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영화란 무엇인가?


1. 고전이란 무엇인가?

1895년 12월, 뤼미에르 형제가 프랑스의 한 카페에서 <기차의 도착>이라는 5분짜리 릴을 ‘돈을 받고’ 상영한 이후, 영화는 영화사(史)라는 시간의 축적물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며 100년이 지난 지금 현존하는 최고의 오락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지나간 작품들을 고전(classic)이라 칭함으로써 현재의 영화와 구분을 짓는다.

그래서 일까, 대다수 사람들은 고전영화라고 하면 지레 고리타분한 것 아니면 재미없는 영화로 단정 지어버린다. 국내의 실정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편견이라는 사실은 금새 밝혀진다.

작품은 실망스럽지만 팀 버튼의 <혹성탈출 1968>과 같이 고전작품을 리메이크한 영화에 다수의 관객이 몰려드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게다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서스피션 1941>,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 1950>, 조지 팔의 <타임 머신 1960>, 안드레아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 1972>, 리나 베르트뮬러의 <귀부인과 승무원 1975> 등의 영화들이 리메이크를 준비 중에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이들 고전이 지금의 영화를 뛰어넘는 재미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시 말해 고전영화를 본다는 것은 우리의 학창시절 혹은 연애시절의 풋풋한 순간을 떠올리듯, 기억의 좋았던 한 부분을 현재에 다시 재생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기억’의 범위 즉, 고전은 언제의 영화를 총칭하는 것인가. 국내 모 영화사이트에 게재되어있는 LA Movie Maker의 ‘클래식 지명하기 How to Nominate a Classic’라는 제하의 번역기사를 보면 미국의 ‘국립 영화 보존 위원회 National Film Preservation Board’는 1989년부터 매년 고전 영화 25편을 선정, 보존 및 복구 작업을 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것의 선정기준으로 두 가지 조항을 명시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선정되는 영화는 발표 된지 10년 이상이 지난 작품이어야 한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한가지,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 혹시 <Madman of Mandoras>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제목이라도 들어본 적은. <Madman of Mandoras>는 1963년에 발표된 SF영화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자국민 중에서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의 조악한 영화로 IMDB 최악의 영화 100 리스트에 4위를 마크하고 있다. 그럼 <Madman of Mandoras>와 같이 자국에서도 존재가치가 미진하고 전 세계적으로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영화를 그저 과거에 만들어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전이라 할 수 있을까.

결국, 10년 이상 전에 발표된 영화일 경우 고전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한 조항은 필름 상태에 따른 편의상 문제이지 정확한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 다음 항은 이러한 모순에 대한 혐의를 잠재우고 고전영화에 대한 더욱 정확한 의미의 유추를 가능케 한다.

“문화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또는 예술적으로 의미가 있어야 한다”

1994년에 발표된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 1994>은 이제 10년 된 작품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시간의 재배열이라는 파격적인 형식으로 그 해의 칸느 영화제 금장상을 수상하였고,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많은 영화들의 모범사례가 되어 이제껏 복제, 변형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는 “문화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또는 예술적으로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조항을 100% 만족시키고 있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반영’이란 측면에서 영화가 후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경우, 이는 숙성(?)시기에 상관없이 고전으로 성립되는 것이다.


2. 고전의 기능

사람들은 거울을 이용,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봄으로써 그것에 반사된 모습을 통해 자신의 외모를 가꾸고 흐트러진 품세를 추스른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현재영화와 고전영화에 대한 관계가 바로 사람과 거울의 관계와 같다.

고전은 거울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아니 역할을 한다. 그래서 현재 영화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단언컨대 현존하는 모든 감독들은 자신의 영화가 나아갈 방향을 고전영화를 봄으로써 창조한다. 그뿐인가, 자신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의 해결을 위한 제1과정으로 고전영화를 참조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러한 ‘수용’과 ‘반성’의 과정을 거친 최근 영화를 무수히 많이 기억하고 있다.

리들리 스콧의 <글래디에이터 2000>에 등장하는 시대와 선과 악의 대립 그리고 로마 콜로세움의 마지막 결투 등 이 모든 영웅탄생을 위한 배경은 40년 전, 윌리엄 와일러의 <벤허 1959>에서 그 탁월함과 감동이 재현된 적이 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1-보이지 않는 위험 1999>의 포드 레이싱 역시 <벤허>의 전차 경주에서 따 왔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신적 재난에 가까웠던 영화 <진주만 2001>은 <도라! 도라! 도라! 1970>의 무뇌아적 버전이 아니었던가. <반지의 제왕:반지원정대 2002>은 또 어떤가, 감독 피터 잭슨은 자신의 영화가 1933년 발표된 <킹콩>과 <제이슨 앤 아거노츠 1963>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한편 장 뤽 고다르는 지난해 칸느를 찾은 자리에서 ‘과거는 지나간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영화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영화계는 위와 같은 ‘수용’의 측면에서나 ‘반성’적인 측면에서 고전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 못 하였다. 점유율이 10%를 겨우 넘기는 상황에서 뒤를 돌아볼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영화점유율이 50%에 육박하는 지금은 그나마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아마도 여유가 생긴 후, 고다르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얼마 전 보도된 기사에 따르면, 춘사 나운규의 1926년 작 <아리랑>이 모 기획사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 올 7월 즈음 개봉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국내영화계의 뜻 있는 인사들은 폭발적인 우리 영화의 호응에 힘입어 한국영화의 복원 및 정리작업에 점차 진행의 속도를 높이고 있는 중이다. 거기다 아직 관객의 반응은 덜하지만 예전에 어디 시네마테크라는 영화도서관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는가. 이같은 국내영화계의 내실 있는 움직임은 이 나라에서 고전영화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결코 가볍지않음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3. 중흥기의 한국 고전들

