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유인원의 플라워 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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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하 ‘진화의 시작’)은 1968년에 프랭클린 J.샤프너가 연출한 <혹성탈출>의 프리퀄로 알려진다. <혹성탈출>의 그 유명한 결말, 모래사장에 파묻힌 반 토막 난 자유의 여신상이 보여주는 것처럼 뉴욕은, 지구는 어떻게 멸망했는지, 그리고 인간을 대신해(?) 지구의 주인이 된 유인원들이 어떻게 지능을 갖게 됐는지를 밝혀나가는 것이 <진화의 시작>의 존재 이유다.

그런데 영화를 연출한 루퍼트 와이어트 감독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한꺼번에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일단 <진화의 시작>을 통해 유인원이 지능을 갖게 된 경위, 즉 ‘진화의 시작’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춘다. 영화의 결말을 보게 되면, 인간과 유인원은 각각 편을 갈랐을 뿐이지 본격적인 대립 양상은 차후로 돌려놓는다. 결국 <진화의 시작>은 오리지널 <혹성탈출>과 그 사이에 또 한 편의 작품을 남겨놓은 셈이다. (루퍼트 와이어트 감독은 “속편이 제작된다면 인간과 유인원의 <풀 메탈 자켓>이 될 것”이라는 여지를 남겼다)

루퍼트 와이어트 감독은 지능을 갖춘 유인원이 인간과 대립한다는 오리지널의 설정을 느슨하게 가져오되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진화의 시작>을 구성했다. 인간의 폭력적인 문명에 반발한 유인원들이 그들만의 제국인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이에 대해 <진화의 시작>과 <혹성탈출>은 전혀 다른 영화라는 평이 지배적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의견을 달리하는 편이다. 문명을 대표하는 인간과 자연을 대표하는 유인원이 편을 나누는 결말을 보면서 <진화의 시작>이 <혹성탈출>이 보여줬던 세계관을 충실하게 반영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vs유인원, 문명vs자연 

과학자 윌 로드만(제임스 프랑코)은 알츠하이머 치료약 개발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에게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존 리스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험 중 원숭이 한마리가 난동을 부리면서 임상실험은 중단된다. 좌절하기를 잠시, 윌은 문제의 원숭이가 낳은 새끼를 몰래 집으로 데려와 키우기 시작한다. ‘시저'(앤디 서키스)라고 이름붙인 아기 원숭이는 커가면서 점점 지능도 진화하고 급기야 인간을 넘어서기에 이른다. 윌과 가족처럼 지내던 시저는 이웃집 남자와 시비가 붙은 윌의 아버지를 보호하려 나섰다가 인간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유인원 보호시설로 보내진다. 이곳에서 잔인하게 학대당하던 시저는 인간의 폭력에 분노하면서 원숭이, 침팬지, 킹콩 등 유인원을 규합하고 우리를 탈출하며 도시를 혼돈에 빠뜨린다.

