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하>(Frances 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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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그레타 거윅)는 스물일곱 살의 나이이지만 친구 소피(믹키 섬너. ‘스팅’의 딸로 유명하다!)의 집에 얹혀사는 처지다. 무용수로 이름을 날리고 싶지만 몇 년째 연습생 신세를 면치 못해 독립은 언감생심이다. 그럼에도 워낙 낙천적인 성격을 타고난 프랜시스는 개의치 않고 살아가는 중이다. 그런 프랜시스에게 고비가 찾아온다. 남자 친구와의 이별을 감수하면서까지 친구와의 동거를 사수했건만 소피가 일본으로 떠나면서 머물 곳이 없어진 것이다.

결국 <프란시스 하>는 프란시스의 홀로서기를 다루는 영화다. 친구로부터 독립해 자신이 머물 곳을 마련하고, 자신이 꿈꾸는 무용수로써 우뚝 서는 것. 독립이 중요한 테마로 기능하는 까닭에 영화는 그 많은 제목을 놔두고 굳이 프란시스라는 이름을 ‘독립’적으로 명시한다. 하지만 그녀의 독립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알려주는 것은 프란시스의 이름 뒤에 붙은 ‘하’이다. 위치상 그녀의 성(姓)일 텐데 왠지 완성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일종의 말장난 같은 것인데 실제로 이 영화에는 그런 수준의 대사가 영화 상영 시간의 반을 차지한다. 프란시스가 소피와의 관계에 대해 “우리 꼭 부부 같다”며 “대화는 나누는데 섹스는 안 하잖아”라고 농을 치면 꽤 웃긴 것이 사실이다. 감각적인 말장난이기도 해서 초라한 현재의 처지를 풍부한 말로써 감가상각하려는 프란시스의 삶에 대한 의지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  

더불어, 그녀와 친구들 사이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버지니아 울프, SNL, 마티스, 세르쥬 갱스부르, 프루스트, 장 피에르 레오 등 고전에서부터 대중문화를 아우르는 풍부한 인용은 프란시스가 엉뚱한 한편으로 꽤 지적인 소유자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사실 이 영화 자체가 장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1973)에 대한 거대한 인용 혹은 오마주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엄마와 창녀>는 직업도 없이 애인에게 빌붙어 사는 인텔리 알렉산드르(장 피에르 레오)를 앞세워 68혁명 이후 프랑스의 청춘을 점령한 절망적인 분위기를 잡아낸 영화다. <프란시스 하>의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은 노아 바움백은 <엄마와 창녀>의 형식을 고스란히 차용하되 인물의 성격을 달리 한다. 그럼으로써 불황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프란시스와 같은 동시대 미국 젊은이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엄마와 창녀>의 흑백 화면이 침체된 당시 프랑스 젊은이들의 심리를 반영했다면 <프란시스 하>는 독립에 방점을 찍는다. 노아 바움백 감독은 일상적인 뉴욕의 풍경을 좀 더 매력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일부러 흑백 촬영을 시도했다고 말했지만 실은 가진 것 없는 프란시스가 자신의 재능과 타고난 성격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이야기에서 착안했다. 프란시스가 살아가는 방식처럼 흑백 필름을 빌려 제작과 배급의 규격화된 틀을 탈피해 지극히 독립적인 방식으로 이 영화를 만든 것이다.

만약 <프란시스 하>가 주류에서 만들어졌다면 무용수로써 인정받은 프란시스의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을 터다. 노아 바움백 역시 해피 엔딩의 결말을 취하면서도 그녀의 미래에 가능성을 열어두며 여지를 남겨둔다. 그 방식이 재밌다. 프란시스의 성은 정확히 ‘할라데이 Halladay’다. 소피를 떠난 보낸 후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힘으로 자그마한 거처를 마련한 프란시스는 우체통 패널에 자신의 이름과 성을 쓴 종이를 넣으려 한다. 이때 패널의 크기가 작아 프란시스의 성은 하(ha)에서 뚝 잘리고 만다.

지금 그녀가 쟁취한 독립은 딱 거기까지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프란시스는 이제 겨우 스물일곱 살이다. 지금은 ‘하’까지가 능력치이지만 프란시스 할라데이, 즉 자신의 이름과 성을 모두 채울 수 있는 패널의 크기만큼의 능력을 발휘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런 믿음을 주는 영화이기에 <프란시스 하>는 흑백 영상이지만 따뜻함이 물씬하고 별 다른 사건이 없어도 에너지로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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