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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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로 이동할 때면 늘 책을 읽는다. 책을 읽는 게 좋아 버스로 이동해야만 하는 목적지도 부러 지하철을 이용한다. 이유는 단 하나, 책을 읽기 위해서다. 창밖으로 풍경이 보이는 버스는 한눈팔기 쉬운 환경인 데다가 도로 사정상 차체의 흔들림이 심해 개인적으로 나른한 덜컹거림이 책 읽기의 집중력을 높이는 지하철을 선호한다.

대학교에 입학해 입시 경쟁의 부담감을 덜어낸 이후부터 지하철에서 잡다한 책을 즐겼으니 벌써 20년을 훌쩍 넘겼다. 대학생 시절에는 학교까지, 사회에 발을 디딘 이후에는 직장까지,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지금은 언론시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극장까지, 집에서 1시간 내외의 거리를 지하철로 이동하니 왕복으로 따지면 하루 2시간 정도 책을 읽었고, 지금도 읽고 있는 셈이다.

이제는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는 승객을 손에 꼽을 만하지만,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만 해도 낯익은 풍경이었다. 책보다는 신문을 읽는 사람들이 월등히 많았지만, 종이 뭉치를 들고 뭔가를 읽는다는 행위는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페이지를 사르륵 넘기는 소리가 지하철 안의 공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던 시절이었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손에 꽉 쥐고 SNS를 확인하거나 귀에 이어폰을 꽂고 DMB 혹은 게임 사운드에 집중하는 작금의 지하철 안에서 종이의 마찰음은 군중 속의 침묵을 날카롭게 깨는 소리만큼 이질적이 되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다는 게 언젠가부터 별난 구경거리가 된 게 사실이다. 이는 ‘절대’ 과장이 아니다.

얼마 전에 페이스북을 확인하던 중 어느 여자 승객이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다 겪은 황당한 사연을 접했다.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는데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무리가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쑥덕거리더란다. 거기에 말리기 싫어 신경 쓰지 않는 척 계속 책을 보고 있는데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고 한다. 그중 한 명이 책을 읽던 그녀 옆 빈자리에 앉더니 스마트폰으로 기념사진을 찍어가며 비웃더라는 내용이었다.

수난을 당한 장본인이 차분히 써내려간 글이었지만, 행간에는 당시 느꼈던 당혹감과 불쾌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여부를 판단할 근거는 없었지만, 능히 일어날 법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련해 어느 시사지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요즘 청소년들은 입시 과목과 관련 없는 책을 읽는 행위를 ‘찌질’하게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단순히 이들만의 문제도 아닌 것이, 행여 학생이 자투리 시간에 <해리 포터>와 같은 소설책을 읽고 있으면 선생님이 다가와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며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라는 식이란다.

책의, 그리고 책 읽는 자의 수난시대. 언제부터 책 읽는 사람이 놀림의 대상이 된 걸까. 스마트폰의 대중화 이후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전부터 책의 위기를 예측한 이가 있었다. 레이 브레드버리다. 누구냐고? <화씨 451>을 쓴 작가다. 1966년에 프랑수아 트뤼포가, 2009년에 프랭크 다라본트가 각각 영화화한 적이 있는 <화씨 451>은 책이 사라진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 Sci-Fi물이다.

이 작품에는 ‘방화수 fireman’라 불리는 생소한 직업군이 등장한다. 이들은 독서가 불법으로 규정된 사회에서 사람들이 몰래 숨긴 책을 찾아 태우는 일을 맡았다. 그래서 제목의 <화씨 451>은 ‘책이 불타는 온도’를 의미한다. 독서가 불법인 이유? 책을 읽으면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을 하면 비판 정신이 생긴다는 정부의 판단 때문이다. 그러니까, <화씨 451>은 사상이 통제되는 사회에 경고를 보내는 작품이다.

다만 일반의 Sci-Fi물처럼 통제사회라는 결과에 대해 그 책임을 세계 지배의 야욕을 드러내는 정치가 또는 기업가에게 묻지 않는다. 오히려 대다수의 일반인에게 묻고 있다는 점에서 <화씨 451>의 진가가 드러난다. 이 소설의 초판이 1953년에 발행됐음을 고려할 때 레이 브래드버리가 보여준 통찰력은 가히 노스트라다무스 급 예언에 가깝다. 그처럼 <화씨 451>을 읽고 있으면 기시감을 느끼는 순간을 자주 접한다.

