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미술감독 삼국지


2007년 전주국제영화제에는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황후花>의 후오 팅샤오, <꿈의 미로>의 이소미 도시히로, <타짜>의 양홍삼 등 세 프로덕션 디자이너를 초빙한 ‘프로덕션 디자이너 마스터클래스’는 아시아 삼국의 영화미술을 접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 마스터클래스에서 확인된 아시아영화의 미술을 조명한다.


영화현장은 바벨탑과 같다. 각 파트별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작가에게는 시나리오가, 촬영감독에게는 카메라가 펜이 된다. 프로덕션 디자이너에겐 세트와 공간을 디자인하는 또 다른 언어가 있다. 영화에서 미술은 이미지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자 1차 정보의 기능을 한다.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조직하고 디자인한 공간에는 그 나라의 시각문화, 이미지에 대한 태도 등 특수한 환경이 묻어난다. 공간을 연출하는 프로덕션 디자인과 미술작업은 각 나라마다 뚜렷한 특징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을 대표하는 미술감독 후오 팅샤오, 이소미 도시히로, 양홍삼의 작업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야기와 주제를 실어 나르는 색채


후오 팅샤오는 현실을 재현한 공간에서 추상적이고 과장된 시대극 공간까지 시대와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현존하는 최고의 미술감독 중 한 명이다. 그중 등장인물의 감정을 공간에 구현하는 데 있어 ‘색’을 가장 잘 활용하는 미술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색에 대한 그의 미학은, 베이징 영화학교 졸업 후 처음으로 참여한 첸 카이거의 <현 위의 일생>(1990)에서 시작됐다. 첸 카이거의 <황토지>(1984)와 장이모우의 <붉은 수수밭>(1988)은 중국 5세대의 시작을 알린 작품으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강렬한 색의 활용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형식미까지 고려한 과감한 시도들은 이후 중국영화를 규정하는 하나의 특징이 됐다.

후오 팅샤오는 공간을 꾸미는 데 있어 색채의 조합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보면 이야기를 규정하는 색조를 가장 먼저 결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백 퍼센트 사실적인 재현이 쉽지 않은 까닭에 해석의 여지가 풍부한 시대극은 후오 팅샤오의 능력이 잘 발휘될 수 있는 장르다. 아닌 게 아니라, 2000년 이후 장이모우 감독의 주요 작품, <영웅>(2001), <연인>(2003), <황후花>(2006)에 참여하면서 그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가장 극대화된 형식미를 보여줬다. 장이모우의 첫 번째 대작 영화 <영웅>에서 후오 팅샤오는 네 가지 단색을 사용해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한편 색채를 통한 드라마를 보여줬다. 통일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의 왜곡된 심리는 강렬한 붉은색을 통해, 파검(양조위)과 비설(장만옥)의 이뤄지지 못한 애정관계는 차가운 푸른색을 통해 표현된다. 이들의 회상 신은 평화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녹색이 배경을 이뤘으며 수시로 상황이 변모하는 현실의 정치적인 이야기는 모든 색을 빨아들일 수 있는 백색으로 처리했다.

강렬한 색이 두드러지다보니 과장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 이 같은 작업물이 규모가 큰 장이모우 영화의 빈약한 서사를 눈가림하는 장치가 아니냐는 식의 의심을 종종 받는다. 왕위를 두고 벌어지는 가족 간의 음모를 다룬 <황후花>야말로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작품 중 하나다. 황궁에서 벌어지는 개인적인 일에 초점을 맞춘 사극이었기에 황금색과 붉은색이 주요한 색조가 됐다. 황금색으로 황궁의 화려함을 강조하는 한편 내부에 붉은색을 점점이 박아 넣어 음모의 기운이 서리도록 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부패한 아이러니를 표현한 것. 하지만 황궁 내부의 조형물을 유리로 제작해 발열하는 빛으로 황금색을 극대화한 점이나, 실제 국화 화분 30만 개를 사용해 황궁의 마당을 뒤덮은 공간 연출은 입이 쩍 벌어지는 규모로 인해 ‘뻥 미학’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재미있는 건, 그런 비아냥거림이 섞인 평가와는 다르게 후오 팅샤오 본인은 “과장되지 않도록 사실적으로 공간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가령, 진나라가 배경인 <영웅>은 북방민족의 특징이 살아 있는 시대였기에 거칠고 투박한 면을 드러내는 데 주력했다. 그에 반해 <황후花>는 중국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시대로 평가받는 당나라가 배경이었던 까닭에 정교하고 섬세한 시각화에 애를 썼다.

