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대왕’이 재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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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는 <인터스텔라>도, <나를 찾아줘>도, <보이후드>도 아니었다. <메이즈 러너>이었다. <메이즈 러너>는 언급한 작품들과 비교해 작품성이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오락성이 월등히 앞선 영화도 아니다. 게다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블록버스터 영화가 몰려오는 겨울 시즌을 앞두고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은 영화도 <메이즈 러너>와 비슷하다. <헝거게임: 모킹제이>(이하 ‘<헝거게임>’)다.

<메이즈 러너>와 <헝거게임> 두 작품은 비슷한 점이 꽤 많다. 각각 수잔 콜린스와 제임스 대시너의 시리즈 소설을 영화화했다. 또한, 할리우드의 잘 나가는 젊은 배우들이 등장하는 까닭에 전 세계 청소년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고 있다. 말하자면, 청소년 관객들을 메인 타깃으로 하는 영화인데 아저씨(?)인 내가 관심을 두게 된 이유가 있다. 이 영화들이 은유하고 반영하는 현실의 어떤 부분 때문이다.

<메이즈 러너>의 연출을 맡은 웨스 볼 감독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고는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소설 <파리대왕>과 드라마 <로스트>가 만난 것 같은 이야기다.” 낯선 공간 안에서 살아가던 소년들이 탈출을 도모한다는 줄거리가 언급한 두 작품과 닮았다는 것이다. 정체불명의 섬에 추락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로스트> 역시 <파리 대왕>의 성인 버전임을 고려한다면 <메이즈 러너>는 현대판 <파리 대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메이즈 러너>만이 아니다. <메이즈 러너> 이전 <헝거게임>은 <파리 대왕>을 현대적으로, 아니 미래를 배경으로 변용했다. <메이즈 러너>가 미로로 둘러싸인 공간을 일군의 청년이 탈출하는 이야기였다면 <헝거게임>은 절대 권력자가 고안한 가상현실 안에서 상대방을 죽여 끝까지 살아남는 젊은이의 사연을 다뤘다. 극 중 배경의 특수성을 제외하면 젊은 세대가 생존게임을 벌인다는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의 원형 같은 이야기가 바로 <파리 대왕>인 셈이다.

<파리 대왕>은 1954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이를 쓴 작가는 윌리엄 골딩.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그는 전쟁터에서 목격한 인간의 야만성을 고발하고 싶었다. 근데 그 야만성이란 전쟁에 관여하고 참전한 성인만의 것이 아니었다. 종전 후 교직에 재직했던 윌리엄 골딩은 질서를 잡아주는 어른들이 사라졌을 때 아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원시적인 성질을 발견했다. 만약 문명화가 완전히 거세된 세계에 아이들만 놓아둔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가? 그런 의문에서 탄생한 작품이 <파리 대왕>이었다.  

한 무리의 영국 10대 소년들이 비행기로 후송되던 중 사고에 연루되어 문명으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진 무인도에 고립된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소년들은 그들 나름대로 규칙을 정하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생존에 돌입한다. 살아야겠다는 의지는 같지만 문제는 그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것. 어떻게든 구조가 되기를 바라는 랠프는 불을 지펴 연기로 신호를 보내자는 것에 반해 굶주린 배를 채우는 게 우선이라는 잭은 멧돼지 사냥을 주장하며 권력 싸움을 벌인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랠프와 잭, 두 패로 나뉜 소년들은 상대방에게 창을 겨누는 전쟁 수준으로 대립을 키우며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가르치고 알려줘야 깨우치고 채우는 백지 상태로 아이들을 이해했던 어른들의 입장에서 <파리대왕>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특히 정치와 권력은 학습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DNA에 이식된 인간 본성이라는 사실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파리 대왕>을 출간한 국내 출판사는 ‘현대의 인간 조건과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을 우화적으로 묘사한 이 소설은 냉전 시대의 불안한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전 세계 독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고 소개한다.