스마트 폰으로 대표되는 가상현실이 실제 현실을 압도하는 사회적 분위기, 즉각적인 반응에 익숙해진 세태 속에서 깊이 있는 생각과 진지한 성찰이 사라진 시대, 그래서 책을 읽지 않아도 전혀 부끄럽거나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소설 속 현실은 놀라울 정도로 현재와 닮았다. 길거리에만 나가봐도 주변에 뭔 상황이 벌어지든 말든 고개를 푹 숙이고 스마트폰에 열중한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매일 같이 경험하는 것이지만, 지하철이나 버스의 승객들이 이동하는 동안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하나같이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광경은 여전히 적응하기 쉽지 않다. 그 안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으면 방해받는 느낌은 없지만, 꼭 고립된 것만 같다. 행여 주변을 힐끗거리다 책 읽는 사람을 발견이라도 하면 다가가 한마디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지하철이나 버스 등에서 책을 읽거나 들고 다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면 선물을 주는 페이스북이 등장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책 읽는 순간을 공유해 많은 사람에게 전파, 놀이로서 책 읽기를 권장하려는 취지 자체는 공감할 만한 것이었다. 물론 그에 대한 효과가 좋았냐, 하는 문제에 직면하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해당 페이스북은 여전히 활동 중이다. SNS에서 만난 이들이 오프라인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하고 책에 대한 토론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은 꽤 긍정적이다. 그에 대한 반발도 만만찮아서 조용히 책을 읽는 이의 사생활 침해라는 비판도 만만찮다. 무엇보다 책 읽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거부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상당하다. 어느 트위터 사용자는 이렇게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페북에 들어갔더니 책 읽는 사람 얼굴, 책 읽는 사람 주변 사람들 얼굴까지 꽤 나온 사진들이 드글드글함. 그냥 정 그렇게 ‘지하철에서 책 읽는 교양 있는 우리‘에 취하고 싶으면 셀카 찍어 올리시라고”  

내가 가장 불편하게 생각하는 지점인데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책을 읽는다는 게 교양인의 특권적인 행위로 비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앞서 언급한 여성이 지하철에서 겪은 수난도 이와 같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교양 있는 사람인 척 티 내지 말라는 심리가 그들 중학생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놀이가 아니라 교양 쌓기 목적으로 책 읽기를 강요해 온 우리 교육의 폐해를 여실히 드러내는 사례다.

그렇다고 우리만의 현실이라고 극단화하기는 힘들 것 같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을 영화화한 트뤼포의 동명 영화에는 원작소설에는 없는 ‘북 피플’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워 후세에 전달하는 이들로, 북 피플들은 극 중 방화수를 피해 도시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연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처음 이 영화를 볼 때만 해도 인상적일 만큼 아름다운 엔딩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 생각이 변했다. 엔딩 그 자체로 아름다웠을지 몰라도 결국 책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이들을 피해 그들만의 이상향을 건설했다는 설정은 게토화에 낭만을 채색했다고 보는 쪽이다. 단지 영화 속 현실로 치부하기에는 지금 책을 두고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 <화씨 451>과 다르다고 부정할 근거가 별로 없어 보인다. 방화수는 존재하지 않지만, 갈수록 책 읽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는 감히 ‘화씨 451의 시대’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이런 인식이 깨지지 않는 한 아무리 책 읽기 운동을 펼친다고 한들 ‘북 피플’의 운명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누구도 커밍아웃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책이 없어진 사회의 즉각적이고 말초적인 감정의 대척점에서 회복해야 할 가치로 자연을 꼽는다. 자연이야말로 물질적 세계를 구성하는 원료에 가깝다는 것이 그의 작품 철학이다. 정신을 도외시하는 현실에 우려하며 자연을 회복하는 것, 즉 정신적인 삶과 그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연을 절대적인 가치로 두는 것이 아닌 자연과 물질의 조화를 호소하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늘 대상의 양면성을 바라보는 너른 자세로 문학성을 높여 왔다. 이는 <화씨 451>의 주요 이미지인 ‘불’을 다루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책을 태움으로써 인간성을 말살하는 ‘부정적인’ 불이 있는 한편엔 추위에 떠는 인간의 몸을 따스하게 해줄 ‘긍정적인’ 불이 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이를 근거로 스마트폰의 대중화에 밀려 급속도로 떨어진 책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무조건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상대적 수치에서는 월등히 밀리지만, 스마트폰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책을 읽는 사람의 상당수는 교양이 목적이 아니라 단순히 오락으로 소비하는 경우가 더 많다. 입시나 취업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소설 따위 뭣 하러 읽느냐는 사람들이 있지만, 스마트폰으로 영상보고 오락하는 걸로 지하철 안에서의 무료한 시간을 때우듯 책을 즐기는 이들이 상당수다.  

요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는 것. 나는 존중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현격히 떨어져 있는 공감 능력을 회복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덜 이용하고 책을 읽기를 바라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다. 강요야말로 우리 사회가 모든 사안에 대해 두 패로 갈리게끔 한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던가. 스마트폰은 책과 다르게 무궁무진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책은 스마트폰으로는 닿을 수 없는 지식의 깊이를 담고 있다. 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포용하는 것, 여기에 바로 화씨 451의 시대를 극복할 해답이 놓여 있다.  

toon 허남준
 

ARENA HOMME
2015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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