<진화의 시작>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바이러스를 소재로 한 좀비물의 설정을 무척이나 닮았다. <28일 후>(2002)나 <나는 전설이다>(2007) 등 동물을 상대로 한 인간의 실험이 재앙을 불러와 인류를 최악의 곤경에 빠뜨리는 영화들 말이다. 이런 종류의 좀비물이 결국 인간의 폭력성에 경종을 울리는 것처럼 <진화의 시작> 역시도 동일한 메시지를 공유한다. 그도 그럴 것이 스스로 재앙을 불러온 인류의 비극적 최후를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어필한 것이 바로 오리지널 <혹성탈출>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니까 <혹성탈출>은 인간의 폭력성을 주요한 소재 삼은 이후의 영화들을 하나의 장르로 상정했을 때 원조 격에 해당하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그것은 단순히 이 영화가 가진 내적인 구조 안에서만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혹성탈출>이 전하는 메시지의 화살촉이 상영관 너머 당시 검은 현실의 과녁을 정확히 관통했기에 가질 수 있었던 폭발력으로 이해해야 한다. <혹성탈출>이 개봉했던 1968년은 냉전의 비극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상반된 이념간의 대립이 전 세계를 두 개의 편으로 갈라놓고 있을 때 미국 내부에서도 전쟁을 밀어붙이는 기성세대와 평화를 연호하는 젊은 세대 간의 대립 또한 만만치 않은 형국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세계의 경찰관 역할을 자처했던 미국 정부는 세계 평화라는 명분하에 무고한 젊은이들을 참혹한 베트남의 전장으로 밀어 넣으며 의미 없는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런 기성세대에 대항한 젊은이들의 저항과 반감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 같은 움직임은 곧바로 영화로 전이 되어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이름으로 기성을 조롱하고 전통을 해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혹성탈출>은 그와 같은 분위기에서 기획된 영화였다. 원래 <혹성탈출>은 프랑스 작가 피에르 블이 1963년에 발표한 <La planegrave;te des singes>에서 설정을 가져왔다. 다만 원작소설에서는 주인공 테일러가 유인원 행성에서 유명해지고 희극적인 인생을 사는 것과 달리 영화의 테일러(찰튼 헤스턴)는 원숭이 장로와 누가 더 지능이 우수한지 설전을 펼치는 처지로 전락했다. 다만 승부는 뻔해 보이는데 원숭이 장로의 말을 빌리자면, 타인의 영역을 독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인간들에 반해 자신들은 문명을 파괴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영화 초반 테일러의 동료 다지가 불시착한 정체불명의 행성(나중에 지구로 밝혀진다)의 땅위에 작은 성조기를 꽂자 이를 지켜보던 테일러는 고개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실소한다. 미국의 패권주의를 우주로까지 확장하는 팍스아메리카나의 어리석음이란! 인간들은 이미 인류역사의 시작과 함께 땅에 대한 욕심을 정복욕으로 드러내왔다. 문명의 진화는 곧 무기의 발전에 대한 순화된 표현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래서 인류역사는 전쟁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거꾸로 말해 폭력적인 문명이 가한 초록빛 자연의 파괴사인 것. 흥미롭게도 <진화의 시작>은 1968년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두고 전쟁의 편에 섰던 기성세대와 총 대신 칼을 외치며 평화를 열망했던 젊은 세대의 대립양상이 극중 인간과 유인원 간의 싸움 속에서 자연스럽게 오버랩 된다.      


왜 샌프란시스코인가?

이와 관련해 <진화의 시작>의 결말부에는 의미심장한 장면이 등장한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잃은 시저는 쫓아오는 경찰과 군부대를 진압하고는 거대한 공원에 그들만의 진영을 마련한다. 윌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것을 권유하기 위해 시저의 뒤를 쫓았다가 또 다른 유인원의 공격을 받는다. 이때 시저는 유인원을 저지하면서 어떠한 폭력도 행하지 못하도록 선을 긋는다. 그렇게 윌을 안전하게 돌려보낸 시저는 곧바로 높은 나무 위에 올라 금문교 너머 우뚝 솟은 고층빌딩의 스카이라인을 향해 팔을 번쩍 추켜올리는 제스처를 취한다. 일련의 장면들로 유추하건데 이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인간은 도시에서, 동물은 자연에서 각자의 선을 지키면서 서로에게 해가 되지 않게 중립을 유지하며 살자는 것이다.

<진화의 시작>에서 시저가 취하는 입장을 보면 이들 유인원들에게서 ‘플라워 파워'(Flower Power)의 세례가 여지없이 느껴진다. 플라워 파워는 히피족 사상의 중심인 사랑과 평화의 슬로건으로써 히피들은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며 전쟁을 외치는 기성세대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특히 플라워 파워로 무장한 히피들이 가장 목소리를 높였던 곳이 샌프란시스코였다. 미국 서부에 위치한 샌프란시스코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그 너머로 아시아와 마주보는 지형에 속한다. 그래서 징집된 젊은이들은 완전무장한 채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집결해 베트남으로 이동했다. 병사들을 환송 나온 여자들은 아들의, 오빠의, 남동생의, 남편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의미에서 머리에 꽃을 꽂고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들었다. 이를 본 존 바에즈, 재니스 조플린, 밥 딜런 같은 포크가수들은 플라워 파워라는 단체를 구성해 반전과 평화를 노래했다.

사실 <혹성탈출>의 결말을 감안하면 <진화의 시작>의 샌프란시스코는 다소 의외의 배경으로 비친다. 영화의 끝에서 뉴욕이 짧게 언급되기는 하지만 감독 루퍼트 와이어트의 판단에는 인간과 유인원, 문명과 자연, 전쟁과 평화의 구도를 더욱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혹성탈출>이 미국의 베트남 참전의 우회적인 비판이었던 것을 헤아렸을 때 <진화의 시작>이 샌프란시스코를 선택한 이유는 자명해진다. 실제로 유인원 보호시설을 탈출해 시저가 유인원들을 이끄는 마지막 장면의 공원은 미국의 베트남 참전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뿐 아니라 전쟁을 반대하는 히피들의 플라워 파워와 관련한 유명한 이미지의 배경이 된 장소이기도 하다.

