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 그의 변신을 기대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석규의 신작 소식을 들었다. 손재곤 감독의 <이층의 악당>이라는 영화다. 여기서 한석규는 정체불명의 소설가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이중간첩>(2003) 이후 매번 흥행에 미끄럼틀을 탔던 그가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콤, 살벌한 연인>(2006)에서 독특한 대중영화적 감수성을 보여줬던 손재곤 감독의 차기작에 출연했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다. 흥행에 별 재미를 못 봤던 영화들의 출연을 결정하면서 보여줬던 특정한 선택 기준의 실패를 <이층의 악당>에서는 반복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좌절과 고뇌

스크린 데뷔작 <닥터 봉>(1995)부터 최근작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2009, 이하 ‘<백야행>’)까지, 그의 필모그래프를 살펴보면 몇 가지 눈에 띄는 특징이 발견된다. 캐릭터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영화배우 생활 초기 의사(닥터 봉), 대학 강사(<은행나무침대>(1995)), PD(<접속>(1997)) 등과 같은 지식인 느낌이 강한 배역을 맡다가 형사(<텔미썸딩>(1999) <주홍글씨>(2004)), 군인(<쉬리>(1999) <이중간첩>) 등과 같은 경찰 계열을 거쳐 악인(<그때 그사람들>(2005) <구타유발자들>(2006))의 역할로 점진적인 변화를 꾀하여왔다. 그럼에도 특징적인 이미지로 기억되는 것은 다양한 캐릭터 변화에도 불구, 하나같이 고뇌하거나 결국 좌절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백야행>에서 연기했던 전직형사 한동수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해결 못한 사건을 가슴에 묻고 야인으로 살아가다 끝내 비극적 최후를 면치 못하는 또 한 명의 형사이자, 또 한 명의 실패한 인물이었다. 사실 한석규의 캐릭터가 보여주는 좌절한 지식인의 이미지(형사와 경찰, 군인은 물론 심지어 조직폭력배로 출연했던 <초록물고기>(1997) <넘버3>(1997)에서도 그는 유능하고 특출한 인물로 묘사됐다.)는 1990년대까지 유효한 것이었다. 예컨대,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우리는 민주화를 위해 그렇게 투쟁하고 항의하였지만 늘 실패하거나 좌절을 맛보기 일쑤였다. 원하는 것을 위해 고뇌하고 투쟁했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대개가 좋지 않았던 것을 비추어 볼 때 1990년대의 한석규는 시대정신을 그대로 반영한 캐릭터를 연기했던 셈이다.

그가 1990년대 작품에서 승승장구했던 것도, 2000년대 이후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2000년대는 1990년대와 또 달라서 인터넷이 활성화됐고 성숙한 민주주의를 성취했으며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세계적인 업적도 이뤘다. 이제 고뇌하는 지식인은 과거의 초상이 되었다. 시대는 심각한 구호와 머리띠 대신 댓글과 놀이로써 현실에 저항하는 세대의 등장과 함께 빠르게 변모했다. 이전까지 흥행 불패를 기록하던 한석규가 2000년대 들어 처음 출연한 <이중간첩>으로 첫 고배를 마신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남북 화해 무드가 정착한 상황에서 고정간첩이라는 다소 철지난 배역도 그렇거니와 무거운 시대 공기에 무릎 끓는 캐릭터의 시효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그런데 한석규 본인은 그가 연기한 캐릭터의 유약한 이미지가 연달은 흥행 실패를 불러온 것으로 분석한 것 같다. <주홍글씨>의 성공에만 집착하는 강력계 형사를 시작으로, <그때 그사람들>의 안하무인격의 경호과장, 그리고 <구타유발자들>의 폭력 교통경찰과 <눈에는 눈 이에는 이>(2007, 이하 ‘<눈눈이이>’)의 경찰청의 전설적인 특별수사반 반장까지, 일련의 선인과 악인의 경계에 선 선 굵은 인물로의 변신을 꾀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한석규의 변신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이들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에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관객들은 한석규 캐릭터의 겉모습의 변신을 원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다른 무엇을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이들 캐릭터 역시도 약속이라도 한 듯 실패하거나 좌절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관객은 2000년대라는 새 시대의 정신을 만끽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한석규만 홀로 1990년대를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신인감독

캐릭터적인 측면 외에 한석규의 필모그래프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유독 연출가 데뷔작의 출연이 많다는 점이다. <닥터 봉> 이후 그는 17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5편(<쉬리><텔미썸딩><주홍글씨><그때 그사람들><구타유발자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신인감독의 작품이다. 더군다나 강제규 감독(<은행나무 침대><쉬리>)과 장윤현 감독(<접속><텔미썸딩>)을 제외하면 한 편 이상 함께한 감독이 없다는 점에서도 한석규는 기성감독보다 신인감독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 뛰어나다는 정평을 들었던 배우이기도 했다. 한석규와 데뷔작을 함께 했던 강제규, 이창동, 허진호 감독 등이 지금 한국을 대표하는 연출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는 증명이 된다.

