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객 섭은낭> 허우 샤오시엔 감독

houhsiao

(제가 인터뷰를 진행하고 이를 <시사저널>의 김회권 기자님이 기사로 작성하였습니다.)

그를 소개할 때면 보통 ‘봉준호’라는 이름이 나온다. 젊은 영화 지망생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봉준호 감독이 사랑하는 영화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흰 운동화에 청바지, 감색 패딩이 잘 어울리는 이 70세의 남성. 대만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이자 명실상부한 현대 영화의 거장이라고 평가받는 허우샤오셴(侯孝賢) 감독이다.

인터뷰를 위해 카페로 막 들어온 허우 감독이 기자 일행을 보자마자 중국어로 이야기를 건넸다. 무슨 이야기일지 궁금해할 찰나, 통역이 웃으며 말한다. “감독님이 자기는 여기가 아니라 건너편의 저 건물로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시네요.” 맞은편에 보이는 건물의 현판에는 ‘노인정’이라는 세 글자가 뚜렷이 보였다. 유머러스함을 뽐내는 그는 나이와 상관없이 여전히 현역이다. 지난해 <자객 섭은낭>으로 그는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동양적 영화미학의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를 받아온 그에게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단 8쪽의 짧은 무협소설이 영화로 탄생

그는 매번 ‘현실’을 그린다. 영화가 현실과 동떨어진 걸 싫어한다. 그래서 리얼리즘에 충실하다. 1989년 내놓은 <비정성시(悲情城市)>로 그는 한국에서 유명해졌다. 1945년 일왕이 항복을 선언한 후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기까지의 4년간 격동의 대만을 그린 이 작품은, 느리고 무거운 대신 대만의 구석구석을, 그리고 대만인 심연(深淵)의 정서를 리얼하게 그려냈다.

그의 리얼리즘 사랑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그에게 칸을 안겨준 <자객 섭은낭>은 허우 감독이 처음으로 만든 무협영화다. 무협이니 화려한 액션 신이 등장할 법도 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 무협의 주인공들은 초인적이니까. 그런데 허우 감독은 그게 싫었다. “처음 무술감독과 만났을 때 무협의 정형화된 형식에 대해 말하더라. 예를 들어 커피 잔을 툭 쳤을 때 밖으로 날아가고 그 커피 잔이 떨어지기 전에 수많은 사람이 쓰러지는, 그런 슬로모션을 통해 강렬하게 보여주는 걸 말해주던데, 난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는 걸 싫어한다. 제한을 두지 않으면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중구난방 흘러갈지 모르니까.”

정형화된 무협을 좋아하진 않아도 무협 그 자체는 좋아했다. 형의 영향이 컸다. 형이 좋아해 빌려온 무협소설을 옆에서 같이 보면서 자연스레 따라 좋아하게 됐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만화나 책에 대해 남다른 태도가 있었다”고 말했다. 절 입구에 만화책을 갖다놓고 돈을 받고 빌려주기도 했다. 학교에 있는 무협소설까지 다 보고 난 후 더 이상 볼 게 없자 <로빈슨 표류기>와 같은 번역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성장하며 읽은 이때의 소설은 그에게 큰 영향을 줬다. 책은 그의 영화세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듯했다. “문자와 글로 접하는 독서에 대한 습관이 영화감독이 되면서 전체 세계관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자객 섭은낭>은 그가 8년 만에 들고 영화계로 복귀한 작품이다. 원작 <섭은낭(隱娘)>은 당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중국은 시대상을 반영한 필기(筆記)소설이라는 장르가 있다. 허우 감독이 대학을 다니던 무렵, 당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단편이 많이 출판됐고, 그 역시 그때부터 이런 소설을 즐겨 읽기 시작했다. 현실적인 내용이 많았고 영화로 찍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 속에 소설 <섭은낭>이 있었다.

당나라는 중국의 역사 중 가장 번성했던 시기다. 그렇다 보니 이야기 소재가 다른 시대보다 워낙 풍부하고 그 시대 자체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허우 감독도 그랬다. “당나라 이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필기소설도 많이 읽어봤다. 그런데 아무래도 당나라의 이야깃거리가 다른 시대보다 워낙 풍부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섭은낭>에 매력을 느꼈다. 이 소설도 허무맹랑한 구석이 있었다. 원작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주먹을 한 번 치면 상대가 저 멀리 날아갔고,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인 같은 이야기도 나왔다. 그럼에도 매력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특히 시대적 배경을 묘사하는 부분이 워낙 잘돼 있었다. <자객 섭은낭> 영화 속에 담아낸 위박(魏博) 지역이라든지, 절도사(지방의 군정을 총괄하던 지위)라든지, 성(城)의 개념으로 사용된 번진(藩鎭) 내부의 문·무관 시스템 등을 원작은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원작 <섭은낭> 자체가 8쪽에 불과한 짧은 소설이라는 점이다. “아마 한자로는 1000~1500자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내용”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문득 궁금했다. 어떻게 그런 이야기가 영화로 확대될 수 있었는지. “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굉장히 많이 봤기 때문에 시대적 배경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역사적인 자료가 굉장히 많이 남아 있다. 위박을 배경으로 한 당나라 중기 시대의 역사적 기록을 보면 안녹산과 사사명이 난을 일으킨 안사의 난 등도 기재가 잘돼 있다. 스토리가 짧아도 인물 구조나 배경이 명확해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되었다.”

