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롯이 변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근 한국영화계에는 ‘하이 콘셉트 high concept’ 영화가 난무한다. 하이 콘셉트란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고안한 용어로, 영화의 주제, 스타, 마케팅 가능성을 결합해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작품을 기획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이를 ‘기획 영화’라는 말로 부르는데 쉽게 말해, 이해하기 쉬운 영화 유형으로 통한다. 이런 종류의 영화들을 구별하는 방법은 굉장히 간단하다. 콘셉트가 딱 한 줄 정도로 요약이 가능하다. 한창 관심을 모으고 있는 한국영화들을 예로 들어보자. <오직 그대만>은 ‘전직 복서와 시각 장애인의 슬픈 사랑이야기’, <도가니>는 ‘장애인학교에서 자행된 성폭력 사건 실화’, <너는 펫>은 ‘연상녀와 애완남의 로맨틱한 동거생활’, <티끌모아 로맨스>는 ‘청년 백수와 짠순이의 생활밀착형 로맨스’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하이 콘셉트 영화의 출현은 2000년대 후반부터 한국영화산업이 대기업 위주로 재편되면서 가장 두드러진 경향 중 하나다. 물론 ‘신세대 부부의 발칙한 신혼이야기’를 내세운 <결혼 이야기>(1992)가 대기업 자본으로 제작된 충무로의 첫 번째 하이 콘셉트 영화로 기억된다. 하지만 1990년대 당시는 기획영화를 비롯해 다양한 소재와 유별난 취향으로 무장한 젊은 감독들이 대거 출현하면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예고하던 때였다. 하여 2000년대 초반을 장식했던 작품들을 보면 한 줄만 가지고는 이야기와 성격을 파악하기 힘든 영화들이 즐비했다. 일례로, 외계인을 끌어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이 시대 소외된 자들의 비극을 그리는 <지구를 지켜라!>(2003)의 경우, 마케팅 포인트를 잡지 못해 코미디로 홍보하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금 충무로에서는 한 줄로 요약되지 않는 시나리오를 가지고는 웬만해서는 영화를 만들기 어려워졌다. 영화가 산업화되고 흥행이 검증된 하이 콘셉트 작품이 우후죽순 쏟아지다보니 작품을 대하는 관객들의 태도가 과거와는 사뭇 달라진 탓이 크다. 다양한 장르의 시대로 기억되는 10년 전만 하더라도 관객들은 적극적으로 영화를 선택하고 소비하는 쪽에 가까웠다. 좀 더 문학적인 텍스트로 풍부하게 읽힐만한 이야기가 좋은 시나리오로 인정받았던 것. 그에 반해 소수의 영화가 전국 스크린의 90% 이상을 장악하기 십상인 요즘에는 작품을 선택할 여지가 없어 관객들은 ‘주는 대로 받아먹는’ 쪽으로 변모했다. 현실을 환기시키는 이야기보다 현실을 잊게끔 영화적으로 마취를 시켜주는 플롯이 각광받는 풍조인 것이다. 

관객 선택의 폭이 단순화되면서 영화 만들기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라 할 수 있는 플롯 구성에서부터 모든 작품에 하이 콘셉트 전략이 요구된다. <천하장사 마돈나>(2006) <페스티발>(2010)을 통해 독창적인 이야기를 선보였던 이해영 감독은 이와 같은 분위기에 발맞춰, “과거에는 창작자의 마음이었다면 지금은 기획자의 마인드를 가지고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말한다. 전작에서는 새롭고 도전적인 이야기를 추앙한 것과 달리 지금 준비 중인 시나리오는 현실반영보다 좀 더 꾸며낸 이야기, 즉 픽션에 충실하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모호한 장르로 관객을 낯설게 하기보다 하나의 장르로 명확하게 떨어질 수 있게끔 큰 틀을 구성하고 세부적으로는 감정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쪽으로 묘사를 가져간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실제로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는 직선적인 플롯이 상대적으로 흥행에 유리한 것이 작금의 추세다. 최근 흥행에 성공한 한국영화들의 플롯을 보면 하나 같이 감정적 파고를 일으키는 데 능란한 솜씨를 과시한다. ‘분노’의 <도가니>, ‘감동’의 <완득이>, ‘신파조’의 <오직 그대만>, ‘샤방샤방’ 빛나는 <너는 펫>은 감정의 스펙트럼을 앞세워 관객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본보기다. 처음부터 확실한 결말이 정해져있는 가운데 영화 상영 내내 그것을 향해 질주하는 감정적 쾌감이 이성과 논리적 사고를 압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 비춰, <집으로>(2002) 이후 9년만의 컴백 작으로 관심을 모았던 이정향 감독의 <오늘>의 흥행 실패를 분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섣부른 용서의 후유증을 다루는 이 영화의 플롯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여러 모에서 퇴행(?)적이다. 한두 줄로 요약하기 힘든 이야기도 물론이거니와 용서와 용서하지 못함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 송혜교의 처지, 그럼으로써 감정의 명확한 입장 정리를 방해하는 플롯은 결과적으로 관객의 무관심을 불러왔다.

그것은 다시 말해 관객이 감정을 이입할만한 캐릭터가 부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요즘 투자사들은 시나리오를 보고 투자를 결정할 때 캐릭터의 매력을 우선적으로 중시한다.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과 <의뢰인>의 연이은 흥행의 결과로 제작자로서 행복한 한 해를 보내고 있는 청년필름 김조광수 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살인의 추억>(2003)처럼 사건 중심의 플롯이 각광받을 때가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캐릭터가 전면에 나서고 사건이 이를 받쳐주는 플롯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다.” 흥행배우라는 개념이 많이 희박해지긴 했지만 캐릭터의 매력이 도드라지는 플롯이어야 캐스팅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이는 곧 투자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조광수 대표는 ‘까불까불한 탐정’을 내세운 <조선명탐정>처럼 캐릭터의 개발 가능성이 큰 시나리오를 다수가 좋아할만한 플롯으로 꼽는다.

