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엑스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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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역사에서 2000년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버금(?)갈 정도로 발상의 대전환이 이뤄진 시기였다. 그전까지 블록버스터의 미덕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인 압도적인 스케일에 있었다. 부수고 폭파시키고, 그 다음엔 ‘더 크게’ 부수고 폭파시키는 것이 당시 블록버스터의 미학이었다.

그렇게 거대한 이미지에 관객들의 피로감이 극에 달하자 20세기 폭스 사(社)는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폭스는 <인디펜던스 데이>(1996)와 같은 단세포적인 블록버스터를 만들기도 했지만 <다이하드> 시리즈, <스피드>(1994) <타이타닉>(1997) <캐스트 어웨이>(2000) 등과 같은 작품으로 나름 블록버스터 시장을 선도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이 주목한 건 슈퍼히어로였다. 슈퍼맨과 같은 주류가 아닌 양지에서 소외당하고 음지에서 방황하는 비주류 슈퍼히어로야말로 블록버스터적인 볼거리를 확보하면서 미국과 관련한 다양한 해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최적의 텍스트였다. 거기에 주인공 격인 슈퍼히어로가 집단으로 등장한다면 갈수록 취향이 다양해지는 관객들을 긁어 모이기에도 그만이었다.

그렇다면 해답은? 마블 코믹스의 <엑스맨>이었다. 문제는 얼굴에 잔뜩 그림자가 드리운 이 비주류 슈퍼히어로들을 다루기에 적합한 연출자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주류 성향의 감독들이 <엑스맨>을 맡는다는 것은 애초 이 프로젝트의 기획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 수가 있었다. 할리우드 시스템 밖에서 나름의 성과를 올리며 이름값을 높이던 감독이 필요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게 인디영화였고, <유주얼 서스펙트>(1995)로 ‘카이저 소제’ 신드롬을 일으켰던 브라이언 싱어가 연출자로 낙점됐다. 대규모 유혈극에 연루된 용의자 다섯 명의 진술을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교차 편집해 보여주는 <유주얼 서스펙트>는 <엑스맨>의 연출 방향을 제시한 가늠자에 다름 아니었다.

사건의 주동자를 검거하려는 수사관과 이에서 벗어나려는 용의자 들의 대립을 다루는 것처럼 <엑스맨>은 ‘인간 vs 돌연변이’, ‘자비에 vs 매그니토’ 간의 양분된 세계를 기본으로 하되 번민에 휩싸인 슈퍼히어로 ‘들’에게 골고루 장면을 배분했다. 그런 자신들을 적으로 돌린 주류 사회에 분노하면서 동시에 인간성의 가치를 놓지 않으려 고뇌하는 주인공 들의 교차하는 감정 묘사는 결과적으로 <유주얼 서스펙트>를 변형한 형태에 가까웠다.  

우려가 없었던 건 아니다. 브라이언 싱어가 적역의 지휘자라고 한들 블록버스터의 스케일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이라는 부정적인 시선도 폭스 내부에는 존재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엑스맨>은 단순한 슈퍼히어로물이 아니었다. 블록버스터 시장에서 앞으로의 주도권을 선점할 프로젝트가 <엑스맨>이었다. 모험을 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텍스트였다. 브라이언 싱어는 만화로만 치부되던 슈퍼히어로물에 실제 역사, 즉 첫 장면부터 1944년의 폴란드 유대인 강제 수용소를 배경으로 등장시켜 <엑스맨>이 단순 오락물의 가치를 넘어 정치 사회적인 해석이 가능하도록 이야기를 꾸몄다. 바로 그와 같은 설정에서 <엑스맨>의 진가가 발휘됐다.

초인적인 힘을 뽐내기만 하던 과거의 슈퍼히어로물이 허구의 영역에서 점점 그 가치를 잃었다면 <엑스맨>의 슈퍼히어로 들은 남다른 능력 때문에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며 현실의 지위를 획득했다. ‘슈퍼’라기보다 ‘안티’에 가까운 히어로 들은 다양한 캐릭터의 매력에 힘입어 전 세계적으로 42억 4천만 달러에 가까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그에 따라 <엑스맨>은 시리즈뿐만 아니라 스핀 오프 개념에서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프랜차이즈로 각광받았다.

