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쉬>(Tr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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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시선에서 어른의 세계를 바라보는 영화가 있다. 아이의 순수함에 대비해 타락한 어른의 세계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트래쉬>가 바로 그렇다. 앤디 멀리건의 동명 소설을 <어바웃 타임>(2013)의 리처드 커티스가 각색하고 <빌리 엘리어트>(2000)의 스티븐 달드리가 연출했다. 모두 영국에서 활동하는 이들이지만, 영화 속 배경은 브라질 최대 도시 리우데자네이루, 그중에서도 쓰레기가 히말라야 산맥처럼 쌓인 슬럼가이다.

‘시티 오브 갓’의 아이들

거대한 쓰레기더미를 뒤지던 열네 살 소년 라파엘(릭슨 테베즈)은 지갑을 발견한다. 그 속에 든 돈을 친구 가르도(에두아르도 루이스)와 나눠 갖는 동안 경찰들이 들이닥친다. 지갑의 행방을 알려주면 거액의 돈을 주겠다고 회유한다. 눈치가 빠른 라파엘과 가르도는 지갑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이를 숨기기로 한다. 뒤져보니 나오는 건 어린 소녀의 사진 뭉치와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딱지 모양의 사진 등 별 게 아니다.

그런데 경찰은 왜 이 지갑을 찾으려는 걸까? 엄청난 증거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시장(市長)의 정치 생명을 단번에 끊을 수 있는 비리를 밝힐 단서가 숨겨져 있다. 그의 비서였던 호세 안젤로(와그너 모우라)가 목숨을 담보로 지갑 속에 숨긴 단서들을 라파엘이 우연히 손에 넣은 것. 라파엘의 행동이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경찰들은 시장의 개를 자처하며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한다.

<트래쉬>는 라파엘이 총을 들고 무언가를 겨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이가 총을 겨누다니, 관객은 갈수록 험악해지는 세상을 향해 한탄 조를 내세우겠지만, 이 영화의 오프닝은 실은 아이러니다. 목숨을 해치려는 어른, 더 정확히는 탐욕에 찌들어 옳고 그름을 분간할 줄 모르는 기성세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라파엘이 총을 들었다는 사실은 중반쯤에야 밝혀진다.

브라질 사회의 부정부패는 극 중 슬럼가의 쓰레기 더미만큼이나 만연해있다. 브라질의 범죄율이 높은 건 극도로 나뉜 빈익빈 부익부의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는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하여 역설적으로 ‘신의 도시 City of God’라 불리는 무법천지의 빈민가 파벨라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손에 총을 쥐고 마약을 판매하는 등 갱단처럼 군림하며 살아간다. 이들의 폭력 커넥션이 얼마나 견고한지 경찰도 쉬이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악명이 높다.

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도 있었다. <시티 오브 갓>(2002)이다. 이를 연출한 감독은 페르난도 메이렐레스다. 그리고 스티븐 달드리의 <트래쉬>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그래서 <트래쉬>와 <시티 오브 갓>은 비슷한 점이 꽤 많다. 범죄가 만연한 도시, 생존을 위해 운명적으로 총을 들 수밖에 없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위협하는 타락한 어른들. 무엇보다 두 영화는 희망의 빛 한줄기조차 쓰레기 더미에 가려진 현실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비슷한 소재의 범죄물과 비교해 이 영화들이 흥미로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트래쉬>의 원작자 앤디 멀리건은 필리핀 마닐라에 머물 당시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로 이 소설을 썼다. 하지만 소설은 특정한 지명을 표기하지 않고 제3세계 어딘가를 배경으로 삼았다. 영화처럼 스릴러를 바탕으로 한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진행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 고발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리처드 커티스와 스티븐 달드리는 사회 고발적 요소를 줄이는 대신 디즈니로 상징되는 동심과 순수함을 강조하는 쪽으로 각색을 잡았다.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총을 들어 상대방을 위협하는 설정에도 영화는 상영 내내 힙합과 같은 경쾌한 음악으로 분위기를 유쾌하게 끌고 간다. 게다가 쓰레기로 넘치는 슬럼가를 보여주는 카메라의 구도는 불결한 기색 하나 없이 동화 같은 분위기를 보는 이의 호응을 유도한다.

오락인가? 윤리인가?

<시티 오브 갓>도 그와 비슷한 방식의 영화적 화법을 구사해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아이들이 담배와 마약을 피우고 경찰과 대치하며 총싸움을 벌이는 ‘현실’을 눈을 현혹하는 빠른 편집과 오락영화처럼 끌고 간 연출 방식이 윤리적으로 과연 옳으냐는 것이었다. <트래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의 시선’이라는 알리바이를 심어 두었지만, 이를 선택한 배경은 윤리보다는 대중성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가뜩이나 비극적인 사건 투성이고 짜증 나는 일로 가득한 현대의 관객에게 브라질의 시궁창 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와 같은 다큐멘터리적인 필체는 애당초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한계가 있음은 자명하다. 그러니까, 브라질 기득권 세력의 탐욕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은 우선으로 흥행을 고려한 선택인 셈이다. 그것이 결코 얄팍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라파엘과 가르도와 같은 아이들이 결국, 어른들이 망쳐놓은 세상을 정화할 수 있는 구원자와 같은 존재인 까닭이다.

<트래쉬>에서 어른들이 주인공 아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경우는 별로 없다. 호세 안젤로가 시장의 비리를 세상에 밝히겠다며 은밀하게 세운 폭로 계획은 그의 죽음과 함께 아이들에게는 큰 짐으로 전가된다. 그로 인해 시장과 비리 경찰들은 지갑을 손에 넣은 라파엘을 제거하기 위해 아주 혈안이고 보호자를 자처하는 줄리어드(마틴 쉰) 신부와 올리비아(루니 마라)는 사지에 몰린 아이들을 구출해내지는 못한다. 어른들의 탐욕으로 건설한 비리의 세계에서 일찍부터 생존경쟁에 말려든 아이들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보호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어디 브라질에만 국한될까. <트래쉬>의 설정은 여러 모에서 절망적인 사건이 반복되는 한국 사회를 대입하게 한다. 불법적으로 선거 자금을 유용한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보신을 위해 거짓말을 밥 먹듯 되풀이하고 세월아 네월아 저 깊은 물 속에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은 1년이 넘도록 방치된 채 정쟁의 빌미로만 악용되는 게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쓰레기’ 같은 작태다. 그나마 이의 현실을 개선하겠다며 거리로 나서고 목소리를 높이는 아이들이야말로 진창에서 피어나는 꽃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런 아이들이 주인이 될 미래는 지금처럼 절망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고 동토를 녹이는 희망이며 쓰레기장에 아름답게 피어난 한 떨기 꽃이다. 리처드 커티스와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아이의 시선을 선택한 이유였을 테다. 아이들로 넘쳐나는 세상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게 꼭 지금이라고 불가능할 것만 같지는 않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립과 폭력과 탐욕과 온갖 비상식과 비윤리는 아이의 시선과 심정을 잃어서 생긴 결과다.

난 <트래쉬>가 견지하는 아이의 시선이 맘에 든다. 대중적인 선택이었을지라도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을 카메라의 윤리로 설득한다는 생각이다. 어른들의 무차별적 폭력에 맞서면서도 미소와 장난기를 잃지 않는 극 중 아이들만큼이나 <트래쉬>는 사랑스러운 영화다.    
 

시사저널
(20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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