<자객 섭은낭>의 첫 장면에는 스승이 은낭에게 전계안을 죽이라고 얘기하는 흑백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은낭이 전계안을 만나러 갈 때는 컬러 장면으로 바뀐다.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명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소설을 보면 프롤로그가 있다. 소설의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되기 전에 프롤로그에 해당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흑백으로 했다. 반면 중간에 컬러로 바뀌는데 영화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이 흑백에서 컬러로의 전환은 기술적으로 허우 감독에게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섭은낭> 같은 경우는 필름으로 촬영하고 디지털로 전환한 작품이다. 필름은 색깔을 정해놓고 촬영하게 될 경우 흑백으로 바꾸는 게 어렵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편리해졌다. 디지털의 힘이다.

“예전에 보던 무협영화와는 많이 다를 것”

하지만 경력이 오랜 감독일수록 필름에 대한 향수가 강한 법이다. 허우 감독에게도 슬쩍 물어봤다. “필름과 디지털은 차이가 많은 것 같다.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는 것은 시대적으로 필연적이다. 일단 이번 작품은 100% 필름으로 촬영했는데 필름이 직감적으로 봤을 때 색감이나 느낌이 좋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다음 영화는 아마 디지털로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객 섭은낭>은 그에게 디지털이라는 도전을 던져준 화두작인 셈이다. 첫 무협영화라는 점에서도 그랬고, 무협영화답지 않게 중력을 거스르지 않는 무협영화라는 점에서도 그랬다. 여러모로 도전을 해야 했던 작품이다.

<자객 섭은낭>에서는 그 흔한 클로즈업도 없다. 피사체를 먼 거리에서 넓게 잡는 롱쇼트 기법이 자주 등장한다. 무협영화지만 정적인 무협영화를 그려낸다. 허우 감독은 클로즈업을 사용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이것 역시 그의 리얼리즘 중시와 관련된다. “클로즈업을 하고 극대화시키는 것은 너무 허구적이다. 배우들이 그만큼 설득력 있게 감정을 극대화시켜서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 대를 가지고 전체를 보여주며 감정을 투영하는 것이 아시아 스타일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섭은낭 역은 서기가, 섭은낭의 타깃이 된 전계안 역은 장첸이 맡았다. 글로벌 인지도가 높은 중화권의 대표적 남녀 배우가 이번 작품에 함께했다. 허우 감독은 보통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배우를 염두에 둔다. 이번 역시 그랬다. 이야기의 중심축을 끌고 가는 두 배우를 그는 잘 안다. 이미 여러 작품을 함께했다.

“물론 다른 배우를 쓸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새로운 배우를 알고 판단하는 데 또 그만큼 힘이 필요하다. 그들을 잘 알기 때문에, 그리고 캐스팅상의 경제적인 이유까지 고려했을 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서기와 장첸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기도 하고. 하하. 서기 같은 경우 유럽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배우라 투자자들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캐스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 배우들과의 작업 과정이 재밌고 그들의 능력이 탁월한 걸 알기 때문에 새로운 배우를 찾기보다는 기존 배우랑 작업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만약 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찍게 되면 오히려 새로운 배우들을 찾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새로운 배우가 잘한다면 기회를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허우 감독은 이번 작품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보던 무협영화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화면 속 움직임과 고요함을 바라볼 것이고, 누군가는 상상력을 발휘해 그 속에 함께 휩쓸려 갈 것이다. 난 그 두 가지 타입의 관객 모두 존재하길 바란다”고.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천하제일의 무림고수도 없고,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액션이 없는 것만이 그가 추구하는 리얼리즘은 아니다. 관객들의 감정 이입을 위해 고민하는 다른 영화와 달리 허우 감독의 영화는 그렇게 되기 어렵다. 그만의 카메라 기법으로 표출되는 보여주기 방식은 관객들을 관찰자의 시선에 머무르게 한다. 그가 제공하는 ‘관객을 위한 리얼리즘’이다. 거장이 만들어낸 무협영화의 새로운 공식이기도 하다.

 

시사저널
(2016.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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