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우주적 상상력으로 장르를 확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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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은 신작을 발표할 때면 어김없이 화제의 중심에 선다. 특히 <다크 나이트>(2008)로 슈퍼히어로물의 문법을 완전히 바꾼 후부터 그의 영화는 형식에서나 소재 면에서 늘 전례 없던 작품 취급을 받으며 지적인 영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단돈 6천 달러를 들여 연출과 각본과 촬영과 편집까지 도맡았던 데뷔작 <미행>(1998)과 그의 천재적 면모를 세상에 알린 <메멘토>(2000)에서부터 놀란의 연출력에는 남다른 면모가 있었다.

그것은 새로움일 텐데 사실 놀란의 영화는 장르적으로나 소재로 볼 때 기존의 것을 활용하는 쪽에 가깝다. 예컨대, 지금 한창 관객몰이 중인 <인터스텔라>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와 비교되며 우주 배경 영화의 진화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시 말해, 크리스토퍼 놀란은 장르의 창조자가 아니라 장르의 확장자라고 할 만하다. 그는 늘 획기적인 방식으로 기존 장르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며 할리우드의 장르 역사를 재편해 가고 있다.

철저한 형식주의자

놀란은 영화를 연출한다기보다 세계를 창조한다는 인상을 준다. 제작사에 고용되는 감독과 다르게 늘 자신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시나리오를 들고 촬영에 임한다. 배트맨 코믹스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면서 <다크 나이트> 삼부작의 메가폰을 잡았던 이유는 그의 영화 철학을 반영할 좋은 텍스트였기 때문이다. “슈퍼히어로물 만큼 현재의 미국을 잘 대변하는 장르는 없다”며 만화적 상상력으로 가득했던 이 세계에 사실주의를 도입해 반전을 꾀했다.

이에 대한 놀란의 입장은 확고했다. “영화는 그 자신만의 내부 논리를 가지고 세계를 이뤄야 한다. 그래야만 관객이 보는 이미지 그 이상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를 연출할 때면 가장 먼저 신경을 쓰는 것이 바로 형식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게릴라 방식으로 만들었던 데뷔작 <미행> 때부터 형식에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 <미행>(1998)은 이야기를 시간순으로 쭉 펼쳐 놓으면 그다지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 미행을 즐기던(?) 주인공이 덫에 걸려 몰락하는 내용이다. 다만 크리스토퍼 놀란에게는 뻔한 내용을 새롭게 할 끝내주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세 부분으로 나눠 이를 뒤죽박죽 편집해 놓으면 무슨 내용일까, 궁금증을 유발해 흥미를 제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미행>의 성공으로 스튜디오와 작업할 수 있게 된 <메멘토>는 형식주의자로서 놀란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경우였다. 단기 기억 상실증을 안고 있는 주인공의 상태를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전체 이야기를 10분 단위로 쪼개 시간 역순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익숙한 내용조차 낯설게 만든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그가 감독을 넘어 작가의 지위를 확보한 까닭은 어떤 장르와 소재를 택하든 재활용을 넘어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연출 능력이 필모그래프 전체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놀란이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이해도뿐만 아니라 이를 활용하는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주는 한 예에 불과하다.

지적 호기심의 대가

크리스토퍼 놀란은 <미행> <메멘토>의 독립영화를 거쳐 <인썸니아>(2002)로 할리우드에 입성 후 <인셉션>(2010)처럼 거대 예산의 프로젝트에 자신의 개성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감독의 위치를 차근차근 밟았다. 그런 행보 속에 <프레스티지>(2006)는 놀란의 작품 중 가장 대중의 관심을 덜 받은 영화에 속한다. 기존의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는 작품을 종종 선보였던 탓인지 그의 영화는 최첨단의 이미지로 인식되는데 1900년대가 배경인 <프레스티지>는 이질적인 인상이 드는 것이다.

