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워>를 보았다. 예상한 그대로였다. 할리우드에서 크게 히트한 고전영화 <타워링>(1974)의 설정과 제목을 가져와 한국의 잘나가는 배우를 포진시킨 후 재난을 묘사하는 한국의 기술력이 이 정도까지 왔다는 것을 자랑스레 펼쳐 보이는 것이다. 기자시사회를 통해 이를 본 언론들도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온 기술력에 초점을 맞춘 기사를 양산하고, 대기업 제작, 배급인 까닭에 안정적인 극장 상영으로까지 이어지니 박스오피스 1위에, 순조로운 흥행 세를 보이는 건 뭐,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니까, <타워>는 소위 말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전형이다. 그것이 어디 <타워>뿐이랴. 우리는 극장가의 성수기로 불리는 여름과 겨울 방학 시즌이면 이런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몰려들고 열광한다. 이번 겨울 극장가만 하더라도 블록버스터 규모의 영화는 아니지만 일곱 살 지능을 가진 아버지의 부성애 연기가 일품이었던 숀 펜의 <아임 엠 샘>(2001)을 벤치마킹(?)한 <7번가의 선물>이 대기 중에 있다. 제목만 하더라도 처음엔 <12월 23일>이었다가 지금의 형태로 바뀌었는데 모 케이블 TV에서 방영됐던 <7번가의 기적>을 염두에 둔 듯하다.
지난여름 1,300만 관객을 모으며 역대 한국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도둑들>도 그렇다. 전반부 강탈영화의 전개는 <오션스 일레븐>(2001)을, 후반부 액션영화 연출은 <순류역류>(2000)를 닮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도둑들>이 마이클 만의 <도둑>(1981)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제목의 유사성은 물론이요, 극 중 프랭크(제임스 칸)가 낮에는 카센터 운영자, 밤엔 도둑인 것처럼 뽀빠이(이정재)도 그러하고 케이퍼 무비로 흐르다가 복수의 테마로 바뀌는 전개도 두 영화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다.
세 작품을 예로 들었지만 범위를 2012년 여름 시장 전으로 넓혀보면 그 수는 더욱 방대해진다. 성공한 해외영화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와 영화화하는 것에는 모방 이상의 전략적인 그 무언가가 감지된다. 이 때문에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논란의 위험을 떠안고도 계속해서 성공할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다. 다름 아닌, ‘할리우드 영화 뺨치는 수준’에 대한 한국 관객들의 자부심이다. 한국 관객들의 경우, 블록버스터를 넘어 할리우드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기술적인 완성도를 함께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할리우드가 콘텐츠, 즉 소프트웨어를 창조하는 쪽이라면 한국 영화는 순전히 저비용 고효율의 기술력에 기댄 하드웨어를 생산하는 쪽에 가깝다. 이처럼 할리우드와 한국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배경은 어딘가 무척이나 낯익은 풍경이다. 우리 손에 늘 쥐어 있는, ‘애플 vs 삼성’의 구도로 펼쳐지고 있는 스마트폰 전쟁 말이다. 시장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대결은 사실상 ‘문화 vs 기술’의 양상을 띠고 있다.
양사가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까닭에 용호상박으로 비치지만 이는 미래지향적인 아이디어와 전근대적인 마인드의 충돌이 빚은 풍경이기도 하다. 한쪽은 아이디어에 바탕을 두고 단순히 폰 판매를 넘어 문화를 전파하는 전략을 편다. 반면 다른 한쪽은 경쟁사가 개척한 아이디어를 가져와 뒤쳐지지 않는 기술력으로 상품을 만든 후 판매고를 높이는 데 주력한다. 그렇다보니 한쪽이 시장의 유행을 선도하는 것에 반해 한쪽은 유행을 따라가기에 급급한 것이다.
그래서 판매량이 사상 최대이고, 관객 수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고 해도 그냥 시큰둥할 뿐이다. 사실 한국영화계가 2012년에 1억 명의 관객을 돌파함으로써 행복한 한 해를 보냈지만 그 결실이 영화계에 고루 퍼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영화계가 창조적인 문화 생산에 있어서 취약하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1천만 영화 두 편, 4백만 이상 관객동원 영화 9편을 배출한 2012년을 두고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2003년이야말로 그런 수식에 걸맞은 해가 아니었나 생각하는 쪽이다.
