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의 말>(A Torinói ló)

사용자 삽입 이미지
<토리노의 말>은 벨라 타르 감독의 은퇴작으로 알려진다. 갑작스러운 결정이 아니라 이미 작품 준비 전부터 계획한 은퇴라는 점에서 <토리노의 말>은 벨라 타르의 세계관이 응집된 영화라고 할만하다. <사탄탱고>(1994)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2000) <런던에서 온 사나이>(2007) 등 벨라 타르의 전작들이 그렇듯 <토리노의 말> 역시 프레드 켈레멘 촬영감독의 흑백촬영과 롱테이크, 미할리 비그 음악감독의 무한 반복되는 멜로디, 그리고 말까지 포함해 총 4명이라는 간략한 인물 구성으로 긴 시간과 느림의 미학을 통해 소멸하는 인간의 생을 묘사한다.

인간의 삶이란 게 그렇다.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일생이다. 니체는 이를 ‘영원회귀’라고 했다. 실제로 <토리노의 말>은 니체의 일화를 설명하는 내레이션을 극 초반에 삽입한다. 어느 마부의 혹독한 채찍질에도 꿈쩍 않는 말에게 달려가 흐느끼던 니체는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는 말을 남긴 후 10여 년 동안 식물인간처럼 지내다 숨을 거두었다는 것. 곧이어 영화는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한가운데서 살고 있는 마부 부녀의 단조로운 삶에 포커스를 맞춘다. 잠에서 깬 부녀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술 한 잔씩을 한 후 우물에서 떠온 물로 익힌 감자를 한 알씩 먹고 마구의 말을 돌본다. 이게 일상의 전부다.  

다만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가 차이를 생성하는 끊임없는 반복임을 상기한다면 마부 부녀의 되풀이되는 생활에서도 미묘하게 변화하는 지점을 감지할 수 있다. 카메라가 매번 구도를 달리하며 이들의 삶을 비춰 미세하게 균열하는 지점을 만들어내면 그 속에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어느 순간 우물가의 물이 말라버리고 등장의 불이 완전히 꺼지면서 마부 부녀의 삶은 점차적으로 소멸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집 바깥의 폭풍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는데 이는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가는 나약한 인간의 생사존망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요람에서 나온 인간은 결국 무덤으로 회귀하는 운명론적 시간을 품은 존재다. 무와 무의 영원 사이에서 유()를 차지하는 찰나의 삶은 살기위해 버텨야 하는 시간들의 연속이다. 창문 밖으로 바람이 휘몰아치는 광경을 태연하게 앉아 바라보는 극 중 인물의 숏은 이를 특징적으로 압축한다. 앞으로 닥칠 미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부 부녀가 끝내 집을 떠나지 않고 남아서 삶을 관망하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인간이 운명에 맞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투쟁은 죽는 그날까지 묵묵히 살아가는 것밖에는 없다. 파멸과 죽음을 향한 니체의 영원회귀는 곧 인간 운명의 시간인 셈이다.  

다시 말해, 마부 부녀가 선 자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이들은 곧 죽을 운명이지만 이는 또 다른 운명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마부 부녀의 사라져 없어지는 삶을 단 6일을 통해 보여주는 건 그래서 의미를 갖는다. 성경에서 말하길, 신은 여섯 번째 날에 자신의 형상을 모방해 인간을 창조하셨다. 극 중 마부 부녀가 거친 바람에 삶이 풍화되어 끝내 점으로 회귀하는 날이 바로 여섯 번째 날이다. 벨라 타르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마지막에 검은 무지 화면을 몇 초간 보여주지만 영화의 시작 역시도 이와 같았다. 마부 부녀가 죽음으로 다시금 태어나는 것처럼 <토리노의 말>은 그럼으로써 니체의 영원회귀를 형상화한다. 벨라 타르도 마찬가지다. 은퇴를 언급했지만 그것이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테다. 삶이라는 방식을 통해 또 다른 영화, 또 다른 예술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NEXT plus사용자 삽입 이미지
NO. 56

“<토리노의 말>(A Torinói ló)”에 대한 2개의 생각

  1. 재작년 길다면 긴 시간 여행하는동안 생각 생각했던 것들을 들켜버린 것처럼 주르르 읽히네요. 지금까지 읽은 아저씨의 글 중에서 가장, 한 어절씩 꾹꾹 눌러 읽은 글이에요. 늘 그렇듯이 잘 읽고 갑니다. 이 영화도 꼭 보고 싶고요…

    1. 좀 더 많은 상영관에서 상영하면 좋을 텐데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단독 개봉했다고 해요. 그래도 찾아가서 봐도 아깝지 않을 영화일 거예요. ^^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