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는 현대 자본주의의 폐부를 찌르는 비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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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은 <피에타>에 대해 “극단적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이며 “돈이라는 것에 의해 사람과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불신과 증오와 살의가 어떻게 인간을 훼손하고 파괴하며결국 잔인하고 슬픈 비극적인 상황을 만들어가는지 보여주는 영화”라는 연출의 변을 남겼다. 그렇다면 앞서 이야기한 구원받아야 할 악행의 근원이 현대 자본주의에서 비롯되었음을 설득해야만 한다. 설득력이 있었나?

박혜은 편집장 김기덕 감독이 현대 자본주의의 폭력적 실체를 청계천에서 발견한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항상 자신이 겪어본 공간을 영화로 끌어들였다. 청계천은 그가 10대 시절을 보낸, 경험의 장소이며 가난한 자들의 둥지다. 소규모 금형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다치고 불구가 되는 일이 부기지수다. 이런 청계천은 약자와 폭력에 집중해 온 김기덕 감독이 취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피에타>의 청계천은 폭력과 가난, 절망의 미장센으로만 차용했다는 혐의가 짙다.

백종현 기자 그렇기 때문에 <피에타>의 배경이 반드시 ‘청계천’일 이유가 없다고 본다. 자본주의의 밑바닥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빈곤자의 이야기를 ‘전시’하기 위한 병풍에 불과하다. 이 점이 <피에타>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김현민 기자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김기덕 감독의 사유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IMF 사태를 겪으면서 현대의 자본주의는 독점 금융 자본주의로 변화했다. 노동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돈을 벌어온다. 이자가 이윤을 창출하는 시대다. 이런 변화를 깊게 사유하지 않고, 무조건 가진 자와 없는 자, 폭력을 행하는 자와 당하는 자의 대립으로 거칠게 편을 가르고 먹이사슬을 단순화한다. 그렇다 보니 분노의 지점과 공격의 대상이 모호해진다.

박혜은 편집장 독점 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체감은 있다고 본다. 돈의 먹이 사슬 상층부를 공장 사장이 아니라 사채업자로 설정한 것을 보면 그렇다. 사멸해 가는 소규모 제조업자들이 고리대금으로 이중고를 당하는 상황은 현실적이다. 하지만 그 고통의 원인을 자세히 들여다볼 생각은 없어 보인다. 몇 백만 원이 없어서 사채를 쓰고, 빚을 갚지 못해 팔, 다리, 목숨을 내어주는 사람들의 비참한 현상만 나열한다.

이은선 기자 나열하는 것 자체를 비판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처벌의 차원으로 넘어가면서 발생한다. 강도는 사채업자의 지시로 폭력을 행사한다. 엄마는 그 폭력의 원인이 ‘내가 너를 버려서, 내가 너를 괴물로 만들었다’고 설명하면서 그의 폭력을 이해하고 용인한다. 또한 그녀는 사채업자를 제 손으로 처벌한다. 한 명의 사채업자를 죽이는 것으로 아주 간단하게 자본주의를 향한 처벌을 완수하고, 강도에게 속죄의 기회를 준다. 견고한 구조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소극적 태도 때문에 <피에타>가 말하는 분노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설득력이 떨어지는 구체적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장성란 기자 자본주의를 향한 비판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장면이 있다. 엄마가 폐건물에서 추락하기 전에 빚과 강도의 협박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아들 상구에게 “상구야, 강도도 너무 불쌍하다”라고 말한다. 간편한 감상주의로 자본주의의 폭력을 무마해 버린다. 이 장면 때문에 구조 자체에 대한 비판은 원천봉쇄된다. 그저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지용진 기자 청계천 사람들의 사연도 너무 감성적으로 치우쳐 있다. 감독은 “정의는 살아 있고, 약자는 위로받아야 한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마치 <인간극장> 혹은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봤을 법한 감상적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데 그친다. 노모의 머리를 빗겨주는 효자 아들,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 두 손을 자르겠다는 젊은 아빠는 전형적 신파다. ‘이렇게 착한 사람들을 세상이 괴롭히면 안 된다’는 정당성을 얻고자 한다.

