕망을, 특히 권력에 대한 욕망을 우회해서 비춘다.

이는 한 달 정도 먼저 개봉한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과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다. 두 작품 모두 ‘욕망의 거울’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이를 드러내는 장르의 선택이나 시대적 배경 등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감독 각자가 데뷔작에서부터 일관되게 고수해온 특유의 기술법이 존재한다. 

직설 vs 우회

제목부터 직설적인 <돈의 맛>은 욕망의 정체를 드러내는 데 에두르지 않는다. 임상수 감독의 개성은 이 지점에서 폭발력을 갖는다. 그는 늘 수면 아래에서 부글거리는 당대의 욕망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처녀들의 성적 욕망(<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가부장 권위의 해체(<바람난 가족>(2003)), 독재 권력의 대물림에 대한 비아냥거림(<그때 그 사람들>(2004)) 등이 모두 임상수의 작품을 통해 양각됐다.

<돈의 맛>도 마찬가지다. 이름을 밝히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다 알만한 어느 재벌가의 저택을 배경삼아 돈의 노예로 전락한 우리 시대의 초상을 계급별로 전시한다. 직설적인 임상수 감독의 성격답게 영화는 첫 장면부터 노골적이다. 돈다발이 산처럼 쌓여있는 금고를 처음으로 경험한 영작(김강우)이 입을 쩍 벌리며 놀라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이때 옆에 있던 윤회장(백윤식)이 영작에게 건네는 말. “너도 몇 다발 챙겨둬. 여기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래. 돈의 맛 좀 보라고.” 몇 분 되지 않는 장면이지만 액수를 가늠하기 힘든 돈의 스펙터클 앞에 놀라기는 매한가지인 관객들을 향해 감독은 이렇게 묻는 듯하다. 돈 앞에 흔들리지 않을 자 누구인가.

<후궁>은 신상옥 감독의 <내시>(1968) 리메이크로 시작된 작품이다. (“이 영화의 제작자인 황기성사단의 황기성 대표님이 어느 날 갑자기 사무실로 불러 신상옥 감독의 <내시>를 보여줬다. 이 이야기를 지금 하면 어떻겠냐고 물으시더라.” 본지 532호 김대승 감독 인터뷰 중에서) 처음에는 거절했던 김대승 감독이 결국 이를 수락한 이유는 권력을 향한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는 감독의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궁>은 시대적으로 조선인 것 같지만 정확한 고증을 따르는 대신 조선과 고려의 풍속을 혼합함으로써 특정 시대에 대한 혐의를 지웠다. 오히려 신하 중 한 명이 왕을 향해 낙동강이 범람하여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요지의 말을 함으로써 동시대성을 획득한다. 우회적으로 지금의 4대강 건설을 비판, 이 영화가 지금 이 시대의 어떤 욕망과 관계되어 있음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후궁>의 혈연

김대승 감독에게 사극은 익숙한 장르다. 임권택 감독 산하에서 <서편제>(1993) <춘향뎐>(1999) 등을 경험했고 조선시대 말엽을 배경으로 한 범죄미스터리 <혈의 누>(2005)를 연출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혈의 누>는 동시대의 구체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욕망의 충돌이 빚은 지옥도라는 점에서 <후궁>의 세계관과 맞닿아있다. 다만 <후궁>이 <혈의 누>에 비해 흥미롭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현실의 욕망이 사극의 옷을 입고 은유되는 방식이다.

무관인 아버지의 권력욕에 후궁이 된 화연(조여정)의 궁 안 생활은 매일이 전쟁이다. 모시던 왕이 독살당하고 마침 아들을 생산하면서 더욱 신변에 위협을 느낀다. 성원대군(김동욱)의 어미인 대비(박지영)가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화연 모자(母子)의 목숨 줄을 끊으려하는 것. 이에 화연은 자신을 사모하는 성원대군을 이용해 위기를 돌파하려 한다. 하지만 화연의 옛 사랑 권유(김민준)가 내시로 입궐하면서 상황은 점입가경이 된다. 화연과 사랑했다는 이유로 화연 부(父)로부터 성기를 잘린 그가 복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후궁>은 화연과 대비의 대결이 중심에 놓인다. 하지만 이 둘의 욕망은 아들의 왕위 계승이라는 점에서 지향하는 바가 같다. 결국 같은 인물인 셈인데, 자식의 출세와 안위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화연과 대비의 욕망은 정확히 지금 이 시대의 어미의 욕망을 대변한다. 어미의 자식사랑이 언제, 어디서건 그렇지 않겠냐마는 자식을 꼭두각시처럼 대하는 대비의 모습은 어딘지 낯설지가 않다. 더 정확히는 대비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성원대군의 일련의 행동에서 부모의 도움이나 명령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지금 젊은 세대의 무기력함이 읽히는 것이다.   

실제로 <후궁>은 성원대군을 앞에 앉혀놓고 바로 뒤에서 국정을 논하는 대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그뿐인가, 성원대군이 중전과 합방을 하는 장면에서 대비는 링 위의 권투 경기를 관람하듯 아들의 잠자리를 지근거리에서 자세히도 살핀다. 이때, 부모의 도움이나 감시 없이는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성원대군의 표정에서 읽히는 감정은 단 하나다. 바로 공포. 그에 반해 왕의 씨를 받아 아들을 생산해야 앞날을 보장받을 수 있는 중전은 그런 대비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성원대군을 향해 “저는 됐사오니 넣어보시지요”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혈연이 권력이 되는 궁 안의 계급 시스템은 대비가 실권을 잡은 후 친인척들에게 주요 보직을 하나둘 내어주는 광경으로 확장된다. 매 정권 친인척 등용과 측근 비리를 목격하는 한국에서 <후궁>의 특정 장면은 무척이나 익숙하다. 대비가 성원대군에게, 화연이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선사하려는 것도 결국 혈연이 권력이 되는 우리 사회의 욕망의 실체를 정확히 반영한다. 하여 성기가 권력이 되는 사회에서 자신의 성기를 제멋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공포다. <후궁>은 이를 성원대군과 ‘내시’ 권유를 통해 거세공포로 치환한다. <내시>의 리메이크를 탐탁치 않아하던 김대승 감독이 이를 발전시켜 지금의 형태로 완성한 건 결국 <후궁>이 현실의 이야기인 까닭이다.