한국영화의 첫 번째 중흥기라 하면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의 흑백무성영화시절을 들 수가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필자의 지식이 너무 짧은 관계로 자세한 내용을 담을 수 없음에 먼저 독자의 양해를 구한다. 게다가 이 시대의 자료 역시, 나운규의 <아리랑>과 국내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 1935>을 제외하고는 너무나 미비해 참고하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한국영화는 제2의 중흥기를 맞게 된다. 1959년의 영화 제작 편수가 현재의 2배에 육박하는, 무려 100편을 넘겼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한다. 특히 1960년대 초반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 <마부, 1961>, <오발탄, 1961>, <하녀, 1960>,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 등 한국영화사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 작품들이 대거 등장한 시기로, 신상옥, 강대진, 유현목, 김기영, 이만희 등 우리에게 거장으로 잘 알려진 감독들이 활동한 황금기이기도 하였다.

흥미로운 건 이 시기에 많은 한국의 걸작 스릴러 영화들이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히치콕’이라는 다소 불경하기까지 한 꼬리표를 달고 있는 김기영 감독을 비롯, 이만희, 이용민 감독 등이 이 계열의 전문 감독으로 이름을 날렸다. 번듯한 공포, 스릴러 국내 소설(문학)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는 참 놀라운 성과인데, 사실 알고 보면 공포계열의 스릴러 영화가 국내에서 붐을 일기 시작한 1960년대 초반의 몇몇 영화들이 미국(간혹 프랑스)의 그것에서 모방됐음을 알 수가 있다.

이만희 감독의 <다이알 112를 돌려라, 1962>는 제목에서부터 히치콕의 <다이얼 M을 돌려라 1954>를 연상시키며, 그의 또 다른 스릴러 작품인 <마의 계단, 1964>은 프랑스의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의 <디아볼릭 1955>과 설정이 유사하다. 또한 이용민 감독의 <흡혈화 악의 꽃, 1961>같은 경우는 드라큐라의 모티브를 국내영화에 최초로 적용한 사례였다.

하지만 이는 열악한 국내 사정상 어쩔 수 없었던 작업으로 이들 감독들은 단순히 외국의 영화를 흉내내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 나름의 철학을 담아 토종화 하는데 성공하여 이후 한국형 스릴러, 공포영화의 전형을 제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그것이 끝내 계보를 이루지 못 해 아쉽지만).

다시 말해 중흥기 한국의 고전들은 바다 건너 외국의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오며 이를 자양분 삼아 국내영화계의 내실을 다지는데 상당부분 기여를 했다는 얘기다.


4. 미국영화의 힘

이와 같은 사례는 비단 우리 만의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전 세계의 영화는 미국의 자기권 안에서 심하게 정체성을 앓고 있는 중이였다. 하지만 그 같은 현상이 꼭 문화주권의 박탈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다. 영화의 발명국 프랑스는 일찍이 미국 영화의 우수성을 간파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서슴지 않았으며, 인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자국영화의 수준을 높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1944년 독일에 의해 가해졌던 미국 영화 수입 제한의 문이 빗장을 풀면서, 이를 역수입한 프랑스의 많은 관객들은 미국영화에 열광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필름 느와르에 대한 애정은 놀라울 정도였다. 특히 프랑스 비평가들은 비극적인 범죄의 세계를 어둡게 다룬 일련의 미국 영화들을 주목하고, ‘검은 영화’라는 뜻의 ‘필름 느와르 film noir’라는 용어를 손수 만들어 주기까지 하였다.

후에 누벨바그를 주도한 프랑스의 젊은 감독들은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영화에 미국 필름 느와르에 대한 오마쥬를 바치곤 하였는데, 비평가 시절부터 필름 느와르 영화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던 프랑소와 트뤼포는 자신의 두 번째 장편 영화로 느와르 요소를 가미한 <피아니스트를 쏴라 1960>를 연출하였다. 또한 장 뤽 고다르는 <네 멋대로 해라 1960>의 미셸이란 캐릭터를 미국 필름 느와르의 상징인 험프리 보가트에게서 차용하였다.  

