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는 인간의 원죄를 씻을 성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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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모든 이야기에 앞서, 김기덕 감독과 모든 배우들, 함께 작업한 스태프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수상 소식이 전해진 이후, 한국 영화 언론이 앞 다퉈 <피에타>를 향한 찬사의 리뷰를 쏟아내고 있다. 리뷰의 대부분은 <피에타>가 담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비판과 종교적인 구원, 속죄의 상징을 해석하고, 복수극으로서의 대중성과 이를 통해 감지할 수 있는 김기덕 감독의 변화를 유추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수많은 상징에 주석을 붙이는 작업은 이미 충분하다. 해석을 넘어 과연 <피에타>는 그 상징들이 닿고자 하는 목표에 성공적으로 도달했는지 심도 있게 파고들어야 할 시점이다. 이에 영화 안팎의 요소를 총망라해 그 답을 찾고자 한다. <피에타>를 이미 본 관객과 앞으로 영화를 볼 관객 모두에게 이 글이 영화를 더욱 풍부하게 즐길 수 있는 친절한 안내서가 되길 바란다.

<피에타>에 대한 총평이 궁금하다.
허남웅 객원기자 이 작품은 구원과 속죄를 이야기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 의미의 구원과 속죄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 아니라, 구원과 속죄의 행위 자체를 종교적으로 치환했다는 점이다.

장성란 기자 동의한다. ‘구원과 속죄’라는 종교적 상징과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더 중요한 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강도(이정진)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역지사지의 감정을 갖고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는 과정이다. 굉장히 인간적인 반성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의 반성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도록 영화를 구현했는지는 찬찬히 따져봐야 할 문제다.

박혜은 편집장 내게 <피에타>는 종교적 제의로 보인다. 죄를 짓고도 자신의 죄를 모르는 인간 강도가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강림한 신(엄마, 조민수)을 영접한다. 처음엔 부정하고 거부하다가 결국 신을 믿고 받아들인다.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후 속죄와 구원을 얻는 일반적인 과정을 영화적으로 옮긴 것이다. 이 영화가 모성을 종교화하고, 그 종교를 빌려 속죄에 이르게 하는 김기덕 감독 식 제의(祭儀)라는 것은 <피에타>라는 제목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지용진 기자 이 영화는 <복수는 나의 것>(2002)이자 <돈의 맛>이고, <마더>(2009)라고 생각한다. 결코 이룰 수 없는 복수극이자, 현대 자본주의의 맨얼굴을 드러내고 있으며, 모성이 구원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은선 기자 <피에타>는 데뷔작부터 속죄와 구원을 이야기해 온 김기덕 감독의 ‘직접 화법’으로 읽힌다. 이 작품을 ‘김기덕 감독 초기작으로의 복귀’로 읽는 시선이 많은데, 속죄와 구원은 그가 지속적으로 추구해 왔던 화두다. 다른 점은 이번 영화는 직접적으로 그 단어를 이야기한다는 데 있다.

김현민 기자 변함없다는 평에는 동의한다. 초기작부터 김기덕 감독은 여성을 구원의 상징으로 삼았다. 이 표현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 때문에 ‘자궁에서 구원을 찾는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 않았나.

장성란 기자 초창기엔 이 땅에서 구원을 찾지만 구원받을 길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구원은 일종의 맥거핀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피에타>는 구원을 적극적으로 성취하려는 인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초기작들과 다르다.

김현민 기자 <빈집>(2004)부터 <사마리아>(2004), <시간>(2006), <숨>(2007)으로 이어지는 시기와 비교하면 메인 플롯의 명확함을 추구한다는 점에선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초기로 회귀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초기작과 비교할 때 <피에타>는 ‘리얼리티’라고 강조하는 것들을 실은 판타지에 가깝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텍스트가 불균질적으로 느껴진다.

제목에서 드러내듯, 강도와 엄마는 ‘피에타’ 상의 예수와 마리아로 읽어야 할 것인가?
이은선 기자 이미지로 보면 <피에타>의 엄마는 성화 속 마리아의 의복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 성화 속 마리아는 일반적으로 붉은 치마와 푸른 망토를 입고 있는데, <피에타>의 엄마는 붉은 치마와 초록색 카디건을 입고 있다. 첫 등장부터 ‘엄마’는 ‘마리아’로 읽힌다.