<프레스티지>에서 놀란이 주목한 건 마술이 가진 영화와의 공통점이었다. 두 매체는 모두 트릭, 즉 속임수를 기본으로 하는 장르다. 영화는 카메라로, 마술은 무대장치로 보는 이를 황홀경에 빠뜨린다. 이에 착안해 두 마술사의 마술 대결을 테마로 삼는 <프레스티지>는 의도적으로 인물들의 시점을 교란해 궁금증을 유발한다. 이는 <미행>에서 이미 선보였던 교차 편집 기술이기도 한데 놀란은 이런 서술 방식에 대해 ‘미로 maze’라고 표현한다. “미로처럼 상황을 유추해야 결말에 다다를 수 있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다.”    

미로의 구조를 예로 들어, 크리스토퍼 놀란이 그 출발점에 해당한다면 복잡한 길의 나침반 역할은 동생인 조너던 놀란의 몫이다. 단기 기억 상실증에 흥미를 느껴 형은 영화를, 동생은 소설(<메멘토 모리>)을 만드는 과정에서 의견을 교환해 가며 <메멘토>를 완성한 건 유명하다. <인터스텔라>의 경우, 형 놀란이 자신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가지고 <인셉션>을 만드는 동안 동생 놀란은 대학에서 상대성 이론을 공부하며 시나리오를 준비해 온 것으로 알려진다. 이를 두고 <인터스텔라>에 참여한 세계적인 물리학자 킵 손은 “놀란 형제가 틀을 잡은 서사는 입증된 과학적 지식 내에서 전개된다.”며 혀를 내둘렀다.

수공업(?)으로 이뤄낸 스펙터클

그와 같은 지적 호기심이 우주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영화로 완성될 때 관객을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이의 바탕을 이루는 사실성이다. 놀란은 불가능한 경우가 아니라면 CG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는 대신 수공업적인 형태로 스펙터클을 만들기를 즐긴다. <인터스텔라>에서 쿠퍼 가족의 옥수수밭을 구현하기 위해 실제로 30만 평의 땅을 매입해 씨를 뿌려 경작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지만, 그는 <인셉션>에서 그보다 더한 수공업의 스펙터클을 이뤄낸 적이 있다.

타인의 꿈속에 침입한 아서(조셉 고든 레빗)가 호텔 복도에서 추격전을 벌일 때 이를 아예 세트로 만들어 360°로 회전한 제작 배경은 거의 전설처럼 회자된다. 또한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아리아네드(엘렌 페이지)가 파리의 카페에서 대화를 나눌 때 프랑스 정부가 실제 폭탄의 사용을 불허했기 때문에 고압 질소를 사용해 폭발 장면을 슬로우 카메라로 잡은 장면은 여전히 영화 팬의 뇌리에 생생하다. CG로 작업했으면 더 쉬웠을 것을 굳이 수공업 방식으로 작업한 것에 대해 놀란은 “영화가 다루는 다양한 꿈의 세계가 환상이 아닌 현실로 보이기 위해서”라는 의견을 밝혔다.

현실에 없는 세계 창조를 위해 첨단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데 일가견을 보이는 그가 예전의 방식으로 스펙터클을 구현하는 광경은 역설적이다. 디지털이 난무하는 시대에 이제는 유물이 된 35mm 필름을 고집하는 것도 그렇다. (<인터스텔라>에서는 우주 배경의 장면을 위해 아이맥스를 부분 도입해 촬영했다!) 그것이 크리스토퍼 놀란을 다른 감독보다 훨씬 특별하게 만드는 정체성이다. 놀란은 <인터스텔라>를 만든 배경에 대해 “차가운 우주와 따뜻한 인간 감성을 대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는 그의 연출 배경에도 그대로 대입되는 개념이다. 첨단의 상상력과 구식의 작업방식. 그러한 대비 속에 최상의 결과물을 도출해내는 놀란의 영화 철학과 세계관이 그대로 일치하는 <인터스텔라>는 그가 보여주는 경력의 정점일지도 모르겠다.    

맥스무비 매거진
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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