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판타지아> 장건재 감독

janggun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올해 가장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한국영화다. 형식과 내용에 있어 한국영화사(史)에서 전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새로움과 신선함으로 가득하다. <회오리바람>(2009) <잠 못 드는 밤>(2012)에 이은 장건재 감독의 세 번째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장편임에도 예사롭지 않게 2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첫사랑, 요시코’는 일본 나라 현의 고조 시를 찾은 영화감독 태훈(임형국)이 가이드 미정(김새벽)의 도움을 얻어 고조 시의 여러 곳을 돌며 만난 사람을 토대로 차기작의 아이디어를 얻는 내용을 다룬다. 2장 ‘벚꽃 우물’은 1장의 태훈이 만든 영화로, 고조 시에 놀러 온 혜정(김새벽)이 그곳에서 감을 재배하는 청년 유스케(이와세 료)를 만나 나누는 하루의 로맨스다.

각각 영화 제작 과정에 대한 작품과 로맨스 영화는 흔하고 흔했지만, 이 둘을 연결해 독특한 미학을 선보인 작품은 없었다. 더 놀라운 건 1장에 대한 설정 정도만 제외하면 아이디어가 없는 상태에서 장건재 감독이 일본으로 건너가 즉흥에서 2장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맥락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세계적인 감독 가와세 나오미(<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2014) <너를 보내는 숲>(2007) 등)가 프로듀서로 참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제작 전부터 관심을 끈 작품이었다. 그러니까,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이성과 상상, 실제와 환상, 현실과 영화, 흑백과 컬러, 한국과 일본 등 여러 요소를 초월해 제목 그대로 영화적 ‘판타지’를 제공한다. 장건재 감독과의 인터뷰는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언론시사회가 있던 다음 날 저녁 약 1시간 동안 이 영화의 배급과 마케팅을 맡은 (주)인디스토리의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올해 본 한국영화 중 제일 좋았어요.
제작비가 <잠 못 드는 밤>에 비해 200배나 더 들었어요. 제작 여건과 다르게 물리적으로는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어요. 11일 동안 촬영해야 했거든요. 게다가 한일 합작이라 중간에 통역도 있고 해서 이를 돌파하기 위해 열심히 했어요.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에요. 이현정 편집기사와 함께했는데 제게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내 기량으로는 최고의 작업인 것 같다.”

가와세 나오미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작품이라 제작 단계에서부터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졌었죠.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배경이 되는 나라 시에서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격년으로 영화제를 개최하고 있어요. 그중 경쟁부문이 있는데 2012년에 <잠 못 드는 밤>이 초청을 받았어요. 대상을 받으면 부상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게 해줘요. 나라영화제가 격년으로 운영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영화제가 끝나면 대상을 받은 감독이 1년 동안 영화를 찍고 그 결과물을 그다음 해에 발표하는 거예요. 제가 참석한 해에 원래는 뉴질랜드 감독의 작품이 대상이었어요. 근데 한 달 후 저에게 연락이 왔어요. 뉴질랜드 감독이 사정이 있어서 못하게 됐다. 고민하다가 수락한 후 제가 물었죠. 왜 나냐? 유력한 대상 후보였대요. (웃음)

립서비스 같은데요. 농담이고요. (웃음) <잠 못 드는 밤>을 좋게 본 거군요.
당시 나라영화제에 참석해서 제가 가와세 나오미 감독님에 대한 팬심을 숨기지 못하고 ‘덕질’을 했거든요. (웃음) 당신의 영화를 모두 본 팬이다, 당신처럼 나 역시 내 경험과 이야기를 영화에 반영하는 스타일이다, 등등. <잠 못 드는 밤>에 대해서 많은 걸 궁금해하더라고요. 이후 <잠 못 드는 밤>으로 여러 영화제를 돌면서 나라영화제 프로젝트로 영화를 찍는다는 얘기를 했어요. 제가 세 번째로 참여하게 된 건데 그전의 감독들이 가와세 나오미 때문에 너무 힘들어했다, 쉽지 않을 거다, 라는 반응을 보이더군요.