<돈의 맛>의 돈

<후궁>이 혈연을 통한 권력 획득의 살풍경에 관심을 둔다면 <돈의 맛>은 사람위에 군림하는 돈의 위력을 전시하며 ‘맛’이라는 제목으로 조롱한다. 하여 <후궁>을 지배하는 정서가 무기력에 따른 공포라면 <돈의 맛>은 돈 앞에 무릎 끓고 머리 조아려야 하는 모욕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돈의 맛>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모욕’이다. 돈 때문에 사랑 없는 결혼을 30년 넘게 지속해온 윤회장이 그동안의 삶을 후회하며 내뱉는 대사는 바로 다음과 같다. “돈 원 없이 팡팡 썼지. 근데 그게 그렇게 모욕적이더라고.”

<돈의 맛>이 주영작의 영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가장 많은 모욕감을 감내하는 위치에 선 인물이기 때문이다. 금고에 들어오면 누구나 돈다발을 챙긴다는 윤회장의 충고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가 하면, 남편의 바람을 목격하고 성이 난 백금옥 여사(윤여정)가 “나이 많은 여자도 하고 싶을 때가 있다”며 섹스를 강제할 때면 영작의 치욕감은 말이 아니다. 이 참에 백여사의 신임을 얻어 돈의 맛을 보려던 영작은 그녀의 아들 철(온주완)에게 들통이 나면서 모욕감이 절정으로 치닫는 것이다.

<돈의 맛>이 <하녀>의 스핀아웃인 <하남 下男>으로 읽히는 것은 전작이 하녀 은이(전도연)의 시선에서 바라본 재벌가의 실상이었다면, 이번 영화는 철저히 영작의 시선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결국 임상수 감독은 <하녀>와 <돈의 맛>을 통해 돈 앞에 모두 하녀이고 하남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을 가감 없이 인증한다. 다시 말해, 영작의 시선은 곧 관객인 우리가 바라보는 재벌의 세상이다. 이 때문에 영작이 돈다발을 가져와 액자 뒤에 숨겨놓는 행위는 <돈의 맛>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액자의 유리면에 비춘 영작의 얼굴 위로 오버랩 되는 돈을 향한 욕망은 우리 또한 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영작은 백여사와 윤철에게 대들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는 <하녀>의 은이가 자신을 철저히 농락한 훈(이정재)과 해라(서우)에게 “복수할 거야. 난 찍소리라도 내야겠다고” 말한 맥락과는 완전히 상반된 태도다. 은이는 자살하기 전 자신의 죽음이 훈과 해라의 어린 딸 나미에게 충격을 준다면 그것으로도 성공이라는 요지의 말을 동료 하녀에게 전한다. 하지만 <돈의 맛>을 보면 은이의 복수는 성공한 것 같지 않다. 이번 영화에는 성장한 나미(김효진)가 등장하는데 <하녀>에서의 그 일을 아무렇지 않게 언급하기 때문이다. 그 뒤에 입사(?)한 영작이 설마 그 사건을 알 리 없겠지만 임상수 감독은 극 중 재벌가에 대립하지 않고 멀리 피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은이의 경우처럼) 순수 따위 통하지 않는 돈의 위력을 입증한다.

욕망의 귀결점

<후궁>의 ‘혈연’과 <돈의 맛>의 ‘돈’은 지금 한국사회를 가장 뜨겁게 달구는 욕망의 정체다. 혈연이 권력 획득의 지름길이 되고, 권력의 최종 목표가 돈으로 귀결되는 한국사회에서 혈연과 돈은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욕망의 비등점이다. 하여 집단의 욕망을 파악한다는 것은 곧 시대의 공기를 포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후궁>과 <돈의 맛>에서 2012년의 한국의 현실을 목격할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후궁>은 왜 과거로 가야했고, <돈의 맛>은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해야만 했던 걸까. 그것은 <후궁>의 혈연이 한국사회에서 보편적인 욕망의 형태이고, <돈의 맛>의 돈은 특정시기에 도드라진 특정한 형태의 욕망인 탓이 크다.

김대승 감독이 사랑(<번지점프를 하다>), 탐욕(<혈의 누>)과 같은 큰 덩어리의 욕망을 말해왔다면 임상수 감독은 좀 더 디테일한 욕망에 집중해왔다. 다시 말해, <후궁>은 인물의 구성이나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나 늘 메시지가 유효하다. (<후궁>이 애초 <내시>의 리메이크로 출발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돈의 맛>은 재벌이라는 특정 집단의 존재감과 권력을 부여한 시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물이라 할 만하다. (임상수 감독이 <하녀> 이후 곧바로 <돈의 맛>에 착수한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반증한다.) 다만 집단적으로 환호하는 욕망, 즉 탐욕은 결국 비극을 부르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두 영화 모두 단순히 재미로 보고 넘기기에 의미하는 바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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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week
NO.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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