시대극에서 사실적인 재현이라 함은 간접적인 정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뼈대 구축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시대극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재현’보다 ‘표현’에 더 가깝다. 대신 후오 팅샤오는 공간의 구성을 상상력에 의지하기보다 등장인물의 감정과 이야기 구조를 바탕으로 최대한 ‘재현’한다. 색을 이용한 작업은 공간의 해석을 풍성하게 만드는 그만의 특징이다.


일상에 들이 댄 현미경


후오 팅샤오가 공간을 채우는 미술감독이라면 이소미 도시히로는 공간을 비우는 미술감독이다. 후오 팅샤오가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반해 그는 최대한 의미를 배제한다.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게 그의 미술 철학이다. 그는 삶의 미세한 부분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공간을 구성한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기술적이라기보다 일상적이다. 가능하면 세트를 만들지 않고 이야기에 맞는 일상의 공간을 집요하게 찾아나서는 건 이 때문이다. <도돔파아가씨, 강에 가다>(1988)에 미술감독으로 입문한 이래, 아오야마 신지의 <헬프리스>(1996), 구로사와 기요시의 <네 멋대로 해라>(1996), 이시이 소고의 <꿈의 미로>(1997), 최양일의 <피와 뼈>(2004)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작업했지만 그의 결과물은 늘 한결같다. 워낙에 일상적인 까닭에 배경이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없다.

이소미 도시히로가 돋보이는 건, 고레에다 히로카즈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서다. 소소한 일상에서 깊은 의미를 건져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이소미 도시히로가 추구하는 프로덕션 디자인의 철학과 일치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들은 데뷔작 <환상의 빛>(1995)에서부터 최근작 <하나>(2006)까지 모든 영화에서 함께했다. 그중에서 고레에다의 이례적인 사극으로 화제를 모았던 <하나>는 이소미 도시히로의 특기가 잘 발휘된 경우다. 아무래도 사극은 일본 건축이 지니고 있는 극도의 형식미로 인해 과장된 느낌이 강한 장르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는 사무라이의 복수담을 주제로 한 ‘주신구라’를 우회적으로 풍자하며 일상의 자질구레함을 찬미하는 탓에 굉장히 현실적인 세계로 재창조됐다. 다 쓰러져가는 집들을 오밀조밀하게 밀집시켜 일상의 풍경들을 강조한 것. 사실 당시에는 토지가 넓은 장소에 집을 세우는 경우가 없었다. 다만 <하나>는 현 시대를 풍자하는 우화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무리가 가는 부분이 있어도 현실적인 공간을 연출할 필요가 있었다. 대신 겐로쿠 시대가 배경이었기 때문에 그 시대에만 통용되던 자재를 이용, 실제 사물이 가지고 있는 느낌을 살리는 데 집중한 건 특기할 대목이다. 1930년대가 배경인 이시이 소고의 <꿈의 미로>가 이를 설명할 좋은 예다. 이를 테면, 차장으로 등장하는 소녀(고미네 레나)가 사용할 버스를 수소문하던 이소미 도시히로는 1950년대에 제작된 것밖에는 구할 수가 없었다. 그는 문제의 버스를 사용하는 대신 외관을 다시 칠하고 내부의 의자라든지 손잡이 등 소품을 모두 1930년대 것으로 교체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며 그 시대의 공기를 되살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처럼 이소미 도시히로는 큰 그림으로써의 배경보다 사물을 활용하는 공간 구성에 특별히 신경 쓴다. 이는 그가 극단의 무대연출로 경력을 시작했기에 보여주는 특징이다. 아무래도 연극은,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이 제공하는 정보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 소품이 갖는 의미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소미 도시히로는 영화에서도 인간의 삶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일상의 자잘한 부분이랄 수 있는 작은 소품을 적극 끌어들인다. 이를 위해 상상력을 쥐어짜는 대신 등장인물의 삶을 간접 체험하며 관찰하는 쪽을 택한다. 극중 인물의 입장에서 생활하며 이들의 감정에 따라 보일 듯 말 듯 반응하는 공간의 미세한 변화를 캐치한다. <아무도 모른다>(2004)는 엄마 없이 생활하는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방식을 알아보기 위해 미술 스탭 중 한 명을 극중 배경인 아파트에 머물게 했다. 공책, 크레파스와 같은 학용품이 아이들이 머무는 아파트를 서서히 어지럽히며 공간을 잠식해가는 것은 이런 경험에서 비롯된 소산이다.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베란다에 정원을 설치한 것도 아파트에서 직접 생활했기에 가능했다.

이소미 도시히로가 연출한 공간은 미세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그에게서 인간에 대한 존경과 삶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의 공간 구성을 보고 있으면, 돋보기를 든 채 삶의 밑바닥에 밀착해 일상을 관찰하는 파수꾼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래서 그의 공간에는 따뜻함이 배어 있다. 이소미 도시히로는 공간으로 감정을 자아내는 흔치 않은 미술감독이다.