안 그래도 가와세 나오미 감독과 함께한 소감이 궁금했어요. 프로듀서로는 악명이 높군요. (웃음)
프로듀서 역할을 맡았지만, 감독으로 제시하는 게 많았어요. 나라는 가와세 나오미의 거의 모든 영화에 배경으로 등장할 만큼 그녀에게는 세트나 다름없는 곳이잖아요. 자신에게 인상적이었던 풍경을 보여주는데 저에게는 마음에 와 닿는 곳이 없었어요. 이후 시간을 두고 둘러보려 했지만, 제작 여건상 그럴 여유가 부족했어요. 가와세 나오미 감독님은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두 파트 모두를 다큐멘터리로 찍기를 바랐어요. 사실 저는 시나리오가 없어서 말로만 설명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OK를 하지 않았어요.

촬영현장에서는 어땠나요?
워낙 바쁜 분이라 크랭크인 첫날 현장에 올까, 했는데 정말 오셨더라고요. 카페 안의 사람들을 비추는 영화의 첫 장면이 첫 번째 테이크였어요. 저는 항상 매 영화의 첫 번째 신이 시간이 가장 오래 걸려요. 그런데 그런 타이밍이 아닌데 여러분 저는 가와세 나오미이고, 이 분은 한국에서 온 장건재 감독이다, 소개하시더라고요. 도와주시려는 거였는데 제가 좀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이 현장에서 나가시지 않으면 이 장면 안 찍겠다고 했어요. 그때 가와세 나오미 감독님이 되게 당황해하셨어요. 제가 작심하고 얘기를 했어요. 현장에서 나가신 후에도 제 주변을 배회하시더라고요. (웃음) 자신의 이름을 걸고 신인 감독을 데리고 와 자신의 동네에서 영화를 찍는 건데 얼마나 불안하셨겠어요. 이해해요.

저희 너무 가와세 나오미 감독님 뒷담화만 하는 거 아닌가요? (웃음)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어떤 상황이 와도 쓰러지지 않을 것처럼 강한 사람이에요. 기본적으로 다큐멘터리스트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주변 사람과의 친화력이 강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아보려는 노력이 대단해요. 상대방으로부터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능력이 탁월해요. 가와세 나오미 감독님의 조감독을 해서라도 사람을 대하는 시선의 통찰력을 배우고 싶은 심정이에요. 이번 작업을 하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된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보면서 꽤 정교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구상한 형태가 아니었다고요?
1장은 자료 조사 목적으로 고조를 방문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취재한 글을 시나리오 형태로 옮긴 거예요. 2장은 지금과는 다른 픽션이었어요. 배경도 추운 계절이라 가을이나 겨울에 찍고 싶었지만, 일본 프로덕션에서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그 때문에 안 가게 되면 프로젝트가 엎어지니까 일단 가자. 배우들은 1장만 찍는 줄 알았어요. 1장 찍고 나서 (김)새벽 씨에게 좀 더 남아달라. 1장을 촬영한 후 3일 동안 쉬면서 이와세 료 씨에게는 감 청년을 연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언질을 줬어요. 새벽 씨에게는 어떤 역할을 줘야 할까? 새벽 씨 본인을 반영한 여배우로 해서 고조에서 감 청년과 만나 벌어지는 여행지 로드무비로 찍자. 그때까지 2장이 로맨스 형태를 띨지는 몰랐어요. 대신 인물의 감정을 따라 매일 장소를 정하고 배우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대본 없이 한땀 한땀씩 그날의 분량을 찍어나갔어요. 극 중 혜정이 즉흥적인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2장은 어떤 이야기가 될지 전혀 예측을 못 하는 즉흥적인 방식의 영화 만들기였어요.