거대 제작사들은 앞 다퉈 <엑스맨>의 방식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소니픽처스는 <스파이더맨>(2002) 판권을 마블로부터 사들이며 전설의 저예산 공포영화 <이블 데드> 시리즈의 샘 레이미를 영입했다. DC 코믹스의 대표 슈퍼히어로인 <배트맨>의 영화화 권리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던 워너 브러더스는 <메멘토>(2000)로 재능을 인정받은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메가폰을 맡겼다.    
   
브라이언 싱어는 말해 무엇할까. <엑스맨>에 이어 <엑스맨 2>(2003)까지 성공 시킨 싱어는 <슈퍼맨 4: 최강의 적>(1987) 이후 명맥이 끊겼던 슈퍼맨 프로젝트를 되살릴 장본인으로 주목받았다. 이에 <엑스맨: 최후의 전쟁>(2006)을 포기하고 <수퍼맨 리턴즈>(2006)의 연출을 승낙하기에 이른다.

비주류 성향을 지닌 싱어에게 주류의 슈퍼히어로를 맡겼다는 점에서 <수퍼맨 리턴즈>는 실패로 끝난 프로젝트였다. 다만 성향과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개의 슈퍼히어로 프로젝트를 양손에 들고 저울질을 할 수 있을 만큼 당시의 싱어에게 쏠린 제작사들의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엑스맨> 한 편으로 슈퍼히어로물이 나아갈 바를 제시하고 블록버스터의 판세까지 바꿨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대개 정치 사회적인 텍스트로 슈퍼히어로물을 말할 때 첫 손으로 꼽는 영화는 <다크 나이트>(2008)다. 이런 가정, 만약에 <엑스맨>이 없었다면 <다크 나이트>가 가능했을까? <엑스맨>의 비주류 혹은 안티 히어로 들은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소수자의 전형과 다르지 않다. 건장한 백인 이성애자 남자가 슈퍼히어로를 독점하는 상황에서 <엑스맨>의 반(反)영웅 들은 유색인종이었고 성소수자(LGBT)였으며 아이와 여자, 노인, 장애우와 같은 상대적인 약자였다.

예컨대, 미스틱과 같은 매력적인 여성 슈퍼히어로는 <엑스맨> 시리즈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대변한다. (실제로 다음 스핀 오프의 주인공으로 미스틱이 가장 유력하다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그러니까, 슈퍼히어로물이 현실 정치의 텍스트가 될 수 있도록 가장 먼저 방향성을 제시한 건 <엑스맨>이었다.

더욱이 블록버스터와 같은 주류 영화에서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대중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묘사한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엑스맨>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캐릭터의 보고였다. 또한 멤버 들이 서로의 보완재로서 힘을 합쳐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은 절대자로 묘사되어왔던 기존의 슈퍼히어로물의 이야기 방식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혁명에 다름 아니었다.  

후에 마블이 직접 영화 사업에 뛰어들어 <어벤져스>(2012)를 기획하면서 연출자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 <엑스맨>이었다. 정확히는 코믹스였는데 <엑스맨>의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케빈 파이기는 조스 웨던이 <어스토니싱 엑스맨>의 코믹스 작가로 참여했다는 점을 들어 <어벤져스>의 연출자로 강력히 밀어붙였다. <엑스맨>을 경험했기에 다수의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캐릭터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 케빈 파이기의 논리였다.

그 정도로 <엑스맨>은 2000년 이후 등장한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물의 기준과 같은 선례였다. 또 하나의 가정. 만약에 브라이언 싱어가 <엑스맨>을 남기지 않았다면 <어벤져스>의 성공이 담보되었을까. <엑스맨>은 거대 스펙터클에 함몰되어 있던 할리우드의 2000년 이후의 블록버스터 시장에 새바람을 불어넣으며 지금도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맥스무비 매거진
201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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