표현되는 것이 아닌 디자인된 공간


양홍삼 미술감독은 공간을 재현하면서 동시에 표현한다. 그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시쳇말로, 후오 팅샤오와 이소미 도시히로 작업의 절충에 가깝다. 인위적이지만 사실적이고, 꾸밈이 없지만 계산적이다. 이는 조소과 출신의 양홍삼이, 민병천 감독의 <유령>(1997)에서 미니어처 세트 디자이너를 맡으며 영화미술 세계에 발을 담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니어처 제작은 참고할 바탕이 있다는 점에서 사실적이고, 인위적인 손길을 가한 모형이라는 점에서 계산적이다. 현실을 가장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장르의 이율배반적인 속성과 닮았다. 박찬욱의 스릴러 <올드보이>(2003), 김태경의 공포영화 <령>(2004), 김지운의 누아르 <달콤한 인생>(2005), 김대승의 사극 <혈의 누>(2005), 봉준호의 괴수물 <괴물>(2006)까지 그의 필모그래피에 유독 장르 영화가 많은 건 우연이 아니다. 2000년 이후, 국내에서 제작된 중요한 장르 영화의 대부분을 양홍삼이 맡았다는 사실에 비춰 그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살펴보는 건 한국 장르 영화의 경향들을 일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모든 장르를 횡단하며 작업한 양홍삼의 공간 구성은 일관된 스타일이 없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장르의 수많은 규칙과 속성에 맞춰 공간을 구성하다보니 개인만의 색깔이 묻어나지 않은 것. 그는 공간을 재현하거나 표현한다고 말하지 않고 ‘디자인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일상적인 공간에 대한 리얼리티도 간과할 수 없지만 극중 배우의 동선에 따라 구성되는 영화적 공간의 리얼리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 작업하기 때문이다. 양홍삼은 시나리오를 확인하는 즉시 일차적으로 실제 공간에 대한 조사를 거친 후 현실적으로 보이게끔 큰 그림을 그린다. 그 후 디테일한 부분은 극중 인물이 살아온 과정을 상상해 영화적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디자인한다. 풀숏으로 봤을 때 리얼리즘이 드러나고, 미디엄숏이나 클로즈업이 들어갈 때 표현주의적인 면모가 살아나는 건, 그런 독특한 작업방식의 결과다. 최동훈 감독의 <타짜>(2006), 그중에서 고니(조승우)의 군산 집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세트로 지어진 고니의 집을 구성하기 위해 양홍삼 미술감독은 가장 먼저, 시나리오상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고니의 가족이 어떨 것인지를 상상했다. 고니는 학교 성적도 바닥을 기고 감정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사고도 많이 치지만 누나가 오는 것을 반긴다는 설정에 착안, 가족 간의 화합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가구는 약간 오래된 듯하지만 손때가 묻은 것들을 선택했고 방안을 포근하게 둘러싸는 형태로 배치했다. 한눈에 봐도 전형적인 방안 풍경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소품 하나하나에 클로즈업이 들어가면 리얼리즘적인 면모는 금세 사라진다. 가령, 장롱 표면에는 화투 패를 연상케 하는 자개장이 붙어 있다. 또한 창에 걸어둔 커튼이나 마룻바닥에 깔린 카펫에는 카드에서나 볼 법한 다이아몬드 문양이 기하학적으로 배치돼 있어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냥 스쳐지나가도 모를 무늬 하나에 도박을 소재로 한 영화의 컨셉을 새겨 넣은 것. 도시 외곽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곽철용(김응수)의 비닐하우스 도박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재현됐다. 실제 존재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양홍삼 미술감독은 최동훈 감독과의 협의하에 그저 재현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인간의 욕망이 집단으로 충돌하는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잭슨 폴락의 작업처럼 노란색과 갈색의 래커를 이용, 비닐하우스 벽면에 어지럽게 흩뿌렸다.

이처럼 일상의 공간을 변주하는 양홍삼의 작업은 철저히 인간의 욕망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그의 공간은 늘 일상과 욕망의 이중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경의 남쪽>(2006)에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두 개의 정치체제가 충돌했으며 <괴물>에서는 일상적인 공간인 한강이 살육의 현장으로 탈바꿈했고 <달콤한 인생>에서는 조폭의 이상과 현실이 어지럽게 겹쳤다. 이런 이중성은 장르 영화가 존재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그런 점에서 양홍삼의 작업은 모든 장르에서 공간 창조가 용이하다. 한국의 장르 영화는 그의 무개성한 구성이 빚어낸 개성적인 공간의 도움을 받아 세계적인 보편성을 확보했다








FILM2.0 335호
(2007.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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