비록 관객 수는 적었을지 모르지만 2003년은 창조적인 한국 영화들이 대거 쏟아졌던 해로 기억된다. 한국 영화사상 전례 없던 외계인 영화 <지구를 지켜라!>가 있었고, 범인이 잡히지 않는 초유의 범죄영화 <살인의 추억>이 발표됐다. 또한 ‘벽지 공포’라는 말을 탄생시킨 <장화, 홍련>이 개봉했고, 고급한 사극을 지향한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도 그해에 나왔다. 전 세계인을 열광시킨 <올드보이>도 2003년의 가장 중요한 영화 중 한 편이었고, 창조적이라기에는 뭐하지만 아무튼, 최초의 1천만 영화 <실미도>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만 하더라도 충무로에는 창조적인 기운이 넘쳐났다. 지금의 ‘한국형’과는 달라서 <살인의 추억>의 예처럼 할리우드가 성립한 범죄영화의 공식을 새롭게 비트는 방식으로 한국 영화의 정체성이 전 세계에 어필하던 때였다. 그것이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이후 10년 동안 한국 영화(계)는 변해도 너무 변했다. 대기업 자본이 영화계로 들어오고 그들의 시스템이 주류가 되면서 이제 영화는 창조적인 행위보다 공장식의 찍어 팔기 형태로 빠르게 변모했다. 그리고 그것이 먹히고 있다.
제목 짓기 역시 그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따라하기가 횡행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머리글에서 언급한 영화 들 외에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그대로 가져온 경우(1939년 빅터 플레밍이 연출하고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안 리가 출연했던 할리우드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 <내가 살인범이다>처럼 원래 있던 소설 제목(리처드 매드슨이 쓴 <나는 전설이다>)을 변용한 사례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관계자들은 관객들의 관심을 끌기 비교적 손쉽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원래 영화를 보지 못했을지라도 어디선가 들어서 귀에 익은 만큼 자신들의 작품을 관객들에게 각인시키기 용이하다는 거다. 안 그래도 지난해 상반기 3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의 관계자로부터 개봉 전 좋은 제목을 짓지 못하고 있다며 아이디어가 있으면 알려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때까지 나왔던 제목의 목록을 보여주는데, 이런 세상에! 유명 영화와 드라마와 소설 제목을 그대로 가져오거나 살짝 변형한 것 투성이었다.
비단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 규모의 제작사나 수입사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이와 같은 행태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최근 개봉 중인 영화의 모 감독은 이를 두고 ‘오마주’라는 얘기를 하지만 급조한 변명 이상으로는 들리지 않는다. 이 단어에 존경의 의미에 더해 창조적 변형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는 걸 모르는 걸까? 창조적 영화 혹은 장면에 대한 존경을 모방이나 베끼기로 가져간다는 것은 오마주의 뜻과는 배치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제목 짓기의 경우도 그렇다. 영화도 문화유산의 형태 중 하나인데 오리지널리티를 지켜주는 건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화를 확산하는 건 결국 창조다. 물론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무수한 따라 하기의 실패 사례 속에서 창조는 꽃피운다. 다만 그것이 힘들다고, 어렵다고, 인내하기 힘들다고, 손쉽다고, 베끼고 모방하는 수준에 그친다면 그건 결국 자기만족 그 이상의 성과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법이다. 몇몇 크게 흥행에 성공한 한국 영화와 그에 열광하는 관객들을 보면 혹시나 ‘한국형’이라는 것에 취해 너무 자기만족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할리우드 작품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창작자) ‘할리우드 영화 보는 것 같아서 뿌듯하던데요. 화이팅!'(관객)
해외에서는 한국 영화를 두고 새롭다, 창조적이다, 라는 평가를 곧잘 내리고는 한다. 그런데 그 새로움을 창조하는 감독과 영화의 목록이 어느 순간부터 제한적이 되어간다는 느낌이다. 사실 새로움도 유통기한이 있어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평범한 것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환경은 중요한 법이다. 한국 영화의 기술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 이제 그 기술력을 좀 더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소재 발굴과 형식의 발견이 시급하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변화가 절실한 것이다. 지금은 아이디어가 경쟁이 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ARENA
2012년 2월호
< 타워> 보면서는 (언제는 안 그랬느냐만은) 정말 관객으로서 우롱 당하는 기분이었어요.-,.-;;;
미래의 거장, 최미연 감독님께서 좋은 영화 만들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