김현민 기자 작가가 영화를 통해 ‘현실을 보여주겠다’고 문제제기를 한 경우에는 작가의 태도 자체 또한 매우 중요하게 읽혀야 한다고 본다. 청계천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 공간에 매혹된 작가적 욕망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김기독 감독이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청계천이다’라고 야심차게 드러내는 순간을 보면, 소재를 너무 장식적으로 끌어다 썼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층 빌딩과 청계천 판자촌이 혼재되어 있고, 자살하기 위해 계단을 올라가는 중년 남자와 그와 반대로 무심히 계단을 내려오는 강도를 보여주는 장면 정도의 상징은 최근 너무 많이 봐 왔다.

허남웅 객원기자 김기덕 감독에게 청계천은 상징의 장소다. 자본주의를 심도 있게 비판하겠다는 목적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가 낳은 폭력의 상징으로 청계천을 가져온 것뿐이다. 항상 김기덕 감독은 약자의 공간을 영화로 가져왔고, 이번엔 그 공간이 청계천이라고 봤다. 감독은 굳이 깊은 탐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은선 기자 청계천의 현실을 짧은 대사 한두 마디로 보여줄 뿐이다. “구리가 요즘 얼마나 비싼데, 그럼 200원으로 맞춰 드릴게요” 식의 대사로 <피에타>의 청계천에 현실감을 부여하려고 하지만 이 정도로는 너무 취약하다.

김현민 기자 소재를 현실에서 꺼내왔다고 해서 영화의 현실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성은 개연성에서 비롯된다. 관객에게 ‘내 주변에서 본 적은 없지만, 분명히 저런 사람이 우리 현실 어딘가 존재할 것 같다’는 믿음을 줄 때 현실성은 확보된다. 이런 관점에서 <피에타>는 판타지에 가깝다. 특히 강도의 캐릭터는 ‘현실에서 만날까 봐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어떤 무대 장치 안에서 대본에 따라 움직이는 배우처럼 보인다.

허남웅 객원기자 하지만 초반부에는 <피에타>가 그리는 청계천이 현실적이라는 암묵적 동의가 있다고 본다. 영화 중반부 강도와 엄마가 명동으로 나들이를 가는 장면에서, 지나가던 남자가 비웃는다. 그때 관객의 웃음이 터진다. 영화의 분위기가 급변하기 때문이다. 강도가 청계천을 돌며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은 매우 극적으로 표현되지만, 우리는 그 모습을 ‘사실적’으로 받아들인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에타>가 조금 과장했을 순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사실을 담고 있다고 인정해 버리는 것이다.

김현민 기자 그것은 ‘명동’이라는 장소의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다. 명동은 자본 집약적인 공간이다. 청계천 뒷골목에서는 강도가 절대 권력자로 군림할 수 있지만, 자본의 광장으로 나온 두 사람은 일개 ‘하층민’의 위치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이런 이질감은 <나쁜 남자>의 오프닝에서도 볼 수 있다. 사람 많은 광장을 배회하는 조재현은 길 잃은 야생 개처럼 보인다. 그가 여대생에게 느닷없이 키스하는 장면이 더욱 폭력적이었던 것은, 앞서 보여준 그의 야생성과 공간과의 대립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피에타>의 명동 장면의 이질감이 겹친다.

허남웅 객원기자 사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 ‘리얼리티’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는 직관과 상징의 힘으로 영화를 이끌어간다. 한국 영화에서 리얼리즘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리얼리즘을 중시하는 풍토가 강하다. 그래서 초기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한국 평단에게 “난해하다” “불편하다” “말이 안 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서양에서는 리얼리즘을 중시하는 풍토가 없다. 현실의 한 조각만 포착하면, 나머지는 상징으로 치환해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의 영화가 한국보다 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김현민 기자 비슷한 관점에서 해외 관객과 평단은 ‘자본주의 사회’를 거침없이 비판하는 <피에타>의 자세를 높이 평가할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자의 시선으로 자본을 공격하는데, 그 공격적인 자세 자체가 순결하게 보일 수 있다. 더불어 한국의 현실을 판타지로 그려낸 <피에타>가 해외에선 ‘곧 현실 그 자체’로 전시되고, 오리엔탈리즘으로 소화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moview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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