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한국영화에 대한 화제는 <명량>으로 일원화되는 분위기였지만 배우의 역할로 한정해 말하자면 좀 다른 양상을 띤다. 관객에게 가장 큰 웃음과 재미를 준 배우의 연기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하 ‘<해적>’)과 <타짜-신의 손>(이하 ‘<타짜2>’)에 출연한 유해진이 독보적이었다.
철봉이, 대박 흥행을 이끈 연기
유해진의 차진 연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평이 나 있다. <해적>의 철봉이나 <타짜 2>의 고광렬 캐릭터는 그의 연장 선상에서 설명될 수 있지만 무작정 튀지 않고 무엇보다 여유가 넘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멀티 캐스팅이 대세로 떠오른 한국 영화계에서 유해진이 20년 가까이 배우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배경이다. (유해진은 정지영 감독의 <블랙잭>(1997)으로 영화에 데뷔했다!)
그의 연기를 축구에 대입해 설명하면, 전면에 나서 공격을 이끌기보다 이들 뒤에서 판을 만들기 위해 묵묵히 자신이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는 미드필더에 가깝다. <해적>에서 해적의 일원이었다가 조직이 와해할 위기에 처하자 저 혼자 살겠다고 산적에게로 투항, 이후 갖은 바다의 지식을 뽐내는 철봉은 공격형 미드필더를 연상시킨다. <타짜2>의 고광렬은 재능은 뛰어나지만, 연륜은 아직 부족한 젊은 타짜 대길(최승현) 뒤에서 자신의 경험을 전파해주는 수미형 미드필더 연기의 전형을 보여줬다.
‘공미’로서의 철봉과 ‘수미’로서의 고광렬이 보여주는 연기의 차이는 각각의 영화가 목적하는 장르성에서 기인한다. <해적>은 사극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군도: 민란의 시대> <명량>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코믹한 느낌이 압도적이다. 특히 유해진이 연기한 철봉이 바다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산적 동료들에게 바다 고기와 민물고기의 차이를 설명하며 ‘음파음파… 파음파음’ 생선으로 빙의한 연기는 <해적>을 찾은 관객을 가장 웃기게 만든 에피소드이었다. 그렇게 철봉이 분위기를 잡으면 영화는 이를 주인공 장사정(김남길)이 엉뚱하게 받아 코믹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극을 진행했다.
그래서 철봉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장사정의 곁에 붙어 있는 것이 중요한 역할이었다. 산적의 두목이라는, 자칫 무거워 보일 수 있는 장사정의 캐릭터를 철봉의 보좌로 관객이 더욱 친밀하게 이입할 수 있게끔 하였고 매력적인 안티 히어로가 터뜨리는 코믹함을 기반으로 <해적>은 추석 시즌까지 장기 흥행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철봉이 골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결정적인 패스가 팀을 승리로 이끌었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고광렬, 아버지의 이름으로
<해적>의 철봉과 다르게 <타짜2>의 고광렬은 결정적인 때가 아니면 전방에 나서는 법이 없다. 후방에서 잔뜩 몸을 움츠린 채 정중동의 자세를 취하다가 고니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타짜2>는 전작 <타짜>(2006)의 고니(조승우)와 평경장(백윤식) 관계에서 보듯 스승과 제자의 사이를 넘어 유사 부자(父子) 관계를 극의 중요한 축으로 삼는다.
그처럼 엄마의 보호 아래에서 자란 대길에게 고광렬은 그동안의 공백을 채워준 아버지와 같은 존재다. 서울로 상경해 촉망받는 젊은 타짜로 이름을 날리던 중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대길이를 품어주는 건 바로 고광렬이다. 밑 장을 빼다가 걸린 고니를 위해 자신의 패를 바꿔 채 위기에서 구해주고 미나(신세경)를 구하러 간 유령(김준호)의 하우스에서 역시 고니 대신 모자란 몸값을 대신 내어주면서 고광렬은 젊은 주인공이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죽음을 불사해 가면서까지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것이다.
복수에 눈이 멀어 함께 파트너로 뛰자며 달려드는 고니에게 고광렬은 이 세계의 가장 중요한 덕목 두 가지에 대해 조언한다. 하나는 “한 끗으로 장땡을 이길 수 있는 게 바로 이 바닥이야”, 또 하나는 “패를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상대방의 마음을 보는 거야” 이는 화투판의 타짜들 사이에서 통하는 말이지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배우들, 특히 유해진의 연기 철학과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유해진은 작품을 고를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재미’이다. 그리고 상대방과 연기할 때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이 ‘호흡’이다. 그는 재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분량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는 배우로도 유명하다. 연기력보다 미모가 주인공의 기준이 되어버린 연예 산업 안에서 유해진은 개성 있는 연기와 사람 좋은 마음씨로 관객을 무장해제 시킨다. 또한, 연기는 호흡의 예술인만큼 상대 배우가 편안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도 유해진은 배우로서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이제 단순히 재미를 주는 캐릭터를 넘어 누군가를 보좌해줄 수 있는 어른의 지위로 영화 속에서 성장한 배경이다. 하물며 멀티 캐스팅이 대세가 된 지금에 많게는 10여 명이 중심이 되는 영화에서 상대방을 배려해주며 자신의 연기를 펼친다는 건 가장 중요한 배우의 덕목일 것이다. 그와 같은 연기 철학이 그대로 반영된 두 편의 영화 <해적>과 <타짜2>에서 유해진의 연기가 가장 돋보였던 건 당연한 결과인 셈이다.
맥스무비 매거진
2014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