미국영화가 끼친 영향력은 필름 느와르 외에 다른 장르에서도 발견된다. 소유에 대한 열망을 노골적으로 영웅의 모습에 투영하는 서부극을 예로 들어보자. 1950년 이후 앙드레 바쟁에 의해 주도된 까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ema)의 비평가들은 1920년대에 논쟁을 불러온 ‘작가(auteur)’라는 개념을 다시금 설파하였는데, 미장센과 관련된 이 주장에 의해 자국에서 B급 영화 감독으로 천대 받던 존 포드는 작가로 등극하였다. 이 후 존 포드에게서 영향을 받은 수 많은 서부극들이 난립을 하였고, 미국에서 그 세를 잃은 후에도 이탈리아로 건너가 ‘스파게티 웨스턴’이란 이름으로 재 탄생하여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한 전력이 있다.

영화자체로만 우수성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미국 영화이다. 많은 이들이 헐리웃 영화를 모방하고 베끼는 것에만 그치고 있을 때, 앙드레 바쟁은 ‘우수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헐리웃의 시스템을 배울 생각은 하지 않고 왜 영화 자체만을 따라 하고 있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헐리웃은 영화를 하나의 예술형태로 자리잡게 한 시스템으로도 세계 영화 시장을 장악하였으며, 이를 보고 해외의 유수 우수한 영화 인재들이 미국의 헐리웃으로 몰려들었다.

히치콕이 영국에서 유능한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시기, 영국의 영화시장을 주도한 것은 미국의 제작사였다(1915년까지 영국에서 상영된 영화 중 98%가 미국 영화였다). 게다가 히치콕은 영화계에 입문하던 때부터 미국식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철저히 계산된 제작과정과 내용 구상면에서도 앞서있던 헐리웃의 시스템 하에서 일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리고 그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9>의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David O. Selznick)과 계약을 맺고 미국으로 건너가 그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 거의 대부분의 작품을 완성하였다.

히치콕만이 아니더라도 미국의 헐리웃 시스템에서 꽃을 피운 외부 인재들은 셀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 중에서 미국 뉴 시네마 운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이지 라이더 1969>의 촬영감독 라슬로 코박스는 헝가리에서 사선을 건너 헐리웃으로 넘어와 혁신적인 촬영술을 발명하였으며, 폴란드와 체코 슬로바키아 출신인 로만 폴란스키와 밀로스 포먼은 각각 자국에서 이름을 날린 후 헐리웃에 입성하여 <차이나타운 1974>,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1975>와 같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만들었다.


5. 기억을 잠식하고 있는 헐리웃의 고전들

그러한 헐리웃의 절대적 배경때문인지, 우리는 고전영화라고 하면 금방 머리 속에 미국영화의 황금기였던 3,4,50년대의 영화를 떠 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한번 그려보아라. 어떤 영화가 당신의 기억을 잠식하는지. 필자 역시 그렇지만 많은 독자들이 스칼렛 오하라와 버틀러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위시하여 <애수 1940>, <아라비아의 로렌스 1962>, <닥터 지바고 1965>, <사운드 오브 뮤직 1965>, <러브 스토리 1970> 등을 기억할 것이다. 일례로 1980년대 중반 KBS에서 연말을 결산하는 의미로 ‘다시 보고 싶은 추억의 명화’라는 특집을 마련하였을 때, 시청자들의 투표에 의한 상위 리스트는 위의 영화들과 다를 바 없었다.

굳이 영화가 아니라 그것의 핵심이 되는 스타를 떠 올릴 경우라도 그 배우는, 또한 미국이 만든 모습일 것이다. 단, 세편의 영화로 불사조가 된 제임스 딘, 헐리웃만이 창조해 낼 수 있었던 환상 마릴린 먼로, 특이한 괴조음을 부르짖으며 현란한 몸 동작을 선보여 전 세계를 사로 잡은 이소룡. 이들은 하나 같이 짧은 삶이 만들어낸 극적인 결과물이자 사후(死後)에도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아이콘이지만 과연 미국의 헐리웃이 아니었다면 가능한 일이였을까. 이소룡의 경우 국내의 팬들에게는 홍콩의 배우로 각인되어있지만 다른 나라의 팬들에게 헐리웃의 배우로 인식되고 있는 사실은 이를 잘 증명하는 사례일 것이다.

사실 필자가 고전영화에 대한 기사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처음 고민한 내용은 100년을 넘는 영화의 역사를 단 몇 페이지에 어떻게 종합, 정리하는 가였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위에서도 밝혔듯이 고전에 대한 필자의 지식이 대부분 미국의 그것에 치우쳐져 있다 보니 자칫 문화사대주의로 비추어 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가급적 헐리웃의 영화사와 우리 영화사 사이의 연관성을 들어 균형을 맞추는데 노력하였고, 고전영화에 대한 국내 팬들의 저변을 생각하여 역사적 사실의 기계적 나열보다는 되도록 대중적인 영화사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두서가 없어졌고 또한 미국영화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고전 헐리웃 영화 위주로 이야기가 구성되고 말았다. 그래도 독자들이 이 기사를 통해 조금이나마 고전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해의 폭을 한 뼘이라도 넓히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2. 2. 영화 월간지 <로드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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