지금도 그는 신인감독들의 작품에 출연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흥행 결과에서나 비평적 평가에서는 예전만 못하다. 그럼에도 신인감독의 작품을 계속해서 선호하는 것을 보면 이들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한석규와 직접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어 확신은 할 수 없지만 필모그래프를 살펴봤을 때 가능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그렇다면 한석규의 고집 (혹은 모험심)은 높이 사줄만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가 다소 시대변화에 둔감한 편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2000년대 이전과 이후의 신인감독을 대하는 충무로 제작자들의 시선이나 그들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로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충무로에 불어 닥친 새바람은 지금의 한국영화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데 밑거름 역할을 했다. 신선한 기획력과 과감한 투자, 그리고 모험적인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 제작자들이 다수 등장했고 그들의 지지 속에 가능성 있는 신인 감독들은 자신의 역량을 맘껏 뽐낼 수 있었다. 홍상수(<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김기덕(<악어>(1996)), 임순례(<세친구>(1996)), 김지운(<조용한 가족>(1998)), 임상수(<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이재용(<정사>(1998)), 정지우(<해피엔드>(1999)), 김태용과 민규동(<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 등 지금의 한국영화를 이끄는 감독들이 당시에 대거 데뷔했고 그런 풍토 속에서 한석규는 강제규, 이창동, 허진호 등의 감독을 만나 배우 경력을 꽃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2000년 들어 금융자본의 유입이 가속화되고 제작부터 배급까지 수직 계열화된 대형 영화사가 등장하면서부터 충무로는 흥행 결과에만 집착하는 풍토로 빠르게 변모했다. 많은 제작자들이 신인감독의 능력을 키우기보다 그들을 통해 돈 되는 영화 만들기에만 몰두, 개성 있는 신인감독들의 출현은 급속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바로 이 점이 2000년대 들어서도 신인감독과의 작업을 선호하는 한석규가 1990년대와는 다른 결과를 낸 결정적인 이유라 할 것이다.

한석규라는 배우는 송강호와 달라서 캐릭터를 자기화하기보다는 자기를 캐릭터에 맞추는 연기에 능하다. 송강호는 출연한 영화가 영 맹탕이어도 연기만큼은 인상적인 경우가 많은데 반해 한석규는 영화가 힘을 못 쓰면 연기마저도 묻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한석규에게는 그 어느 배우보다 연출자의 능력이 중요하다. 한석규가 가장 최근에 출연했던 <백야행>은 그런 점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영화의 전형이었다. 고뇌하는 지식인의 이미지에 살짝 변주를 가한 형사 캐릭터의 반복이었으며 전혀 연기 조율이 되지 않은 손예진과 고수 사이에서 한석규는 고군분투했지만 불협화음을 빚고 말았다. 그리고 흥행에서도, 영화적 평가에서도 <백야행>은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이층의 악당> 과거와는 다른 선택

한석규가 이번에 출연한 <이층의 악당>은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가 이사 오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다고 알려진다. 여기서 그는 정체불명의 소설가 창인을 맡아 여자가 집을 비우면 몰래 집안을 수색하는 미스터리한 인물을 연기한다. 그 외에는 <이층의 악당>의 이야기에 대해 더 알려진 것이 없어 한석규가 연기한 인물의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지만 그가 기존해 연기했던 캐릭터와는 확실히 차별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연출을 맡은 손재곤 감독이 독특한 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인상적인 코미디 연출에 능하다는 점에서 이번에야 말로 한석규가 새로운 연기를 선보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확실히 한석규의 이번 출연 결정은 여러 모에서 과거와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그의 필모그래프에서 유독 많은 수를 차지하는 형사 계열의 캐릭터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어딘가 모르게 엉뚱한 기운을 풍기는 창인이라는 캐릭터에서 고뇌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발견하기 힘들다는 점도 그러하며 <달콤, 살벌한 연인> 이후 무려 4년 동안 자기 색깔을 드러낼 수 있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두문불출한 손재곤 감독의 작품이란 점에서 특히 그렇다. (아무리 전작이 크게 성공했어도 스스로 만족할만한 작품을 찾기 위해 4년을 투자한다는 건 지금 같은 보릿고개에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런 뚝심은 지금의 신인감독에게 기대할 수 있는 덕목은 아니다.) 

지금의 관객은 더 이상 고뇌하고 좌절하고 실패하는 한석규 캐릭터를 원치 않는다. 지금 시대는 겉모습의 변신이 아닌 캐릭터 자체의 변신을 꾀한 한석규의 새로운 연기를 원한다. <이층의 악당>은 그래서 더 없이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가 이번 영화를 통해 과거의 명성을 재현하기를 기대해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딴지일보
(2010.6.15)

2 thoughts on “한석규, 그의 변신을 기대한다”

    1. 오~ 이런 고급 정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 전에 맡았던 역할과는 많이 다른 것 같군요. 근데 이거 미리 알고 보면 재미 없는 건 아닐까요? ^^;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