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볼 만한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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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칼럼과 평론을 업으로 삼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어떤 영화가 볼만해요?” 그럴 때마다 직업 정신이 발동해 (내 기준으로) 괜찮은 영화들을 추천해주고는 한다. 이거 은근히 신경 쓰이는 일이다. 상대방의 취향과 엇나가는 작품을 권했다가는 얼마간 연락이 끊어지는 불상사를 각오해야 한다.

얼마 정도는 과장이다. 그만큼 사람마다 영화를 보는 눈이 제각각이라는 의미다. 요즘에는 타율이 꽤 높은 편이다. 웬만해서는 볼멘소리를 듣지 않는다. 어떤 영화를 추천했냐고? 사실 특정 영화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게 비결이다. 대신 “한국영화만 피하면 손해 보지 않을걸”이라고 얘기해줬다. 우스갯소리로 넘기기에는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영화의 현실이 그렇다.

최근 한두 달 사이 영화 팬들에게 화제를 모은 작품은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이하 ‘<킹스맨>’)와 <위플래쉬>이었다. <킹스맨>은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라는 핸디캡이 무색하게 6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위플래쉬>는 개봉 1주차 전국 436개 상영관으로 시작해 영화를 본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2주차에는 574개로 늘어났다. 이에 <킹스맨>을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그뿐인가. 아카데미 시상식 시즌을 전후해 <버드맨> <이미테이션 게임> <폭스캐처> 등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들이 대거 극장에 풀렸다. 그에 맞춰 한국영화는 <국제시장> 이후로 눈에 띄는 화제작을 내놓지 못했다. <소셜포비아>와 <스물>이 작은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국영화계에 부재했던 청춘물로 선전했지만, 시장을 장악하기에는 폭발력이 부족했다.

할리우드 영화의 강세 이유는 간단하다. 재밌고 잘 만들었다. 중요한 건 그 배경이다. <킹스맨>과 <위플래쉬>는 전에 없던 새로움으로 관객을 극장가로 불러 모았다. <킹스맨>은 ‘007’ 시리즈의 계보에 놓이는 첩보물이지만,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 대신 발랄함을 장착해 장르의 진화를 꾀했다. 베테랑 요원이 신입 요원을 훈련하는 과정에서 첩보물의 클래식을 적극 빌려오되 이를 코믹하게 비틀었다. 첩보물은 그 자체로 일정 정도의 관객층을 형성하는 인기 장르다. <킹스맨>은 이에 더해 신입 요원 에그시를 연기한 태런 에거트라는 새 얼굴 발굴에까지 성공했다. 600만 관객 돌파는 전 연령대가 골고루 극장을 찾은 결과다.

<위플래쉬>는 음악영화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박스오피스를 역주행한 경우다. 아트버스터 시대의 도래와 함께 주목받기 시작한 음악영화는 나름의 흥행 공식이 있다. <비긴 어게인>(2013)으로 증명된 바 있다. 남녀의 달콤한 사랑이 감미로운 음악으로 예쁘게 포장된다. 그중 몇몇 곡은 음악차트의 상위권에 오를 정도로 인기를 얻는다. <위플래쉬>에는 남녀 간의 사랑이 없다. 솜털처럼 귀를 간질이는 음악도 없다. 스승과 제자 간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음악 천재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폭군처럼 밀어붙이는 스승에 맞서 제자는 질 수 없다고 손에 피를 흘러가며 매일 같이 드럼을 두드린다. 여기서 음악은 멜로디와 가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무기 역할을 한다.

<킹스맨>과 <위플래쉬>가 전면에 내세우는 새로움의 정체는 ‘다양성’이다. 이들 영화는 한국영화가 좀체 시도하지 않는 장르와 이야기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국영화 시장의 특수성이 작용한 부분도 있다. 최근 몇 달 동안 한국영화는 빈 수레가 요란하듯 영화 외적인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작품성 유무를 떠나 연일 보도되는 천만 달성 초읽기와 같은 흥행 신기록 기사는 영화를 영화 그 자체로 온전히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앗아갔다. 그렇게 천만 영화가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한국영화에 관객들은 피로감을 느끼던 터였다.  

그 어떤 영화 외적 논란이나 노이즈 마케팅 없이 순전히 영화의 힘으로 흥행을 이끈 <킹스맨>과 <위플래쉬>가 한국영화계에 남긴 교훈은 자명하다. 이는 한국영화의 기대작으로 분류됐으면서 그에 합당한 흥행 성적을 기록하지 못한 <조선명탐정 : 사라진 놉의 딸> <쎄시봉> <순수의 시대> 등 부진의 원인과 맥락을 함께한다. 관객의 구미를 끌 만한 새로움 없이 흥행에 성공한 영화의 요소를 답습해서는 더는 많은 관객을 모으기 힘들다.  

