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스티븐 킹, 가능할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장르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스티븐 킹의 열혈 팬이다. 스티븐 킹의 신작이 국내에 발매될 때면 혹시나 책이 없어지기라도 할까봐 부러 서점을 찾아갈 정도다. <미저리> <죽음의 무도> 등을 번역한 전문 번역가 조재형이 운영하는 스티븐 킹의 팬 블로그(http://stephenkingfan.tistory.com)에도 시간이 될 때면 찾아가는 편이다.

얼마 전 이 팬 블로그에 들렀다가 스티븐 킹이 1977년에 발표한 <샤이닝>의 속편 <닥터 슬립>을 올해 미국에서 출간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꽤나 흥분됐다. 스티븐 킹은 그렇게 발표하는 작품마다 풍선 속에 바람을 불어 넣듯 전 세계 독자들의 기대감을 빵빵하게 채울 줄 아는 작가다.

마침 ARENA 편집부로부터 스티븐 킹이 연관된 재미난 기획을 청탁받았다. ‘한국의 스티븐 킹이 가능할까?’라는 요지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이었다. 얼씨구나, 하는 기분으로 수락했다. 장르문학 관계자들의 생각을 알아볼 수 있음과 동시에 한국 장르문학의 현재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장르문학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추세다. 출판계에서는 일본소설이 인기를 얻으면서 일본의 장르문학이 그야말로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고 이에 탄력을 받아 영미권의 유명 장르문학 발매도 활발히 이뤄지는 중이다. 특히나 영상 쪽에서 장르문학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각광을 받으면서 장르문학을 발표하는 출판사가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해외 장르문학이 꾸준히 소개되며 인기를 얻는 것과 달리 국내 장르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덜한 편이다. 이에는 몇 가지 원인이 존재한다. 우선 해가 갈수록 독서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하나다. 그러다보니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작가의 발굴이라는 모험을 택하기보다 검증된 작가들의 작품을 발표해 리스크를 줄이려는 쪽을 택한다.

또 하나는 한국 문학계의 특수성이다. 예로부터 한국은 순문학에 대한 전통이 강해서 상대적으로 장르문학에 대한 평가가 박한 편이다. 예컨대, 순문학의 경우, 작가들이 등단하고 평가를 받을 만한 창구가 꾸준한 것에 반해 장르문학은 출판사가 책으로 만들어주지 않으면 딱히 독자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가 힘든 것이다.

‘한국의 스티븐 킹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이와 같은 한국 장르문학의 한계를 인식하고 접근해야만 한다. 문학동네 장르소설 임프린트 ‘엘릭시르’의 임지호 편집장은 “그래서 스티븐 킹과 같은 대형작가의 출현은 지금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돌파구라고 생각한다.”고 견해를 밝힌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문학 역시 영화나 음악이나 만화나 드라마처럼 사람들이 오락거리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책을 읽자는 캠페인이 활발하고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존재하지만 교양의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까닭에 장르소설과 같은 오락물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독서 인구의 유입에 장벽만 높아진다는 것이 그가 보는 우리 문학의 현실이다.

이에 임지호 편집장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한국의 스티븐 킹이 출현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이다. 이를 위해서는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각종 대중문화처럼 책 역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즉, 책에 대한 재미를 느낄 수 있게끔 어른들이 장르소설을 읽으면 도움이 안 된다는 식의 편견을 버려야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조성되는 장르문학의 환경? 미국의 스티븐 킹이나 일본의 에도가와 란포와 같은 상징적인 존재의 출현을 기대해 봄직하다. 그러면 장르소설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를 롤 모델 삼아 데뷔하는 작가들의 등장도 활발해진다. 그에 따라, 담론이 될 만한 이슈도 생겨나고 그와 같은 프로세스를 통해 장르문학의 저변은 보다 폭넓게 이뤄질 것이다.

여기서 방점은 ‘장기적인 계획’이다. 한국의 장르문학은 미국이나 일본과 비교, 워낙 역사가 일천하고 문화의 파이가 협소하다보니 그걸 따라잡기 위해서는 단계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시도가 국내 출판사의 사정상 가능할지 의문을 제기하는 이가 있다. 미야베 미야키의 작품을 꾸준히 소개하고 있는 ‘북스피어’의 김홍민 대표다.

“대형작가가 나오기 위해서는 작가의 층이 두터워질 필요가 있다. 점차적으로 작가들의 발전 가능성을 높여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를 시도할 만한 출판사들이 1억 고료와 같은 행사로 손쉽게 해결하려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의 말인 즉슨, 그렇게 해서 작가를 발굴하더라도 그때만 반짝할 뿐 후속 작이 미비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지속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스티븐 킹에 대한 김홍민 대표의 답변은 부정적이다. 그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그런 행사를 통해 갑자기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작품을 읽어보면 오래전부터 장르소설을 읽어오고 써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란다. 해외의 장르소설과 견주어 보면 수준 미달인 작품도 많고 그 정도가 국내 장르문학의 맥시멈이라면 한국의 스티븐 킹이 어렵지 않느냐는 거다.