김현민 기자 행위로 보면 강도 역시 예수의 행동을 재현한다. 이유는 정반대지만 강도는 제 살과 피를 타인에게 먹임으로써 각성하고, “엄마를 살려주면 대신 내가 죽겠다”고 신에게 기도하고, 끝내 피를 뿌리며 스스로를 처형함으로써 속죄하고 구원에 이룬다.

이은선 기자 개연성 측면에서 보자면 강도가 여인을 너무 빨리 엄마로 인정해 버리는 점에서 이물감이 생긴다. 강도가 갖은 핍박과 협박, 폭력을 행사해도 여인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를 계속 찾아온다는 점 때문에 너무 쉽게 마음이 동요한다. 물론 다트 판에 여인의 초상을 붙여놓고 매일 칼을 던지는 장면에서 그가 여성 혹은 모성에게 집착하고, 그 부재에 분노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지만 충분한 설명이라고 보긴 힘들다.

김현민 기자 강도가 여자를 엄마로 인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행동은 엄마를 범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강도에게 그 행동은 일종의 시험대다. 그를 받아들이면 여자는 ‘창녀’가 되겠지만, 여자는 괴로워하면서 끝내 그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 때문에 강도는 세상의 모든 여자는 ‘창녀’라는 자신의 여성관을 깨고, 그녀를 ‘엄마’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장성란 기자 덧붙이자면 생살을 먹이는 장면이 이 모자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강도는 갑자기 나타난 여성을 친모로 인정했다기보다는 엄마로 믿고 싶은 나머지 그녀를 제 엄마로 만들어버린다. 그 의식으로써 생살을 베어 먹이고 강제로 범하려고 한 것이다. 이를 통해 강도는 그 여인의 자궁을 통과하고, 살과 피를 나눈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도가 그녀를 너무 ‘빨리’ 엄마로 인정했다고 보는 것보다는 스스로 ‘엄마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김현민 기자 정리하자면 이 영화는 ‘만들어진 신’에 관한 이야기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인간 백정처럼 살던 불운한 남자가 자신의 신을 만들어내고, 그를 믿고 스스로 죽는 이야기. 하지만 그 죽음을 구원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지용진 기자 엄마를 신으로 대체하는 시선이 있다. 폐건물에서 엄마와 강도가 대치하는 장면에서 카메라의 앵글이 전과 확연히 달라진다. 부감으로 엄마가 내려다보는 시선을 보여주는데, 마치 구원을 갈망하는 아이를 처연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에 앞서 엄마는 혼잣말로 “강도가 너무 불쌍하다”고 고백한다. 도식적이지만 구원의 제스처로 읽히기 충분하다.

허남웅 객원기자 조금 다른 분석도 가능하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 이 영화의 제목이 ‘피에타’ 대신 ‘라오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강도에게 먹이기 위해 장어를 가져왔는데, 거기엔 여자의 휴대전화 번호가 표식으로 붙어 있다. 이 장어는 강도를 죽음에 이르게 한 뱀으로 볼 수 있다. 강도의 헤어스타일도 라오콘의 곱슬머리와 유사하다. 엄마 역시 강도를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진짜 엄마가 아니라, 친아들의 복수를 위해 찾아온 가짜 엄마다. 엄마는 구원을 위해서 찾아온 게 아니라 복수와 처단을 위해 찾아온 악마인 셈이다. 그렇다면 <피에타>의 모성과 구원은 일종의 ‘맥거핀’으로 볼 수도 있다.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 특히 배우 조민수의 강렬한 연기가 호평받고 있다.
허남웅 객원기자 조민수의 연기는 정교하고 정확하다. 그녀의 연기는 배우 윤여정의 연기 타입과 유사한데, 감독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주어진 바를 완수한다.