* 버클리 대학은 금문교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학교는 샌프란시스코에서도 꽤 진보적인 학풍으로 유명하다. 이는 베트남전 반대와 관련한 히피들의 플라워 파워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 당시 버클리 대학 측은 주차장을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주변 건물들을 헐기 시작했다. 이를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은 건물 잔해 위에 꽃을 심어 항의의 표시를 대신했다고 한다. 이곳은 ‘민중의 공원'(People’s Park)으로 불렸는데 집회의 확산을 우려한 당시 로널드 레이건 주지사는 군대를 투입해 강제력으로 이들을 해산코자 했다. 이때 한 젊은 히피 여성이 앞으로 나와 군인의 총구에 꽃을 꽂았고 이 장면은 전쟁에 반대하는 상징적인 메시지가 되어 지금까지도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

물론 <진화의 시작>의 유인원들에게서 히피의 외양을 끄집어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루퍼트 와이어트 감독은 시저에게서 의도적으로 플라워 파워의 정신을 덧씌운다. 그렇지 않고서야 유인원들은 왜 하고 많은 연결지점을 놔두고 굳이 다리를 건너, 그것도 꼭 동쪽 방면으로 향해야 했으며 (카메라 구도 역시 상상의 선을 가운데 두고 주로 오른쪽, 지리적으로 동쪽으로 향하는 유인원의 모습에 집중한다!) 시저가 처음 입 밖으로 끄집어내는 인간의 언어가 폭력에 반대하는 “노”(NO)였을까. 특히나 그 명칭이 언급되는 것은 아니지만 극중 유인원들의 공원은 민중의 공원을 염두에 두고 설정한 장소임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이에 더해, 시저가 윌을 유인원의 폭력에서 구해내고 돌려보낸 건 히피 여성이 군인의 총구에 꽃을 꽂은 행위와도 유사해 보이는 것이다.  


파멸은 인간의 운명

<진화의 시작>은 그 자체만 놓고 보았을 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시저로 대변되는 유인원들이 실험실을, 동물원을 박차고 나와 그들의 고향인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혹성탈출>도 폭력적인 환경에 환멸을 느낀 테일러가 고향을 떠나 (이와 관련해 <진화의 시작>에는 우주비행사가 실종됐다는 뉴스와 신문 화면이 스치듯 지나간다) 우주를 유영하다가 불시착한 곳이 지구라는 사실도 <진화의 시작>과 맥을 같이 한다. 다만 테일러는 유인원이 지배하는 이 새로운 행성이 지구라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데 <혹성탈출>의 감독 프랭클린 J.샤프너(후에 <패튼 대전차 군단>(1970)을 만들기도 했다)는 결국 파괴될 수밖에 없는 지구로 돌아와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영화를 통해 예시했다. 다시 말해, <혹성탈출>도 그렇고 <진화의 시작>에서 부각되는 건 강조하건데 인간 중심의 폭력성이다.

아마도 <진화의 시작>이 철저히 볼거리적인 관점에서 만들어졌다면 자유의 여신상이 파괴되고 지구가 척박한 환경에 처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했을 터. 하지만 루퍼트 와이어트 감독은 최소한 이번 작품에서는 <혹성탈출>이 만들어놓은 세계관에 좀 더 충실한 영화 만들기에 집중했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혹성탈출>을 통해 결말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들이 유인원들을 공격할 것이고 그런 폭력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인류를 멸망시키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현실 역시도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다만 파괴될, 멸망할 지구의 운명을 전제에 두고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사실은 사뭇 충격적이다. <혹성탈출>에서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던 테일러는 “우주의 무한함에 비추어 인간이란 얼마나 미비한 존재인가”라고 나직이 읊조린다. 그런 별 볼일 없는 미물이 전쟁을 일으키고 자연을 억압해 우주의 한 요소를 파괴하려 든다니 그게 얼마나 웃긴 노릇이냐는 거다. 이를 이어 받은 <진화의 시작>은 차라리 극중 유인원처럼 문명은 문명대로 존중하고 자연은 자연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더욱 현명한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폭력을 일삼는 지구인들을 보자니, 과연 인간은 파괴될 운명인 것이다.  

* 버클리 대학 관련한 부분은 이명석이 쓴 ‘예쁘게 미친, 샌프란시스코'(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2085) 중 ‘버클리 대학의 플라워 파워’에서 그대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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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1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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