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 vs <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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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램지의 <케빈에 대하여>와 봉준호의 <마더>는 숭고한 모성신화를 해체한다는 점에서 주제를 공유한다. 흔히 모성애라고 하면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자기희생적 면모가 강조되지만 두 영화가 보여주는 모성은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파괴하는 수준이다. 모자(母子)의 애증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돌이킬 수 없게 된 가족의 비극적 삶을 어머니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 그럼으로써 이들 모성은 시험대에 오르지만 처한 상황과 감내하는 방식에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가 설명하는 바는 과연 무얼까.

에바 캇차두리안 vs 도준 엄마

각자의 이름에서 드러나는 바, <케빈에 대하여>와 <마더>의 차이는 곧 모성을 리트머스 삼은 그 사회의 인식을 간접적으로 반영한다.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틸다 스윈튼)는 애초에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 세계 각지를 돌며 글을 쓰는 에바에게 임신은 곧 직업의 포기를 의미한다. 남편 프랭클린(존 C. 라일리)이 임신 소식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과 달리 에바는 찡그린 표정을 지음으로써 엄마가 된다는 것에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음을 드러낸다. 사실 에바는 엄마의 정체성과 함께 개인의 사회적 성공 역시 중요시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에바 캇차두리안’이란 이름은 누구 엄마 이전 개인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에바의 심리를 상징한다.

에바가 양육과 직업 사이에서 갈등하는 현대 사회의 모성의 딜레마를 예시한다면 <마더>의 도준 엄마(김혜자)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조건적인 희생을 감내하는 모성의 예에 해당한다. 그녀에게 여자의 정체성은 자식의 성장과 함께 서서히 사라져가는 어떤 것이다. 자식의 희로애락을 본인의 것으로 등가에 놓는 근대적 모성의 징후로, 이는 엄마를 섹스하지 않는 존재로 바라보는 한국사회 저변의 편견의 바탕이 된다. 하여 한국의 엄마들은 도준 엄마처럼 자신의 이름 대신 누구의 엄마로 불리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이 같은 심리에는 품안에서 자식을 놓기 (혹은 잃기) 싫다는 어미의 공포가 짙게 배어있다.

케빈 vs 도준

에바와 도준 엄마의 각각의 아들인 케빈(이즈라 밀러)과 도준(원빈)은 표면상 공통점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와 불화했던 케빈과 다르게 도준은 남녀 관계가 연상될 정도로 사이가 각별하다. 아빠가 부재하고 무엇보다 어릴 때 농약을 잘못 먹고 정신이 이상해져 엄마가 좀 더 가까이서 돌봐야했기에 가능했던 관계다. 그에 반해 케빈은 아빠의 눈을 피해 엄마를 괴롭히다보니 두뇌가 영악한 쪽으로 발달했다. 치밀한 작전을 세워 학교 친구들을 체육관에 가둬두고 학살하는 장면을 보라. 좀 다른 경우지만 <마더>는 범행 은폐의 의도 여부를 애매모호하게 묘사함으로써 도준이 완전히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다만 이들의 행위는 모성을 인식하고 있는 가운데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가령, 케빈이 에바에게 갖는 분노의 원인 중 하나는 무조건적인 희생을 감내하지 않는 모성의 정도에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엄마 얼굴이 실린 서점의 걸개 사진을 보고 케빈이 적의를 드러내는 장면은 엄마가 되어서도 사회적 성공에 목매하는 에바의 가치관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보인다. 도준은 엄마의 희생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는 듯한 인상이 뚜렷하다. 도준은 아들의 범행 목격자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엄마가 잃어버린 침통을 돌려줄 때 성을 내며 이렇게 얘기한다. “이걸 아무 데다 떨어뜨리면 어떻게” 두 영화는 공히 자식이란 부모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순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케빈에 대하여> 모성 vs <마더> 모성

두 영화 모두 아들의 악행과 그에 이르게 한 과정을 회고하는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에바와 도준 엄마의 후일담은 그들의 성격만큼이나 다르게 진행된다. 에바가 이웃의 따가운 눈총을 감내하며 주홍글씨의 삶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반면 도준 엄마는 제 새끼의 죄악에 눈감은 망각을 방패삼아 이기적인 모성의 깊은 우물로 잠입한다. 이 차이는 개인과 가족이라는 서로 다른 가치의 지향에서 비롯된 결과다.

<케빈에 대하여>가 가해자 측에 해당하는 에바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유는 그녀(와 케빈)에게 집중된 가해의 책임을 분산시키기 위함이다. 케빈은 괴물이고 괴물을 키운 건 에바이지만 그 때문에 모든 책임을 이들에게만 돌리는 건 사실 나이브한 발상이다. 잊을만하면 미국 사회를 충격의 도가니로 빠뜨리는 대형 총기 사건이 특정 개인의 잘못이던가. 에바는 수감된 케빈을 찾아가 어렵게 말문을 연다. 대체 왜 그랬냐고. 하지만 케빈에게서는 잘 모르겠다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다. 그제야 해방감을 느끼는 에바. 

명확한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 일차적인 이유는 원제(<We need to talk about Kevin>)처럼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한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동시에 에바에게만 지운 죄를 덜어줌으로써 새 출발의 문을 열어주는 감독의 배려이기도 하다. 자식이란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던 것도 그녀가 엄마였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가 아니던가.

케빈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괴물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에바와 달리 <마더>의 도준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그 자신조차 괴물이 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아버지까지 부재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 자식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엄마’뿐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살인(murder)도 마다하지 않는 엄마(mother)는 괴물의 다른 이름이다.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라면 망각하는 것일 뿐. 그럼으로써 도준 엄마는 여자라는 자신의 성도 망각하고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다. 

<케빈에 대하여>와 <마더>는 모두 엄마가 된다는 것의 어려움을 말한다. 모성은 늘 희생과 동의어로 인식되는 탓에 고정불변의 신화가 되었지만 실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모하는 살아있는 생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모성의 본질을 다루는 <케빈에 대하여>와 <마더>에서 보이는 차이, 예컨대 서양과 동양의 엄마의 지위, 또는 현대와 근대의 모성의 역할 같은 것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중요한 건 숭고한 모성신화를 해체하고 새로운 모성신화를 완성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케빈에 대하여>와 <마더>는 두고두고 이야기될 필요가 있는 영화다.  

Tip! 비극의 근원

<케빈에 대하여>와 <마더>는 또한 흡사한 이미지가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무래도 모성에 대한 영화이니만큼 여성 성기를 상징하는 이미지의 등장은 필연적이다. <케빈에 대하여>의 날리는 커튼 실루엣 사이로 비추는 문의 장면과 <마더>의 약재상 안의 엄마가 문을 통해 바깥의 도준을 바라보는 장면이 그렇다. 이들 장면의 이미지는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과 흡사한데 그런 점에서 ‘비극의 근원’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2 thoughts on “<케빈에 대하여> vs <마더>”

  1. 비극의 근원 보다는 모든 이야기의 근원 정도로 해주시면 안될까요… 엄마는 아니지만 잠재적 엄마로서 맘이 무거워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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