<조선명탐정 : 사라진 놉의 딸>은 흔히 속편이라면 떠올릴 법한 규모의 확장만을 꾀해 전편만 한 평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쎄시봉>은 1970년대 유행했던 통기타 문화에 첫사랑의 이야기를 접목해 전 연령대를 겨냥했다. 하지만 이미 TV에서 시효를 다한 쎄시봉 소재가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기에는 애초에 한계가 명확했다. <순수의 시대>는 이제는 너무나 흔해 빠진 사극인 데다가 왕위찬탈의 이야기도 별다른 차별을 갖지 못해 극장 개봉만으로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속된 말로 안이한 기획이 부른 예고된 실패라고 할 만하다.

사실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할리우드 영화가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할 때면 클리셰처럼 동원되는 ‘한국영화 위기’론의 실체는 단순히 흥행 수치에만 한정하지 않는다. 어쩌다 대박을 치는 한국영화가 등장하면 이를 마구잡이로 답습하고 베끼는 경직된 기획력이 악순환의 고리다. 언급한 작품들 외에 지금 극장에 간판이 걸린 한국영화는 크게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전반부 웃음, 후반부 감동을 주는 가족드라마요, 둘은 사극이고, 셋은 잔혹 무도한 묘사를 동반한 사적 복수 스릴러다.

모두 원전이 있다. 가족드라마는 <해운대>(2009) <국제시장>의 영광을 재현하려 한다. 사극은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이후로 주류의 장르가 되었다. 사적 복수 스릴러는 <올드보이>(2003)의 전 세계적인 성공이 바탕으로 작용한다. ‘미투상품’으로 재미를 보는 한국 대기업 특유의 마인드가 작용한 결과다. 한국영화는 대기업 자본의 유입과 함께 전 세계 영화 팬을 매료시켰던 개성을 급속도로 잃어갔다. 영화는 새로움과 창의성을 알아보는 눈이 무엇보다 필요한 분야다. 대기업 제작사들은 천문학적인 수익을 기록한 작품의 흥행 법칙을 수치로 산정해 이를 재활용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상품으로 전락시켰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이미 2000년대 중반부터 이뤄졌지만, ‘천만’이라는 상징적인 수치 앞에서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기업 제작사가 수직 계열의 형태로 보유한 막강한 스크린 배급망 앞에서 좋은 작품은 더는 개성 있고 잘 만든 영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숱한 논란에 상관없이 많은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좋은 작품이라는 공식이 어느덧 한국영화계에 통용되고 있다. 그래서 작금의 한국영화계는 대기업 제작사가 선택한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로 일종의 전선이 형성됐다. 대기업 계열 극장에 선택받지 못할 경우, 관객과 만날 수 있는 통로마저 거의 차단당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놓이게 됐다.
 
현재 한국영화계는 그에 대한 부작용을 톡톡히 앓고 있다. <킹스맨>과 <위플래쉬>를 위시한 해외영화들의 흥행이 남긴 교훈이 한국영화의 변화, 다시 말해, 대기업 제작사의 안이한 기획에 경종을 울릴 수 있을까? 그렇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사실 절망적이다. 얼마 전 모 대기업 멀티플렉스 극장 체인망에서 빅데이터에 기반을 둔 ‘관객이 신뢰하는 한국 감독, 한국 배우’를 꼽아 보도자료로 돌린 적이 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내게는 이것이 일종의 선전포고처럼 들렸다. 새로운 이야기와 장르의 발굴에 힘을 쏟기보다는 관객들이 선호하는 감독과 배우까지 수치화해 이를 영화 만들기에 대입함으로써 공장식 제조 시스템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이런 기우까지 든다. 앞으로 이야기를 발굴하거나 장르를 결정할 때도 대기업 제작사들은 자체적으로 조사한 수치를 기반으로 하는 것은 아닐까? 설마?
   
설마가 아니다. 어느 대형 제작사는 한국 관객들에게 사랑받았던 과거의 해외영화를 골라 이를 한국적인 배경으로 옮기는 기획부서를 따로 두었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사실이라면 이는 영화 만들기에 대한 그동안의 메커니즘을 뿌리째 뒤흔드는 처사에 가깝다. 창조의 영역에 있던 영화 만들기를 기술로 끌어내리겠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가 영화를 감상하는 행위에 더해 즐기고 향유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상품으로 영화를 소비한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합하게 느껴진다.

한때 한국 영화인들은 한국영화의 의무상영일수, 즉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라는 미국 정부의 압력에 맞서 투쟁에 나선 적이 있다. 당시 한국 영화인들이 내세운 근거는 바로 다양성이었다. ‘영화는 문화고 문화는 그 나라의 정신이다. 우리들의 삶과 영혼과 희로애락이 영화라는 형태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미국이 세계 영화시장의 85%를 독식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의 영화를 지켜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후로 한국영화는 승승장구하며 산업적으로 거대한 시장이 되었지만, 그렇게 지키려 했던 다양성이 가치를 잃은 상황에 직면했다. 그것도 내부에 조성된 시스템으로 말이다. 이에 대한 개선의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에 대한 해결은 여전히 요원하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대로는 한국영화의 미래에 희망은 없다.

ARENA HOMME
2015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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