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노운 걸> 타인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

‘형제’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감독들이 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의 루소 형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의 코언 형제, <매트릭스>(1999)의 워쇼스키 형제, 엇! 이들은 여자로 성 확정 수술을 받았으니 이제는 자매이지만, 어쨌든. 그리고 벨기에 출신의 다르덴 형제가 있다.

다르덴 형제는 누구?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형제의 <언노운 걸>(2016, 국내 개봉 2017년 5월 3일)은 2016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랐던 작품이다. 다르덴 형제는 칸영화제 경쟁부문의 단골손님(?)으로 유명하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칸영화제 초청을 받아 <언노운걸>을 포함해 7편의 영화가 연속해서 경쟁부문에 포함되었다. 칸영화제에서의 수상 경력은 더욱 화려하다.

<로제타>(1999)로 칸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을, <아들>(2002)로 남우주연상을, <더 차일드>(2005)로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로나의 침묵>(2008)으로 각본상을, <자전거 탄 소년>(2011)으로 심사위원 대상(박찬욱 감독이 2004년 <올드보이>로 받았던 바로 그 상!)을, <내일을 위한 시간>(2014)으로 에큐메니컬 상을 받는 등 세계 최고의 영화제로 군림하는 칸에서만 무려 7개의 상을 받은 명실상부 유럽, 아니 전 세계 최고의 영화감독이다.

대체 다르덴 형제가 어떤 영화를 만들기에 발표하는 작품마다 칸영화제가 주목하는 걸까. <내일을 위한 시간>으로 받은 애큐메니컬 상(Prize of the Ecumenical Jury)은 인간 존재를 깊이 있게 성찰하는 것은 물론 예술적 성취까지 이뤄야 받을 수 있다. 그렇다, 다르덴 형제는 이 사회의 가장 최하층에 있는 인물에 주목하고 그들의 삶에 눈높이를 맞춘 카메라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언노운 걸>의 제니(아델 에넬)는 입원 중인 원장 의사를 대신해 병원 업무를 맡고 있는 의사다. 인턴의 일 처리가 맘에 들지 않아 충고를 하던 중 벨이 울리지만, 제니는 업무가 끝났다는 이유로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다음날 병원으로 경찰들이 찾아온다. 인근에서 ‘신원미상’(The Unknown Girl)의 소녀 변사체가 발견되었는데 마지막 행적이 이 병원이라는 것. 자초지종을 살피던 중 제니는 어제 병원 벨 소리의 정체가 소녀이었음을 깨닫고 혼란에 빠진다.

목숨을 살리기 위해 의사가 된 제니는 자신의 행동 때문에 소녀가 살해된 것만 같아 마음이 괴롭다. 그렇다고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대신 속죄하는 마음으로 소녀의 이름을 찾기로 한다. 소녀가 최소한 익명으로 매장되기를 바라지 않는 제니는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쓴다. 주변을 수소문한 끝에 소녀가 어떤 이유에서 성매매를 하던 중이었고 그 대상자 중 한 명이 제니가 치료하는 환자와 연관이 있다는 걸 발견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엄밀히 말해 제니는 이 사건의 가해자는 아니다. 몰려오는 환자를 치료하느라 업무에 심신이 지쳐 안정을 취할 목적으로 정해진 진료 시간을 지켰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제니가 신원미상 소녀의 죽음에 죄의식을 느끼는 건 사회적인 약속의 범위가 포함하지 못하는 사각지대, 즉 마음의 문제가 걸리기 때문이다. 제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사건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괴로운 거겠죠.”이다.

이 사회에는 단순히 업무 시간을 지키는 것 이상의 가치가 요구될 때가 있다. 병원이라는 곳이 그렇다. 병원은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심각한 병을 예방하고 그럼으로써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역할의 공간이다. 인간은 약한 존재여서 병원처럼 치료와 치유의 공간이 없으면 살아가기 힘들다. 약자는 더 그렇다. <언노운 걸>의 죽은 그녀는 여자이고, 아이이고, 흑인이고, 난민이다. 도움이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인물이다. 그들에게는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까지도 도움이 절실하다.

의사는 그 누구보다 타인의 고통에 먼저 반응하고 동참해야 한다. 제니의 죄의식을 추동하는 건 이 부분이다. 그리고 이는 다르덴 형제 영화의 근간이기도 하다. 그동안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 등장했던 인물의 면면을 보면, 생계 곤란에 시달려 아이를 팔아야 하는 부부(<더 차일드>),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온 이주민(<로나의 침묵>), 아빠를 찾아 보육원을 탈출한 아이(<자전거 탄 소년>), 동료의 동의가 있어야 회사에 복직할 수 있는 노동자(<내일을 위한 시간>) 등 계급이라는 표현조차 사치스러울 정도로 고통을 겪고 있다.

이들의 사정을 외면한다고 죄가 되는 건 아니지만, 제니가 벨 소리를 외면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문제다. 굳이 죄의식이 아니더라도 연대의식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들이 처하게 될 최악의 상황을, 또는, 동일한 고통의 반복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다르덴 형제가 영화를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다. 그래서 다르덴 형제 영화의 카메라는 극 중 인물의 곁에 바싹 달라붙어 이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하고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게 하여 종국에 세상을 변화시킬 방법에 대해 고민하도록 한다.

그러니까,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일종의 <언노운 걸>의 도움이 절실한 소녀가 누른 ‘벨 소리’이다. 이에 대해 문을 열어줄지 말지를 판단하는 제니의 위치는 곧 우리가 맞닥뜨리게 될 상황인 셈이다. 실제로 생활이 너무 곤궁해 일자리 찾기에 전전하는 소녀를 다룬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는 개봉 후 벨기에 정부가 청년 고용을 의무화하고 십 대 노동자를 보호하는 ‘로제타 법’을 제정하도록 했다.

세상이 아무리 고도화되고 조직화되고 그 결과, 각박해지고 있더라도 타인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이유로 우리 모두에게는 책임감이 필요하다. 책임감은 타인을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타인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 또한, 주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간다는 의미다. 제니는 소녀의 죽음에 죄의식을 느끼고 최소한 그 소녀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걸 세상에 확인시켜주려고 이름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타인의 고통은 익명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만큼 세상은 병들었다. 병든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건 관심이라는 책임감이다. 다르덴 형제는 그와 같은 책임감에서 영화를 만들고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 있다. 그리고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형제, 아니 감독을 통틀어 최고의 연출자가 되었다.

 

KDI 나라경제
2017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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