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의 말> 시네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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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8일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 상영 후 이용철 평론가와 함께 진행했던 시네토크 중 제가 이야기했던 부분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말이 나오는대로 타이핑한 거라 문장이 거칩니다. 양해와 이해 바랍니다.

벨라 타르의 영속성

전 먼저 <토리노의 말>이 품고 있는 영속성의 세계관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벨라 타르가 이 영화를 은퇴작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소멸’ 혹은 ‘마지막’이라는 관점에서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해석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 관점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고요. 다만 저는 이 영화가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오늘 <토리노의 말>의 시네토크를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먼저 벨라 타르의 전작이었던 <런던에서 온 사나이>(2007)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시리즈 중 한 편을 영화화한 <런던에서 온 사나이>의 첫 장면은 카메라가 롱테이크로 움직이며 배를 정면에서 바라봅니다. 인적이 드문 밤을 배경으로 하지만 화면의 오른쪽은 밝게, 왼쪽은 어둡게 처리가 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밝은 오른쪽에서는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배에서 내리는 모습이, 왼쪽에서는 돈가방을 둘러싼 어떤 음모가 벌어집니다.

이 장면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1972)의 첫 장면과 비교하면 흥미로울 듯 합니다. <대부>의 첫 장면은 말론 브랜도가 연기한 돈 콜레오네의 어두운 사무실과 대낮의 마당에서 벌어지는 딸의 결혼식 장면을 교차로 편집해서 보여줍니다. 어두운 사무실에서는 범죄와 관련한 은밀한 거래가 벌어지고 있고 밝은 마당에서는 딸의 결혼식이 교차하면서 일상과 범죄의 세계가 나눠지는 거죠. <대부>에서 코폴라 감독은 이렇게 일상과 범죄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화면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런던에서 온 사나이>의 벨라 타르는 일상과 범죄를 나누지 않고 한 화면에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벨라 타르에게 있어 일상과 범죄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 속에서 공존하는 무엇입니다. 낮이 지나면 저녁이 오고,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 것처럼 말이죠. 흑과 백, 낮과 밤, 밝음과 어두움, 일상과 범죄는 서로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원형을 이룹니다. 벨라 타르가 흑백 필름을 고집하는 것 역시도 이렇게 대립되는 개념들의 공존을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죠.

<토리노의 말> 역시도 소멸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시작을 암시하는 영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을 삶과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요. 극 중 마부 부녀가 살고 있는 집은 곧 삶과 죽음의 경계입니다. 이들은 집안에서 낮과 밤을 맞이하면서 영화 상으로는 6일의 시간을 보여주는데요. 벨라 타르가 7일이 아니라 6일로 압축해서 이들의 삶을 보여주는 건, 그래서 죽음과 함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창세기에서 말하길, 신은 여섯 번째 날에 자신의 형상을 모방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제가 성경을 가지고 온 건 이를 영화 밖의 개념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실제로 극 중에서 여행을 하던 일군의 히피 중 한 사람이 마부의 딸에게 책을 한 권 주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왜 이 영화가 6일을 다루는지에 대한 벨라 타르가 관객에게 제공하는 나름의 힌트인 셈이죠. <토리노의 말>의 마부 부녀는 거친 바람에 삶이 풍화되어 끝내 점으로 회귀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다른 세계 혹은 차원으로의 이동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일 텐데요. 사실 벨라 타르와 같은 거장은 그들 자신의 삶과 작품 활동이 분리되지 않고 겹쳐지면서 더욱 존경을 받는 것이 사실인데요. <토리노의 말>은 이 영화의 내레이션에 등장하는 니체의 말이 그 이후에 어떻게 됐을까에 착안해 만든 영화라고 하죠. 1985년에 각본가 라즐로 크라즈나보르카이와 이미 아이디어를 나누고 이후 영화로 만들만한 적당한 시기를 모색했다고 합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벨라 타르는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얘기를 했는데요. 그렇다면 벨라 타르에게 <토리노의 말>은 영화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영화가 소멸을 말하지만 한편으로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벨라 타르의 이후 활동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토리노의 말>이 어떤 면에서는 또 다른 영화로 영화인의 삶을 살아갈 것임을 선언하는 영화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아닌 게 아니라, 은퇴 선언을 했지만 벨라 타르는 <토리노의 말>을 완성한 이후 10인의 헝가리 감독들이 참여한 <Magyarorszag 2011>의 프로듀서로 참여한 사례가 있습니다. 이후에도 후배 감독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죠. 그래서 전 <토리노의 말>을 소멸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의미로 바라보는 것이 더욱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벨라 타르의 롱테이크

<토리노의 말>과 <런던에서 온 사나이>를 비롯해 벨라 타르가 그의 영화에서 일관되게 세계화하고 있는 영속성을 촬영으로 형상화한 것이 아마 롱테이크일 것입니다. <토리노의 말>의 시작과 함께 니체의 일화를 소개하는 장면이 끝나면 말이 수레를 끄는 모습을 5분 여에 걸쳐 보여줍니다. 이때 카메라는 말의 주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어떠한 편집도 가하지 않고 한 번에 쭈욱 보여주거든요. 혹자들은 벨라 타르의 롱테이크를 두고 예술적인 기교라고 깎아내리기도 하지만 삶의 영속성과 관련한 굉장히 중요한 힌트를 제공하는 오프닝이 아닐까 합니다.

