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렌스 말릭, 현자(賢者)가 바라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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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스 말릭은 영화계의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로 통한다.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은 명작을 냈음에도 평생을 은둔하면서 지냈던 샐린저처럼 테렌스 말릭 역시 인터뷰는커녕 공식석상에 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황무지>(1973)로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연출 경력 39년 동안 총 다섯 편의 작품만 남겨 과작의 작가로 통한다. 두 번째 연출작 <천국의 나날들>(1978)과 세 번째 작품 <씬 레드 라인>(1998) 사이의 공백기만 무려 20년이 존재할 정도다. 하지만 <씬 레드 라인>을 연출한다고 하자 닉 놀테, 숀 펜, 존 쿠삭, 애드리언 브로디, 우디 해럴슨, 존 트라볼타, 조지 클루니 등과 같은 할리우드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보수 없이 출연하겠다며 경쟁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럴 만큼 테렌스 말릭의 영화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존재한다.  

2011년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중 하나였던 <트리 오브 라이프>(2011)가 공개되자 각국의 기자들 입에서는 동시에 “역시 테렌스 말릭!”이라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영화의 질적 여부와는 별개로 (기자들의 평가는 극명히 갈렸지만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테렌스 말릭의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연출적 요소가 모두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여섯 번째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는 엄격한 아버지와 그런 환경에서 증오심을 갖고 자란 아들이 끝내 화해에 이르는 과정을 따라가는, 그리 새롭지 않은 이야기다. 사실 말릭의 영화는 아버지를 살해한 후 도피에 나선 젊은 남녀의 사랑을 그린 <황무지>를 제외하면 전혀 독창적이거나 도발적이지 않다. 돈 많은 지주와 떠돌이 노동자, 그리고 여자 사이의 삼각관계를 그린 <천국의 나날들>, 세계2차 대전 당시 미국과 일본의 비극적 전투를 다룬 <씬 레드 라인>, 미국 건국의 주역이었던 스미스 선장과 포카혼타스 전설을 차용한 <뉴 월드>(2005)까지, 기존의 소재를 재활용한다는 인상이 강한 것이다.

대신 그의 영화에는 테렌스 말릭의 인장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존재한다. 불필요한 대사를 줄이고 이미지에 기대는 서사의 전달력, 이미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자연 풍경, 극중 캐릭터가 자신의 속마음을 읊조리는 내레이션 등 말릭의 작품은 한 편의 영상 시(Poet)이거나 삶에 대한 감독의 철학(Philosophy)을 음미하는 기분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테렌스 말릭은 하버드 대학 재학 시절 철학을 전공으로 삼았고 졸업 후에는 매사추세츠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사로 재직하며 세상을 바라봤다. 또한 프리랜서 신분으로 ‘뉴스위크’와 ‘뉴요커’, ‘라이프’ 지(紙)에서 기자로 활동했는데 주로 관심을 가졌던 소재는 극단으로 대립하는 세계 정세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과정에서 테렌스 말릭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의 본질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 요컨대, 그의 영화는 항상 대립하는 가치의 충돌이 빚어내는 결과에 대한 것이었다. 기성과 젊은 세대 간의 충돌 속에 꽃피는 사랑(<황무지>), 한 여자를 사이에 둔 지주와 노동자의 갈등(<천국의 나날들>), 야생과 문명의 삶을 차례로 경험하며 성장하는 원주민 여자의 삶(<뉴 월드>) 등 선명한 이분법의 가치가 극중 세계를 형성했던 것이다. 여기서 테렌스 말릭은 어느 편을 옹호하거나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자세를 지양한다. 그런 감독의 의도는 <천국의 나날들>에서 빌(리처드 기어)의 어린 여동생 린다(린다 만츠)의 입을 통해 잘 드러난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어요. 인간의 반은 천사고, 반은 악마죠.”

린다의 대사를 토대삼아 테렌스 말릭의 영화세계를 굳이 분류해보자면, <천국의 나날들>까지는 철저히 비극적 세계관을 견지한다. 그에 반해 <씬 레드 라인>을 분기점으로 <뉴 월드>와 <트리 오브 라이프>는 혼돈 속의 한줄기 희망을 발견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트리 오브 라이프>는 반목하며 평행선을 긋던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의 순간을 구체적으로 적시하며 보다 유연해진 말릭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사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테렌스 말릭이 <천국의 나날들> 개봉 이후 착수했던 ‘Q’ 프로젝트로 지구상의 생명의 기원을 탐구하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테렌스 말릭은 프리프러덕션 기간 중 갑자기 사라지며 <씬 레드 라인>으로 돌아오기까지 20년 동안 완전히 잊힌 인물이 되었다.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는 은둔 기간 동안 여러 작품의 각색 작업에 참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에는 미조구치 겐지가 영화화했던 일본의 설화 <산쇼다유>를 안제이 바이다의 무대극을 위해 각색한 작업도 있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가슴 절절한 사랑을 그린 <산쇼다유>는 인간의 고귀한 가치를 역설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세상을 비극으로 바라보던 당시 테렌스 말릭에게 <산쇼다유>의 세계관은 신선한 충격과도 같은 것이었다. ‘Q’ 프로젝트를 오랜만에 꺼내들은 말릭은 답보 상태에 빠져있던 이야기의 골자를 구성할 수 있었다. 하여 완성된 <트리 오브 라이프>를 보면 가족에 대한 사랑과 존중은 물론 증오와 반감, 그리고 죽음까지 껴안은 테렌스 말릭의 지혜로운 어른의 면모가 화면 곳곳에 베어난다. 

다만 그는 <트리 오브 라이프>의 부자 관계를 특정 가족의 사연이 아닌 우주의 질서로 설명하고픈 야심이 있었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순환계를 이루는 것처럼 사랑과 미움도, 존중과 증오도, 싸움과 화해도 감정이라는 세계의 질서를 이루는 것. 공룡에서 인간으로 지구의 주인은 바뀌었지만 공룡 역시도 서로 먹고 먹히는 본능의 질서 속에서 그렇게 지구에서 생명을 유지해왔다. 너무 어려운 이야기 아니냐고?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반은 천사이고, 반은 악마라고. <트리 오브 라이프>에 황금종려상을 수여했던 칸의 경쟁부문 심사위원장 마틴 스콜세지는 테렌스 말릭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규모에서도, 중요도에서도, 의도에서도, 당신이 이름붙인 모든 것에서 테렌스 말릭은 최고의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과작의 작가로 알려진 테렌스 말릭은 지금 행보로만 보면 (좀 과장해서) 다작의 작가라 할만하다. <트리 오브 라이프> 개봉 1년도 되지 않아 여섯 번째 영화의 촬영을 마쳤기 때문이다. 3개의 에피소드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이 러브스토리에는 밴 에플렉, 레이첼 맥아담스, 올가 쿠를렌코, 하비에르 바르뎀, 그리고 레이첼 바이즈가 출연한다. 누가 테렌스 말릭의 영화 아니랄까봐, 할리우드 빅스타들이 ‘떼거지로’ 출연한다. 구체적인 이야기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없지만 삶의 조화에 대한 것임은 자명하다. 그게 바로 ‘현자'(賢者) 테렌스 말릭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beyond
(201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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