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의 용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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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火車)는 생전에 악행을 한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옮기는 불수레를 뜻한다. (이제부터 스포일러 왕창! 주의!! 책임 못짐!!!) 실제로 영화 <화차>에는 두 명의 망자가 등장한다. 한 명의 망자는 정선영(차수연). 자신을 꾸미기 위해 불법으로 대출금을 끌어 쓰다 서울에서 도피 중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부모가 남긴 대출 빚 때문에 고통에 시달리던 차경선(김민희). 새 인생을 살고 싶어 선영을 살해 후 그녀의 신분으로 살다 정체가 들통 나 기차역에서 투신자살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화차>는 선영 행세를 하는 경선의 악행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그런데 이 두 명의 망자(더 정확히 말하면 한 명의 망자와 곧 망자가 될 이)가 한 공간에서 조우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용산역에서다. 선영 살해 후 또 다른 신분 세탁을 위해 범행을 계획하다 용산역에서 약혼자 문호(이선균)와 그의 삼촌 종근(조성하)에게 덜미가 잡힌 경선은 이들을 따돌리기 위해 필사적이 된다. 용산역에서 들어서 쇼핑몰을 경유해 철로가 내려다보이는 옥상에서 막다른 골목에 놓이게 되는 것. 그런데 경선은 도망 중 쇼핑몰에서 쇼핑을 하고 있는 선영의 유령을 보며 경악한다.

두 망자의 원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태어났다는 것에 있다. 지금 이 사회에서 돈 없이 산다는 것은 죄악에 가깝다. 욕망을 부추기는 무수한 상품과 광고들의 전시 속에 경선과 선영 같은 이들은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이것들을 손에 넣을 수가 없다. 그러니 살아생전 이들에게 마음 편할 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도망치는 경선의 눈 속에 비친 선영의 유령은 죽어서야 마음 편히 쇼핑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마치 경선의 미래를 암시하려고 그 위치에 존재하는 것만 같다.

변영주 감독은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하면서 경선의 악행에 대해 관객들이 동정심을 갖지 않도록 흐름을 끌고 가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가 없는 이들에게 가혹하다고 해도 개인파산을 신청하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어야지 범행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화차>에서 그녀가 단죄를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왜 굳이 용산역이어야 했고 그녀는 철로 위로 떨어져야 했을까.

경선(과 선영)이 품은 소비(그리고 대출)에의 욕망은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다. 요컨대 대다수의 우리는 사회적 죽음을 담보로 대출을 감행하는 하루살이 인생을 살고 있다. 그래서 이 세계는 마치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어쩌지 못하는 이들이 대기하는 공간, 즉 림보를 연상시킨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는 죽은 이들이 일주일간 머무는 림보라는 공간이 등장한다.) <화차>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용산역은 림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이다. 지상으로는 쇼핑몰, 극장, 레스토랑과 같은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첨병들이 집결해있고 지하로는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열차들이 오간다. 그 사이에서 방황하던 경선은 결국 지하로 몸을 던져 선영의 뒤를 따르게 되는데 철로 위에서 숨은 거둔 모양새가 마치 ‘화차’에 실려 지옥으로 끌려가는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2 thoughts on “<화차>의 용산역”

  1. 그 에스켤레이터에서 대사하는 장면에서의 마스크, 마치 자기 안의 모든 것을 모조리 긁어낸듯한 건조함. 그리고 경악하는 장면에서 진짜 소름 돋았어요. 왜 화차라고 했는 지 분명히 느끼게 만든 대목. 근데 사실 개인적으로 철로에 떨어지는 장면의 컷 분할은 아쉬움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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