요람에서 나온 인간은 결국 무덤으로 회귀하는 운명론적 시간을 품은 존재입니다.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가는 그 영원의 시간 사이에서 우리는 유를 차지하는 찰나의 삶을 살기위해 ‘버티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마부 부녀의 삶도 계속 되풀이되는 삶의 연속이죠. 잠에서 깨어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술 한 잔씩을 마신 후 우물에서 떠온 물을 데워 익힌 감자를 먹고 마굿간의 말을 돌보고 하루를 마치는 일상의 반복인 것이죠.

그런 반복된 삶 속에서 목격되는 변화는 사실 굉장히 미비합니다. 그 미비한 변화가 쌓이고 쌓여 퇴적층을 이루면서 죽음으로 이들의 삶은 점이 되는 것일 텐데요. 그래서 벨라 타르 영화에서는 마치 롱테이크의 변형이라도 되듯 정물처럼 사는 부녀의 삶을 굉장히 여러 각도에서 비춰주는 카메라 워크를 구사합니다. 카메라가 매번 구도를 달리하며 이들의 삶을 비춰 미세하게 균열하는 지점을 만들어내는 것인데요. 전 거기서 이 카메라의 ‘안간힘’을 읽었습니다. 여러 각도를 전전해도 이들의 삶에는 딱히 변수라고 할만한 것이 없거든요. 물론 우물가의 물이 말라버려 집을 떠나려한 경우가 있지만 다시 돌아와 일상을 되풀이하게 되죠. 정물은 곧 움직이지 않는 것, 정지해 있는 것, 그러니까 극 중 부녀의 삶은 곧 정물과 같습니다.

창문 밖으로 바람이 휘몰아치는 광경을 태연하게 앉아 바라보는 인물의 숏은 이런 주제를 특징적으로 압축합니다. 이들에게는 희망도 없지만 그렇다고 절망도 없습니다. 그 시간,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만이 그들의 의무라도 되는 양 관망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죠. 이처럼 인간이 운명에 맞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투쟁은 죽는 그날까지 묵묵히 살아가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결국 <토리노의 말>은 세계 멸망에 대해 이이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물인 인간이 삶과 투쟁하는 이야기인 것이죠.

실제로 벨라 타르는 <토리노의 말>에 대해서 영국의 영화사이트 ‘Eye for Film’와 이런 인터뷰를 했습니다. “<토리노의 말>은 묵시록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일상에 대한 영화다. 인간은 불을 필요로 하고, 물을 필요로 하고, 먹을 것을 필요로 하고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다만 존재의의를 갖는 시간은 ‘자연과 관계를 맺을 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토리노의 말>에 등장하는 자연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컨대, 집밖에서는 심할 정도의 바람이 불고 있죠. 마부 부녀의 행동 하나하나는 이 회오리바람과 맺는 관계 속에서 정해집니다. 이들의 행동은 모두 바람 때문에 빚어집니다. 그것이 이들의 존재 의의죠. 자연이 있은 후에 인간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벨라 타르의 생각을 잘 보여주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삶의 투쟁은 곧 자연과의 투쟁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 수밖에 없죠.

벨라 타르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인 롱테이크는 살기 위해 애쓰는 인간의 삶을 그대로 대변합니다. 우리는 오프닝에서 수레를 끄는 말의 고통 뿐만 아니라 이를 촬영하느라 고생했을 촬영진의 노고 역시 느낄 수 있습니다. 할리우드였다면, 혹은 한국의 대기업 영화였다면 컷을 잘게 쪼개거나 CG로 처리했을 장면을 벨라 타르는 굳이 힘들게 트랙킹으로 이 장면을 롱테이크 촬영했습니다. 힘겹게 수레를 끌고 가는 말의 안간힘, 이를 찍느라 힘겨워했을 벨라 타르 이하 스태프들의 고생, 그것은 마치리과 닮아있지 않은가요. 말이 곧 우리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겠죠. <토리노의 말>에서 부녀와 말의 존재는 경중이 없습니다. 그저 자연 속에 속한 어떤 존재들이죠. 이 롱테이크에서 삶과 영화를 분리하지 않고 일원화하는 벨라 타르의 영화관이 그대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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