흥행몰이에 성공한 <완득이>가 정확히 이에 해당한다. 영화는 재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초장부터 담임선생님을 죽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리는 완득이(유아인)의 에피소드를 통해 맹랑하지만 귀여운 캐릭터를 강조한다. 곧이어 완득이를 못살게 구는 막무가내형의 담임 ‘똥주’ (김윤석)의 사연을 배치하면 ‘톰과 제리’의 구도가 성립하면서 캐릭터 구축은 물론이요, 두 인물 간 치고 박는 코믹한 분위기까지 획득하게 된다. 명료한 캐릭터와 이를 기반으로 한 일직선의 플롯 구조는 사실 TV예능프로가 시청자의 시선을 가급적 오랫동안 잡아두기 위해 구축한 비결을 영화가 따라간 결과이기도 하다. 한 때 영화가 유행의 선도자 역할을 한 적이 있었는데 역으로 요 몇 년 새에는 영화가 대중의 욕망을 따라가는 쪽으로 변모했다. 따라서 지금의 플롯 구조는 철저히 상업적인 목적 하에 기획 상품으로써 계량화된 형태라 할만하다.  

<오직 그대만>의 송일곤 감독은 그런 영화계의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예전의 그는 <꽃섬>(2001) <거미숲>(2004) <마법사들>(2005) 등 소위 말하는 ‘작가주의’ 영화를 선보였던 감독으로 유명하다. 인간의 무의식을 따라가는 이야기, 컷을 나누지 않는 파격적 구조와 같이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던 감독이 톱스타를 기용해 신파를 선보인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외로 받아들인다. 송일곤 감독은 이에 대해 어느 인터뷰에서 “대중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퇴물복서와 시각장애인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루는 <오직 그대만>은 전형적인 캐릭터와 관습적인 이야기로 무장한 플롯이 특징이라면 특징인데 감독의 말에 따르면, “관객이 가장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해” 나온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충무로의 많은 감독들은 많은 대중들이 좋아할만한 플롯을 짜기 위해 아이디어를 쥐어짜고 있다. 데뷔작을 준비하는 감독은 말할 것도 없고 이미 몇 편의 영화를 만든 감독들도 시장이 요구하는 플롯의 룰에 맞추되 자신만의 색깔을 입히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충무로의 대표적인 모 중견 감독은 준비한 시나리오를 일반인 대상의 모니터링 후 재미의 반응에 따라 개선을 요구하는 투자사와 제작사의 작태가 처음에는 영화를 무시하는 태도로 비췄단다. 현재는 생각을 바꿔 더 많은 관객에게 좋은 영화를 선보여야 한다는 일념 하에 올 12월 촬영을 목표로 한국형 액션물을 준비 중에 있다. <미쓰 홍당무>(2008)의 이경미 감독은 차기작 <여교사>(가제)의 시나리오 작업에 한창인데 “이미 정해져 있는 플롯 구조 안에서 어떻게 하면 새로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 중”이라고 전한다. 플롯의 변화는 대중의 시대적 요구를 전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플롯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충무로의 현재를 파악하는 중요한 지표인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GQ
2011년 12월호

6 thoughts on “플롯이 변했다”

  1. 아이쿠 정말 콘셉트 한 줄만 읽어도 영화가 어떨지 대충 짐작이 간다고 하면, 제가 너무 비하하는 건가요? ^^; 저 영화들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구요. 아무튼 잘 정리하신 글 잘 읽었습니다. 도움이 됐습니다.

    1. 안녕하세요 d님 처음 뵙겠습니다. ^^ 비하는요, 현실이 그런데요. 좋은 영화도 있지만 나쁜 영화가 더 많습니다. 앞으로는 더 그렇겠죠. 그래서 고전영화들이 더 중요한 게 아닌가 싶네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종종 뵐게요. ^^

  2. 저는, 초딩(혹은 할머니ㅠㅜ)처럼 이야기를좋아해서인지 몰라도 상대적으로 새로운 ‘표현 기법’에는 큰 흥미를 못 느끼는 편이에요. 내노라하는 감독마저  쉽게 몰입할 플롯의 틀을 만들어놓고 최대한 유니크한 표현툴을 고심한다니 놀랍기도하고,, 그런 얘길 듣는 저같은 대중만큼 그 창작자도 많이 헛헛할 것 같네요. 문득득.. ‘산업’이라는 말이 지긋지긋합니다.(저는 내일부터 개발자 50명이 4년 동안 라면먹으며 -_- 만든 게임에 상업성 평가기준을 들이밀며 수정!수정!을 외치고 잔혹한 매출사이클을 그려야 한답니다. 산업산업;;)

    1. 단순한 게 뛰어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요. 그것이 대중성이기도 하고요. 아이폰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단순한 것과 쉽다는 것은 구별되어야 하겠죠. 그래서 창작자들이 더 머리를 쥐어짜매고 있는 거겠죠. 요즘 한국영화에는 단순함과 쉬움을 구별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 아, 오늘이 첫 출근이셨군요 전 퇴사 얼마 안 남았는데 ㅋㅋ 힘들어도 힘 내세요.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인 시대 아닌가요 (옷! 이거 염장 아닙니다 ^^;) 근데 산업 안에 있다보면 사실 힘들 때가 많죠. ^^; 그걸 못 견디는 저는 그래서 이렇게 들락날락 하는 것 같아요. ㅜㅜ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