지용진 기자 엄마에게 부여된 목적은 분명하다. 하지만 강도 캐릭터는 외부적인 꾸밈이 강한 전형적인 인물이다. 주어진 이름부터 ‘강도’가 아닌가. 눈에 두드러지는 아이라인이나 헤어스타일 등 겉모습이 강도의 성격을 너무 일찌감치 드러내기 때문에 이정진이 연기로 캐릭터를 쌓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허남웅 객원기자 <피에타>의 대사는 매우 직설적이다. 지금까지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대사보다는 이미지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성향이 강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대사가 이야기를 끌고 간다. 강도의 대사 역시 직설적이기 때문에 관객은 그의 연기를 단면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연기력의 문제로 치환해서 조민수의 연기는 뛰어나고 이정진의 연기는 어색하다, 라고 평가하긴 힘들다. 아마 대사를 자막으로 읽는 해외 관객들은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피에타>가 모성을 매개 삼아 인간의 구원과 속죄를 이야기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렇다면 <피에타>는 이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고 판단하나?
지용진 기자
주제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 장면으로는 폐건물에서 엄마가 강도를 내려다보는 장면과 강도가 트럭에 끌려가면서 도로에 핏줄기를 그리는 마지막 장면을 꼽을 수 있다. 두 장면 모두 ‘응시’의 시선을 보여주는데, 그 태도가 ‘용서’를 갈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장성란 기자 인간이 인간에게 구현할 수 있는 ‘구원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엄마와 강도는 각각의 장면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스스로를 처벌한다. 하지만 처벌에 이르는 과정이 도식적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이은선 기자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2002)에서도 거의 동일한 엔딩을 볼 수 있다. 여자와 남자를 태운 트럭이 굽이치는 산길을 오르는 장면을 멀리서 바라본다.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까지 트럭의 붉은 차양이 점으로 남아 있다. <나쁜 남자>가 그들을 땅 위의 점으로 남겼다면, <피에타>는 시선을 들어 산과 하늘을 바라본다. 마치 강도의 처벌이 하늘에 닿은 듯한 시선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김현민 기자 매우 서정적인 장면이기 때문에 많은 관객들이 처연한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장면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구원이라기보다는 ‘처벌’에 가깝다고 본다.

지용진 기자 기독교 신자가 그 장면을 보면 해석이 다를까?

김현민 기자 아마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종교적 상징은 깊은 함의를 가졌다기보다는 상징으로만 쓰였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충분히 해석이 가능한 직접적인 상징이다. 직부감의 카메라 앵글은 감독이 ‘신의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강도는 ‘예수’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임무를 부여받은 인간으로, 모든 사건의 중심에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다. 강도의 피가 뿌려지는 길을 비추는 마지막 장면은 모든 죄를 껴안은 강도(예수)가 피를 흘리면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장면을 신이 내려다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박혜은 편집장 직접적으로 ‘구원의 행위’를 보여주지만 끝내 모호한 이유는 <피에타>의 전체적 얼개가 헐겁기 때문인 것 같다. 원초적인 상징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김기덕 감독 작품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영화가 상징을 직관적인 이해를 돕는 도구로 활용하는 대신 상징을 이어 붙여서 내러티브로 쓰면서 메울 수 없는 구멍이 생겼다는 점이다.

김현민 기자 누구라도 해석하고픈 충동을 일으키는, 표피적인 상징들은 <피에타>의 장점일 수도, 약점일 수도 있다. 관객이 쉽게 상징을 해석할 수 있다는 점, 그간 상업 영화에서도 많이 봐왔던 ‘모성의 복수극’을 줄거리로 잡았다는 점에서는 대중성을 확보할 것이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의 전작들처럼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는 수그러들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 그를 자신이 속한 세계(창녀)로 끌어내리는 <나쁜 남자>나 <섬>의 가학적 묘사, ‘여고생이 보시를 위해 몸을 판다’는 이야기를 그린 <사마리아>처럼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지점은 많이 희석되었다.

지용진 기자 곁가지가 중심을 흩뜨리는 것도 문제다. 이후 이야기하겠지만 현대 자본주의의 폭력적 현실과 반전을 내포하는 엄마의 복수극, 종교적인 구원 등의 이야기가 뒤섞이면서 내러티브가 거칠게 비약하는 약점을 드러낸다.

장성란 기자 구원과 속죄의 상징이 영화를 도배하다시피 반복되지만, 전형적이고 도식적이다. 지금껏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강렬한 상징으로 보는 이를 설득했다. <피에타>도 해석의 여지가 무궁무진한 구원과 속죄의 상징이 영화를 도배하고 있는데, 설득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도식적인 상징이 남발되면서, 보기 좋은 이미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점은 영화의 주 무대인 청계천과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적 현실을 드러낸 부분에서 더 여지없이 드러난다.

movieweek
NO. 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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