김홍민 대표는 오히려 반문한다. “아등바등해서 한국의 스티븐 킹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한국의 장르문학과 저변이 넓어지길 바란다는 전제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만들어지면 모를까 인위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일본이나 영미권의 장르문학을 따라잡기에는 늦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잘하는 순문학을 하면 된다. 추리도, 공포도, 미래소설도 모두 잘 쓸 수는 없지 않나.”

언제나 좋은 이야기에 목말라하는 영화계의 입장에서는 스티븐 킹과 같은 작가의 출현이 절실하다. 현재 차기작으로 공포물을 염두에 두고 있는 이해영 감독(<페스티발>(2010) <천하장사 마돈나>(2006))은 한국에서 장르영화를 만들기 힘든 점 중 하나로 국내 장르문학의 척박함을 꼽는다. “특정 장르의 레퍼런스를 찾다보면 외국의 것 일색이고, 그 때문에 필연적으로 어떻게 한국화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직면한다.”

문학과 영화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황이 된 지금 그의 말은 좀 더 파고들 필요가 있다. 다들 알겠지만 스티븐 킹의 소설이 발표되기라도 하면, 아니 이미 그 전부터 영화의 판권을 사기 위한 제작사들 간의, 연출권을 따내기 위한 감독들 사이의 경쟁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이 과정에서 제작사와 감독이 결정이 되면 스티븐 킹의 소설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드라마 혹은 영화로 만들어진다.

2009년 발표된 <언더 더 돔>은 CBS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을 눈앞에 두고 있다. 2011년에 발매된 <11/22/63>은 일찌감치 <양들의 침묵>(1991)의 조나단 드미 감독을 연출자로 내정하고 영화화를 진행 중에 있다. (최근의 현지 소식에 따르면, 각본 작업에 참여한 스티븐 킹과의 의견 차이로 조나단 드미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다시 말해, 스티븐 킹의 소설은 영상으로 제작되기까지의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편에 속한다.

그에 반해, 한국에서 장르소설을 영화화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의욕적으로 영화화에 나섰다가 프로젝트가 무산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주로 일본의 장르소설을 가져오는 까닭에 우리 정서와 상황에 맞게 각색 작업을 하느라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하나요, 한국의 장르소설을 원작으로 삼을 경우, 작가들의 지명도가 높지 않아 새로운 것을 낯설어하는 국내 영화 시장에서 투자를 얻고 스타 배우를 캐스팅하기까지가 쉽지 않은 것이다.

다만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을 각각 영화화한 변영주 감독의 <화차>와 방은진 감독의 <용의자 X>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장르소설을 확보하기 위한 국내 제작사 들의 발걸음이 급해졌다. 사실 일본 장르소설을 향한 국내 제작사 들의 열렬한 구애는 이미 몇 년 전부터 목격된 상황이다. 문제는 너무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판권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는 것.

아마 그런 점에서라도 우리 영화계에 있어 한국의 스티븐 킹의 출현은 희망사항이라기보다는 숙원에 가깝다. 그리고 이해영 감독은 웹툰 작가의 예를 들며 그와 같은 장르작가가 한국에서도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강풀이 대중적으로 높은 호응을 얻고 있는 건 장르적인 관점에서 접근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장르의 쾌감을 소비하는 시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장르적 토양이 바탕이 되어 한국의 스티븐 킹을 불러내지 않을까?”  
  
<신세계>(2013)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수준급의 갱스터물이다. 그동안 한국영화는 <조폭마누라>(2001)를 필두로 조폭을 소재로 한 갱스터 장르를 다양하게 소비하며 장르의 정체성을 모색해왔다. 10년이 훌쩍 넘는 무수한 시도와 실패의 역사 속에서 <신세계>는 한국형 갱스터물의 어떤 전범을 마련했다. 이와 같은 사례가 우리의 장르문학 시장에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한국의 스티븐 킹이 단기간에 만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망상이다. 오랜 시간을 인내하면서 장르작가를 양성하고 수많은 실패 들을 반면교사삼아 단계별로 성과물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와 동시에 오락으로써 책이 가진 재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시간을 마련하는 것 역시 병행되어야 함은 자명하다. 결국 ‘한국의 스티븐 킹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우리의 열악한 독서 환경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와 맞닿아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스티븐 킹은 반드시 필요하다.’

ARENA
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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