<파리 대왕>의 아이들이 벌이는 생존과 권력 싸움은 당시 사람들에게 생소한 사실에 가까웠다. 그와 다르게 <메이즈 러너>와 <헝거게임> 속 젊은 세대의 그들만의 경쟁은 일상화되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메이즈 러너>와 <헝거게임>은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 이미 소설을 통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은 베스트셀러였다. 어른들이 짜놓은 판 안에서 아이들이 살기 위해 죽음도 불사한다는 내용이 흥미를 돋웠지만, 이 두 작품의 진가는 그들만의 싸움을 넘어서는 데 있다. 젊은 세대가 그들을 경쟁하도록 만든 시스템에 저항하고 급기야 파괴한다는 결말이 현실과 오버랩하면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지점이 <파리 대왕>과 결정적으로 차별을 이룬다. <메이즈 러너>와 <헝거게임>의 청춘에는 <파리 대왕>의 아이들과 다르게 싸워야 할 대상이 하나 더 늘었다. 어른, 즉 기성세대다. <파리 대왕>에서 각각 연기 피우기와 멧돼지 사냥을 주장하며 극단적으로 대립하던 랠프와 잭은 서로의 목숨을 건 싸움을 펼치려 한다. 그 순간, 이들을 발견한 구조대의 어른이 다가오자 잭과 랠프의 눈에 가득 찼던 살기는 이내 눈물로 지워진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보호 받아야 할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메이즈 러너>와 <헝거게임>의 주인공들은 보호는커녕 경쟁을 조장하는 기성세대 때문에 하루하루가 늘 전쟁과 같다. 왜 아니겠는가. <메이즈 러너>의 기성세대는 멸망한 지구에서 살아나 갈 수 있는 전사형의 인간을 키울 목적인지 괴생물체를 심어놓은 죽음의 ‘미로 maze’를 설계해 이에서 탈출한 아이들을 선별한다. <헝거게임>의 ‘헝거게임 hunger games’은 매년 12개 구역에서 남녀 한 쌍씩, 24명을 선정해 게임에 참여시킨 후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이도록 독재국가 ‘판엠’의 절대 권력자가 고안했다.

두 작품 속 기성세대들이 미로나 헝거게임을 만들어 젊은이들을 힘들게 하는 이유는 뻔하다. 의도적으로 공포심을 조장, 젊은 세대를 길들여 기성세대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끌고 가겠다는 포석이다. <파리 대왕>의 아이들처럼 <메이즈 러너>와 <헝거게임>의 젊은이들도 살기 위해 죽을 고생을 하지만, 그 생존마저도 어른들에 의해 관리된다는 것. <파리 대왕> 때도 세상은 공포로 만연했지만, 지금처럼 아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시스템을 의도적으로 만드는 수준은 아니었다. 미래의 희망이라 불리던 아이들이 훨훨 타오르는 등불이 되어 세상을 환하게 비추기를 바랐거늘 선별된 등불만이 살아남아 세상은 더욱 어두워졌다.

물론 <메이즈 러너>와 <헝거게임>의 주인공처럼 지금의 청춘들이 진짜 미로 속에 갇혀 사경을 헤매지도, 살벌한 무기를 확보해 친구의 심장을 겨누는 게임을 벌이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작품 속 과장된 설정으로 치부해 버리기에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젊은이들은 기성세대가 짜놓은 경쟁사회 속에서 기약 없는 생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일류대학의 취업률 높은 학과에 들어가 상위권에 들어야지만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어렵게 바늘구멍을 통과해도 언제 잘려나갈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을 버티며 살아간다.  
 
이들은 그래도 조금 나은 편이다. 경쟁을 버티지 못하고 일찍이 나가떨어진(?) 대다수는 더 최악이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수천만 원을 대출한 상태로 졸업과 함께 신용불량자로 전락한다. 어떻게든 이를 마련해보겠다고 겨우 일자리를 찾아도 비정규직 신세가 되어 한 달 생활비로도 빠듯한 최저임금을 받는다. 행여 부당한 처우에 불만을 제기했다가는 불이익을 당할까 찍소리 한 번 내지 못하며 파리만도 못한 삶을 연명하고 있다. 이게 사는 건가. 지금 우리가, 우리의 젊은 세대가 처한 생존의 미로이고 헝거게임이다. 그것이 어디 2014년의 한국의 경우에만 해당할까.

<파리 대왕>과 이를 작금의 현실에 맞게 변주한 <메이즈 러너>와 <헝거게임>이 모두 영미권 작품이란 사실은 젊은이들이 처한 상황이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 저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다르다면, 직설적으로 전달하면 부담스러울 시스템 파괴와 같은 전복적인 메시지를 우회하여 전달하고 포장하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것. 이들 작품의 진짜 가치는 여기에 있다. <파리 대왕>의 랠프가 피운 연기처럼 물리적인 형태로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살려달라는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넘쳐난다.

<파리 대왕>과 <메이즈 러너>와 <헝거게임>은 한 번 실패가 영원한 실패로 이어지는 경쟁사회 속 선택받지 못한 다수에게 내미는 구조의 손길과 같다. ……. 과장이다. 사실은 그러기를 바라는 개인적인 심정이다. 꽃다운 청춘의 죽음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산다는 건 참으로 힘든 일이다. 하물며 젊은 세대의 희생을 오히려 자신의 이득으로 삼는 기성세대가 이 시스템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제정신으로 살 수 있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 이 세상은 잘린 멧돼지 머리 주변에 잔뜩 꼬인 파리 떼를 보는 것처럼 잔인해졌다.

또 다른 <파리 대왕>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이 세상에서 파리 대왕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현실의 반작용일 것이다. 고작 소설과 영화에 이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는 비약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절실하다고 할까. 파리 대왕이 똬리를 튼 생존의 미로 같은 사회에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불씨를 어디서든, 어떡해서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다. 우리의 청춘들이 기를 펴고 맘껏 목소리를 내는 세상을 보고 싶다. 그리고 함께 하고 싶다.  

ARENA
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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