2장에 대한 아무런 준비가 없었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연기를 보여준 김새벽과 이와세 료의 연기가 새삼 다르게 보이는데요.
이와세 료는 2010년부터 알았던 친구예요. 영화제에서 만나서 친해졌고요. <한여름의 판타지아> 1장을 준비하면서 도시에서 시골로 와 시청에 근무하는 청년이라는 캐릭터를 준비했어요. 이와세 료가 했으면 좋겠더라고요. 다행히 일정이 맞아서 같이 하게 됐어요. 새벽 씨는 일본어를 하는 배우를 주변에 부탁해서 알게 됐어요. 양심적 병역거부로 지금은 감옥에 있는 김경묵 감독이 새벽 씨와 <줄탁동시>(2011)에서 함께 작업했었는데 자리를 마련해주셨어요. 임형국 선배는 감독 역할을 찾다가 불현듯 생각이 나서 일본 출국 3일 전에야 캐스팅했어요.

1장의 시청 직원 유스케는 2장에서 감 청년으로 등장해요. 물론 다른 인물이지만, 모두 이와세 료 배우가 연기했죠. 그처럼 1장과 2장의 연관성을 지켜보는 게 흥미로워요.
1장과 2장은 각각 감독이 어떻게 창작의 재료를 찾고 그것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설계도와 완성본의 관계 같아요. 2장의 즉흥적인 연출도 그렇지만, 1장에서의 영화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로 그들의 사연을 끄집어내는 작업도 저에게는 처음 하는 시도였어요. 이번 작업을 하면서 제가 가진 다른 가능성을 본 거 같아요.

1장은 흑백, 2장은 컬러로 촬영된 방식이 독특했어요. 1장은 극 중 태훈이 백지상태에서 고조의 사람들을 알아가는 과정, 2장은 이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색을 부여하는 과정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2장에 대해서는 컬러로 찍을 생각은 있었어요. 그 외에는 전혀 계획한 게 없었어요. 1장에서 흑백을 사용한 건 제가 실제로 고조라는 공간을 방문해서 보고 생명력을 잃은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게다가 다큐멘터리의 과정이 반영되어서 흑백이 어울릴 것 같았어요. 사실 저에게 흑백이란 영화가 필름이던 시절을 생각나게 해요. 촬영감독님께도 고전영화처럼 우아하고 고전적인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 대신 2장에서는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느낌으로 컬러를 가져갔어요.

그에 맞춰 카메라의 움직임도 변화합니다. 1장의 카메라는 고정숏이 많고 2장에서는 많이 움직이죠. 특히 1장의 고정숏을 보면서 감독님이 낯선 공간에 왔을 때 취하는 태도 같더라고요. 조심스럽게 예의를 갖추고 해당 공간을 알아가기 위해 예의주시하는 느낌이랄까요.
와~ 그럴싸한데요.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작업하면서 제 태도는 딱 하나였어요. 합작은 엎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합작영화를 경험한 적 있는 프로듀서 분들에게 많이 자문을 구했어요. 결론은 ‘영화를 완성하자!’였죠.

낯선 환경에서의 새로운 시도로 완성된 <한 여름의 판타지아>는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아트하우스 계열의 영화는 한국에서 영화진흥위원회와 같은 공공기관의 지원이 없으면 제작비를 구하는 게 어려워요. 그래서 합작을 염두에 두고 이에 대해서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성사가 된 게 <한여름의 판타지아>예요. 다행히 가까운 일본에서 작업을 하게 됐는데 저에게는 좋은 공부였어요. 가와세 나오미라는 강한 프로듀서를 만나 제가 원하는 바에 대해 거절당하기도 하고 크게 충돌하지 않으면서 설득하며 나아가는 과정을 겪다보니 ‘나도 센 놈이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게 되면 필요한 태도를 훈련한 거죠.

기자시사회 이후 <한여름의 판타지아>에 평가가 좋아요. 개봉을 앞둔 지금의 심정은 어떠세요?
흥행으로 직결될지는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저의 이전 작품과 다르게 영화의 존재감이 많이 알려지는 것 같아 감독으로서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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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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